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를 말하면서 김지미를 빼놓을 수는 없다.
한국영화의 전성기에 모든 이의 숭앙을 받으며 정점에 서 있던 여배우, 700여 편의 작품을 통해 거대한 발자국을 남긴 여배우, 그리고 숱한 스캔들과 연애사건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이 여배우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거칠 것 없이 당당했다.
김지미씨와의 인터뷰는 이제까지 필자가 해본 인터뷰 중 제일 어려운 것이었다. 미국에서 막 귀국한 그녀는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상태였고, 담당기자와 필자가 여러 차례 전화를 한 끝에야 겨우 인터뷰를 승낙했다.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은 해야 한다는 사전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만나자마자 “한 시간밖에 없다”고 못박았다. 김지미. 이 당대의 최고 여배우는 할리우드 영화 ‘선셋대로’의 사라진 스타 노마와 달리 지금도 바쁘고 활기찬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내게, 전성기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얼굴을 ‘본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른 스타들처럼 따로 포즈를 취하는 대신 인터뷰하는 도중 자신의 얼굴을 그냥 찍어달라고 사진기자에게 부탁했다.
그랬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은 지금도 당당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름다움과 도도함은 그녀를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라 카리스마 넘치는 스타로 자리잡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인터뷰 내내 그녀에게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에너지와 자의식이 넘쳐흘렀다.
도대체 누가 그녀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열일곱에 데뷔해 열아홉 살에 첫 결혼을 했고 스물세 살에 재혼하여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던 삶. 그리고 이어지는 아들의 죽음과 두 번째 남편 최무룡씨의 영화 제작 실패, 이혼 재혼을 반복하며, 월세와 대저택을 오가던 삶, 입도선매격으로 수입한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로 흥행 대박을 터뜨리고, 남편에게는 그렇게도 말렸던 영화제작을 시작해 지미필름의 대표와 영화인협회 이사장이란 공직을 맡았던 그녀의 삶.
이제 63세인 그녀는 다시 한번 이혼해 또다시 세간의 눈길을 받고 있다. 보통 여인네라면 그 절반의 삶조차 감당키 어려웠을 질풍노도 같은 삶을 견디며 지탱해온 이 철의 여인의 삶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내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녀는 인터뷰 도중 자주 “나는 어제 일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슬며시 다른 주제로 방향을 바꾸곤 했다. 필자가 느끼기에 그녀의 망각은, 현재를 살게 하는 거의 유일한 방어기제이자 미래로 향하는 마지막 출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대 여배우는 과거를 흘려보내며 자신 앞에 닥친 현재의 삶을 부단히 살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배우로서, 연기자로서 김지미를 연구하는 일은 인간 김지미를 인터뷰하는 일보다 더 어려울 듯싶다. 그녀 자체가 자신의 영화에 대한 기억이 희미한 데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가 무려 700편에 달한다는 사실에 압도되었는지 세상의 많은‘김지미론(論)’에도 그녀의 연기 자체에 대한 세세한 분류나 언급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그녀의 연기 세계를 요약하자면, 영화 속의 김지미는 가부장제에 짓눌리거나 무조건 순종하는 가련한 여인네보다는 현대적인 이미지의 여성이었다. 팜므 파탈, 단순히 악녀라고 번역할 수 없는 강인한 의지와 품위로 독립적인 기질이 강한 주체적인 여성상을 체화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김지미란 여배우는 영화판을 열렬히 그리고 평생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과거 인터뷰에서 “출연을 못하면 스태프로 뛰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고, 이번 인터뷰에서는 “좋은 역할이라면 이빨이라도 다 뽑고 맡겠다”고 고백했다. 아마도 그녀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그녀가 어떤 남자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던 불꽃, 오직 영화하고만 가능했던 평생 지속된 김지미의 단 한 개의 연애담이기도 하리라.
-한동안 외국에 나가 계셨죠? 얼마 만에 들어오신 건가요.
“3개월 만이에요. 자주 드나들어요. 미국에 식구가 많거든요. 그래서 한번 나가면 몇 개월씩 있게 돼요. 가려고 그러면 식구들이 자꾸 더 있다 가라고 그러니까요.”
(계속)
-인터뷰를 준비하다 보니 김지미씨는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 많은 인생체험을 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17세에 데뷔해서 결혼을 하고 곧 이혼, 23세에 재혼을 하셨잖아요. 저는 곧 마흔이 되는데, 당시 김지미씨의 절반도 인생을 경험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김지미씨의 운명이었을까요 아니면 의지에 따라 살아온 삶이었을까요.
“글쎄요. 팔자타령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것이 일종의 운명이라는 생각은 합니다. 한번도 거부할 수 없었던 입장이었거든요.”
김지미는 1940년 7월 충남 대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 직후 서울에 올라와 성장한 그녀는 초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발발한 한국전쟁을 피해 다시 대덕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신탄진국민학교와 대전여중을 졸업한 그는 서울이 수복된 후 귀경해 덕성여고를 다녔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 무렵 김기영 감독에게 픽업되어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그의 성장시절은 끝이 난다.
“원래는 미국에 갈 계획이었어요. 서울대 문리대를 나온 저희 큰오빠가 미국에 유학가면서 저를 데려가려고 했거든요. 대사관에서 인터뷰를 하기로 한 상황이었죠. 그러는 와중에 김기영 감독님이 저를 보고는 끈질기게 캐스팅했죠. 저희 집으로도 여러 번 찾아오셨고요. 그 분은 자기 눈에 드는 사람은 어떻게든 데뷔를 시켰어요.”
-집안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꽤 부자였어요. 아버지께서 사업을 크게 하셨거든요. 초등학교 때 뷰익이라는 자가용을 타고 학교를 다녔으니까요. 흔히 옛날 연예인들은 집이 가난해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데뷔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좀 달랐죠.
내가 데뷔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가 심했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거죠. 형제가 8남매였는데 다들 인물이 좋고 공부도 잘했어요. 그 중에 ‘이화여고 대표미인’ 소리를 듣던 둘째언니가 6·25 전쟁이 나기 전에 ‘나라를 위하여’라는 영화에 가족 몰래 출연했대요. 집안이 발칵 뒤집혀서 난리가 났었죠. 덕분에 제가 배우 한다고 나섰을 때는 거부반응이 좀 덜 했던가 봐요.”
-그렇게 시작한 데뷔작이 김기영 감독의 1957년작 ‘황혼열차’였습니다. 당시 영화계 상황을 좀 설명해주세요.
“그때는 배우가 많지 않았어요. 이름있는 여배우로는 조미령 주증녀 노경희 양미희씨가, 남자배우로는 이민 박암 김진규 최무룡 윤일봉씨가 활동하고 있었어요. 김승호씨는 조금 연세가 많았고요. 영화도 1년에 두세 편 정도 제작되면 많다고 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영화계에 나온 게 계기가 되어 한국영화가 전성기를 맞았다, 그런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데뷔 이듬해부터 제작편수가 10편, 20편, 30편 막 늘어나는 거예요. 전쟁 직후 혼란하고 황폐한 시대에 국민들이 애환을 달래기 위해 극장을 찾았던 거겠죠. 슬프면 가서 실컷 울고 즐거우면 실컷 웃고. 그래서 영화가 갑자기 붐을 맞았던 것 같아요.”
흔히 1958~64년을 한국영화의 중흥기로, 1965~70년을 황금기로 평가한다. 이승만 정권은 1958년 4월 ‘국산 영화 제작 및 영화 오락 순화를 위한 보상 특폐조치’를 실시했고 이에 따라 영화수입은 쿼터제가 되어 국산영화 제작이 장려되었다.
그녀의 말처럼 1957년 이전에 국산영화가 한 해에 한두 편 제작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데뷔 직후였던 1958년에 급격한 양적 성장을 거둔 것은 분명하다(1955년 제작된 한국영화는 15편, 1956년 30편, 1957년 37편, 1958년 74편, 1959년 111편). 본인의 말 그대로 그녀는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간 운 좋은 배우였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김지미씨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사각(死角)이 없는 배우’, 어느 쪽에서 카메라를 들이밀어도 죽은 구석이 없는 배우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최무룡씨의 회고담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고 촬영기사도 그렇게 말했던데, 정작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자신의 얼굴에서 불만족스런 부분이 없는지.
“나는 나를, 내 모든 것을 굉장히 사랑해요. 외모는 물론 성격까지. 제 성격이 좀 모질고 괴팍스럽다는 건 저도 잘 알거든요. 싫은 것은 굉장히 싫어하고 좋은 것은 굉장히 좋아하는 스타일이죠. 한번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건이든 사람이든 영원히 안 보는 식이에요. 그걸 내 스스로 알면서도 ‘아,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다’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다른 사람하고 똑같을 수는 없지 않느냐, 나는 나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생각하죠.”
아마도 김지미가 스크린에서 내뿜는 카리스마의 많은 부분은 그녀의 타고난 외모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 평하던 시절도 있었다. 최무룡씨 외에도 촬영기사 대다수가 증언하듯, 그녀는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는 제대로 갖추어진 모양새’라는 평가를 받았다.
(계속)
-스스로에 대해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전혀 없었다는 거네요.
“단 하나 키가 조금 마음에 걸렸어요. 키가 160cm거든요. 당시에는 내 키가 작은 건 아니었어요. 보통 여자로는 괜찮은 키였어요. 그래도 늘씬한 사람 보면 ‘아, 나도 저렇게 늘씬해 봤으면’ 하는 생각은 했죠. 그런데 그것도 생각해보면, 감독들이나 촬영기사 분들이 여배우의 키는 160cm가 가장 적합하다고 하거든요. 여자가 체격이 크면 러브신을 할 때 남자 품에 안겨들어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몸무게 50kg에 키 160cm. 열일곱 살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아요. 지금도 처녀 시절하고 1kg도 차이가 안 나요. 한번 살이 빠졌던 적은 있었어요. 내가 재작년에 이종구 박사와 이혼할 그 무렵에. 예전에는 이혼에 대해 별 부담을 안 느꼈어요. 어렸으니까. 지금은 사회적인 책임도 있고, 환경도 많이 바뀌어 고민이 적지 않았거든.
이제 손자손녀도 있는 나이에 또 헤어져야 되나, 내 체면과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 고민을 하다 보니 4.5kg 이상 체중이 줄었어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이혼을 결심하고 나니 다시 원상으로 돌아오더군요.”
-제가 볼 때 김지미씨의 전성기는 1961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해에는 여러 작품을 하셨죠. 이 때 촬영한 작품들이 ‘춘향전’ ‘에밀레종’ ‘마부의 딸’ 그리고 정창화 감독의 ‘장희빈’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등이었습니다.
“‘춘향전’은 선민영화사에서 찍었죠. 그 무렵 영화계에는 전속제가 있었어요. 크게는 임화수 사단과 선민영화사로 나뉘어 소속되어 있었죠. 나는 선민영화사 전속배우였고요. 선민영화사 전속배우는 김지미와 최무룡밖에 없었어요. 다른 배우들은 대부분 임화수씨가 하는 영화사 전속이었죠. 선민영화사는 지금 광화문 동화면세점 자리에 있었던 국제극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도 상당히 튼튼했어요. 그 영화사에서 작품을 많이 찍었죠.”
이 대목은 약간의 보충설명을 해야 할 듯하다. 영화사에 기록된 당시 상황과 김지미씨의 이야기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비약적인 성장은 제작회사의 난립을 가져오기도 했다. 홍성기 감독이 속해있던 선민영화사 외에도 안양영화사(홍찬), 현대영화사(정화세), 한국연예주식회사(임화수), 서울영화사(신상옥, 후에 신필름으로 개칭), 한흥영화사(최관두) 등 무려 72개의 영화사가 간판을 걸었다.
그러나 1961년 5·16 이후 정부는 영화사를 16개로 통폐합했다. 이 과정에서 1963년까지 살아남은 영화사는 4개에 불과했다.
악녀와 성녀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많은 영화를 찍었다는 것은 오히려 위기인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양이 많은 만큼 연기에 몰입하는 정도는 낮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음, 나 개인을 두고 말하기보다는 한국영화의 당시 흐름을 우선 살펴봐야죠. 그 무렵 촬영을 많이 한 것이 내 뜻은 아니었으니까. 첫 영화가 성공하자마자 시나리오가 산더미처럼 몰려오는 거예요. 한꺼번에 37편을 겹치기 촬영한적도 있어요.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어요? 하자면 무조건 하는 식이었지.
전국 극장에서 다 와서 매달리고, 영화사, 프로덕션, PD마다 모두 ‘이거 출연해주셔야 제가 살겠습니다’ 하고 사정하는데, 그걸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그러니 영화가 제대로 될 리가 있나. 영화는 많아도 정작 이거다 하고 내놓고 연구할 만한 영화는 별반 없을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렇다고 당시의 제작관행을 욕할 수 있느냐, 그것도 아니라고 봐요. 그때는 예술성보다는 전쟁에 상처 입은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게 더 중요했거든. 내가 식모부터 왕비까지 마다하지 않고 영화에 출연한 것은 달리 말하면 헌신적이었다는 거예요. 흔히 내 다음세대로 ‘트로이카 시대’가 왔다고 하잖아요. 나는 경쟁대상이 아무도 없었어요. 대한민국 영화를 십수 년 동안 혼자 끌고가야 했어요.
그 때만 해도 감독이나 제작자가 자기 집 팔아서 영화 만들던 시절이에요. 지금처럼 어디 벤처에서 남의 돈 몇백억씩 끌어다 쓰는 식이 아니었죠. 그렇게 영화 만든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영화의 밑거름이라고 봐요. 그들을 이해했기 때문에 내키지 않는 작품에도 억지로 출연했던 거죠.”
-당시 출연했던 영화 가운데 우선 궁금한 작품은 정창화 감독의 ‘장희빈’입니다. 이 작품에서 김지미씨는 장희빈의 완전히 다른 두 캐릭터를 인상 깊게 연기하셨는데요. 임금님한테 그지없이 헌신적인 성녀의 모습과 나인의 뺨을 치는 표독스러운 악녀의 모습을, 마치 아예 다른 인물처럼 보이도록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두 통의 편지를 써서 보내는 장면이 있었는데, 흡사 두 편지에 두 명의 다른 여인이 깃들여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더군요.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장희빈’을 초기 작품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작품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때의 연기나 인상적인 장면에 대해서 하실 얘기가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