竹山安氏世譜舊序
徃在乙未, 余拜族叔禮山公, 於桂麓精舍。公手閱譜牒。顧謂余曰, 吾安氏又無刊譜, 吾於癸亥始就, 僉正公所編輯, 正其訛誤, 補其闕漏。迄于甲子, 譜始成。而急於榟, 疎略者多, 其勢固然。今欲更爲修葺, 以圖後日之刋成云矣。是歲之冬, 宗孫光宅, 出示草譜三冊曰, 禮山公所刋之譜, 雖甚草略, 昔日未遑之事, 始成於公手比實, 吾宗之幸。第今三十年之間, 生死嫁娶, 人事多變, 不得不添補釐正, 而遠代疎逖之派, 窮鄕散處之宗, 有難詳悉, 而徵信積費心力, 廣披窮覓草本。雖成吾宗貧寒, 剞劂未易, 豈不可悶乎。其勤勤惓惓之意, 溢於言外, 聞其言觀其書, 而感歎者又矣。其後又閱三十年 而宗孫不幸棄世。今其子大壽, 憫先志之未就, 三霜甫畢, 不顧財力, 開役於楊州錦右之舊堂。並取禮山公譜草, 而增刪之刋出五編之全書。苟非至誠, 豈能如是前後一甲, 似非偶然。而余又適莅是州, 得見斯譜之成, 亦豈非幸歟噫。吾先祖文貞公, 秉軸麗朝, 直聲著顯於東史。田慇公, 棄官, 高蹈氣節, 見推於佔畢齋。以至晩悟公, 孝友淸儉。鶴村公, 德行文章。俱爲一世之所豔服。无爲我先祖之後者, 更相飭勵, 思所以無忝焉。則程夫子所謂, 收宗族厚風俗, 其在斯歟, 聊以是。自勉而勉諸宗云爾。
崇禎紀元後三甲子 後孫 通政大夫行大司諫知製敎 策 謹序 |
죽산안씨세보 구서(舊序)
지난 을미년(1775)에 나는 족숙 예산공(禮山公)[안종수(安宗秀, 1715~1776)]을 계록정사(桂麓精舍)로 방문해서 공이 족보를 펼쳐 보시며 나에게 말하길 “우리 안씨(安氏)는 족보를 간행한 적이 없었는데, 계해년(1743)에 이르러 자료를 모아, 첨정공(僉正公)[안상진(安相眞, 1654~1725)]이 편집을 맡아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갑자년(1744)에 이르러 마침내 족보(族譜)가 갖추어졌지만, 관직에 있을 때 급하게 한 일이라 소략(疎略)된 사람도 많았을 것인데, 이는 당시 형편이 그러했기 때문이리라. 이제 또 수즙(修葺, 고쳐서 새로 이는 일)해서 다시 족보의 중간(重刊)을 도모(圖謀)하려 한다."고 하였다. 금년 겨울 종손 안광택(安光宅, 1723~1802)이 《초보(草譜)》3책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예산공(禮山公)께서 펴낸 족보가 많은 부분 초략(草略, 몹시 거칠고 간략함)되었을지라도 지난날 겨를이 없었음에도 공(公)이 몸소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우리 일족에게 다행한 일입니다. 만약 앞으로 30년 동안에 생사(生死,)와 가취(嫁娶, 자손들의 혼인) 같은 인간사(人間事)에 변화들이 많아지면, 결국 첨보(添補, 더하여 보충함)와 이정(釐正, 글로 정리하여 바로잡음)이 필요하게 됩니다. 여러 세대가 흘러 멀어진 지파(支派)들이 외딴 시골로 흩어져 살게 된다면, 빠짐없이 자세히 알기가 어렵게 되고, 신뢰할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적비심력(積費心力, 마음과 힘을 많이 허비함)해야 되고, 널리 찾아봤더라도 궁심멱득(窮心覓得, 온갖 힘을 다 들여 고생한 끝에 겨우 찾아냄)한 뒤에나 초본(草本)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갖추어진 뒤에도 우리 종족(宗族)이 빈한(貧寒)해서 기궐(剞劂, 인쇄하려고 나무판에 글자를 새김)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어찌 불가(不可)하다고만 하니 민망한 일입니다.”고 하였다. 그렇게 성의를 다 하는 뜻이 빈말이 아니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고 그의 글을 살펴본다면 감탄하게 될 것이리다. 그 후로 또 30년이 헛되이 지나고 종손은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의 아들 안대수(安大壽, 1764~1842)가 선친이 남긴 뜻을 완수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삼년상을 끝내자마자 비용 부담 능력도 생각지 않고 양주(楊州) 금우(錦右)에 있던 선대가 살던 옛집을 수리하면서 예산공의 초보(草譜)를 얻어와서 다시 증산(增刪, 내용 일부를 보태거나 삭제하여 고침)을 한 뒤 5편의 전서(全書, 한 질로 만든 책)로 출간을 해냈도다. 참으로 지극한 정성이 아니라면 어찌 우연처럼 이와 같은 일이 앞뒤로 60여 년 만에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나 또한 이 고을을 방문해서 이 족보가 완성된 것을 볼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어찌 행운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선조 문정공[文貞公, 안극인(安克仁, ? -1383)]은 고려 왕조에서 높은 관직에 있었는데, 《고려사(高麗史)》에도 “바른 소리로 명성이 있었다[直聲著顯]” 하고, 전은공[田慇公, 안상계(安桑鷄, 1444~1496)]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가 추앙하기를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여 기개와 절조를 지켰다[高蹈氣節]” 했고, 만오공[晩悟公, 안정섭(安廷燮, 1591~1656)]에 이르러 “효성과 우애가 있었고 청렴하고 검소했다[孝友淸儉]” 했으며, 학촌공[鶴村公, 안진(安縝, 1617∼1685)]은 “어질고 너그러웠으며 글을 잘 지었다[德行文章]” 했으니, 모두 다 그 시대의 빛나던 지위에 있었던 분들이다. 자연스레 우리 후손들도 서로 번갈아가며 면려(勉勵, 노력하거나 힘씀)하고 선조들을 욕되게 하지 않기를 생각할 뿐이었다. 즉 정부자[程夫子, 송나라의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두 형제 유교 철학자]가 말한 “천하의 인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게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계보를 밝히고 세족을 모아 종자(宗子, 종통의 적장자)에 관한 법을 세워야 한다[管攝天下人心 收宗族厚風俗 使人不忘本 須是明譜系收世族 立宗子法].”는 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권면(勸勉, 알아듣도록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함)하고 또 여러 종족들까지도 권면한 것을 말한 것이리라. 숭정년간(1628~1644)이 지난 후 3번째 돌아오는 갑자년(甲子年, 1804)에 후손 통정대부 행 사간원 대사간 지제교 안책(安策, 1742~?)이 삼가 서문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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