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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
해당화 필 때(1)
영신이가 떠나기로 작정한 전날 밤은, 달이 유난히 밝았다. 열나흗날 달이, 어지간히 기운 것을 보니, 밤은 자정도 가까운 듯. 다른 사람은 초저녁에 다 와서 작별을 하고 갔고, 건배의 아낙은 영신이가 친정에 왔다가 가는 것처럼 수수엿을 다 고아가지고 와서, 눈물로 작별을 하고 갔건만, 동혁이만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점심때 집에 볼일이 있다고, 잠깐 다녀는 갔으나, 동화의 말을 들으면 집에는 종일 들어오지를 않았다고 한다. 영신은,
‘한마디래두 꼭 허구 가야만 할 말이 있는데…..
하고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눈이 까맣게 기다리다가,
‘내일 아침에야 일찌감치 오겠지.’
하고 누웠었다. 서창을 물들이는 달빛은, 이런 걱정 저런 근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영신을 문밖으로 꾀어내었다. 그는 바스켓 속에 감추어 가지고 왔던 조그만 손풍금을 꺼냈다. 그것은 00여고보를 우등 첫째로 졸업한 상픔으로 미스 필링스란 서양 여자가 선사한 것이다.
영신이가 이곳에 온 뒤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거닐던 바닷가 백사장에는, 하아얀 모래가 유릿가루처럼 반짝이는데, 그 모래를 밟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난다. 옷 속으로 스며드는 밤기운이 조금 산산하기는 하나, 바람 한 점 일지를 않는다.
영신은 외로운 그림자를 이끌며 가만가만히 손풍금을 뜯음녀서 그 모래 위를 거닐려니, 영신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노래가 저절로 입을 새어나왔다. 그 노래는 드리고의 ‘세레나데(소야곡)’였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찬송가나 동요 같은 노래 이외에, 애틋한 사람을 읊는 노래라든가, 조금이라도 유흥 기분이 떠도는 유행가는, 귀에 익도록 들으면서도 입 밖에 내기는 삼가왔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 저녁은, 즉흥적으로 드리고나 슈베르트 같은 작곡가의 애련한 영탄적인 노래가 줄달아 불러졌다.
처음에는 입속으로만 군소리하듯 불러보던 것이, 차츰차츰 그 소리가 높아져서, 무섭도록 고요한 깊은 밤, 해변의 적막을 깨트리다가는, 가느다랗게 뽑아 올리고 뽑아 내리는 피아니시모에, 영신은 ‘내가 성악가나 될걸 그랬어’ 하리만치, 제 목소리가 오늘 저녁만은, 은실같이 곱고 꾀꼬리 소리만치나 청아한 듯이 제 귀에 들렸다.
머리를 들면, 황금가루 같은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머리를 숙이면, 그 달빛을 실은 물결이 천 조각 만 조각으로 부서지며, 눈과 영혼을 함께 황홀케 한다. 다시금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면, 풀솜 같은 구름 속으로 숨바꼭질을 하는 달 속에는, 쓸쓸한 방구석에 홀로 누워 외딸을 그리는 어머니의 눈물에 젖은 얼굴이 비치는 것 같고, 기다란 한숨과 함께 머리를 떨어뜨리면, 닦아놓은 거울 같은 바다 위에 꿈에도 잊히지 못하는 고향산천이 아련히 떠오른다.
영신은 백사장에 펄썩 주저앉으며 눈을 꽉 감았다. 이번에는 무형한 그 무엇이 젖가슴으로 치밀어 오른다.
‘아이, 내가 왜 이럴가?’
하고 제 마음을 의심도 해보았다. 이제까지 참고 눌러왔던 청춘의 오뇌에 온몸이 사로잡히자, 영신의 떨리는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한마디는,
‘하나님, 제가 그 이를 사랑해도 좋습니까?’
하는 독백이었다. 영신은 다시 부르짖듯이, 신앙의 대상자에게 호소한다.
‘하나님, 일과 사랑과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해주시옵소서. 저의 족속의 불행을 건지기 위해서 이 한 몸을 바치겠다고, 당신께 맹세한 저로서는, 지금 두 가지 길을 함께 밟을 수가 없는 처지에 부닥쳤습니다. 오오, 그러나 하나님, 저는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를 버릴 수도 없습니다.’
영신은, 모래 위에 푹 엎드러졌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에 번지는 모래를, 으스러지라고 한 움큼 움켜쥐고서…..
어디서 무엇에 놀라서 날아가는지, 물새 한 마리가 젖을 보채는 어린애처럼 삐액— 삐액—하고 울면서 머리 위를 지나간다.
영신은, 고독과 적막이 등허리에 서리를 끼얹는 듯해서, 진저리를 치고는 발딱 일어나면서, 치맛자락의 모래를 활활 털었다.
그 외롭고 적적한 생각을, 잠시라도 헤쳐버리려고, 곁에 동댕이를 쳤던 손풍금을 다시 집어 들고 감흥에 맡겨 열 손가락을 놀리며, 저도 모를 곡을 한바탕 뜯었다. 누가 곁에 있어서 그 음보를 그대로 오선지에 기록했다면, 혹시 ‘헝가리안 광시곡’ 같은 작품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리라.
그는 풍금 타던 손을 쉬고, 다시금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였다. 바로 영신의 등 뒤에 솟은 바위 위에서, 시꺼먼 그림자가 괴물과 같이 나타나더니,
“저….그 곡조 한 번만 더 타주세요!” 하는 굵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깜짝야!”
영신은 두 손을 짝 버리며(‘벌리며’의 옛말) 오금에 용수철이나 달린 듯이 발딱 일어섰다. 전신에는 소름이 쪽 끼쳤다. 달빛을 정면으로 받아, 시꺼먼 그림자의 정체가 눈앞에 드러나자,
“난 누구라구요.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놀래주서요?”
영신은 반가움과 원망스러움에 반죽이 된 표정으로, 동혁을 살짝 흘겨본다. 동혁은 빙긋이 웃으며, 저벅저벅 걸어서 여자의 앞에 와 선다.
“놀라긴 내가 정말 놀랬어요. 이 밤중에 어디루 가셨나 허구, 빈방 속에서 한참이나 기다렸는데…..”
“풍금 소릴 들으시구 여깄는 줄 아셨군요.”
“네, 독창회에 방해가 될까봐, 저 바위 그늘에서 입장권두 아니 사구 근청을 했지요.”
그 말에, 대낮 같으면 영신의 얼굴이 석류처럼 빨개진 것을 볼 수 있었으리라.
잠시 이성을 잃었던 모든 동작과, 미쳐날 듯이 목청껏 부른 노래를, 동혁이가 지척에서 보고 들은 생각을 하고 열적고 부끄러워서, 영신이가 얼굴을 붉힌 것뿐이 아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안타까이 하나님을 부르며 ‘일과 사랑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해줍소서!’하고 빌던 그 상대자가, 뜻밖에 유령과 같이 눈앞에 나타난 데는 형용키 어려운 신비를 느꼈다. 신비스럽다느니보다도, 폭풍우처럼 뒤설레던 감정이 짓눌리고,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지리만치 엄숙한 기분이 온몸을 지배하는 것이다.
“앉으십시다.”
동혁은 바위 아래 모래밭을 가리키고 저 먼저 앉으며, 두 무릎을 끌어안고는 바다 저편을 바라다본다. 아득한 수평선을 따라 일렬로 주욱 깔린 것은, 달빛을 새우는 듯한 새우잡이 중선의 등불들이다. 아까까지 영신은, 그 불을 얕은 하늘의 별들이 반짝이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리 와 앉으시라니까요.”
눈을 내리감고 발끝으로 모래를 허비적거리며 서 있는 영신을 돌려다보고, 동혁은 명령하듯 한다.
“네…….”
영신은 들릴 듯 말 듯하게 대답을 하고, 동혁의 곁에 가 치맛자락을 휩싸 쥐고 앉는다. 오늘 밤만은 동혁의 어떠한 요구에든지 순종하려는 듯이……
“차차 바람이 이는데, 춥지 않으세요?”
“아아뇨.”
바닷가의 밤은 점점 깊어만 가는데, 해금(바닷물 따위에서 흙과 유기물이 썩어 생기는 냄새나는 찌꺼기) 내를 머금은 바람이 솔솔 불어오기 시작해서, 이슬에 촉촉이 젖은 몸이 감기나 들지 않을까 하고 동혁은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온몸의 피를 끓이며 노래를 목청껏 부르던 영신은, 도리어 홧홧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인제 오셨어요? 오늘 밤엔 못 만날 줄만 알았었는데……”
“한 이십 니라 되는 데, 누굴 좀 만나보려구 찾어갔다가 오는 길이에요.”
“그럼 여태 저녁두 안 잡쉤게요?”
“주막거리서 요기를 해서, 시정허진 않아요.”
“무슨 급헌 일이 생겼어요?”
“급허다면 급허지만…..” 하고 동혁은 더 자세한 대답을 하기를 피하느라고,
“참 달두 밝군요!” 하고 딴전을 부리며 서녘 하늘을 쳐다본다.
볕에 그을어 이글이글하게 타는 듯하던 얼굴과, 그 건장한 몸뚱이를 기울어가는 창백한 달빛이 씻어 내린다. 파르스름한 액체와 같은 달빛이…
영신은 다시 무슨 생각에 잠겨, 동혁의 커다란 그림자가, 저의 눈앞에 가로 비친 것을 들여다보고 잠자코 있다. 조금 전까지도 외로움과 쓸쓸함을 못 견디어, 바람 모지에 외따로 선 나무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던 영신은, 동혁이가 와서 제 곁에 턱 앉은 것이 큰 바위 속에다가 뿌리를 박은 것 만치나 신변이 든든한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애상적이던 기분은, 구름과 같이 흩어지고 안개처럼 스러졌다. 다만 동혁의 윤곽만이 점점 뚜렷하게 커져서, 제 몸이 그 그늘 속으로 차츰차츰 기어들어 가는 것 같은, 환각을 느낄 따름이다.
한참 만에 동혁은 무거이 입을 열었다.
“저…..오실 때, 편지에 꼭 친히 만나서 의논헐 말씀이 있다구 그러셨지요? 그걸 지금 말씀해주시지요. 하룻밤쯤 새우는 게 우리헌텐,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
“내일은 그예 떠나신다니, 또 만날 기회가 졸연치 않을 것 같은데, 꼭 해주실 말씀이건 지금 허시지요.”
“………..”
영신의 머리는 수그러만 드는데, 동혁의 눈은 점점 탐조등처럼 빛난다.
“왜 말씀을 못 허세요? 무슨 말인지 시원스럽게 해버리시지요. 나두 허구 싶은 말이 있는지두 모르니까요…….”
영신은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동혁 씨가 허구 싶으신 말씀버텀 먼저 해주서요.”
“아아니, 내가 먼첨 물었으니까, 영신 씨버텀 대답을 허실 의무가 있지 않겠세요?”
“그래두 먼첨 해주서요. 권리니 의무니 허구 빡빡허게 구실 거 없이……”
영신의 목소리에는 소녀와 같은 응석조가 약간 섞였다.
“그건 안 될 까닭이 있세요. 언권을 먼저 드리지 않으면, 분개허시는 성미를 잘 알구 있으니까요.”
그 말 한마디에, 이태 전 00일보사 주최의 간친회 석상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과, 악박골서 밤을 새우던 때의 정경이, 바로 어제런 듯 주마등과 같이 두 사람의 눈앞을 달렸다. 그것은 두 사람의 평생을 두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무한히 정다운 추억이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불시에 몸과 마음이 더한층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동혁은 더 우기지 않았다. 남자의 자존심으로가 아니라, 그런 말을 강제로 시키기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이번만은 내가 지지요.”
하고 동혁은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어째서 그런진 몰라두, 내가 영신 씨헌테 허구 싶은 말이나, 영신 씨가 나헌테 꼭 허구 싶다구 벼르면서두 얼핏 입 밖에 내지를 못 허는 말은, 그 내용이 비슷헌 것 같은데….영신시 생각은 어떠세요?”
“……….”
“아아니, 말대답이나 시원스럽게 해주서야지요.”
하고 동혁은 달려들기라도 할 형세를 보인다. 영신은 간신히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저 역시두 한평생에 제일 중요헌……우리의 운명이 좌우되는 그런…….”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떠듬떠듬 토막을 친다. 아무리 고집이 세고 무슨 일에나 앞장을 서고 누구에게나 지지 않으려는 성벽이 대단한 영신이건만, 오늘 저녁 이 자리에서만은 꽃을 부끄리는 처녀의 속탈을 벗지 못한다.
“아마 연애나 결혼 문제루 퍽 고민을 허시는 중이시지요?”
동혁이가 불쑥 내미는 말이, 정통으로 들어가 맞히니까,
“…………”
무언중에도 영신의 온 몸의 신경은 불에나 닿은 것처럼 움찔하고 자지러들었다.
“나두 그런 문제루 적지 아니 괴롭게 지내는 중이에요. 늙으신 부모의 성화가 매일 같어서 그것두 어렵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몹시 외로울 때가 있세요. 억지루 일을 해서 잊어버리려구는 애를 써두, 나만치 건강헌 남자가, 언제까지나 독신으루 지낸다는 건 암만 생각해두 부자연헌 것 같아서….”
하고 발꿈치로 조약돌을 부벼서 으깨며 말을 멈추고는, 영신을 흘낏 곁눈으로 흘려본다. 영신은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다가 글씨를 썼다 지웠다 한다.
“영신 씨!”
동혁은 새삼스러이 저력 있는 목소리로, 숨 쉬는 소리가 서로 들릴 만치나 가까이 앉은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네?”
영신은 하얀 이마를 들었다.
“멀구두 가까운 게 뭘까요?”
끝도 밑도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에, 영신의 눈은 동그래졌다. 무어라고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서 눈을 깜박깜박하더니,
“글쎄요…..사람과 사람의 사일까요?”
하고 동혁의 표정을 살핀다.
“알 듯허구두 모르는 건요?”
“아마…..남자의 맘일걸요.”
그 말 한마디는 서슴지 않았다.
“아니, 난 여자의 맘인 줄 아는데요.”
동혁의 커다란 눈동자는 영신의 가슴속을 뚫고 들여다보는 듯하다.
달은 등 뒤의 산마루를 타고 넘으려 하고, 바람은 영신의 옷깃을 가벼이 날리는데, 어느 덧 밀물은 두 사람의 눈앞까지 밀려 들어와, 날름날름 모랫 바닥을 핥는다.
“……….”
“……….”
굴 껍데기로 하얗게 더께가 앉은 바위에, 찰싹찰싹 부딪히는 파도 소리뿐….. 온 누리는 아담과 이브가 사랑을 속삭이던, 태곳적의 삼림 속 같은 적막에 잠겨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형체 없는 영혼만은 무언중에도 가만히 교통한다. 똑같은 고민과 오뇌로 다리를 놓고서…….
영신은 앉아서 꿈을 꾸는 사람처럼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다가,
“제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간신히 한마디를 꺼내고는 말끝을 맺지 못하더니,
“제 사정은 대강 아시는 터이지만, 얼마 전에 어머니가 청석골까지 다녀가셨어요. 제에발 고만 시집을 가라구, 이틀 밤이나 꼬박이 새워가며 빌다시피 허시는 걸, 끝끝내 시원헌 대답을 못해드렸어요.”
“그래서요?”
“그랬드니, 나중엔 ‘네가 이 홀어미 하나를 영영 내버릴 테냐’고 자꾸만 우시는 데는 참 정말 뼈를 깍어내는 것 같어서…..”
영신은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참느라고 이를 악문다.
“그렇게 언짢어허실 게 뭬 있어요? 얼른 결혼만 허시면, 문제는 다 해결이 될걸요.”
하고 동혁은 일부러 비위를 긁어주면서도, 그다음 말이 궁금해서 영신의 곁으로 다가앉는다.
영신은 남자를 원망스러이 흘낏 쳐다보고는, 다시금 주저주저하다가 버쩍 용기를 내어,
“저…..보통학교에 댕길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혼인을 정해두신 남자가 있었어요.”
이 말을 드자, 동혁의 눈은 화등잔만해졌다.
이제까지 사사로운 이야기는 일부러 해오지를 않던 터이나, 영신에게 약혼한 남자가 잇다는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아, 약혼헌 사람이 있세요?”
제아무리 침착한 동혁이라도, 저도 모르는 겨를에, 이 말 한마디가 입밖을 튀어나오는 것을, 틀어막을 겨를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영신의 태도는 매우 침착해진다.
“어려서버텀 한동리에 자라나서 저두 그이를 잘 알어요. 김영근이라구 사방 황해도 어느 금융조합에 취직을 했는데, 사람은 퍽 얌전해요.” 하는데, 그사이에 제가 너무 당황해하는 눈치를 보인 것을 뉘우친 동혁은, 영신의 말을 자아내는 수단으로 얼른 말끝을 채뜨려,
“그만허면 조건이 다 구비허군요.”
하고는 시피미를 딱 갈기고 외면을 한다. 영신은 대들어서 동혁의 넓적다리를 꼬집기라도 하려는 자세를 보이다가,
“글쎄 그렇게 사람을 놀리지만 마시구 들어보세요. 다강만 얘기를 허께요.”
하고는 다시 바다 저편의 고기잡이 등불을 바라보다가,
“그런데 그이는 내가 자기허구 곡 결혼을 헐 줄만 믿구 있거든요. 지난 겨울엔 일부를 휴가를 맡어가지구 찾어왔었는데, 이 말 저 말 해가며 속을 떠보니까, 농촌운동 같은 데는 털긑만치두 이해가 없구요. 그런 덴 취미까지두 없어요.”
“그래두 어떠헌 생활의 목표는 있겠지요.”
“그저 월급이나 절약을 해서, 한 달에 얼마씩 또박또박 저금을 했다가, 그걸루 결혼비용을 쓰자는 것……”
그 말에 동혁은,
“아무렴, 그래야지요. 현대는 금전만능 시대니까요. 거 일찌감치 지각이 난 청년이로군.”
하고 시골 늙은이처럼 매우 탄복을 한다. 남은 진심으로 하는 말에, 한편에서는 자꾸만 이죽거리며 씨까스르기(쓸까쓰르다. 남을 추기었다. 낮추었다 하여 비위를 거스르다)만 하니까, 영신은 발끈하고 정말 성미가 났다.
“아아니, 그렇게 조롱만 허시는 법이 어딨어요? 난 인전 암말두 안 헐테야요!”
하고 톡 쏘아붙인다. 그러나 그 말쯤에 노염을 탈 동혁이가 아니다.
“아아니, 이건 결혼 얼른 못 허는 화풀이를, 내게다 허시는 셈이에요?” 하고 더한층 핀둥핀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