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클립
홍종현
어느 날 ‘빨간 클립’이라는 단어가 느닷없이 떠올랐다. 불쑥 침입한 그 단어는 내 귓가에 장기 체류하며 계속 윙윙거렸다. 꽤 성가셨다. ‘윙윙거림’의 내용은 ‘너는 빨간 클립이란 제목의 글을 쓰게 될 것이다’라는 수상하기 그지없는 예언이었다. 신경에 거슬렸지만 무시하려 애썼다. 하지만 만만하게 볼 녀석이 아니었다. 예언은 아주 끈질기게 내 일상에 파고들었다.
최근 책 두 권을 구입했다. 문구를 좋아하는 마니아라면 무조건 소장한다는 《문구의 모험》과 여성 시인들의 글을 모은 산문집 《당신의 사물》. 믿기 어렵겠지만 두 권 모두에 <클립>이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클립의 윙윙거림이 사라지지 않아 귀찮던 시기에 클립에 관한 글을 연이어 만나다니! ‘징크스, 징조’같은 운명론적 단어에 예민한 성격인지라 이 우연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다.
《문구의 모험》 첫 장을 넘기면 바로 클립에 관한 글이 나온다. 저자 제임스 워드는 클립의 역사와 디자인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다. 지금은 사소한 소모품인 클립의 역사는 의외로 파란만장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는 클립의 시대였다. 발명가들은 좀 더 나은 클립을 발명하고자 열정적으로 고군분투했고 각자 다양한 모양의 클립들을 경쟁적으로 선보였다. 이렇듯 비슷한 시기에 여러 모양의 클립들이 우후죽순 발명되었기 때문에 최초 클립 발명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엔 ‘여러 낭설들이 난무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당신의 사물》엔 김수우 시인의 산문 <클립>이 실려 있다. 시인은 클립에서 ‘여밈의 철학’을 발견한다. 클립은 ‘손을 빠져나갈 듯한 종잇장 몇 장과 그 불안을 가지런히 모아주고 여며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흐트러진 마음이나 사람의 관계에도 반짝이는 작은 클립이 있었으면 싶을 때가 많다’고 마무리한다.
클립에 대한 글들은 윙윙거림의 사이즈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했지만 나는 못 듣는 척, 그것들의 끈질긴 요구를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이어 예언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매우 단순한 사건이었다. 거대한 빨간 클립과의 조우, 특대 사이즈의 강렬한 빨간색 클립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대학 동기들 모임에서였다. 문구 마니아로 유명한 친구가 가죽 수첩을 펼쳤는데 거기에 커다란 빨간 클립이 도도하게 꽂혀 있었다. 그 클립은 일반 클립보다 서너 배 정도 컸고 세련된 붉은색으로 코팅되어 있었다. 빨간 클립을 본 순간, 윙윙거림은 마지막 펀치를 날리기 위해 나를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이래도 쓰지 않겠다는 거냐?’고 다그치는 환영이 보였다. 나는 그 빨간 클립에 사로잡혔다.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클립은 국내에선 구하기 어렵다고, 단호한 표정으로 친구가 말했다.
빨간 클립의 윙윙거림에서 벗어날 방법은 그것을 내 손으로 활자화시키는 것뿐이라는 운명을 서서히 인정해야만 했다. 도대체 빨간 클립이 뭐란 말인가? 이 세상에 그것이 차지하는 고유 영역이 있기는 한가 싶어 인터넷 세상을 뒤져보았다. 그러다 《빨간 클립 한 개》라는 책을 발견했다. 빨간 클립 하나로 물물 교환을 시작해 집을 마련한 25세 캐나다 백수 청년 이야기였다. 그 청년은 빨간 클립을 인터넷을 통해 물고기 펜과 교환하고 다시 문 손잡이와 교환하는 식의 거래로, 결국 2층집을 소유하게 되었다. ‘더 크고 더 좋은 것으로 바꿔보자’는 아이디어를 바로 실행한 것이 그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의 핵심은 ‘떠오른 생각을 주저하지 말고 즉시 행동으로 옮겨라’ 였다. 이 이야기는 빨간 클립 예언의 화룡점정이 되었다. 빨간 클립이라는 단어가 윙윙거리느냐?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즉시 글로 옮겨라, 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들렸다.
빨간 클립에 대해 글을 쓰기로 하고 내가 클립인지 클립이 나인지 알 수 없는 경지가 될 정도로 클립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클립은 떨어져 있는 종이 몇 장을 연결한다. 하지만 클립의 연결은 분리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클립을 제거해도 연결되었던 자국이 남지 않는다. 핀이나 스테이플러는 종이에 구멍을 남긴다. 연결되었다가 분리된 후 남는 구멍은 이별의 상처다.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을 클립은 배제한다. 어떤 목적에 의해 하나로 모아졌다가 그 목적이 사라지면 감쪽같이 분리되는 인스턴트 식 만남, 이것이 클립이 존재하는 이유다. 금속의 클립은 그것의 매끈하고 깔끔한 외형만큼 냉정하다. 차갑다.
이런 내용으로 쓰다 보니 어느 순간 김 빠진 맥주처럼 손가락에서 힘이 쭉 빠져버렸다. 글이 정말 재미없어 보였다. 클립은 관념적으로 고찰해야 할 사물이 아닌 듯싶었다. 솔직해지기로 했다. 날 지배한 단어가 ‘초록 클립’, ‘은색 클립’, ‘노란 클립’이 아닌 ‘빨간 클립’인 이유부터.
새천년이 시작될 즈음, 직장에서 떠도는 소문을 접했다. 직장 내 불륜 스캔들, ‘빨간 클립 사건’. 같은 동네에 사는 유부남, 유부녀 동료가 카풀(car pool)을 하다 그만 사랑에 빠져 양쪽 가정이 파탄 났다는 내용이었다. 남자의 부인이 여자가 쓴 연애편지를 발견하고 일하는 곳으로 찾아와 소동을 피웠다고 했다. 오래 전에 들어 구체적인 이야기는 가물가물하다. 어쩌면, 소문 그 자체가 비약과 굴절을 내포하고 있을 테니 구체적 내용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빨간 클립 사건인지 알어?”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전해주던 선배의 모습만은 생생하다.
“그 편지에 빨간 클립이 꽂혀 있었거든.”
학창시절 빨간 클립 중간을 살짝 접어 하트모양으로 만든 후 편지봉투에 꽂아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냈던 기억이 겹쳐졌다. 나의 빨간 클립은 상대를 향해 겁 없이 날뛰는 내 심장이었다. 유부녀는 유부남에게 진심이었구나. 엉뚱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부인 손에 들려 있는 편지봉투, 거기에 꽂혀 있는 빨간 클립이 클로즈업되었다.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는 부인 손에서 편지와 함께 경박스럽게 흔들렸을 그 빨간 클립. 그렇게 빨간 클립은 사랑, 상처, 모멸감 등의 말들과 범벅이 되어 내 의식 귀퉁이에 박혀버렸다.
처음으로 클립을 만든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최초’라는 타이틀을 두고 지하에서 발명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양한 클립들이 과잉 경쟁하던 클립의 세상은 매끈한 타원형 모양의 젬클립(gem clip)의 등장으로 평정된다. 수 십 년 동안 젬클립은 클립 세상의 제왕으로 거만하게 군림하지만 역설적으로 클립은 흔한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빨간색을 입힌 클립은 여러 의미를 나타낸다. 최근 그것은 ‘실천’의 상징으로 굳혀지고 있다.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옮긴 이에게 오는 행운의 상징. 하지만 부도덕한 실천은 빨간 클립을 상처로 얼룩진 불륜의 상징으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빨간 클립의 예언을 성실히 실천했으니, 윙윙거림은 마지막 마침표와 함께 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제 내게 빨간 클립의 의미는 단순해졌다. 그것은 가지고 싶으나 구할 수 없는 희귀 아이템을 뜻한다. 친구가 가지고 있던 대형 빨간 클립, 그 클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경력>
2013 《한국산문》 등단
한국산문 작가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