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선과 악의 보편 개념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또는 도덕 법칙의 존경이 동기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해결책에 대한 제시.
◆구성 및 의견
1.선과 악
우리가 선하다고 일컬어야만 할 것은 모든 이성적 인간의 판단에 있어서 욕구 능력의 대상일 수밖에 없고, 악이란 모든 사람의 눈에 혐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감관 이외에 이성이 필요하다.(145)
선이나 악은 항상, 의지가 이성 법칙에 의해 어떤 것을 그의 객관으로 삼게끔 규정되는 한에서의 이 의지와의 관계를 의미한다.(144)
알게 모르게 우리는 무의식중에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세계 속에서 살아 왔다. 어렸을 적에 검은별이라는 악당이 나온 어린이 드라마가 생각이 난다. 그 당시에 검은별이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해로운 존재로 알고 있었다. 또한 로봇 만화에서도 언제든 착한 로봇과 나쁜 로봇의 대립적 관계 속에서 만화는 전개가 되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선과 악이란 개념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의 이성적 판단이 아닌 무의식의 판단 속에서 선과 악의 개념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우리는 꼭 선해야만 하는가? 악하면 안되는가? 안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무의식적 선의 개념이 이제는 우리의 이성의 필요로 선과 악의 개념을 분리시키고 있다. 하지만, 요즘과 같은 시대에, 인간의 이성이 무참히 짓밟힌 이러한 시대에 과연 선과 악이란 개념은 이제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나가 인식하게 될 것이다.
보편적이었던 세상 속에 있던 것이 이제는 보편적이지 않게 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선과 악의 두 대립개념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의 이성일까? 하지만, 이성은 이제 더 이상 제 구실을 하지 못함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기준을 어디에다 두어야만 하는 것일까?
과연 모든 이성이 신뢰할 만한, 보편적 선이 존재하는 것일까? 칸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자연법칙과의 유사성을 통해서 존재한다고 보는 그런 우는 범한 것은 아닐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칸트의 의견에 동의하고 싶다. 요즘과 같은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러하다. 가치 체계가 무너져 가는 세상, 저마다의 색으로 무장해서 나름의 논리를 펴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싶다. 그런 논리를 칸트에게서 빌어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것, 선험적이고 순수 이성은 그 자체로 실천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 그러한 것으로 우리는 선과 악의 개념을 파악해야 한다.
많은 비판이 올 수 있겠으나, 악의 개념과 반대되는 선은 분명히 존재한다. 모호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성을 통해서 판단할 수가 있다.
2. 자연법칙이라는 범형(範型)
자연 법칙을, 그러나 단지 그것의 형식의 면에서, 판단력을 위한 법칙으로서 놓을 수 있고, 이것을 우리는 그래서 윤리 법칙의 범형이라고 부를 수 있다.( 160)
자기 행위들의 준칙과 보편적인 자연 법칙의 이런 대조가 또한 그의 의지의 규정 근거는 아니다. 그럼에도 자연 법칙은 윤리적 원리들에 따라 행위의 준칙을 평가하는 범형이다. 만약 행위의 준칙이 자연 법칙 일반의 형식에서 검사받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준칙은 윤리적으로 불가능하다.(161)
1번에서 제기되었던 선과 악의 개념이 이제는 도덕 법칙이라는 속에서 자연 법칙이라는 형식의 면에서 윤리 법칙의 범형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자연적인 법칙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운동의 법칙이다.
뉴튼의 운동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관성의 법칙, 구체적 예시로 들어가서, 물은 아래로 떨어진다거나,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는 것등은 모두 자연의 법칙이다.
존재의 대연쇄적 측면에서 관찰해보면 생과 사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주기가 있다. 인간 세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도 거대 흐름의 법칙 속에서 그 나름대로의 규칙과, 그 규칙에 따른 활동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태고로부터, 우리네 인류 역사를 되돌이켜 보면, 끊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과 다시 태어난 사람들 속에 지금도 세상은 존재함을, 또한 내가 있음으로 해서 세상이 존재하게 됨을 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자연 법칙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인간들에게서 발견한 법칙이 하나 있다. 바로 '관성의 법칙' 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사람이 잠에서 깰 때 바로 깨어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좀더 눕고 싶을 것이다. 이것은 잠을 계속 더 자려는 속성 때문에 그런 것이다. 또 하나의 예로, 이것은 더욱 나 혼자만의 느낌일 수도 있겠으나, 공부를 하다 보면 계속 공부가 잘 된다. 이것은 공부를 계속 하려는 속성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를 안 하다가 막상 하려면 잘 되지 않는다.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공부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속성 때문이다.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자연 법칙은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형식적 범형이 되는 자연 법칙 속에서 도덕 법칙의 범형을 찾는 것은 약간의 오류가 발견이 되는 듯 하다. 자연 법칙에는 형식만 있을 따름이지 내용은 평가되어질 수 없다. 단순히 그렇고, 그렇지 아니함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도덕 법칙처럼 가치 평가가 되어지는 것에도 이런 변하지 않는 형식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억지 해석,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인 자신만의 요청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어쩌면 칸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덕 법칙은 분명히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행위기준을 둘만한 것이 그 어느 것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3. 존경-도덕 법칙의 동기, 사랑.
존경은 언제나 오로지 인격들을 향해 있지, 결코 물건들을 향해 있지 않다. (175)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은 그러므로 유일한 그리고 동시에 의심할 바 없는 도덕적 동기이며, 이 감정은 또한 오로지 이 근거 이외에는 어떠한 객관도 지향해 있지 않다.(179)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와 같은 명령의 가능성, 이것은 명령으로서 사랑을 명하는 법칙에 대한 존경을 요구하며, 사랑을 원리로 삼는 것을 임의의 선택에 맡기지 않으니 말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명령될 수 없다. 한낱 명령에 의하여 누군가를 사랑하는 능력은 어떤 사람에게도 없으니 말이다.(187)
우리가 도덕 법칙,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지 마라라는 도덕 법칙이 있을 때 이것을 지키는 것은 그 도덕 법칙을 존경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그 법칙을 존경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법칙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킬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 어떤 도덕법칙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그 보편적 도덕 법칙이 되는 것이 변할 것이라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거짓말을 하지 마라'라는 도덕법칙에의 존중이, 극한의 상황, 또는 다른 상황에서, 즉 하얀 거짓말 같은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 때는 정말로 인정 없는 보편 법칙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적 측면은 남아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이 역시 공허하다.
우리는 공허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측면으로 돌아오면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인간애를 느끼게 해준다. 사랑! 한 없이 들어도 기분 나쁘지 않은 단어다. 그동안, 나 자신은 기독기이지만, 사랑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최후의 명령을 하게 된다. 바로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명령이었다. 내가 그동안은 쭈욱 명령으로만 생각했다.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왜 사랑해야 합니까? 때로는 자문해 봤지만, 역시 사랑은 명령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맞다. 그 누구도 사랑을 명령할 수는 없다. 사랑은 느낌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느낌이지만, 한없이 좋다. 명령에 의한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느낌이다. 이 느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함이 사랑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강제성의 측면보다는 보다 자발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제 결론을 내려할 듯 싶다.
인류 보편적 도덕 법칙이 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 하지만, 약간은 변형된 사랑이라는 것이 도덕 법칙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이라는 측면에서 법칙 아닌 법칙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내면 깊숙이서 들리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이제는 허무한 보편적 도덕 법칙 보다는 보다 더 근본적인 보편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 해답이 바로 태고로부터 존재하는 '사랑'이다. <1042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