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의 ‘사랑할 수 없는 자’
오늘 오후에 백화점에 들를 일이 있었다.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누군가 무심히 내 목발을 툭 건드려서 나동그라지게 될가 봐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런데 한 구석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딸인 듯 보이는 네다섯 살 난 어린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아이는 무슨 일인지 막 무가내로 떼를 쓰면서 울고 있었다. 그때 마침 나를 발견한 그 여자는 갑자기 손가락으로 나를 가르키면서 ‘저 봐, 에비 에비, 너 계속 울면 저 사람이 잡아간다’하는 것이었다.
나를 흘끗 올려다본 아이는 참으로 신기하게도 순식간에 울음을 그쳤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여자는 나를 힐끗 보더니 아이의 손을 잡고 사라졌다.
황당한 경험이었다. 물론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지만, 그냥 호기심일 뿐, 우는 아이도 당장 그치게 할 만큼 그렇게 가공할만한 괴물처럼 보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아이의 엄마도 내 모습에 ‘공포’라는 의미를 부여했고, 아마도 이제 그 아이는 앞으로 신체장애인을 보면 자연스럽게 무서운 사람, 내게 해코지를 하는 사람‘을 연상할 것이다.
이렇게 신체장애에 ’악이나 공포‘의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는 미디어뿐만 아니라 분명 문학도 큰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 아이들이 읽는 동화에서 악당들은 대체로 신체적으로 모종의 결손이 있거나 ’정상‘이 아닌 모습을 하고 있다.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마녀는 다리를 절고, 럼프스틸스긴은 난쟁이이고, ’보물섬‘의 롱 존 실버는 나무 다리에 에꾸눈,’피터 팬‘의 악한 캡틴 혹은 외팔이에 갈고리를 끼고 있다.
내친 김에 동화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더욱 가까운 만화나 영화를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이다. 신체적으로 정상이 아닌 사람이 자동적으로 악한 성품이나 도덕적 결핍과 연결되는 예는 허다하다. 70년 대의 ’외팔이 시리즈‘를 비롯하여 ’하록 선장‘은 애꾸눈이고, ’뽀빠이‘의 브루터스는 거인인데다 팔둑에 커다란 흉터가 있고, ’은하철도 999‘에 등장하는 악인들도 곱추거나 외팔이거나 모종의 신체 기형, 또는 결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디즈니 프로덕션의 ’미녀와 야수‘는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외모의 상치로 선과 악의 대비를 시도한 제목이다.
메부리 코에 관절염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는 근시 노파가 밝고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적이 없고 ’이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백설공주, ‘품성적으로는 완벽한 선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여왕은 백설공주에게 사과를 먹이는 악한 일을 하기 위해 사마귀가 나고 허리가 굽어 신체적으로 추한 노파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동화 속에서 ’착한 일‘이 보상받는 길도 매우 육체적이다. 미운 오리새끼는 아름다운 백조가 되고, 징그러운 두꺼비는 잘 생긴 왕자님이 되고, 괴물같이 생긴 짐승은 멋진 왕이 되고, 딸을 만난 행운이 완전하기 위해 심봉사는 눈을 떠야 하고, 착한 혹부리 영감은 호이 떨어져 나가서 ’정상‘이 되어야만 이야기가 끝날 수 있다.
소위 ’고전‘에 속하는 문학작품에서도 이런 전통은 계속된다. 재알 먼저 떠오르는 것이 허먼 멜빌(1819-1891)의 모비 딕(1851)에 등장하는 외다리 선장 에이헤브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세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도 유명하다. 실제 역사상의 리처드 3세는 장애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세익스피어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그의 악한 성향을 표현하기 위해 조산으로 인해 추하고 몸이 비꼬인 기형으로 그를 묘사하고 있다.
나는 기형이고, 미완성이고, 반도 만들어지지 않은 채
너무 일찍 이 새동하는 세게로 보냈지
절뚝거리고 추한 나의 모습에
곁에만 지나면 개들도 짖는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날을 즐기는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없기에
나는 악인이 되기로 굳게 마음 먹는다.
-1막1장-
얼마 전 어느 대학신문 칼럼의 제목은 ’절름발이 지성‘이었고, 어느 일간지의 사설에서는 정부시책을 비난하면서 ’곱사둥이 정책‘이라는 말을 썼다. ’벙어리 삼룡이‘ ’백치 아다다‘는 가난과 불운, 비참과 우둔의 상징이고, 우리 말에 ’소경 코끼리 더듬듯 한다.‘ 거나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한다.‘는 비유도 종종 심심찮게 사용되는데, 이 모두가 그러한 장애가 갖는 좌절과 능력부족을 전제한다.
더욱 재미 있는 것은, 어떤 때는 반대로 극단적인 ’선‘의 의미가 부과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어리석을 정도로 순수한 사랑의 주인공 ’노틀담의 곱추‘ ’코주부 시라노 드 벨쥐락‘이 생각나고, 크리마스 캐럴(1843)의 터미도 있다. 얼마 전 TV에서 한 연예인은 어느 장애인 공동체를 방문하고 나서 ’장애인이라서 그런지 해맑고 천사같다.‘라고 말했다. 악을 행하기 위해 돌아다닐 여건이 안 되어서 그렇다. ’장애인‘이라서 천사 같을 리는 없는 노릇이다.
신체장애는 단지 의학적 케이스 일 뿐 악이든, 선이든 모종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또한 인간 치유의 역할을 가진 문학이 한 집단에게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문학의 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몇 년 전, 없는 재주로 무리해서 수필집을 낸 적이 있다. 가끔씩 방송이나 신문에서 소개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1급 장애 여교수의 인간 승리, 그리고 치열한 삶’ 등등으로 요약된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책을 소개하는 TV 교양 프로그램에서 문인 220 명에 의해 섣날에 가족에게 선물하고 싶은으로 내 책이 뽑혔다고 했다. 시간에 맞춰 TV를 보니 마침 사회자가 내 책을 들고 소개하고 있었다.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 번‘은 자서전적 에세이입니다. 요새 암 투병 중이라 투병 중 느낀 바를 적은 책입니다.’ 옆에 있던 여자 사회자가 때 맞춰 ‘쯧쯧 혀를 찼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그 책은 이미 4년 전에 내가 암에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 때에 쓰여진 책이다. 그러자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 코미디언이 한 맏 거들었다. ’그런데 저자 장영희 씨는 1급 신체 장애인이라네요.‘ 순간 세 사람 모두 고개를 숙이고 죽은 사람에 대해서 묵념하듯이 눈을 내리깔고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책에 대한 소개는 거게 다였다.
’자서전적‘ 에세이니 불가피하게 나의 신체장애에 관한 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의도는 ’장애인 장영희‘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러 형태의 삶의 장애를 갖고 있는 ’인간 장여희‘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 암만 생각해도 내 삶이 별로 치열한 것 같지 않다. 아니, 내 삶이 치열하고 감동스럽다면 난 이제껏 치열하고 감동적으로 살지 않은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차피 인생은 장애물 경기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제 작은 드라마의 연속이고 장애물 하나 뛰어 넘고 이제 됐다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쉴 때면 생각지도 않앗던 또 하나의 장애물이 나타난다. 그 장애가 신체장애이든, 인간관계 장애이든, 돈이 없는 장애이든, 돈이 너무 많은 장애이든, (정부 요직에 오르기 위해 많은 돈을 이리저리 감추거나 먹은 돈을 안 먹었다고 오리발 내 먹었다고 오리발 내릴어야 하는 것도 분명 장애이다.)- 아무리 권력 있고 부를 누리는 사람이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데, 왜 유독 신체장애에만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나도 남들처럼 사랑하며 살고 싶은데, 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아로 만들어 버린 아까 그 여자에 대한 궁색한 변이 너무 길어졌다.
(장교수님 맞는 말씀입니다. 저는 남을 미워하고, 등등 많은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이동민)
첫댓글 장영희 교수님이 그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