國朝人物考四十
이지충(李之忠) 묘갈명(墓碣銘) - 황정욱(黃廷彧)
선생(先生)의 휘(諱)는 지충(之忠)이요, 자(字)는 원노(元老)인데, 황해도 우봉현(黃海道牛峰縣) 사람이다. 12세조(世祖) 이정(李靖)은 고려조(高麗朝)에서 금(金)나라에 들어가 시중(侍中)이 되었고, 시중의 뒤로는 계속하여 유학(儒學)으로 현양(顯揚)하였다.
고조(高祖) 이길배(李吉培)는 본조(本朝)에서 등제(登第)하여 벼슬이 관찰 출척사(觀察黜陟使)에 이르렀고, 증조(曾祖) 이기(李圻)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추증되었으며, 조고(祖考) 이승건(李承健)은 예조 판서(禮曹判書)이고, 고(考) 이순(李詢)은 학문(學問)에 힘썼으나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는데, 거상(居喪)하면서 효(孝)로써 일컬어졌다.
비(妣)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대호군(大護軍) 이귀유(李貴裕)의 딸인데, 선생을 정덕(正德) 기사년(己巳年, 1509년 중종 4년) 2월 병인일(丙寅日)에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의지와 기개가 범상치 않았다. 나이 13세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고 15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이른 나이에 질병에 걸렸으나 오히려 학업에 분발하여 힘써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김공(金公)이 여강(驪江)에서 산관(散官)으로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문하에 나아가 수업(受業)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537, 중종 32)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國庠]에 유학(遊學)했는데, 취향(趣向)과 논의(論議)가 뛰어나 여러 유생 속에 스스로 우뚝 서자 속된 무리들이 자못 기뻐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아니하고 오직 후진(後進)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배우려는 자들이 많이 따랐는데, 그 성취(成就)한 자가 성대하게 당시의 인망이 있었다.
선생은 기개와 도량이 엄격하고 의연하여 바라보기에 두려워서 자리에 모시고 있는 자들이 감히 게으른 얼굴빛을 보이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에게 한 가지 선(善)이 있으면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였고 불선(不善)한 것을 보면 미워하기를 자신이 더럽혀지듯이 하였다. 남과 응접(應接)하는 때에는 말씀과 웃음을 구차하게 하지 않았고, 일찍이 의(義) 아닌 것으로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남도 감히 의 아닌 것으로 서로 더하지 않았다.
선생은 남에게 허락해주는 것이 적었으므로 서로 더불어 교유(交遊)하는 자는 반드시 당세(當世)에 이름이 알려진 인사였다. 성품 또한 산수(山水)를 매우 사랑하여 흥이 있는 곳을 만나면 문득 찾아가서 노닐다가 호연(浩然)하게 돌아오곤 하였다.
만년의 풍치(風致)는 더욱더 깨끗하여 일실(一室)을 엄숙히 치우고 좌우에 도서(圖書)로 생활했으며, 정원(庭園)에는 매화나무ㆍ대나무ㆍ국화를 심어 가꾸면서 자호(自號)를 ‘삼우당(三友堂)’이라 하고, 문을 닫고 한가하게 지내면서 세상에 뜻이 없는 듯이 하였으나 시정(時政)의 궐실(闕失)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미상불 개연히 탄식을 하였다.
신해년(辛亥年, 1551, 명종 6) 봄에 양종(兩宗,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회복시키자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여러 달 동안 대궐(大闕) 앞에 엎드려 항소(抗疏)를 하여 장차 성균관(成均館)을 비우고 떠나게 되었는데, 지금의 감사(監司) 박소립(朴素立)이 그때 소두(疏頭)가 되어 그들의 거취(去就)를 선생(先生)에게 물으매 선생이 말하기를, “신하의 의리는 일이 있으면 힘을 다하여 간할 따름이다.
무리를 이루어 달아나는 것은 임금을 협박하는 데 가깝다. 또 어떻게 아주 가버리고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박소립이 크게 그렇게 여기고 글을 지어 제생(諸生)에게 보이니 제생이 비록 끝내 떠나기는 하였으나 사람들은 선생의 말을 사체(事體)를 아는 말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이에 항소(抗疏)하여 극언(極言)을 하되 꺼리는 부분에 저촉됨도 가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자못 위험하게 여겼으나 선생은 흔들리지 않았다.
계축년(癸丑年, 1553, 명종 8) 봄에 인사[銓衡]를 맡은 자가 선생의 이름을 듣고 천거하여 동부 참봉(東部參奉)으로 삼았으나 힘써 사은(謝恩)하고 즉시 병을 핑계대어 나가지 않았다. 을묘년(乙卯年, 1555, 명종 10) 여름에 왜구가 달량포(達梁浦)를 함락하여 절도사(節度使)가 패배해 죽었는데, 선생이 소(疏)를 갖추어 ‘권신(權臣)들이 뇌물을 받아 장수를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 제수하였기 때문’이라고 배척을 하여 장차 올리려 하다가 자제(子弟)들이 힘써 말려서 그만 두었다.
무오년(戊午年, 1558, 명종 13)에 말에서 떨어져 중상(重傷)을 입었는데, 이 때문에 나질(癩疾)이 발생해서 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에 두지 않고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온종일 단정히 앉아 검속(檢束)하는 일을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술년(壬戌年, 1562, 명종 17) 11월 11일에 정침(正寢)에서 졸(卒)하니 향년(享年) 54세였다. 이듬해 계해년(癸亥年) 2월 11일에 연기현(燕岐縣)의 북쪽 오봉산(五峯山) 흥천동(興泉洞)의 건좌 손향(乾坐巽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배위(配位) 유인(孺人) 김씨(金氏)는 관향(貫鄕)이 순천(順天)인데, 증조(曾祖) 김함(金瑊)은 증 호조 참판(戶曹參判)이며, 조고(祖考) 김세희(金世熙)는 경상도 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이며, 고(考) 김근(金近)은 적순 부위(迪順副尉)로 군수(郡守) 정삼산(丁三山)의 딸을 취(娶)하여 정덕(正德) 임신년(壬申年, 1512, 중종 7) 11월 12일에 유인(孺人)을 낳았다.
유인은 나이 15세에 선생에게 시집왔는데 온화하고 은혜로우며 자애롭고 소상하여 아랫사람을 부리되 은혜가 있게 하였고 사람을 접대하되 후덕하게 하였으며, 제사(祭祀)를 받들고 친척(親戚)을 돌보되 모두 그 정성을 다하였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이첩(李)은 무진년(戊辰年, 1568, 선조 원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봉사(奉事) 구순(具循)의 딸을 취(娶)하여 2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차남 이협(李)은 경력(經歷) 남정국(南定國)의 딸을 취(娶)하였고, 딸은 생원(生員) 이사효(李思孝)에게 시집갔다. 융경(隆慶) 임신년(壬申年, 1572, 선조 5) 6월 28일에 유인(孺人)이 세상을 떠나자 선생의 무덤 좌측에 부장(祔葬)하였다.
선생은 높은 식견(識見)이 있어 옛 성현의 말을 믿었고 의(義)를 좋아하였으며, 곤액(困厄)과 빈궁(貧窮)을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 경서와 사서의 연구에 마음을 가라앉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학문을 연구하는 겨를에 글씨를 쓰는 것으로 스스로의 즐거움을 삼았으며, 복서ㆍ산술ㆍ율려 등 제가(諸家)의 서책에도 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사람과 변론함에 있어 굉박(宏博)하고 확실하며 유창하고 통달(通達)해서 듣는 자들이 흡연(洽然)히 스스로 만족하게 여겼고, 일시의 명유(名儒)와 숙학(宿學)들이 의심된 논의가 있으면 반드시 그들과 더불어 참여하여 정정하였다.
일찍이 글을 지어 자제(子弟)들에게 우애를 독실히 할 것을 면려하였고, 또 제식(祭式)을 지어 자손들에게 전했으며, 종법(宗法)을 행하고 항상 말하기를, “옛날에 재산을 두어 가난한 친족을 진휼(賑恤)한 자가 있었는데, 나는 그런 자산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그리고 학자(學者)들이 경서(經書)를 읽을 적에 전주(傳註, 주석)에 구애되어 본지(本旨)를 상실하는 것을 병되게 여겨 이에 ≪역시서집람(易詩書輯覽)≫을 지었고, 또 ≪이정전서(二程全書)≫ㆍ≪주자대전(朱子大全)≫ㆍ≪춘추좌전(春秋左傳)≫을 베껴서 집에 보관해 두었다.
선생의 병이 위독해지자 내가 시좌(侍坐)했었는데, 선생이 말씀하기를, “나는 장차 죽을 것이다. 만사(萬事)가 함께 기억나지 않으나 다만 때로 옛날에 배웠던 것을 생각하면 그 의미가 더욱 새로워지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나머지를 끝마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으니, 선생은 힘쓰고 부지런히 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자라고 할 만한데, 불행하게 병에 걸려 하늘이 더 살도록 하지 않으니 아! 슬프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배우기를 널리하고 행하기를 또 확실히 하며, 감추고 숨김을 달갑게 여기고 섭섭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었네. 오래오래 살아 큰 도를 밝히리라 여겼는데, 이 병이 있으니 하늘은 기필하기가 어렵네. 아직도 은미한 말씀은 어제 들은 것과 같으니, 산소에 명을 새겨 무궁토록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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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충李之忠 墓碣銘[黃廷彧]
先生諱之忠, 字元老, 黃海道牛峯縣人也。 十二世祖靖, 高麗朝, 入金爲侍中。 侍中之後, 繼以儒顯。 高祖諱吉培, 登第本朝, 官至觀察黜陟使。 曾祖諱圻, 司憲府監察、贈議政府左參贊: 祖諱承健, 禮曹判書。 考諱詢, 力學未試, 居喪以孝稱。 妣全義李氏, 大護軍貴裕之女。 先生生于正德己巳二月丙寅。
自幼志氣不凡。 年十三, 丁外艱。 十五, 丁內艱。 夙嬰疾病, 猶且奮勵爲學, 聞慕齋金公散居驪江, 造其門受業焉。 丁酉, 擧生員
遊國庠, 趣向論議卓然自立於群儒中, 俗輩頗不悅。 自是不事科業, 惟以訓誨後進爲己任, 學者多從之, 其所成就者, 蔚有時望。 先生氣度嚴毅, 望之可畏, 侍席者不敢設惰容。 見人有一善, 好之易色: 有不善, 惡之若浼。 應接之際, 言笑不苟, 未嘗以非義干人, 人亦不敢以非義相加。 先生小許可, 其所與交遊者, 必當世知名之士。 性又酷愛山水, 遇興輒往, 浩然而歸。 晩年風致, 尤更脫灑, 一室倏然, 左右圖書。 庭植梅竹菊, 自號三友堂。 杜門閑居, 若無意於世, 至聞時政闕失, 未嘗不慨然歎息。 辛亥春, 復兩宗, 太學生累月伏闕, 將空館而去, 今監司朴素立時爲疏頭, 問其去就於先生。 先生曰: “臣子之義, 遇事力諫而已。 成群出走, 近於脅君。 且豈可長往不返乎?” 朴大以爲然, 遂作書示諸生, 諸生雖竟去人以先生言爲識體。 先生於是抗疏極言, 不避觸諱, 人頗危之, 先生不爲動。 癸丑春, 典銓衡者, 聞先生名, 薦授東部參奉, 僶勉謝恩, 卽移疾不出。 乙卯夏, 倭寇陷達梁, 節帥敗死。 先生具疏斥權臣受賕授帥非人, 將上, 子弟力諫止之。 歲戊午, 墜馬重傷, 因發癩疾, 藥餌無效。 不以芥懷, 必正衣冠, 端坐終日, 檢束之功, 未嘗少懈。 壬戌十一月十一日, 卒于正寢, 享年五十四。 越癸亥二月十一日, 葬于燕岐縣北五峯山興泉洞乾坐巽向之原。
配孺人金氏, 貫順天。 曾祖諱瑊, 贈戶曹參判: 祖諱世熙, 慶尙道兵馬節度使。 考諱近, 迪順副尉, 娶郡守丁三山女, 以正德壬申十一月十二日生孺人。 年十五, 歸先生, 溫惠慈詳, 御下有恩, 接人以厚。 奉祭祀, 賙親戚, 咸盡其誠。 生二男一女: 長曰㥈, 中戊辰進士, 娶奉事具循女, 生二女, 幼: 次曰㤲, 娶經歷南定國女。 女適生員李思孝。 隆慶壬申六月二十八日, 孺人卒, 祔葬于先生塋左。
先生有高識, 信古好義, 阨窮無悶, 潛心經史, 手不釋卷。 硏究之暇, 游戲翰墨以自娛。 至於卜算、律呂、諸家之書, 靡不通曉, 與人辨論, 閎確暢達, 聽者莫不洽然自足。 一時名儒宿學, 有疑議必與之參訂。 嘗作書勉子弟篤友愛, 又作祭式遺子孫, 行宗法, 常曰: “古有置財以賑窮族者, 恨吾無其資也。” 病學者讀經拘於傳註, 失其本旨, 乃撰《易詩書輯覽》, 又抄《二程全書》、《朱子大全》、《春秋左傳》藏于家。 先生疾革, 某侍坐, 先生曰: “吾病將死, 萬事俱不省記。 但時念舊學, 覺意味尤新, 恨未得卒緖爾。” 先生可謂俛焉孶孶, 死而後已者也。 不幸遘疾, 天死假年, 嗚呼痛哉! 銘曰:
學之博, 行又確。 甘晦隱, 無慍悶。 謂壽考, 闡大道。 有斯疾, 天難必。 尙徵言, 如昨聞。 銘幽宮, 示無窮。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