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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아미타불 원문보기 글쓴이: 慧蓮
『관경사첩소』강요綱要
혜정법사 저술
정전스님 번역
출처 - 순정시대 (純淨時代) http://cafe.daum.net/sunsujeongto
『관경사첩소』 서문
『관경사첩소』는 당나라 선도대사(613~681)의 저작著作인데, 『불설관무량수경』을 해석한 책으로, 네 권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권의 제목은 「관경현의분觀經玄義分」이요, 제2권의 제목은 「관경서분의觀經序分義」 이요, 제3권의 제목은 「관경정선의觀經定善義」이요, 제4권의 제목은 「관경산선의觀經散善義」이다. 이 책은 『대정장大正藏』 37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예로부터 모두 「해정소楷定疏」 또는 「증정소証定疏」라 존칭하였으며, 금조옥조로 받들어져 경전과 같이 존중하였다.
이 책에는 안목(眼目:문장의 뜻이 관건이 되는 곳)이 두 군데 있고, 심요(心要:핵심) 역시 두 곳이 있다. 비록 두 곳이 있으나 공통으로 하나의 이치를 밝히고 있으니, 이 하나의 이치만 안다면 『관경사첩소』의 종지는 손금 보듯이 환히 알 수 있다.
안목 하나:
사바화주(娑婆化主:석가모니불)께서 (위제희부인의) 청으로 인해 널리 정토의 「요문要門」을 열어주셨고; 안락능인(安樂能人:아미타불)께서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 「홍원弘願」을 드러내셨다.
그 「요문」이란, 바로 이 『관경』에서 말하는 정산이문(定散二門)이다.
정定이란 곧 생각을 쉬어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고, 산散이란 바로 악을 버리고 선을 닦는 것으로, 이 두 행을 회향하여 왕생을 기원하는 것이다.
「홍원」이란 말은, 저 『대경』에서 설하신 것처럼 “일체 선악범부가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아미타불의 대원업력에 올라타는 것을 증상연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제18원의 뜻을 취한 글)
이 글은 「요홍이문판要弘二門判」의 글이라 부르는데, 제1권 <현의분> 「칠문요간七門料簡」의 첫 번째 「서제문序題門」에 나온다. 즉, 이 『사첩소』의 첫 머리에 요지를 밝히는 「서제문」에서 우선 『관경』 한 부에서 설하신 의리義理를 「요문」과 「홍원문」으로 분석하여 귀납한 것이다. 이는 단지 『관경』에 대한 교판일 뿐만 아니라 역시 전체 정토종의 교판이다.
「요문」이란 『관경』 가운데 13관의 정선定善 및 삼복구품의 산선散善인 이른바 ‘정산이문’을 닦아서 이 공덕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 3장12부와 팔만사천 가지 수행은 이 요문 속에 죄다 들어있다.
「홍원」이란 『대경』 중에 아미타불의 본원, 즉 제18원을 말한다. 선도대사는 여기서 왕생은 자력인 정산이문에 의지하여 회향왕생을 구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본원의 구제에 의지하여 저절로 왕생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 문장으로부터 이 책의 목적은, 아미타불의 본원구제를 널리 선양하고, 극락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전부 반드시 아미타불의 본원구제에 승탁乘託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릇 아미타불의 본원구제에 승탁하는 자는, 선인과 악인을 말론하고 모두 다 아미타불의 무위열반의 고묘高妙한 보토에 들어가고, 모두 다 아미타불과 함께 광명과 수명이 무량한 최상의 극과極果을 증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대경』 아미타불 48원 중의 본원왕인 제18원의 종지이다. 마치 '물이 흘러 근원인 바다로 돌아가고, 달이 지더라도 하늘을 여의지 않는 것'처럼 아미타불의 본원 바다를 멀리한다면, 시방중생들은 돌아갈 곳이 없다. 아미타불의 본원과 석가세존의 본회本懷를 선도대사께서 여기서 남김없이 드러낸 것이다.
안목 둘: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말을 잘 지녀야 하느니라. 이 말을 지닌다는 것은 곧 무량수불의 명호를 지니는 것이니라.”
지금까지 비록 정산 두 문(定散兩門)의 이익을 설하셨지만, 부처님의 본원을 바라보면, 그 뜻은 중생들이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데 있다.
이 글은 「요홍폐립要弘廢立」의 글이라 부르는데, 제4권 <산선의散善義>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으며, 『관경·유통분』을 해석하는 글이기도 하다. 이는 『사첩소』의 결론으로, 이 결론에서는 자력인 정산定散의 「요문」을 버리고, 오로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홍원」에 의지해야 함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필력이 막강하여 정토종의 종의宗義가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보듯이 환하게 홀로 비추고, 연꽃이 떨어지는 동시에 연밥이 이루어지듯이 방편을 지니지 않는다. 이 글은 전부 『관경』의 핵심·골수·결정結晶이요, 정토교의 종지·방침·눈과 발이요, 16관의 천리내용千里來龍이 여기서 혈을 맺은 것이다. 『관경』 한 부의 모든 개합開合은 뭇 근기들을 이끌고 ‘일향전칭一向專稱’의 일행一行으로 들어가도록 하는데 있다. 이 ‘일향전칭’의 선시宣示는 곧 『대경』의 아미타불 48원 중의 본원왕―제18원의 ‘내지 십념’에 대한 해석이자 앞에서 말한 ‘아미타불의 대원업력에 올라탐’의 내용, 즉 어떻게 승탁하는가이다. ‘일향전칭’이 바로 승탁하는 방법이다. 선도대사는 이 글로써 『관경』 한 부의 목적이 정산定散의 모든 근기들을 이끌고 제18원으로 들어가는데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마치 수많은 별들이 북극성을 에워싸고 ,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아서 일향전칭의 행에 의지하면 반드시 무위열반의 국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와 같이 도표를 첨부한다:
심요 하나:
첫째, 자신은 현재 죄악생사범부로서 광겁 이래 항상 침몰하고 항상 유전하여 (생사로부터) 벗어날 기연이 없음을 결정코 깊이 믿는다.
둘째, 저 아미타불께서 48원으로 중생을 섭수하시니, 의심과 걱정 없이 저 원력을 타고 반드시 왕생함을 결정코 깊이 믿는다.
이 문장을 ‘두 가지 깊은 믿음’의 글이라 부르는데, 제4권 <산선의散善義> 중 ‘심심에 대한 해석深心釋」’에 나온다. ‘심심’이란 곧 ‘깊이 믿는 마음’을 말한다. 이 글은 ‘기법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機法二種深信)’을 밝히는 것으로, 기(근기)는 범부를 말하고, 법은 아미타불을 말한다.
범부로서 자신의 삼업이 모두 죄업이어서 영원히 윤회에 빠져 삼계를 벗어날 힘이 없다는 것을 깊이 믿는다. 그러나 이 범부는 아미타불께서 깊은 연민심을 내어 그들을 위해 발원하여 맹세코 구제하려는 대상이므로, 이 범부가 두렵고 불안한 마음속에서 아미타불의 본원력의 섭취와 보호와 구제의 진실을 깨닫고 아무런 의심과 걱정 없이 아미타불의 본원구제를 믿고 받아들여 그 자리에서 바로 왕생이 결정됨을 얻은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의심과 걱정 없이 저 부처님의 원력에 힘입어 반드시 왕생한다.’는 의미이다. 즉, 『대경』에서 말한 “만약 내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중생들이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내가 맹세코 부처가 되어 널리 이 원을 실행하여, 모든 공포로부터 크게 편안케 하리라.”“모든 중생 가엾이 여겨 내가 마땅히 제도하리니, 시방에서 오는 중생들 마음이 즐겁고 청정하리라.”“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유정들을 건지시어 아비지옥 고통 받는 중생 남김없이 제도하리.”의 종지이다.
심요 둘: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행주좌와에 시간의 멀고 가까움을 묻지 않고 염념마다 버리지 않는 것을 정정의 업이라 부르나니, 저 부처님의 원력에 순응하는 까닭이다.
이 ‘칭명정정업’의 글도 제4권 <산선의> 중의 ‘심심에 대한 해석’에 나온다. 이 글에서는 청정함과 더러움淨穢·죄와 복罪福·정과 산定散·마음의 옳고 그름을 모두 따지지 않으며, 범부의 마음으로 다른 것을 염하면 모두 미혹되어 왕생의 인이 아니므로, 오직 아미타불을 불러(念)야 즉시 왕생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이 제18원 ‘내지 십념’의 뜻이다.
앞의 ‘두 가지 깊은 믿음’은 신(信:신심)의 각도에서 말한 것이고, 이 ‘정정업’의 글은 행(칭명)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여기서 본원의 염불을 믿는 것은 신행信行이 일체이고, 신행이 둘이 아니며, 신행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이 의미는 선도대사의 『왕생예찬』 전서前序에서도 말씀하셨다.
‘심심深心’은 곧 ‘진실한 믿음真實信心’이다 :
자신은 번뇌를 구족한 범부이고, 선근이 엷고 적어서 삼계를 유전하며 화택火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믿고 아는 것이다.
지금은 아미타불의 본래 크신 서원 및 적게는 열 번 한 번에 이르기 까지 명호를 칭념하면 반드시 왕생하게 됨을 믿고 알아서, 내지 한 생각조차도 의심이 없기 때문에 심심深心이라 부르는 것이다.
두 가지 깊은 믿음은 왕생의 정인正因이고, 일향전칭은 왕생의 정행正行이다. 정선과 산선, 오역과 십악을 막론하고 시방의 모든 중생들이 ‘위로는 일평생을 다하고 아래로는 열 번 한 번 일념에 이르기까지도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만약에 이 믿음을 일으키는 당시에 이미 임종이 되어 입으로 염불할 겨를이 없더라도 당장에 극락왕생을 하게 되고, 만약에 수명이 연장되었다면, 한 평생을 다해 칭명염불을 하는 것이다. 칭념을 하지만 칭념의 공이라 여기지 않고, 그 공은 나무아미타불이란 육자명호 자체에 있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두 곳의 안목과 두 곳의 심요는, 비록 글은 두 가지가 있으나 공통으로 하나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이치란 곧 아미타불의 본원구제를 믿고 아미타불의 본원명호를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부의 생명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정대頂戴하고, 생명이 아미타불과 일체가 되는 것이다.
선도대사는 이 『소』에서 『관경』의 의취는 본래 성도문을 닦던 근기들은 인도하여 정토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아울러 정토문에서 자력으로 정산이선을 닦는 근기들을 설득하여 타력구제의 법으로 들어가도록 하는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관경』의 최종 목적은 일체 중생들을 인도하여 오로지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지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아미타불의 구제를 정대하고 극락정토에 왕생하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오랜 세월 고통의 원인을 가르쳐 영생의 즐거운 과보를 깨닫게 한다. (현의분·서제문玄義分、序題門)
부처님의 원력에 의탁함을 강한 연으로 삼아 5승이 함께 (보토에) 들어가는 것이다. (현의분·화회문 玄義分、和會門)
이는 시방삼세 제불들이 세간에 출현하신 본회이니, 이른바:
제불이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대자비를 베푸심에 있어서, 마음으로는 오로지 항상 침몰(윤회)하는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정토에 돌아가도록 권유하신 것이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은 급히 구할 필요가 있겠지만, 언덕 위에 있는 자들은 구제가 필요 없는 것과 같다.(현의분·화회문 玄義分、和會門)
이 『관경사첩소』 및 『왕생론주』·『안락집』등은 당나라 말기 이후에 이미 실전되었다. 당무종(841~846)의 폐불멸법廢佛滅法은 불교사 중에서도 가장 참혹하였고, 또 당나라 송나라 사이의 오대전란五代戰亂 속에서 불교의 전적典籍들이 거의 불에 다 타버렸던 것이다. 오대 때 오월국吳越國의 충의왕忠懿王 전홍숙錢弘俶은 중국 본토에서 ‘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를 구하려 하였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의적義寂법사가 먼 고려국으로부터 모시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유명한 천태 삼대부조차 역시 이러하니 기타 전적은 가히 짐작할 만 할 것이다. 일본 정토종 행서상인幸西上人의 제자인 명신明信법사가 송나라 때 중국으로 건너와 다시 선도대사의 모든 저작을 찾아 구하려 하였으나 아무런 소득 없이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관경사첩소』는 일찍이 선도대사가 왕생한 후의 63년, 즉 서기 744년에 이미 일본에서 필사되고 홍양되었으니, 불에 타고 흩어져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정토교에서 귀중히 여기고 주로 의거하는 논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일본의 정토교에서는 모두 이 『소疏』를 『조전祖典』으로 받들고 있으니, 그 존숭의 지극함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며, 또한 이 책에 대한 깊은 연구와 유포와 선양에 가장 깊이 진력하였다.
반면에 중국을 살펴보면, 중생들이 박복하여 청나라 말년에 이르러서야 이 『소』와 함께 기타 정토종의 보전寶典들이 비로소 일본으로부터 되돌아오게 되었으나,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 조전祖典의 지도가 부족한 탓에 천여 년 이래 중국 정토종 대덕들의 자행화타(自行化他:스스로 수행하고 남을 교화함)는 대부분 아미타불의 본원과 소원하여 담란·선도 등 정토종 조사들의 종지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이는 그 당시의 기연이 아직 무르익지가 않아 교법이 잠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 근기와 교법이 이미 성숙되어 이 『소』가 인연에 응해 나타났으니, 새롭게 단락을 나누고 문장부호를 넣고, 아울러 미주眉註를 추가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쉽게 해독하고 속히 종지를 얻어, 다함께 정토종 조사들의 노선을 따라 다함께 아미타불의 본원 바다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만약 이 책의 강요를 파악하고, 아울러 대사의 위대한 자취를 정확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졸작인拙著인 『관경사첩소강요』와 『선도대사약전』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범부가 본원을 믿어 부처와 일체가 되니, 조석으로 함께 기상과 취침하며, 출입을 함께 동행 하네.
항상 부처님 생각하고 염불하여 삼업에 부처님을 여의지 않으니, 현생에 안온함 얻고 임종 시 극락왕생 하네.
불기 2543(1998)년 1월10일 본원산에서 혜정 삼가 적음
『관경사첩소』 강요綱要
1. 5부9권의 본소와 구소, 교문과 행문의 안심기행
아미타불의 시현示現이신 선도대사의 찬술로는 「5부9권」이 현존해 있는데, 그 중에 『관경소觀經疏』 1부4권은 『대정장』 37권에 수록되어 있고 나머지 4부5권은 47권에 수록되어 있다.
『관경소』를 일반적으로 『관경사첩소觀經四帖疏』, 정식이름은 『관무량수불경소』 또는 『관무량수경소』라 부르는데, 그 내용의 의미로부터 봤을 때 『해정소楷定疏』 또는 『증정소證定疏』라 불리기도 한다. 이 밖에 또 『관경의觀經義』·『관경요의觀經要義』·『관경의소觀經義疏』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많은 이름으로부터 이 소가 얼마나 널리 인용되고 얼마나 높이 존숭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관경소』는 5부9권 가운데 「본소本疏」 혹은 「경소經疏」라고 불리고, 또 「교상분敎相分」·「해의분解義分」·「안심본安心分」이라 불리는데, 「교문敎門」에 속한다. 이와 상대되는 『관념법문觀念法門』등 4부5권는 「구소具疏」라 부르고, 「행의분行儀分」·「기행분起行分」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행문行門」에 해당한다.
2. 아미타불께서 직접 지도해 주시고 제불이 그 진실함을 증명하셨으니, 고금의 오해를 바로 잡아 경전과 같이 존중하여 믿는다
『관경』의 주제는 매우 특별하여 일반 성도문의 여러 종사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즉, 위제희부인은 일개 평범한 여성이고 완전한 범부로서 괴로움의 핍박을 받고 있었으나 아미타불께서 허공 속에 머물러 서계시는 모습을 뵙는 찰나에 즉각 왕생이 결정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였다.
또 경의 마지막 <유통분>에서 설하시길,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난다.”(의역)고 하셨다.
그리고 하품하생의 극중한 악인도 임종 시에 고통에 시달리고 지옥의 불길이 나타났지만 겨우 열 번의 염불로 역시 왕생하였다.
요 몇 가지 점은 성도문의 자력근성의 수행자들이 이해하기란 몹시 어려웠다. 증오證悟의 측면에서 말하더라도 단지 견혹을 깨트리는 것만 해도 숙세에 많은 공덕을 쌓고 여러 가지 어려운 행을 닦지 않았으면 절대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제희부인은 왕궁에서 자라나 오욕락을 맘껏 즐기면서 언제 하루만이라도 수행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나 간에 마음을 바꾸자마자 바로 무생법인의 지위(아미타불의 구제를 깨닫고 신심이 물러나지 않는다는 뜻)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삼도육도三途六道의 윤회로부터 멀리 벗어나기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극중한 악인이 아무런 선행 없이 단지 부처님의 명호만 불러 길이 사바세계와 작별하고 높이 극락으로 초월한다. 이러한 일들은 범부들의 지견에서 크게 벗어난다.
그런 까닭에 성도문의 제사諸師들이 서로 다투어 『관경』에 대해 주석을 하였지만, 위제희부인이 대보살이고 숙세에 이미 공행功行을 쌓은 적이 있었기에 비로소 이 법회에서 즉각 무생법인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라 오판한 것이었다. 아울러 십념왕생은 ‘발원만 있고 행이 없다.’면서 단지 먼 미래에 왕생할 연만 지을 뿐 금생에는 바로 왕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오해를 한다면 『관경』에 해당하는 주근기가 범부가 아니라 성인이 되므로, 『관경』의 바른 뜻이 감춰져 드러나지 않게 되고 우리들이 오탁악세를 벗어날 길이 없게 되고 만다.
이러한 오해는 한마디로 『관경』의 목적이 ‘아미타불의 본원은 범부를 근본으로 한다.’는 이치를 모른 소치이다. 다시 말해 정토문의 이행타력을 모르고서 성도문의 난행자력에 집착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문은 모름지기 자신의 수행역량으로 자신의 생사윤회를 구제해야 하는데, 이는 자력의 난행인 까닭에 『대집경』에서 설하시길, “수많은 중생가운데 얻은 이는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만약 완전히 아미타불의 원력의 구제에 의지한다면 일체 선악범부가 전부 극락에 왕생하여 다시는 육도윤회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본소에서 설하기를, “일체선악범부들이 왕생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아미타불의 대원업력에 올라타는 것을 증상연으로 삼지 않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면서 또 “부처님의 원력에 의탁하는 것을 강한 연强緣으로 삼아 5승이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고 하셨다.
자력과 타력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관경』은 바로 타력으로 정토에 왕생하는 경이고, 아미타불의 불력佛力으로 구제하는 법이며, 성인聖人이 아닌 범부들을 위해 설한 경이다. 불력인 까닭에 범부인 위제희가 무생법인을 깨닫고, 극중한 악인이 극락으로 왕생한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지하는 것으로 범부의 자력과 자득自得에 전혀 의지하지 않는다. 이른바 불법 가운데 다섯 가지 불가사의함이 있지만 그중에 불력이 가장 불가사의한데, 불력의 불가사의란 바로 아미타불의 대비구제大悲救濟의 힘을 말한다.
지금 선도대사의 『관경소』가 『해정소』라 불리게 된 이유가 바로 선도대사가 완전히 아미타불의 불력구제의 입장에 서서 성도문의 예로부터 지금까지 제사諸師들의 잘못된 오해들을 바로 잡고 그 옳고 그름을 판정했기 때문이다.
대사께서 발문跋文 중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이 관경의 요의要義를 드러내어 고금의 잘못을 바로 잡고자 한다.
(某今欲出此觀經要義, 楷定古今。)
이른바 ‘고금’할 때 ‘고’는 ‘옛 사람들의 주장(古說)’이라는 의미로서, 선도대사 이전에 『관경소』를 저술한 정영사淨影寺의 혜원慧遠·가상사嘉祥寺의 길장吉藏·천태종의 지의智顗 등의 주장을 말한다. ‘금’은 ‘요즘 사람들의 주장(今說)’이라는 의미로서, 대사님과 같은 시대에 정영淨影·가상嘉祥 등의 논설을 계승한 사람들과 섭론가攝論家들의 주장을 가리키는데, 대사께서 그 분들의 이름을 삼가 부르지 않고 존경을 보이시며, 이상의 여러 스님들을 통틀어 ‘제사諸師’라고 부른 것이다. ‘해楷’는 해정楷正과 규범이고, ‘정定’은 의리義理의 옳고 그름을 결정함이다. 다시 말해 의리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여 후세의 본보기(範本)로 삼는 것을 일컬어 ‘해정’이라 하는 것이다.
정영사 등 고금의 제사들이 성도문聖道門 자력교自力敎의 관점으로써 정토문淨土門 타력교他力敎인 『관경』을 해석함으로 인해 『관경』의 진실한 뜻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경』의 진의眞義가 명확하지 않고, 석존의 본회가 밝혀지지 않았으며, 아미타불의 불력이 드러나지 않고, 정토법문을 널리 펴는데 장애가 생겼으며, 범부의 왕생길이 막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상황을 지켜본 선도대사는 매우 슬퍼하며 말씀하시길, “스스로를 잃고 남을 그릇되게 하여 그 해가 매우 크다.”고 하시고는 아미타불과 제불을 향해 이 책을 저술하여 고금 이래 『관경』에 대한 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여 『관경』의 바른 뜻을 드러낼 수 있도록 명훈가피를 주시길 기원하였다.
과연 마침 이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을 즈음에, 매일 밤마다 모두 거룩한 스님 한분이 오셔서 직접 현의과문玄義科文를 지도해 주셨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이 나오자 『관경』의 진의는 마치 밝은 해가 중천에 떠올라 대지를 환하게 비추고 있는 것과 같았다. 석존의 소회素懷와 아미타불의 원력을 남김없이 철저하게 드러내었으니, 염불하는 사람들이 마치 우후죽순처럼 장안에 가득 찼다.
그런 까닭에 고덕古德이 말씀하시길, “선도화상이 홀로 부처님의 바른 뜻을 이해하였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시의 불교계에서 오직 담란대사·도작선사로 내려오는 바른 법맥을 계승한 선도대사만이 석존께서 이 『관경』을 선설宣說하신 진정한 목적과 『관경』의 정확한 의취를 밝히셨다는 것인데, 그런 까닭에 대사의 소疏는 ‘고금의 오해를 바로 잡은 소(楷定古今之疏)’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제불이 증명하고 확정하신 책이기 때문에 이 소를 『증정소證定疏』라 부르기도 한다. 그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 구절 한 글자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되며, 사경을 하고자 한다면 경법經法과 같이 해야 한다.
법연상인께서도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선도화상의 『관경소』는 서방으로 가는 나침반이요, 행자의 눈과 발이다.
또 말씀하시길, “꿈속에서 스님이 오셔서 심오한 뜻을 지도해 주셨다고 하였는데, 이 스님은 아마도 아미타불의 응현應現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는 아미타불께서 직접 전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길, “온 세상에서 ‘증정소’라 부르고, 사람마다 경법과 같다고 찬탄하였다.”고 하셨다.
이 『관경소』가 아미타불께서 직접 지도해주신 심오한 뜻과 제불이 증성(證誠:진실한 말씀임을 증명함)하신 미묘한 해석인 이상, 귀중히 여기며 존경하여 믿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3. 구품은 오직 범부이며, 관경 한 부는 부처님께서 범부들을 위해 설한 것이지 성인을 위한 게 아니다
제사諸師들의 『관경』에 대한 해석 가운데 영향이 가장 크고 또 가장 명백히 알 수 있는 오해는 네 가지 점이 있다.
1) 위제성인론(韋提聖人論): 위제희부인은 대보살이라 판정하였다.
2) 구품유성론(九品唯聖論): 구품왕생의 근기가 모두 성인이라 판정하였다.
3) 화신화토론(化身化土論): 아미타불은 화신이고, 극락은 화토라 판정하였다.
4) 별시의취론(別時意趣論): 하품하생의 십념왕생은 오직 원만 있을 뿐, 행이 없다고 판정하였다.
대사께서는 『관경소』의 제1권<현의분> 칠문분과七門分科의 여섯 번째 「화회문和會門」에서 이 네 가지 주장들에 대해 낱낱이 바로 잡으시고, 아울러 아래에 열거한 일곱 가지 주장을 들어 고금의 잘못을 바로잡은 정론正論으로 삼았다. 사실상 이 일곱 가지 주장은 『관경소』가 고금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은 중점이다.
1) 관경유범론(觀經唯凡論): 부처님께서 관경을 설하신 것은 오직 범부를 위해서지 성인 을 위한
게 아니다.
2) 위제범부론(韋提凡夫論): 위제희는 범부이지 성인이 아니다.
3) 구품유범론(九品唯凡論): 구품의 행자는 모두 범부이지 성인이 아니다.
4) 보신보토론(報身報土論): 아미타불은 보불이고, 극락은 보토이다.
5) 원행구족론(願行具足論): 육자명호에는 원행이 구족하여, 신심을 내어 칭명만 하면 반드시 왕생
한다.
6) 범부입보론(凡夫入報論): 일체 선악범부들이 평등하고 차별 없이 보토에 왕생하여, 아미타불과
같은 무량광·무량수를 증득하는 게 정토문의 본의이다.
7) 승불원력론(乘佛願力論): 일체 선악범부의 보토왕생에는, 아미타불의 대원업력에 올라타지 않
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
『관경』의 하품하생은, 일생 동안 악업을 짓던 범부가 임종 시에 고통에 시달리다가 선지식을 만나 열 번의 염불을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당장에 연화대의 영접을 받아 아주 장엄하게 극락왕생을 하였다.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과 이러한 수승한 경계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담란대사께서 말씀하시길, “평범하지 않는 말은 평범한 사람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셨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으면 우리도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이니, 직심이 곧 도량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평범한 사람의 귀로써 평범하지 않은 말씀을 헤아리려 하거나, 심지어 범부들의 합리적인 해석을 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곡해한다면, 자신도 잃고 남도 그르치게 되므로, 그 해가 적지 않을 것이다. 『관경』이 쉽게 곡해를 받는 이유는, 범부이면서도 극도로 악한 사람이 어떻게 왕생할 수 있는가? 만약에 왕생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범부악인이 아닐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성자로써 구품왕생의 근기를 다음 도표와 같이 판정한 것이다.
구품왕생의 근기가 성자이고 범부는 몫이 없다고 판정한 것은, 완전히 정토문의 ‘범부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취지를 잃은 것이고, 부처님께서 『관경』을 설하신 진의를 상실한 것이다. 이에 대해 대사께서 감개하여 잘못된 오해를 바로잡아 주신 것이다. 대사께서는 <현의분>의 「화회문」에서 먼저 도리로써 이론을 내세워 그 그릇됨을 밝히고, 그 다음 『관경』의 경문에 입각하여 범부를 중심으로 삼는다는 경전의 말씀으로써 증명을 하시고는, 결론을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관경』의 정선 및 삼배구품에 대한 위아래 경문의 의미를 보니, 전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오탁악세의 범부들이 단지 만나는 인연이 다름으로 인해 구품의 차별이 생겨난 것이
다.
왜 그러한가?
상품의 세 사람은 대승법을 만난 범부이고,
중품의 세 사람은 소승법을 만난 범부이다.
하품의 세 사람은 악법을 만난 범부인데,
악업 때문에 임종 시 선업에 힘입어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왕생한 것이다.
아래의 도표와 같다.
또한, 대사께서는 <산선의> 중에서 구품에 해당하는 근기들의 위치를 낱낱이 다음 도표와 같이 판정하였다.
대사님의 판정에 의하면, 구품은 모두 범부이지 성인이 아니다. 게다가 전체 『관경』은 석가세존께서 미래세의 오탁범부들을 위해 설한 것이지, 성인들을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성인들은:
삼도(三塗:지옥·아귀·축생)가 영원히 끊어지고, 사취(四趣:지옥·아귀·축생·아수라)에 다시 태
어나지 않는다.
몸은 비록 생사 가운데 머물고 있으나 생사로부터 물들이 아니하니, 마치 거위나 오리가 물에
들어가도 물에 젖지 않는 것과 같다.
신통이 자재하여 자유롭게 변화할 수 있다.
다시 무슨 걱정이 있어서 위제희가 그들을 위해 부처님께 청을 하는 인연을 빌어 안락국에 왕
생하려 한단 말인가?
라고 하셨다.
그런 성자들은 이미 삼도육도三塗六道로부터 멀리 벗어나 안락하여 근심이 없으므로,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해 벗어나는 길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시고, 또 아미타불께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한 발원을 할 필요가 없으시다. 오히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오탁악세의 범부들이야말로 번뇌의 도적으로부터 침해를 받고, 탁하고 악하여 착하지 않으며, 다섯 가지 괴로움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다. 이처럼 괴로운 자들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과 같아서 항상 침몰하고 항상 유전을 하므로, 아미타불께서 가엾이 여기시어 그들을 위해 정토를 성취하여 급히 구제해 주시겠다고 발원한 대상이다.
이른바 ‘아미타불의 구제에는 범부가 주 대상’이다. 아미타불의 대비원력은 오탁말세에 번뇌의 도적으로부터 침해를 받고 괴롭기 그지없는 우리 범부죄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데, 만약 이처럼 죄와 괴로움이 있는 근기들을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자비원력이 원만하지가 않을 뿐더러 중생들은 윤회를 하면서 영원히 초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오겁·영겁 동안의 대비원행大悲願行과 십겁 이래의 끊임없는 부름은, 바로 이처럼 괴로운 근기들을 구제할 것을 급선무로 삼으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사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제불이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대자비를 베푸심에 있어서, 마음으로 항상 침몰(윤회)하는 중생
들을 특히 불쌍하게 여기시므로 정토에 돌아가도록 권유하신 것이다.
또한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급히 구제해야지 언덕 위에 있는 자들은 구제할 필요가 없는 것
과 같다.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이 『관경』은 부처님께서 범부를 위해 설하신 것이어서 성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세존께서 틀림없이 범부를 위한 것이지 성인을 위한 게 아니다.
여래께서 이 십육관경을 설하신 것은, 오직 항상 윤회하는 중생들을 위한 것이어서 대소승의
성인들과는 관계가 없음을 증명하셨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전체 『관경』에서 설한 정선십삼관定善十三觀 및 산선구품散善九品은 전부 석가세존께서 오탁악세에 항상 윤회하는 범부들을 위해 설한 것으로, 성자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에, 비단 구품이 성자가 아닐뿐더러 정선의 근기 역시 성자가 아니다. 설령 위제희부인에 대해 제사들이 그녀를 대보살이라고 단정 지었어도, 대사께서는 우선 <서분의>에 “그대는 범부여서 생각하는 바가 여리고 열등하다”는 부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위제희는 대승의 성인이 아닌 박지범부博地凡夫라고 해정楷正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정식으로 위제희는 범부일 뿐, 성인이 아님을 밝혔다. 성인이 아닌 까닭에 우러러 불력의
명훈가피를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저 나라가 비록 멀지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정선의>「화좌관華座觀」에서도 말씀하셨다.
위제희는 실로 번뇌가 있는 범부여인이로서 말할 것도 없지만,
오직 불력의 명훈가피로써 저 부처님께서 몸을 나투셨을 때, 예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반주찬』에서도 말씀하셨다.
위제희는 곧 여인의 모습이니,
탐욕과 성냄을 구족한 범부의 지위이다.
요컨대, 전체 『관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오탁악세의 범부와 항상 침몰(윤회)하는 악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설하신 경전이요; 정토문에서 정식으로 섭수하는 근기로는 범부를 근본으로 삼고, 이러한 범부들을 위해 설하신 것임을 나타내는 경전이요; 모든 범부들이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남을 설명하는 경전이요; 석가세존께서 중생들의 근기와 가르침을 받을 인연이 무르익었음을 보시고 설하신 말법시대 오탁악세의 근기와 가르침에 상응하는 경전이요; 아미타불께서 구제해주시는 법과 범부가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설한 경전이다.
4. 아미타불은 보신이고 극락은 보토인데, 범부가 보토로 들어감은 전적으로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한다
아미타불의 정토가 보토인가 화토인가의 문제와 관련해서 제사들 중에 어떤 분은 응화토應化土라 말하면서 범부들도 왕생할 수 있는 정토라면 마땅히 열등한 응화토일 것이라 여기기도 하고, 어떤 분은 범성동거토凡聖同居土라 말하면서 범부와 성인이 모두 왕생할 수 있는 정토라면 마땅히 범부와 성인이 함께 모여 사는 하등한 정토일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도작선사께서는 이미 『안락집安樂集』 제1대문의 <삼신삼토장三身三土章>에서 시정을 하시면서 아미타불의 정토는 보토이지 화토가 아니라고 설명하셨다. 지금 (선도)대사께서도 <현의분>의 「이승의 종성은 태어나지 않음을 회통시키는(會通二乘種不生)」 단락에서 아미타불의 정토는 응화토 또는 범성동거토가 아니라 가장 고묘高妙한 보토, 이른바 ‘보토이지 화토가 아님(是報非化)’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동시에 『대승동성경大乘同性經』·『무량수경』·『관경』 등의 세 가지 경전을 들어 보토이지 화토가 아닌 의미를 증명하셨다.
그렇다면 이처럼 높고 미묘한 보토를 범부들이 어떻게 왕생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뜻을 밝히기 위해 대사께서는 특별히 문답의 방식을 설립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묻기를: 저 부처님 및 국토를 보불과 보토라고 하셨는데, 보법은 높고 미묘하여 소승의 성인
조차 오르기 어렵거늘, 번뇌와 업장이 있는 범부들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問曰:彼佛及土,既言報者,報法高妙,小聖難階;垢障凡夫,云何得入?
답하기를: 만약 중생들의 번뇌와 업장을 논한다면 진실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바로 부처님의
원력에 의탁하여 강력한 증상연을 지어 주시는 까닭에 5승이 다 같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答曰:若論眾生垢障,實難欣趣;正由託佛願以作強緣,致使五乘齊入。
이것이 바로 유명한 ‘범부입보론凡夫入報論’이다: 아미타불의 정토가 비록 고묘한 보토이기는 하나, 일체 선악범부가 모두 왕생할 수 있다. 그들이 왕생할 수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부처님의 원력인 타력에 의지하는 것으로, 범부의 자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불의 보토 역시 수승하고 미묘한 정토이기는 하나, 범부와 이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높은 지위의 보살들조차 들어갈 방법이 없다. 예컨대 『인왕경仁王經』의 「교화품教化品」에서 설하시길, “삼현(三賢:십주·십행·십회향)과 십성(十聖:십지)은 과보에 머물고, 오직 부처님 한 분만이 정토에 계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보토는 ‘시방중생들이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제18원에 보답하여 성취된 정토이기 때문에 고묘한 보토인 동시에 시방중생들이 (위로는 등각보살에 이르고, 아래로는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지은 일천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왕생할 수 있는 견줄 데 없는 보토이고, 제불의 보토를 월등히 뛰어넘는 보토이다. 이 역시 아미타불의 원력이 특별히 수승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 문답 중에서 ‘보법이 고묘함’등은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성취하신 보토는 법성신토法性身土여서 아미타불 자신의 경계이므로, 대승의 성인과 소승의 성인조차 자신의 힘으로는 들어갈 수 없거늘, 번뇌가 치성하고 업장이 두터운 범부들이 어떻게 왕생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해 대사께서 답하기를, 번뇌의 장애가 있는 범부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물론 왕생할 수 없지만(근기를 믿음), 완전히 아미타불의 구제의 힘에 의지(법을 믿음)하는 까닭에 5승(인간·천인·성문·연각·보살)의 근기부류들이 다 같이 보토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이라 하셨다.
여기서 대사께서는 아미타불께서 구제하시는 근기는 매우 낮은 악업범부이고, 왕생하는 국토는 매우 높은 고묘한 보토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수승한 이익은 모두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탁하여 얻게 되는 것으로서, 아미타불의 구제는 5승이 다 같이 들어가고, 모든 근기들이 두루 이익을 얻게 되는 법임을 나타낸다.
‘5승이 다 같이 들어감(五乘齊入)’할 때, ‘제齊’는 ‘동일하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결과一因一果’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만약 5승을 논한다면 범부와 성인의 선악은 제각기 달라서, 원인이 천차만별인 이상, 결과 역시 천차만별(수많은 원인과 수많은 결과多因多果)일 것이지만, 5승이 다 같이 자력을 버리고 다 같이 불력(하나의 원인)에 의탁하여 다 같이 보토에 태어나 다 같이 법신을 증득(하나의 결과)하게 되는 것이다.
시방중생 가운데 위로는 등각보살이 있고 아래로는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지은 사람도 있어서 만약에 자력에 의지한다면 각자 받게 될 과보가 천차만별이겠지만, 만약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한다면 위아래의 차별이 없이 다 같이 고묘한 보토에 왕생하여 다 같이 광명과 수명이 무량한 최고의 과위를 증득하게 된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서방극락세계의 왕생은 자력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불력에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들의 신분과 자격을 논하지 않는다. 즉, 남녀노소를 논하지 않고, 출가와 재가·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논하지 않으며, 죄업의 경중을 논하지 않고, 수행의 유무를 논하지 않으며, 마음의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을 논하지 않고, 염불이 일심이 되던 되지 않던 일절 논하지 않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필히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게 된다. 다시 말해 오로지 아미타불의 불가사의한 불력에 기댄다면 십악과 오역, 정법을 비방한 일천제라도 모두 왕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락왕생은 자력을 논하지 않고 오직 타력만 논할 뿐이다.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먼저 아미타불의 본원을 알아야 하는데, 아미타불께서 이미 미리 우리들을 위해 극락세계를 성취해 주시고, 미리 우리들을 위해 왕생에 필요한 공덕자량을 성취해 주셨으며, 또 미리 우리들을 위해 한량없는 세월 동안 지은 모든 죄업을 소멸할 수 있는 명호의 공덕력을 성취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지 못하고 믿지 않아서 아미타불의 공덕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헛되이 윤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믿고 알았으니, 아미타불의 원력에 올라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왕생할 것이다. 이 믿음은 한 번 믿으면 영원히 믿는 것이고 한평생을 관철하는 것이어서 다시 의심하지 않는다.
만약 아미타불의 원력에 올라타지 않는다면 등각보살조차 왕생할 수 없거늘, 하물며 범부이겠는가? 만약 범부를 논한다면 육도윤회를 벗어날 힘조차 없거늘, 하물며 고묘한 보토의 왕생하겠는가? 5승의 자력은 보토로 들어갈 수 있는 원인이 아니니, 오직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탁하는 것만이 비로소 바른 원인(正因)이 되는 것이다. 이른바:
원력으로 성취한 보토는 자력의 공행功行으로 도달할 수 없으니,
대소승의 성인들은 다 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함이니라.
근기와 선악을 막론하고 보토의 왕생은, 오직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할 뿐, 행자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다.
중생에게는 모두 독이 섞인 마음과 거짓된 행만 있고, 오직 아미타불만이 청정한 마음과 진실한 행이 있으시다. 따라서 중생들의 수행의 힘을 논하지 않고 오직 아미타불의 구제의 힘만 말할 뿐이다.
중생의 자격에 의해 왕생하고 못하고를 논하지 말고, 마땅히 아미타불의 구제로부터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물어야 한다. 믿는 자는 왕생하고 의심하는 자는 왕생할 수 없다.
정토법문은 범부가 주 대상(正機)이고, 본원인 칭명으로 보토에 왕생한다. 다시 말해 가장 어리석은 최하의 사람이 가장 뛰어난 최상의 법에 의지하여 가장 높고 가장 미묘한 보토에 왕생한다는 것이다.
구품은 모두 범부이고, 극락은 보토인데, 범부가 보토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부처님의 원력에 의탁한 까닭이다.
5. 육자명호는 기법이 일체이며 신원행이 갖춰진 정정업이다
대사께서 <현의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지금 이 『관경』 중에 열 번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 곧 열 번의 원과 열 번의 행이 구족되어
있다. 어떻게 구족하는가?
나무란 말은 곧 귀명이요, 또한 발원회향의 뜻이며, 아미타불이란 말은 곧 그 행이다.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왕생한다.
今此《觀經》中,十聲稱佛,即有十願十行具足。
云何具足?
言南無者,即是歸命,
亦是發願迴向之義;
言阿彌陀佛者,即是其行。
以斯義故,必得往生。
이것을 ‘육자석六字釋’라 부른다. 대사께서 이 ‘육자의 세 가지 뜻(六字三義)’으로써 ‘나무아미타불’의 육자명호에 구비된 공덕의 의미를 해석하신 것이다. 이는 『사첩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석의釋義 중의 하나로서, 이 글에서는 고금을 해정(楷定古今)한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열 번의 칭불(稱佛:부처님의 명호를 부름)에 원행願行을 구족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 ‘어떻게 구족하는가’ 등을 말씀하시면서 법체法體의 측면에서 구족의 의미를 들어낸 것이다.
이 ‘육자의 세 가지 뜻’ 속에 내포된 의미에는 「기법문機法門」과 「원행문願行門」이 있다. 육자에는 신원행의 의미가 있어서 신(믿음)과 행이 상대적일 때 기법문의 의미가 되는데, 나무란 곧 믿음의 주체로서의 근기이고, 아미타불은 바로 구제의 법이니, 이를 신행信行 또는 기법機法이라 말한다. 그러나 믿음 가운데도 발원의 의미가 있어서 발원과 행이 상대적일 때 곧 원행문이 되기 때문에 법체육자法體六字 가운데 기법이 일체이고 원행이 구족하는 것이다. 법체육자에는 본래부터 원행을 구족하므로, 중생이 수행하여 회향하기를 기다릴 필요 없이 여실하게 칭명하는 가운데 한 번 한 번의 염불소리마다 모두 원과 행을 구족하기 때문에 반드시 왕생하는 것이다.
이 육자석이 나오게 된 원인은 당시 당나라 시대의 섭론종도攝論宗徒들이 『관경』의 하품하생에서 오역죄를 지은 악인이 임종 시에 선지식이 열 번의 칭명염불을 가르치는 인연을 만나 극락왕생한 사건을 두고 「별시의취別時意趣」의 방편설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즉, 일생 동안 악업만 짓다가 전혀 수행을 한 적이 없이 쭉 임종에 이르러 비록 ‘왕생원往生願’은 있으나 겨우 열 번밖에 칭명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생행往生行’이 될 수 없으니, 이는 ‘오직 발원만 있고 행이 없는 것(唯願無行)’이므로 즉시에 왕생할 수 없으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왕생은 방편설이어서 진정한 왕생은 먼 미래세의 ‘별시別時’에 있는 것이지 금생의 즉시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상 섭론종도들이 『섭대승론』에서 설한 「별시의취」로써 『관경』 하품하생의 왕생을 그릇되게 해석한 내용인데, 그들은 하품하생의 열 번 칭명을 일반적인 「나무대일여래南無大日如來」·「나무다보여래南無多寶如來」의 칭념과 똑같이 생각한 것이었다. 이는 그들이 정토문교리와 성도문교리의 한계를 모르고서 성도문의 자력적인 관점으로 『관경』을 봤기 때문에 이 같은 그릇된 해석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주장은 정토문의 홍통(弘通:불법을 세상에 널리 퍼뜨림)을 가로 막아 많은 사람들이 듣고 나서 정토수행을 그만두게 되었다. 『석정토군의론釋淨土群疑論』에서 말씀하시길, “섭론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이 되었는데, 많은 대덕들이 이 논문을 보시고 서방정업을 닦지 않았다.”고 하셨다.
이 별시의라는 그릇된 견해는 이미 도작선사의 『안락집』 제2대문의 제2장에서 시정을 하셨다. 지금 대사께서도 분연히 『관경』에 대한 주석서를 지어 제1권에서 「별시의취를 회통시키는(會通別時意趣)」 한 단락을 설립하여 섭론종도들의 오직 원만 있고 행이 없다는 논란을 꾸짖었던 것이다.
이 육자석의 글에는 안과 밖의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바깥으로는 성도문 가운데 섭론종도들의 비난에 대해 열 번의 칭명에 원행이 구족함을 밝히고, 안으로는 아미타불의 홍원의 구제를 구명究明하고, 아울러 염불왕생의 깊은 뜻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나무라는 말은 곧 귀명이요」 등의 26자(한문기준)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육자 가운데 원행을 구족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그 중에 「나무」 두 글자는 기(중생)의 입장에서 설명한 것이고, 「아미타불」 네 글자는 법(아미타불)의 입장에서 설명한 것이다.
「나무란 곧 귀명이다(南無者即是歸命)」: 나무는 귀명한다는 의미인데, 귀명은 아미타불의 구제에 귀순하는 것이고, 또한 「이하백도의 비유(二河喻)」에서 말씀하신 ‘두 부처님의 뜻을 믿고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귀명이 바로 ‘신심信心’인 것이다.
「또한 발원회향의 뜻이다(亦是發願迴向之義)」: 왕생하겠다는 서원을 일으키는 것을 ‘발원’이라 말하고, 자력을 되돌려 타력의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아미타불의 구제)을 ‘회향’이라 말하며, ‘뜻’이란 덕의德義의 의미이다. 귀명하는 마음에는 왕생을 염원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즉, 귀명을 하는 이유가 왕생발원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귀명을 ‘즉시卽是’라 말하고, 발원회향을 ‘역시亦是’라 말하였다. 그 이유는 ‘나무’ 자체가 ‘귀명’이기 때문에 ‘즉시’라고 말한 것인데, ‘즉’은 ‘그 자체가 전부 그것이다’·‘당장에 즉각적이다’라는 의미이니, 곧 ‘…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원회향’은 나무에 갖춰진 덕의 德義로서 또 다른 일종의 함의(다른 의미)이기 때문에 ‘역시’라고 말하며, 즉시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아미타불이란 곧 그 행이다(阿彌陀佛者即是其行)」: ‘즉’은 무엇과 같다, 그 자체가 전부 그것이다는 의미로서, 귀명하는 법체 자체가 ‘행’이기 때문에 ‘즉시’라고 말한 것이다. ‘그 행이다’의 ‘그其’자는 앞의 나무귀명을 가리키는 것이고, 아미타불의 명호는 중생이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원만한 만덕의 홍명(萬德洪名)이므로, 이 홍명으로써 중생들이 왕생할 수 있는 행업으로 삼으신 것이다. 중생이 일단 귀명하며 염불을 할 때, 즉각 이 행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에 신행불이信行不二·기법일체機法一體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왕생한다(以斯義故,必得往生)」: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육자홍명 속에 발원과 수행이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금생에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인데, 담란대사께서는 이를 일러 ‘업사성판業事成辦’이라 하셨다.
‘원행이 구족함(願行具足)’에는 삼중의 뜻이 있다.
1. 법체명호에 원행을 구족함: 원은 중생을 구제하는 대원으로서, 아미타불께서 인위因位에 계실 때 5겁 동안의 사유를 통해 일으킨 대원을 말하고, 행은 이 원을 성취한 행업으로서, 아미타불께서 조재영겁 동안 고행을 통해 완성한 대행을 말한다. 원행이 원만하여 나무아미타불이 되시고, 인위의 대원과 대행의 공덕이 모두 명호 속에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이 육자명호 속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이 원과 행을 구족하는 것이다. 여기서 구족의 주체는 명호이고, 구족의 대상은 인위에서 5겁과 영겁 동안의 원행이다.
2. 귀명하는 신심에 원행을 구족함: 중생이 그 명호의 위덕威德을 들었을 때 명호가 중생의 신심이 되는 것이니, 이를 일러 타력신심이라 하고, 이 신심에 자연히 명호에 갖춰진 원행을 구족하기 때문에 신심에 원행을 구족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구족의 주체는 신심이고 구족의 대상은 명호 속에 있는 원행이다.
3. 칭명염불에 원행을 구족함: 중생들이 신심을 구족한 이상, 끊임없이 칭명을 할 수 있는데, 그 칭명은 신심이 전부 나타난 칭명이다. 다시 말해 신심을 바탕으로 한 명호 자체가 구업(입)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한 번 한 번의 칭명에 모두 원행을 구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구족의 주체는 칭명이고, 구족의 대상은 신심 가운데의 원행, 즉 명호 가운데 본래 구족하고 있는 원행인 것이다.
법체명호에 원행을 구족함에는 이와 같은 순서가 있는 까닭에 대사께서 명호 가운데 원행을 구족하고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법체인 명호에 이미 원행을 구족하고 있는 이상, 이와 같이 믿고 받아들이며 칭명을 한다면 한 번 한번의 (염불)소리마다 모두 원행을 구족하고 있는 것이니, 중생의 자력으로 공을 쌓은 후에 구족하는 게 아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명호 육자의 전체에 원행을 구족한 까닭에, 원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육자 전체가 원이고, 행의 각도에서 말한다면 육자 전체가 행인 것이다. 다만, 대사께서 이를 분리하여 해석하시면서 나무를 원으로 보고 아미타불의 행으로 보신 것인데, 이는 그 의미가 가까운 곳에 따라 설하신 것이다.
또한, 이른바 ‘열 번을 칭명염불하면, 곧 열 번의 원과 열 번의 행이 구족함(十聲稱佛即有十願十行具足)’이란, 한 번 칭명하면 한 번의 원과 한 번의 행이 구족하고, 두 번을 칭명하면 두 번의 원과 두 번의 행이 구족하며, 열 번을 칭명하면 열 번의 원과 열 번의 행이 구족하다는 말이 아니라 법체인 명호자체에 원행이 구족하기 때문에, 소리 내어 칭명할 때 소리 소리마다 원행을 구족하여 한 번 한 번의 소리마다 원행을 구족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염불소리 하나의 원행과 많은 염불소리의 원행은 모두 아미타불께서 베풀어주시는 원행을 여의지 않으며, 아미타불께서 베풀어주신 원행이 바로 왕생의 업인業因이니, 업인이 이미 원만한 이상, 한 번 한 번의 염불소리마다 모두 아미타불의 법체명호의 현현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른바 열 번의 칭명에 원행을 구족한다는 것은, 칭념을 할 때에 비로소 구족한다는 게 아니라 칭념하고 있는 명호자체에 바로 원행을 구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믿고서 칭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열 번의 칭명에 당연히 역시 원행을 구족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파도가 만물을 적시는 데는, 파도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만물을 적실 수 있는 게 아니라 본래부터 물에는 만물을 적시는 작용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작용은 파도 역시 갖추고 있는 것이기에 파도가 만물을 적실 수 있는 것이다.
6. 요홍이문과 염관양종의 은현·폐립으로, 방편으로부터 진실로 들어가다
선도대사께서 『관경소』 첫 시작부터 <현의분>「칠문요간七門料簡」의 제1「서제문序題門」에서 『관경』의 내용을 귀납하면서 유명한 「요홍이문판要弘二門判」을 지었으니, 이를테면;
사바화주(娑婆化主:석가모니불)께서 (위제희부인의) 청으로 인해 널리 정토의 요문要門을 열어 주셨고, 안락능인(安樂能人:아미타불)께서는 특별한 뜻이 있는 홍원弘願을 드러내셨다.
그「요문」이란 곧 이『관경』에서 설한 정산定散 두 문이니, 정定이란 생각을 쉬고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고, 산散이란 악을 버리고 선을 닦는 것으로서, 이 두 행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는 것이다.
「홍원」이란 말은『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듯이 ‘모든 선악범부가 왕생을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아미타불의 대원업력大願業力에 오르는 것을 증상연으로 삼지 않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관경』 한 부에서 설하신 내용은 이 두 문에 있다.
「요문」이란 곧 13관의 「정선定善」 및 삼복구품의 「산선散善」을 말하고,
「홍원」이란 곧 『대경』의 제18원, 즉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말한다.
「요문」은 스스로 정선 또는 산선을 수행하여 그 공덕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는 것으로, 이것을 용수보살께서는 「난행도」라 말씀하시고, 담란대사께서는 「자력」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홍원」은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하는 것으로, 아미타불의 본원에 이미 미리 시방중생들을 위해 불가사의한 구제력救度力, 즉 대원업력을 완성하시어 시방중생 가운데 어떠한 근기도 빠뜨리지 않고 선인과 악인을 모조리 거두어들이는 크고도 넓은 대원이기 때문에 홍원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를 두고 용수보살께서는 「이행도」라 말씀하시고, 담란대사께서는 「타력」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이어서 제3「종지문宗旨門」에서 『관경』의 종지를 판정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지금 이 『관경』에서는 곧 「관불삼매觀佛三昧」를 종지로 삼고,
또한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종지로 삼는다.
그 이유는 『관경』 한 부의 내용이 「요홍이문」을 설하고 있는 이상, 요문의 관불과 홍원의 염불인 「염관양종(念觀兩宗)」, 이른바 「일경양종(一經兩宗)」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불」은 자력난행의 길이어서 아미타불의 본원이 아니거나와 석존의 본회도 아니며, 시방중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더욱이 아니지만, 「염불」은 타력이행의 길이므로 아미타불의 본원이자 석존의 본회이며, 시방중생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관경』의 <유통분>에서 석존께서는 요문의 법을 부촉하지 않으시고 염불의 법을 부촉하신 것이다. 석존께서는 ‘관불을 폐지하고 염불을 세우시면서(廢觀立念)’(요문을 폐지하고 홍원을 세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말을 잘 간직해야 하느니라.
이 말을 간직한다는 것은 곧 무량수불의 명호를 지니는 것이니라."
선도대사께서는 미타·석가 두 부처님의 일치된 뜻을 깨닫고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셨다.
지금까지 비록 정산이문의 이익을 설하셨으나,
부처님의 본원을 바라보면 그 뜻은 중생들이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데
있다.
『관경』의 <정종분>에서 광범위하고 자세하게 정선인 13관과 산선인 삼복구품에 대해 설하셨는데,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비록 이익이 있어서 회향만 하면 모두 왕생할 수 있다지만, 아직 더욱 큰 이익은 이 정산이문에 있는 게 아니라 홍원일문弘願一門, 즉 『대경』의 제18원인 염불왕생원(대경의 유통분에서는 ‘큰 이익과 위없는 공덕’이라 말씀하셨다)에 있다는 것이다.
제18원은 아미타불께서 염불중생들이 반드시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에 대한 서약과 보증으로, 시방중생이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며),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며(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내지 열 번만이라도), 반드시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게 된다(만약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석존께서 이 『관경』의 <유통분>에서 찬탄하시면서 아난에게 부촉하시기를, “무량수불의 명호를 잘 지녀야 하느니라”, 다시 말해 선도대사께서 해석하신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구제에 맡겨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육자홍명에 전부의 공덕을 구족하고 있어서 시방의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떠한 중생이라도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구제에 맡기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이미 아미타불의 전부 공덕을 받아들인 것이므로, 요문에서 자신이 닦은 공덕을 회향하여 구원을 바라는 자력관불 또는 자력칭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홍이문」의 「염관양종」으로부터 「요홍폐립」(요문을 폐지하고 홍원을 세움)·「염관폐립」(관불을 폐지하고 염불을 세움)의 「염불일종(念佛一宗)」에 이르기까지 「거짓으로부터 진실로 들어감(從假入真)」(방편으로부터 진실로 들어감)의 은밀함과 드러남의 의미가 담겨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석존께서 성도문의 모든 근기부류들을 인도하여 정토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다시 정토문 중의 요문으로부터 아미타불의 본원인 홍원염불로 이끌어 들이기 위한 시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관경』의 목적은 13정관 또는 삼복구품에 있는 게 아니라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데 있는 것이다. 아래의 도표와 같다.
7. 부처님께서 허공중에 서서 홍원을 드러내시니, 위제희가 뵙자마자 무생법인을 얻다
앞서 선도대사께서 <현의분>에서 '안락능인(아미타불)께서 특별한 뜻이 있는 홍원을 드러내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아미타불께서는 대체 『관경』의 어느 곳에서 ‘홍원을 드러내신 것’일까? 바로 <정종분> 13관의 제7「화좌관(華座觀)」 첫 부분에서 드러내셨는데, 여기가 바로 ‘(아미타불께서) 홍원을 드러내시고, 위제희가 믿음을 얻은’ 곳이다. 즉, 화좌관의 첫 시작부분에 석가세존께서 ‘괴로움을 없애는 법’을 설하시겠다고 표명하셨을 때, 아미타불께서 석가세존의 소리에 응하여 즉각 허공중에 나타나 위제희부인이 뵐 수 있도록 하셨는데, 선도대사께서 이 부분을 해석하시길, ‘소리에 응하여 바로 나투시자 왕생을 증득하였다’고 하셨다.
그 의미는 ‘괴로움을 없애는 법’이 바로 아미타불 본신에 있다는 것인데,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지하는 모든 업장이 두텁고 괴로운 중생들은, 그 괴로움이 즉각 사라지고 왕생이 결정되며, 번뇌를 끊지 않고도 열반을 얻게 되며, 그 뒤로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면 된다는 것이다. 즉, 위제희부인의 견불見佛은 단지 눈으로 부처님의 신체만 접촉한 게 아니라 이 분이야말로 자신을 구제해 주시는 부처님임을 깨닫고 깊이 믿게 되었다는 것이니, 곧 아미타불의 원력을 꿰뚫어 보았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제9「진신관真身觀」에서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몸을 관찰한 까닭에 역시 부처님의 마음도 보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마음이란 대자비가 그것이니, 조건 없는 자비로써 모든 중생을 섭취하느니라.
부처님의 몸을 보았다는 것은 곧 부처님의 마음을 보았다는 것이고, 부처님의 마음을 보았다는 것은 곧 부처님의 무연대자·동체대비가 바로 눈앞에 있는 못나고 비천하며, 겁이 많고 나약하며 무기력한 자신을 구제하는데 있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믿음과 기쁨의 깨달음(信喜悟)」인 무생법인(신심불퇴)을 얻은 것으로, 이는 『대경』 18원의 성취문에서 말하는 “그 명호를 듣고 신심 내어 기뻐하며 내지 한 번만이라도 염念하여,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하여 저 나라에 태어나기를 발원한다면 바로 왕생하여 불퇴전에 머물게 되느니라”와 동일한 의미이다.
담란대사께서 말씀하시길, ‘명호가 곧 법이다(名即法)’·‘명호와 본체가 둘이 아니다(名體不二)’·‘명호와 본체가 똑같다(名體一如)’고 하셨는데, 부처님의 몸을 뵙고서 믿음을 일으킴(부처님을 뵙고 무생법인을 얻음)과 그 명호를 듣고서 믿음을 일으킴(명호를 듣고 퇴전하지 않음)은 들어가는 문은 달라도 결과는 일치하기 때문에 들음과 봄은 필경 똑같이 모두 아미타불의 대원업력의 자비하신 구제를 깨닫는 것이어서, 이를 일러 ‘문견일치聞見一致’라고 한다.
이러한 뜻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대사께서는 삼심석三心釋 가운데 「이하백도의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백도를 걷는 수행자가 스스로 탐욕과 성내는 마음이 강성하여 그칠 줄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가든 뒤로 물러나든 모두 죽을 수밖에 없으며,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게 됨을 느낀 그 순간에, 문득 아미타불께서 구제해주시는 부름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대는 일심으로 정념을 갖고 곧장 오너라. 내가 너를 보호해 줄 수 있으니,
물과 불의 재난에 떨어질 것을 전부 두려워하지 말라.
문득 이 말을 듣자 마치 우렛소리가 마음을 꿰뚫은 것처럼 활연히 깨닫고 믿음의 눈이 확 뜨였으며, 일찍이 없었던 불가사의함을 찬탄하는 즉시 대안심과 대만족의 경지(불퇴전)에 머물게 되었으니, 정토법문에서 말하는 견불見佛 혹은 문명聞名이 바로 이런 심경의 체득이었던 것이다. 「이해백도의 비유」는 수행자의 심적 변화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는데, 아미타불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바로 제18원의 구체적인 내용이라 말할 수 있다. 아래의 도표와 같다.
아미타불의 부름소리: 그대는 일심으로 정념을 갖고 곧장 오너라. 내가 너를 보호해 줄 수 있으니, 물과 불의 재난에 떨어질 것을 전부 두려워하지 말라.
제18원: 만약 내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며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나의 명호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 다만 오역죄와 정법을 비방한 이는 제외한다.
아미타불의 광명(지혜)에 비친 수행자는 자신이 탐욕과 성냄·오역과 정법비방·세 가지 반드시 죽음·구제될 길이 없는 근기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아미타불께서 ‘내가 너를 구제할 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자비로운 구제의 소리가 몸과 마음을 뚫고 들어와 물과 불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안심하고 백도를 걷는 기법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을 갖춘 염불인이 된 것이다. 이 역시 「진신관」에서 말하는,
"광명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면서 염불중생을 섭취하여 버리지 않으신다."
는 의미이다.
이른바 ‘곧장 오라’란 바로 먼 길로 빙빙 돌아서 가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만약 본래의 모습을 바꿀 수 없다면 현재의 모습으로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탐욕과 성냄의 번뇌를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곧장 아미타불의 원력의 백도를 의지하며 오직 아미타불의 자비하신 구제에 맡긴다는 것으로, 이른바 ‘두 부처님의 뜻을 믿고 따르며 물과 불의 두 강을 아랑곳하지 않고 염념마다 남김없이 저 원력의 길을 오른다’는 뜻이다.
남자든 여자든 출가자든 재가자든, 지혜롭든 어리석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막론하고 각자 근기에 따라서 염불만 하면 전혀 제한이 없으며, 만약 제한이 있다면 시방중생은 절대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곧장 오라’는 부름은 아미타불의 자비심의 극치이자 원력의 절정이며, 이 역시 아미타불의 ‘시방중생들이 내지 십념만이라도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본원이 ‘세간을 초월하는 원력’임을 나타낸다.
이른바 ‘세간을 초월하는 원력’이란 곧 시방삼세제불을 초월하는 대비원력을 말하는 것으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의 불가사의함은 구제될 수 없는 사람을 구제하고 왕생할 수 없는 사람을 왕생케 하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본원을 ‘세간을 초월하는 대비원력(超世悲願)’이라 부르고, 이 길 역시 ‘세간을 초월하는 바른 길(超世直道)’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미타불께서 인지因地에서 ‘시방중생들이 내지 십념으로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세간을 초월하는 발원’을 하시고, 또 이처럼 전무후무한 세간을 초월하는 원력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이 부처님을 ‘나무아미타불’이라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아미타불과 기타 제불은 크게 달라서 오탁악세의 탐진치를 구족한 범부와 극중한 악인에 대해 시방제불은 구제할 수 있는 원력이 없으시고, 수용할 수 있는 정토가 없으시지만, 시방제불 가운데 오직 아미타 한 부처님만이 이 원력이 있어서 구제할 수 있고, 또 이 보토가 있어서 수용할 수 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세간을 초월하는 원력은 시방삼세제불을 초월하는 ‘크신 원력(홍원)’이기 때문에 석가세존께서 『대아미타경』 중에서 당신의 입으로 직접 나무아미타불을;
“부처님 중의 왕이요, 광명 가운데 최고이니라”
고 극찬하신 것이다.
만약 시방중생인 우리로 하여금 지옥에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신다면, 아미타불의 입장은 성립할 수 없으며,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불이 되신 신분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마침 바다에 빠져 물위로 솟아오를 힘이 없어 곧 물이 머리까지 잠기게 되었을 때, 아미타불께서 직접 바다에 뛰어들어 나를 안고 언덕으로 나왔으니, 비단 나로 하여금 다시 태어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퇴전을 얻게 하였으며, 내가 막 지옥에 떨어지려 할 때서야 비로소 아미타불께서 이미 여기서 십겁 동안이나 서서 기다리고 계셨음을 발견하였다.
이처럼 삼학을 성취할 수 없고 삼독을 끊기 어려웠던 바로 그때, 곧장 오라는 자비하신 부름을 듣고서 대안심과 대만족을 하며 백도를 걸으면서 생활이 곧 신심이고 신심이 곧 염불인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또한, 백도를 걷던 수행자가 마침내 아미타불의 부름의 소리를 듣고 구원을 얻게 되었으나, 그 원인을 따져보면 역시 석가세존의 ‘보냄發遣’에 그 공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하백도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다.
동쪽 언덕으로부터 문득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인자시여! 결정코 이 길만 따라간다면 절대 죽지 않는다. 만약 멈춘다면 바로 죽을 것이다”
그러나 <현의분> 제1「서제문」의 후반부에서도 미리 석가세존의 보냄과 아미타불의 내영인 ‘두 부처님의 보냄과 부름(二尊遣喚)’‘두 부처님의 일치(二尊一致)’한 대비심을 나타내며 말씀하셨다.
우러러 생각건대 석가모니불께서 이 곳에서 보내시고 아미타불께서 저 나라에서 내영을
하시니, 저쪽에서 부르시고 이쪽에서 보내시는데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 부처님의 보냄과 부름’ 중에, 아미타불께서 부르시는 경전의 증거는 이미 화좌관의 첫 부분인 ‘허공중에 서 계시는 부처님’으로부터 알아차릴 수 있는데, 이 역시 아미타불 자신이 홍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석존께서 보내시는 경전의 증거는 또 『관경』의 어느 곳에 나오는가? 맨 마지막 <유통분>의 ‘아난에게 부촉하는’ 경문에 나온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말을 잘 간직해야 하느니라.
이 말을 잘 간직한다는 것은 곧 무량수불의 명호를 지니는 것이니라”
두 부처님의 의도가 다르지 않고 두 부처님의 뜻이 일치하여 이쪽에서 보내고 저쪽에서 부르는 것은 모두 아미타불 홍원의 자연적인 작용으로서, 그 목적은 자발적이고 평등하고 조건 없이 모진 고난에 처한 뭇 중생들을 구제하는데 있다.
두 부처님의 은혜는 분골쇄신하여도 보답할 길이 없다. 이 뜻을 『반주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미타불의 크신 서원의 힘을 입지 않고서 어느 세월에 사바를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사바세계 장겁長劫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오늘 석가불의 은혜를 보게 되었네.
만약 본사선지식의 권유가 아니었다면 아미타불의 정토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또한 앞서 말한 ‘부처님을 뵙고 믿음을 냄’ 혹은 ‘부처님을 뵙고 무생법인을 얻음’은 오직 염불의 근기가 아미타불의 대비심을 꿰뚫어 보시고 칭명하면 필히 왕생한다는 아미타불의 대비원력에 대해 결정코 깊이 믿는 것을 가리켜 하는 말들이다. 따라서 불자들이 꿈속에서 부처님을 뵙는다거나 정좌 중에 부처님을 뵙는다거나 염불하는 도중에 부처님을 뵙는다거나 심지어 위급한 상황에서 불보살님들이 몸을 나투시어 구제를 해주시는 경우들은 모두 평범한 감응들이어서, 기법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과 똑같이 여기면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8. 왕생의 정인은 깊은 믿음에 있으며, 행으로부터 믿음을 일으키니 믿음과 행이 일체이다
『관경』의 「구품왕생의 단락(九品段)」 첫머리에서 말씀하셨다.
저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는 이가 세 가지 마음을 내면 바로 왕생할 수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지성심至誠心이요, 둘째는 심심深心이요, 셋째는 회향발원심迴向發願心이다.
이 세 가지 마음을 갖춘 이는 반드시 저 나라에 왕생한다.
이 세 가지 마음은 정토의 진수真髓이자 행자의 심간心肝이며, 『관경』의 안목이자 출리의 요도要道이다. 그런 까닭에 선도대사께서 이 문구의 앞에 특별히 ‘경에서 말씀하시길(經云)’ 두 글자를 놓아 부처님 말씀을 들어 그 중요함을 나타냄으로써 사람들에게 믿고 따라야 한다고 권장하신 것이다.
대사께서 이 삼심에 대한 해석(三心釋)의 첫 머리에 ‘삼심을 판정하여 정인으로 삼는다(辨定三心以為正因)’고 표시하며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삼심이 왕생의 정인(正因: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심석의 끝 부분에 “그리고 이 삼심은 역시 정선의 뜻도 전부 거두어들인다”고 말씀하셨다. 그 의미는 13정관도 반드시 이 삼심이 있어야 하는데, 만약 삼심을 갖추지 못한다면 왕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정선이든 산선이든 막론하고 왕생은 이 삼심에 있는 것으로서, 이 삼심이 있으면 바로 왕생하고 이 삼심이 없으면 왕생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삼심이야말로 『관경』뿐만 아니라 정토문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으니, 그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법연상인께서 당신의 『선택집』<삼심장>에서 “삼심은 행자의 지요(至要:가장 중요함)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경문의 의미에 의거하면, 삼심에는 ‘요문삼심要門三心’과 ‘홍원삼심弘願三心’의 뜻이 있다.
요문의 정선삼심 및 산선삼심은 ‘이 두 가지 행을 회향하여 왕생을 기원하는’‘자력의 삼심’이고, 홍원의 삼심은 ‘아미타불의 대원업력에 올라타는’‘타력의 삼심’이다.
삼심에는 이처럼 ‘요문의 자력삼심’과 ‘홍원의 타력삼심’의 차별이 있다.
‘자력의 삼심’은 행자 스스로 일으킨 삼심인 까닭에, 근기에 천차만별이 있는 이상 각자 일으킨 삼심의 정도 역시 천차만별이 있으며, 게다가 자력의 삼심은 허위적이고 아첨하고 거짓되어 진실한 마음이 없으며, 더러움에 물들어 청정한 마음이 없는 죄악생사범부들이 일으킬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난행도’인 것이다.
‘타력의 삼심’은 정선과 산선을 논하지 않고, 지혜롭고 어리석고 선하고 악함을 논하지 않으며, 유루와 무루를 논하지 않고 모두 다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 때문에 삼심은 모두 ‘심심深心’에 통섭統攝되어 있다.
대사께서 ‘심심이란 곧 깊이 믿는 믿음이다’고 말씀하시면서 전개하신 ‘일곱 가지 깊은 믿음과 여섯 가지 결정됨(七深信六決定)’의 해석을 귀납하면 곧 ‘두 가지 깊은 믿음(二種深信)·사람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就人立信)·행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就行立信)’ 등의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두 가지 깊은 믿음’이란, 곧 ‘기법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이다. ‘기機’는 자신을 가리키고, ‘법’은 아미타불을 가리킨다. 기에게 힘이 없기 때문에 죄악을 짓고 생사윤회를 하며 벗어날 기연이 없다는 것을 믿고, 법法에 힘이 있어서 아미타불의 진실한 원력에 올라타기만 하면(내지 십념의 칭명염불) 반드시 왕생하게 됨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범부와 성인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에게 한 맛이며, 구제는 모두 아미타불의 힘에 의한 것이고 모두 한 맛인 믿음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이행도’인 것이다.
이 기법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은 바로 제18원의 내용이자 또한 이하백도 비유의 주지主旨이다. 기법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첫째, 자신은 현재 죄악생사범부로서 광겁 이래 항상 침몰하고 항상 유전하여 (생사로부터)
벗어날 기연이 없음을 결정코 깊이 믿는다.
둘째, 저 아미타불께서 48원으로 중생을 섭수하시니, 의심과 걱정 없이 저 원력을 타고 반드시
왕생함을 결정코 깊이 믿는다.
『왕생예찬』에서 ‘심심深心’에 대해 해석한 글은 다음과 같다.
‘심심深心’은 곧 ‘진실한 믿음真實信心’이다 :
자신은 번뇌를 구족한 범부이고, 선근이 엷고 적어서 삼계를 유전하며 화택火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믿고 알고 있지만, 지금은 아미타불의 본래 크신 서원 및 적게는 열 번 한 번에 이르기
까지 명호를 칭념하면 반드시 왕생하게 됨을 믿고 알아서, 내지 한 생각조차도 의심이 없기
때문에 심심深心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해석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정토법문의 믿음은 ‘위로는 일평생을 다하고 아래로는 열 번 한 번 일념에 이르기까지도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믿고 난 다음은 당연히 반드시 일생동안 한결같이 오로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18원에서 말하는 ‘내지 십념’의 뜻이며, 용수보살께서 ‘믿음을 방편으로써 쉬운 행으로 빠르게 이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믿기는 하나 행이 없다면 진실한 믿음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오롯하게 행할 수 있다면 믿음은 자연히 그 속에 있게 되는데, 본원의 이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법연상인께서 당신의 『선택집』<삼심장三心章>의 ‘믿음과 의심을 결정하여 판별하는 글(信疑決判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심심’이란 ‘깊이 믿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니 마땅히 알라;
생사의 집은 의심으로써 머무는 대상으로 삼고,
열반의 성은 믿음으로써 들어갈 수 있는 주체로 삼는다.
생사와 열반의 원인은, 성도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번뇌를 끊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미혹과 깨달음에 있다는 것으로서, 미혹하면 생사윤회를 하고 깨달으면 열반을 얻게 된다. 따라서 믿음과 의심에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문은 완전히 자력에 의지해야 하므로, 자신의 힘으로 무명을 타파하고 실상을 깨닫고 번뇌를 끊어야 하며, 자신의 힘으로 삼계의 육도윤회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번뇌를 끊지 않고는 열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성도문은 자력의 가르침인 것이다.
정토법문은 타력의 가르침이다. 즉 아미타불의 불가사의한 본원력에 승탁乘託하여 극락왕생을 하는 것이다. 이미 극락왕생을 한 이상 삼계육도의 생사윤회를 자연히 멀리할 수 있다. 담란대사께서 말씀하시길, “태란습생은 이를 증상연으로 길이 하직하고, 업에 매인 긴 밧줄은 이로부터 영원히 끊어진다(胎卵濕生,緣之高揖;業繫長維,從此永斷)”고 하셨다. 게다가 극락은 무위열반의 경계여서 왕생하면 바로 무생(생이 곧 무생임生即無生)을 깨달아 아미타불과 같은 광명과 수명이 무량한 몸과 마음을 증득하게 된다. 따라서 만약에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자는, 담란대사께서 이를 일러 ‘업사성판業事成辦’(왕생의 업이 이미 완성됨)·‘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의 몫을 얻음’이라 하셨다.
따라서 정토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생사와 열반의 원인은 믿음과 의심에 있을 뿐 미혹과 깨달음에 있는 게 아니므로, 믿는 자는 왕생하고 의심하는 자는 왕생할 수 없다. 마치 환자가 의사의 말을 믿고(믿음) 그 분이 주시는 약을 복용(염불)한다면 자연히 병이 치유될 것이지만, 의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그 약을 복용하지 않는다면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 비록 죽음의 원인은 위중한 병에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약을 복용하지 않아서 결국 사망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번뇌의 병이 위중하여 스스로 나을 수 없기에 오직 아미타불께서 본원으로 성취하신 아가타약(만병통치)인 육자홍명을 복용한다면 비단 모든 병이 나을 수 있을뿐더러 무량한 수명을 얻고 심신이 편안하며 여섯 가지 신통으로 자재할 수 있다.
안락국에 왕생하는 것은 다만 염불을 믿는 데 있고,
만약 이러한 깊은 믿음을 갖춘다면 삼심은 저절로 구족한다.
9. 다섯 가지 정행 중에 정정업인 칭명은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하므로 결정코 왕생한다
대사께서 ‘심심석深心釋’ 중에서 두 가지 깊은 믿음·사람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행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 등의 세 가지 중요한 뜻을 말씀하셨다.
‘두 가지 깊은 믿음’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사람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은 바로 석가와 제불 등의 대비심을 만족하신 사람들의 말씀으로부터 아미타불의 본원구제에 대한 신심을 안립安立하는 것이다. 아미타불 본원의 구제법문은 석가세존께서 설하신 것이고, 시방제불이 이구동성으로 그 진실함을 증명하신 것이니, 이러한 제불들은 모두 자비와 지혜가 원만하신 분들이기 때문에 그 분들의 말씀은 추호도 틀림없고 의심할 여지없이 모두 믿고 받아들일 만하겠지만, 만약 보살 등의 아직 수행단계에 계신 인위의 사람(因人)이라면, 지혜와 행이 아직 원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분들의 말씀은 신용할 것이 못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의 뜻이다. 그런 까닭에 대사께서 결론을 내리면서 말씀하셨다. “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을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그 일의 진실함을 증명하셨으니, 이것을 사람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이라 말한다.”
석가와 제불께서 설하신 이 염불법문은 부처님의 원력에 올라타는 법이자 명호의 공덕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행이다. 이 행업으로써 아미타불의 본원구제에 대한 믿음을 세우는 것이 바로 ‘행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하는 것’이다.
대사께서는 여기서 ‘행’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하셨는데, 하나는 ‘정행’이고, 또 하나는 ‘잡행’이다. 이는 정토왕생에 대한 행의 측면에서 말씀하신 것으로서, 서방정토로 향하는 아미타불의 행업을 일러 ‘정행’이라 하셨고, 이와 상대적인 이 땅에서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는 성도문의 만행을 회전하여 정토왕생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일러 ‘잡행’이라 하셨다.
‘정행’에는 다섯 가지 이른바 ‘5정행’이 있으니, 곧 ‘독송·관찰·예배·칭명·찬탄공양’이다.
다음 도표와 같다.
이 5정행은 다시 ‘정정업正定業’과 ‘조업助業’ 두 종류로 나뉘는데, 앞의 셋과 뒤의 하나는 조업이고, 네 번째 칭명은 정정업이다. 대사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행주좌와에 시간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염념마다 버리지 않는 것을 정정의 업이라 부르나니, 저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한 까닭이다.
一心專念,彌陀名號,行住坐臥,不問時節久近;念念不捨者,是名正定之業,順彼佛願故。
대사께서 또 말씀하셨다.
그 나머지 모든 선들은 전부 잡행이라 부른다.
즉, 오정행 이외의 모든 수행을 전부 ‘잡행’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잡행은 정행과 상대적인 말이기 때문에, 이를 축약하면 ‘다섯 가지 잡행’이 있고, 이를 확대하면 무량한 잡행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량한 잡행을 ‘제선만행諸善萬行’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섯 가지 잡행은 아래와 같다.
독송잡행: 극락왕생을 위해 정토삼경 이외의 경전을 독송하는 것.
관상잡행: 극락왕생을 위해 극락정토 이외의 의정장엄을 상상하는 것.
예배잡행: 극락왕생을 위해 아미타불 이외의 제불보살들께 예배하는 것.
칭명잡행: 극락왕생을 위해 아미타불 이외의 제불보살들의 명호 및 진언을 칭념하는 것.
찬공잡행: 극락왕생을 위해 아미타불 이외의 제불보살들을 찬탄하고 공양 올리는 것.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앞의 정, 조 두 행을 닦아서 마음을 항상 가까이 하고 끊임없이 생각한다면 틈새가 없음
(無間)이라 부른다.
만약 뒤의 잡행을 닦는다면 곧 마음에 자주 틈새가 생기므로, 비록 회향하여 왕생을 할 수는
있지만 모두 소원하고 잡다한(疏雜) 행이라고 부른다.
이 ‘왕생행상往生行相’에 ‘정잡이행正雜二行」’이 있다면, ‘이행의 득실’도 있을 것이다. 그 득실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아래와 같다.
「정행의 다섯 가지 득」: 아미타불과 친하고 가깝고 틈새가 없고 회향할 필요가 없으며
순수하다.
「잡행의 다섯 가지 실」: 아미타불과 소원하고 멀고 틈새가 있고 반드시 회향해야 하며
잡다하다.
다음의 도표와 같다.
본래 다섯 가지 잡행이든 제선만행이든 모두 불교내의 수행이다. 다만 행업의 성격으로부터 말한다면 잡행은 성도문·난행도·자력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 땅에서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는 행업이다. 그러나 정행은 정토문·이행도·타력의 범부에 속하는 것으로서, 저 나라(극락세계)에서 증득하는 행업이다. 양자의 성격과 이익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대사께서 이를 자세히 구분하기 위해 이 같은 두 행의 판별을 하시고, 아울러 ‘이행의 득실’을 든 것인데, 여기에는 포폄褒貶과 폐립廢立의 뜻이 있다. 즉 정행을 칭찬하고 잡행을 폄하함으로써 정행을 닦고 잡행을 버릴 것을 권장하신 것이다.
이 ‘정잡이행’의 판별은 정토문의 판석이다. 잡행을 성도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잡’이라 부를 수 없지만, 정토문에 들어와서는 순수한 아미타불 극락세계의 행업이 아니어서 반드시 회향을 해야만 비로소 왕생할 수 있고, 만약 회향하지 않는다면 왕생할 수 없기 때문에 ‘잡’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직행차를 타고 역에 도착하면 바로 목적지가 되겠으나, 만약 직행차가 아니면 여러 곳에서 차를 갈아타고 방향을 회전하여 목적지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선 영원히 도착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아미타불과 무관한 모든 행업은, 설사 오로지 한 가지 행만 닦더라도 역시 잡이라 부르게 되므로, 여전히 회향해야만 비로소 왕생할 수 있다.
본래 성도문의 수행을 하던 사람들은 이 땅에서 성인의 과위를 증득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육도만행을 그 인행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필경 번뇌가 강하고 업장이 두터워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육도만행의 여러 바라밀을 원만히 닦을 수 없고 이 땅에서 과위를 증득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자신이 닦은 공덕을 회향하는 것이다. 만약 그 분들이 성도문의 행업을 바꿔서 잡행을 버리고 정행으로 돌아오고, 잡수를 버리고 전수로 들어간다면 따로 회향을 할 필요가 없으니, 순수한 극락의 행체行體인 까닭이다.
그러나 잡행은 순수한 극락의 행이 아닌 인·천·삼승 및 시방정토에 널리 통하는 행이므로, 자체의 업인業因에 따라 과보를 감득하게 된다. 따라서 원인에 천차만별이 있는 이상, 결과 역시 천차만별이 있기에 만약 회향을 하지 않는다면 극락의 과보를 감득할 수 없기 때문에 ‘잡’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회향할 수는 있지만 태생을 할 뿐, 화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아미타불의 본원의 진실한 행이 아닌 범부들의 독이 섞인 선과 거짓된 행이며, 게다가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지 않아 아미타불의 광명의 섭취와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대사께서 『왕생예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미타불의 몸은 금색 산과 같고 상호의 광명은 시방을 비추시네.
오직 염불만이 광명의 섭취를 받나니 마땅히 본원이 가장 강함을 알라.
또 『반주찬』에서도 말씀하셨다.
팔만사천가지 수많은 상호, 낱낱의 광명 시방을 비추시니,
다른 인연으로 두루 비추는 게 아니라, 오직 염불왕생인을 찾기 위함이라네.
잡행으로 왕생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대사께서 『법사찬』 권하卷下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극락의 무위열반계無為涅槃界를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왕생하기 어려우니,
여래께서 요법要法을 선택하시어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 가르치네.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가 바로 ‘정정업正定業’이다. 즉 대사께서 말씀하신;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행주좌와에 시간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아니하고 염념마다 (명호를) 버리지 않는 것을 정정의 업이라 부르나니, 저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한 까닭이다” 는 것이다.
‘정정업’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곧 ‘정식으로 선정한 업(正選定之業)’과 ‘정식으로 결정된 업(正決定之業)’이다. 전자는 아미타불의 입장에서 말한 것으로, 아미타불께서 210억에 달하는 제불의 서원 가운데 일체 제행을 선택해 버리시어(選捨) 중생들이 왕생하는 인행因行으로 삼지 않으시고, 오직 염불일행만을 선정選定하시어 중생들이 왕생하는 인원因願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정식으로 선정한 업’이라 부르는 것이고, 후자는 중생들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중생들이 이 원을 믿고 따르며 칭명염불을 한다면 왕생이 결정되기 때문에 ‘정식으로 결정된 업’이라 부르는 것이다.
‘정정업’의 글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일심(一心)」은 곧 본원의 ‘삼심’이고,
「전념(專念)」은 곧 본원의 ‘십념’이다.
「아미타불명호(彌陀名號)」를 삼심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듣고 믿는 대상(所聞所信)’에 속하고, 십념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칭념의 대상(所稱所念)’에 속한다. 다시 말해 믿는다는 것은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것이고, 행한다는 것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행하는 것이다.
「행주좌와에 시간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아니하고(行住坐臥不問時節久近)」의 ‘따지지 않음(不問)’ 두 글자는 앞뒤로 관통하기 때문에 행주좌와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따지지 않고, 시간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간의 길로 짧음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모두 염불할 수 있고 모두 염불해야 하며, 일심전념으로 염념마다 아미타불의 명호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아래 글에서 ‘염념불사念念不捨’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시간의 오래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본원문에서 말씀하신 ‘내지 십념’할 때 ‘내지’의 의미이다. ‘내지 십념’의 의미가 바로 ‘내지 임종의 십념 일념으로도 왕생할 수 있다’는 이치로써 신심을 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원문에서 ‘내지 십념’이라 말씀하신 것이고, 성취문에서는 ‘내지 일념’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임종 시의 십념 일념조차도 왕생할 수 있다면 그 누가 왕생할 수 없겠는가! 따라서 일생 동안을 염불한다면 더욱 필히 왕생할 것이다.
대사께서는 이 이전의 ‘사람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범부들이 죄와 복의 많고 적음과 시간의 오래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다만 위로 백년을 다하고 아래로 일일에서 칠일에 이르기까지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한다면 반드시 왕생하니, 의심하지 말지어다.
여기서 ‘죄와 복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중생의 근기를 논하지 않는다, 즉 중생의 신분이 어떠한가를 논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출가자든 재가자든, 성인이든 범부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간에 전부 논하지 않고, 오직 왕생을 발원하고 칭명을 하느냐만 논할 뿐이라는 것이며, ‘시간의 오래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시간의 길고 짧음을 논하지 않고 모두 마땅히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장수하는 근기라면 일평생을 다해 칭명을 하고 단명의 근기라면 내지 칠일에서 일일, 임종의 십념일념으로도 역시 왕생하게 되므로 한 생각 의심조차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락왕생은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왕생의 업인을 이미 구족한 이상, 업보신業報身 수명의 장단에 따라서 한 평생을 다해 일심만 있을 뿐, 이심이 없으며, 신심을 다해 의심이 없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하되, 행주좌와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논하지 않고, 시절의 오래고 가까움의 시간의 길고 짧음을 논하지 않는다. 담란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십념이란 업사성판을 밝히는 것이다”고 하셨다. 즉 왕생의 업인은 ‘내지 십념’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를 때 이미 완전히 결정되었다는 것인데, 이를 일러 고덕 역시 ‘평생업성平生業成’이라 말씀하셨다.
이 ‘죄와 복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를 것을 권장함’의 글에서는, 아미타불의 불력의 걸림 없는 구제를 나타냄으로써 모든 의심스러운 견해에 대한 집착을 소멸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죄와 복의 인과에 집착하여 복을 닦으면 마땅히 왕생하고 죄를 지으면 왕생할 수 없다고 여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복이 많고 죄가 적으면 여전히 왕생할 수 있지만 죄가 많고 복이 적으면 왕생할 수 없다고 집착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심의 집착을 없애기 위해 “죄와 복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할 수만 있다면”이라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삿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 아미타불의 구제를 함부로 해석하고 있는데, 죄와 복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기 때문에 죄를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복을 닦아서도 안 된다며, 만약 죄를 두려워하여 복을 닦는 자가 있다면 아직 아미타불의 원력을 믿지 못한 사람이라 말한다. 그래서 방일함과 게으름만 늘어나서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여전히 죄와 복을 따지는 가운데 있으면서 복을 닦는 것을 잘못이라 여기고 죄를 짓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러한 삿된 견해를 집착하여 스스로 신심이 결정되었고 정토의 원인이라 말하고 있다. 또한 자신은 죄악범부인 까닭에 삼업을 방종하여 마음껏 나쁜 짓을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며, 거리낌이 없이 함부로 “나는 진실한 타력수행자여서 부처님의 원력에 힘입어 반드시 왕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무리들은 아미타불의 본원과 상응하지 않으니, 가히 극락왕생을 구하고자 하나 도리어 더욱 침륜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이미 자신이 죄악범부임을 알고 있기에 부끄러운 마음과 참회하는 마음을 내어 겸손하고 유연한 마음을 품고서 악을 버리고 선을 실천할 것을 생각할 것이니, 마치 선도대사께서 “염념마다 칭명하며 항상 참회함”이라 말씀하신 바와 같다. 또한 이미 아미타불의 대비구제를 알고 있고, 게다가 은혜를 입고 은혜를 느끼고 있다면 마땅히 은혜에 감사하고 은혜에 보답해야 하므로, 선도대사께서 하신 “부처님의 대비심을 배운다”는 말씀과 같이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유정들을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해야 할 것이다.
‘염념마다 버리지 않음’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곧 ‘근상책려根相策勵’와 ‘법덕불단法德不斷’이다. ‘염념’이란 두 글자를 아미타불의 입장에서 말하면 광명이 찰라찰라 염불중생을 섭취하는 것이고, 중생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염하고 또 염하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줄곧 임종에 이를 때까지 일심전념으로 염념마다 아미타불의 명호를 버리지 않겠으나, 반드시 찰라찰라마다 칭명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해 할 수 있는 데까지 생각만 나면 염불하고 말만 꺼내면 염불하는 것이다. 이는 아미타불께서 선정해주신 것으로서, 중생들이 믿고 따르기만 하면 왕생은 이미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저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한 까닭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함’에서, 여기서는 더욱 특별히 ‘전專’이라는 글자를 사용하였는데, 독송·예배 등의 제행을 융화시켜 전칭불명專稱佛名으로 귀속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정정의 업이라 부른다(是名正定之業)」는, 오로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바로 왕생이 결정되는 업임을 나타낸다.
「저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한 까닭이다(順彼佛願故)」는, 오로지 명호를 부르는 것은 아미타불의 제18원과 상응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요 몇 가지 점으로부터 봤을 때, 대사님의 뜻은 앞의 셋과 뒤의 하나의 행으로부터 믿음을 세우는데 있는 게 아니라 네 번째의 칭명일행으로부터 믿음을 세우는데 있기 때문에 ‘행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단락 문장의 첫 부분에 ‘행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한다는 것은’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표목標目을 하는 것으로서 표목의 목적은 본문의 종지를 지적해 내는 데 있다. 그러나 그 종지가 바로 부처님의 원력에 순응하는 정정업의 칭명일행에 있기 때문에, 행으로부터 믿음을 세우는 ‘행’은 ‘칭명일행’을 가리키는 것이지 다섯 가지 정행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행주좌와를 따지지 않고 시간의 멀고 가까움도 따지지 않는다고 말한 이상, 언제 어디서 어떠한 인연을 막론하고 모두 염불할 수 있고 모두 마땅히 염불해야 하며, 또한 모두 필히 왕생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사께서 『왕생예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중생이 아미타불을 칭념하되, 칠일에서 하루에 이르기까지
아래로 열 번 내지 한번 일념 등을 한다면 반드시 왕생한다.
내지 임종의 근기가 일성일념一聲一念으로도 역시 왕생할 수 있다면, 결코 칭명으로써 실력을 쌓고, 자신의 칭명의 힘으로써 왕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원명호의 힘이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생하도록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저 부처님의 원력에 순응하는 칭명을 정정업으로 삼는다면, 왕생의 업인이 구족하고, 앞의 셋과 뒤의 하나인 조업 역시 자연히 칭명하는 가운데 융화된다. 물론 아직 신심을 구족하지 못하고 아직 정정업의 칭명이 되기 전에는 조업이 곧 방편행이 되어 신심을 도와서 이루게 하는 방편에 불과하겠지만, 일단 신심을 갖추고 부처님의 구제를 받는다면 자연스럽게 칭명을 하되, 명호를 부르면서 부르는 공을 인정하지 않고 도우면서 돕는다는 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정조正助’에도 역시 군신君臣과 주반主伴의 뜻이 있다. 칭명을 주된 위치에 두고 예배·독송 등이 이를 수순하게 되므로, 정조로 나뉘게 되는데 마치 용이 움직이는 곳에 구름이 따르고 임금이 가는 곳에 신하가 시중들고 있는 풍모와 같다. 그러나 만약에 일심전념만으로는 왕생하기에 부족하여 반드시 조업으로 보충하여 채워야 한다고 여기면서 다섯 가지 정행을 겸하여 닦아서 왕생을 구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명백한 자력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고덕이 이를 일러 ‘조정을 겸하여 닦는 잡행(助正兼行之雜修)’이라 말씀하셨고, 또 ‘조정이 섞인 잡심(助正間雜之雜心)’이라 말씀하셨다. 이는 조정에 방편과 진실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통달하지 못하고서 둘을 똑같이 중요시하며 함께 닦았기 때문에 ‘비록 잡행을 닦는 전수는 없어도 정행을 닦는 잡수는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상 대사께서 ‘잡행·정행·조업·정업’으로 나누어 분별하시면서 행주좌와를 따지지 않는 칭명을 권장하신 데에는 잡행을 버리고 정행으로 돌아오고, 조업을 버리고 정업에 전념하라는 폐립廢立의 의미가 있다.
앞서 ‘다섯 가지 잡행’은 모두 불교 내의 수행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다만 생사해탈하여 극락왕생하려고 하면서 도리어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따라지 않고서 아미타불 이외의 제불보살들과 기타 법문에 의지하려 한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왕생에 있어서는 전부 힘이 없고 왕생할 수 없으며, 힘은 전적으로 아미타 한 부처님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소치이다. 이렇게 미혹하여 깨닫지 못한 까닭에 그 마음과 그 행이 모두 잡다하여 ‘잡행’이라 말하면서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타이르신 것이다.
물론 용수·천친·담란·도작·선도 등 정토5조들의 정토삼경을 정확히 해석하신 논석들을 독송하는 것은 독송잡행에 속하지 않으며, 또 인과와 관련된 경론들을 열람하여 기에 대한 깊은 믿음이 생기도록 돕는 것 역시 독송잡행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제선만행諸善萬行’에 대해서는, 이러한 제선들을 부지런히 닦음으로써 이런 선만 있으면 반드시 자신을 구제할 수 있고 반드시 극락왕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선을 닦는 힘을 의지하려 한다면, 이런 마음가짐이 바로 자력의 마음이고, 이러한 자력의 마음으로 지은 제선들이 바로 잡행이다. 물론 행위자체는 착한 것이어서 마땅히 뭇 선을 받들어 실천해야 하겠지만, 자력의 마음은 좋은 게 아니므로 대사께서 이를 폄하하여 잡행이라 싫어하며 사람들에게 버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는 절대 선행을 버리라는 게 아니다. 선을 버려서는 안 되며,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은 자력의 마음이다. 자력의 마음을 버렸을 때, 모든 이른바 잡행이라 불리던 제선들은 완전히 광대한 불은에 보답하는 감사의 행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잡수’에 관해서는, 바로 조정을 겸하여 닦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당연히 마음이 아미타불 한 부처님의 행업을 향해 있는 것이지만, 부지런히 이 다섯 가지 정행을 닦은 까닭에 비로소 왕생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여, 조업은 방편이고 오직 정정업만이 비로소 진실이고, 비로소 왕생의 원인이라는 것을 모르고서 자신이 닦은 다섯 가지 정행의 힘에 의지하려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력의 마음이다. 이러한 자력의 마음으로 닦은 다섯 가지 정행을 ‘잡수’라 부른다. 물론 닦은 바가 정행이고, 이 정행을 실천해야만 비로소 본원의 뜻을 알게 되겠지만, 여전히 자력이 남아있기에 대사께서 잡수라고 폄하하며 사람들에게 버리라고 타이른 것이다. 이것은 절대 다섯 가지 정행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력의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다. 자력의 마음을 버렸을 때, 이제까지 잡수라고 폄하되었던 조정겸행助正兼行은 완전히 광대한 불은을 보답하는 감사의 행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 ‘행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의 ‘행’이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하는 정정업인 칭명이고, 이 칭명은 수행자가 쌓은 자신의 칭명의 공이 아니며, 칭명의 힘으로써 왕생을 기원하는 것이 아닌 이상, 왕생의 자량은 아미타불의 명호의 공덕에 있으며, 이 칭명은 명호의 공덕이 전부 드러나는 것이기에 믿고 받아들이면서 칭념하면 바로 왕생하게 된다. 따라서 ‘행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은 ‘기법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 가운데 ‘법에 대한 깊은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대사께서 ‘법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말씀하시기를, “저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반드시 왕생함(행의 측면에서 염불이 바로 저 부처님의 원력을 타는 것임)을 결정코 깊이 믿는다(믿음을 건립함)”고 하셨다.
또 <현의분>에서 말씀하시길, “나무란 곧 귀명(믿음을 세움)이요, 아미타불이란 바로 그 행이다(행의 입장에서 명호가 바로 행임).” 원력과 명호는 일체의 다른 이름(一體異名)으로서, 원력을 믿는 것이 곧 명호를 믿는 것이고, 명호를 믿는 것이 바로 염불을 믿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바로 본원명호가 사람으로 하여금 왕생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원명호정정업本願名號正定業”이라 말하는 것이고, 중생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바로 신심염불로 왕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심염불정정업信心念佛正定業’이라 말하는 것이다. 명호·신심·염불은 일체의 다른 이름이므로, 명호가 곧 신심이요, 신심이 곧 염불이다. 마음속으로 본원의 명호를 믿고 받아들였다면 자연히 입으로도 본원의 명호가 흘러나올 것이다. 이 역시 대사께서 『왕생예찬』에서 말씀하셨다.
미타세존께서 본래 깊고 크신 서원을 세우시어 광명명호로써 시방(중생)을 섭취하고
교화하시는데, 다만 신심을 내어 왕생을 구하고 염불한다면.
여기서 ‘명호정정업’·‘신심정정업’·‘칭명정정업’ 역시 일체의 다른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께서 옛적에 널리 48대원을 세워서 본원명호를 성취하여 중생을 구제하시는데, 오직 믿는 자만이 왕생할 수 있다. 대사께서 ‘삼심석’의 시작에서 ‘삼심을 정인으로 판정함’이라 말씀하셨으니, 삼심이 바로 하나의 신심인 까닭에 ‘신심을 정인으로 삼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왕생의 정인은 이 신심에 있는 것이어서 하나의 원인만 있을 뿐 두 번째 원인은 없다. 이 신심이 바로 ‘행으로부터 믿음을 세움’의 믿음이므로, 오직 이 하나의 믿음과 하나의 행만 있을 뿐, 다시 두 번째 믿음과 두 번째 행은 없으며, 오직 아미타불의 본원인 칭명염불을 믿는 것을 정인으로 삼기 때문에 정정업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다섯 가지 정행의 대판문과 세판문을 아래의 표도와 같이 표시한다.
10. 두 가지 깊은 믿음과 다섯 가지 정행의 뜻은 일향전칭으로 인도하는 데 있다
‘믿을 신信’자는 ‘사람 인人’자와 ‘말씀 언言’자로 합성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사람의 말씀’을 ‘믿음(信)’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에게 인격이 없고 하는 말들이 허망하여 진실하지 않다면 ‘신’이 될 수가 없으며,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선도대사께서 ‘심심深心’을 일러 ‘깊이 믿는 마음’이라 해석하시면서, ‘사람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就人立信)’ 및 ‘행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就行立信)’의 측면에서 설명하신 것이다. 이른바 사람으로부터·행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한다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믿을 수 있는 행으로부터 범부들의 왕생의 신심을 건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이란, 이 사람은 범부가 아닐뿐더러 이승과 삼승의 성자도 아닌 대비심을 만족하시고 자각自覺과 각타覺他의 행을 원만히 하신 부처님으로서, 부처님은 참다운 말씀을 하시는 분이시고, 실다운 말씀을 하시는 분이시며, 이치에 맞게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다른 말씀을 하지 않는 분이시며, (중생을) 속이는 말씀을 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이야말로 가장 깊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니, 이것은 ‘부처님’으로부터 신심을 건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설하셨는가? ‘행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에서 설하시길,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행주좌와에 시간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염념마다 버리지 않는 것을 정정의 업이라 부르나니, 저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하는 까닭이다”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言)’이 자연히 ‘믿음(信)’이 되는 까닭에 가장 ‘깊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부처님의 말씀’으로부터 신심을 건립한 것이다. 따라서 ‘깊은 마음에 대한 해석(深心釋)’의 대강大綱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대비심을 만족하신 사람의 말씀으로부터 신심을 건립하는 것(사람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이고, 또 하나는 칭명정정업의 행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하는 것(행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이다.
그러므로 ‘심심석’ 가운데 최초의 ‘두 가지 깊은 믿음’ 중의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반드시 왕생한다’는 말씀에서 어떻게 부처님의 원력에 ‘올라타는가(乘)’에 대해서 여전히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다가 ‘행으로부터 믿음을 건립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심전념一心專念’의 정정업을 지목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대개 이른바 ‘원력’이란 바로 ‘제18원’의 힘을 말한다. 제18원에서 ‘내지 십념’을 설하셨기에, 무릇 ‘내지 십념’을 하는 사람은 곧 저 부처님의 원력을 타는 것이며, ‘내지 십념’이란 바로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염념마다 버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원력에 순응하는 까닭’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일심전념一心專念’이란 바로 ‘저 부처님의 원력에 올라타는 것’이다. 만약 ‘일심전념’이 아니라면 곧 저 부처님의 원력에 올라타는 게 아니니, ‘저 부처님의 원력에 순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깊은 믿음과 다섯 가지 정행의 안목眼目이자 전체 『관경』의 심요이다. 그런 까닭에 『관경』에서 비록 널리 정선의 십삼관과 산선의 삼복구품을 설하셨지만, ‘유통분’에 이르렀을 때, 석가세존께서 정선과 산선을 다 버리시고 오직 ‘무량수불을 명호를 지닐 것’을 들어 현세 및 미래세의 먼 훗날까지 유통시킨 것이며, 선도대사께서도 “지금까지 비록 정산이문의 이익을 설하셨지만, 부처님의 본원을 바라보면 그 뜻은 중생들이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고 해석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깊은 믿음과 다섯 가지 정행에 대한 석존의 뜻은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으로 인도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왕생하게 됨을 믿어야 하나니, 정정의 업인 까닭이요, 저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하는 까닭이요, 저 부처님의 원력에 올라타는 까닭이다.
11. 아미타불의 원력은 증상연이요, 중생의 염불은 곧 승탁함이다
‘원인因’이 ‘연(緣:조건)’을 만나면 ‘결과果’가 나타나는데, 조건이 다름에 따라서 결과 역시 달라진다.
예컨대 ‘탄소碳素’는 상온 상압에서 ‘숯’이 되지만, 섭씨 2천도와 5만5천 기압을 가한다면 ‘다이아몬드’가 된다.
※ 여기서 탄소가 숯으로 변한다는 말은 설명을 위한 방편의 말씀으로 이해하시면 된다.
예컨대 ‘물’은 섭씨 영도를 만나면 ‘얼음’이 되고, 섭씨 백도를 만나면 ‘수증기’가 된다.
예컨대 ‘씨앗’은 불의 연緣을 만나면 불에 타서 영원히 죽게 되지만, 물과 흙의 연을 만나서 씨앗을 잘 뿌려두면 끊임없이 생장하고 번성하게 된다.
죄업범부가 보통의 연을 만난다면, 여전히 삼도육도三塗六道에서 윤회하고, 여전히 죄업을 짓고 고난苦難을 받는 범부일 뿐이다.
또 예컨대 『관경』의 구품에 비록 대승을 만나고 소승을 만나고 악연을 만나는 세 가지 다른 연緣으로 인해 겉으로는 선악의 삼배구품 차이로 나타나지만, 내면의 실질은 여전히 모두 한결같은 범부로서 항상 생사의 고해 속에 침몰하고 있기 때문에 선도대사께서 ‘구품은 모두 범부이다’고 확정지어 판단하신 것이다.
대승불법과 소승불법은 성도의 근기에 대해 말한다면 물론 “돈교든 점교든 각자 근기에 부합한다면, 기연을 따라 모두 해탈하게 되어”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연이 되겠지만, 구품의 범부들 입장에서는 만나도 만나지 못한 것과 같아 여전히 보통의 연이 될 뿐 출리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
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죄악생사범부들은 광겁 이래 항상 침몰하고 항상 유전하여 벗어날 기연이 없다.”며 또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왕생하기 어렵다”고 하셨으니, 이와 같은 죄악범부들이 만약 미타세존께서 세간을 초월하는 ‘특별한 뜻이 있는 홍원’을 일으켜 출리의 강연强緣으로 삼지 않았다면 모든 해탈의 길이 끊어져 영원히 생사의 깊은 연못 아래에 잠기게 될 것이다.
선도대사께서 『법사찬』에서 말씀하시길, “바로 좋은 강연强緣을 만나지 못해 윤회로부터 득도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영원히 득도될 수 없는 선악범부들도 만약 아미타불의 대원업력의 증상연을 만날 수 있다면 만 명 가운데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왕생성불할 수 있다. 천친보살께서 말씀하시길, “부처님의 본원력을 살펴보면, (본원을) 만나는 이마다 헛되이 지나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범부가 벗어날 수 있는 인연은 오직 아미타불의 본원에 있는 것이다.
선도대사께서 <현의분> ‘요홍이문판要弘二門判’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 모든 선악범부들이 왕생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아미타불의 대원업력에 올라타는 것을
증상연으로 삼지 않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
또 ‘범부가 보토에 들어감’의 글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2 부처님의 본원에 의탁함을 강연으로 삼아 오승이 다 같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악범부들이 어떻게 아미타불의 대원업력에 올라타는 증상연을 의지할 수 있는가?
3 중생들이 칭념하는 즉시 다겁생의 죄가 사라지고, 목숨을 마칠 때 부처님과 성중들이 자연히
영접을 하며, 온갖 삿된 업의 계박繫縛이 장애를 할 수 없는 까닭에 증상연이라 부른다.
따라서 ‘부처님의 명호만 부른다면’ 곧 아미타불의 대원업력이라는 ‘증상연’을 타고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관경』에서 “오역과 십악과 같은 온갖 불선업을 갖춘 어리석은 사람이 악업으로 인해 마땅히 악도에 떨어져야 하므로, 임종 시에 지옥의 모든 불길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데, 마침 선지식을 만나 그 가르침대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자 당장에 지옥의 맹렬한 불길이 시원한 바람으로 변하고, 즉시에 금색 연꽃을 타고 극락세계에 왕생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원히 생사윤회하는 덧없는 업보신業報身을 버리고 반드시 열반의 경계 속에 항상 머무시는 불신佛身을 증득하게 된다.
심하도다! 연의 중요성을 여기서 알 수 있구나.
선도대사께서 또 말씀하셨다.
4 미타세존께서는 본래 깊고 크신 서원을 세우시어 광명명호(光明名號)로써 시방중생들을
섭취하고 교화하시는데, 다만 믿음을 내어 발원을 하고 위로(길게)는 평생을 다하고, 아래로
(짧게)는 열 번·한 번 등으로 염불을 한다면 부처님의 원력으로 쉽게 왕생할 수 있다.
(왕생예찬)
5 다만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는 중생이 있다면 저 부처님의 심광心光은 항상 그 사람을
비추어 섭취하고 보호하며 버리시지 않지만, 여타의 잡다한 업(雜業)을 닦는 수행자들을
비추고 섭취를 하는 것은 전부 논하지 않는다. (관념법문)
6 아미타불의 몸은 금색 산과 같고 상호의 광명은 시방을 비추시네.
오직 염불만이 광명의 섭취를 받나니 마땅히 본원이 가장 강함을 알라. (왕생예찬 )
7 부처님의 원력으로 오역과 십악의 죄업이 소멸되어 왕생하고,
정법을 비방한 자와 일천제도 마음을 돌리면 모두 왕생한다. (법사찬 )
8 오역과 정법비방에 십악을 지은 이도 마음 돌려 염불하면 모든 죄업 다 사라지고,
이검利劍이 곧 아미타명호이니, 한번 칭념함에 모든 죄업 다 사라지네. (반주찬 )
자민慈愍대사께서 말씀하셨다.
9 다만 마음 돌려 염불 많이 하면 깨어진 기와조각도 금으로 변할 수 있다네.
12. 관경의 내용은 베풀고 열고 폐함으로써 성도문의 행자를 이끌고 정토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관경』의 내용을 자세히 연구해보고, 아울러 설법할 시기의 인연을 잘 살펴보면, 곧 『관경』에 ‘거짓으로부터 진실로 들어가는(從假入真)’ ‘베풀고(施) 열고(開) 폐함(廢)’의 세 가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베풀고 열고 폐함이란 곧:
1. 진실을 위해 방편을 베품(연밥을 위해 연꽃이 핌) ― 정산이선(定散二善)
2. 방편을 열어 진실을 드러냄(연꽃이 피어 연밥이 드러남) ― 정산 가운데 염불을 설함
3. 방편을 폐하고 진실을 세움(연꽃이 떨러지고 연밥이 성취됨) ― 유통분에서 정산을 폐하고
염불을 세움이다.
‘정산定散’ 가운데 염불을 설하는 글:
1. 정선 중의 ‘제9관’에서 말씀하시길, “광명은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며 염불중생을 섭취하여
버리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2. 정선 중의 ‘제12관’에서 말씀하시길, “무량수불께서 무수한 화신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
보살이 함께 항상 이 수생자의 처소에 오시느니라”고 하셨다.
3. 산선 중의 ‘하품상생’에서 말씀하시길, “지혜로운 사람은 그에게 합장 차수하고 나무아미타
불을 부르도록 가르치셨다”고 하셨다.
4. 또 말씀하시길, “화신불께서 찬탄하시기를, ‘선남자여, 그대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까닭에
여러 가지 죄업을 소멸하고 내가 그대를 맞이하러 왔노라’”고 하셨다.
5. 산선 중의 ‘하품중생’에서 말씀하시길, “선지식이 널리 저 부처님의 광명신력光明神力을 찬탄
하시니, 듣고 나서 바로 왕생하였다”고 하셨다.
6. 산선 중의 ‘하품하생’에서 말씀하시길, “마땅히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야 하느니라”고 하셨다.
<유통분>에서 정산을 폐하고 염불을 세우는 글:
<유통분>에서 말씀하시길, “염불하는 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백련화와 같아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그의 좋은 친구가 될 것이며, 마땅히 도량에 앉아 모든 부처님의 집에 태어나게 됨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길,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이 말을 잘 간직하여라. 이 말을 잘 간직한다는 것은 곧 무량수불의 명호를 지니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유통분>의 이 글에서 석존께서는 ‘무량수불의 몸을 관하는’ 열세 가지 ‘정관定觀’을 설하지 않으시고 ‘무량수불의 명호를 지니는’ ‘칭명염불’을 설하셨기에, 이로써 석존의 뜻과 목적은 정산이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산이선으로써 성도문의 수행자들을 인도하여 정토문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맨 마지막에 오직 『대경』의 제18원에서 설한 ‘내지 십념’의 칭명염불(즉 ‘무량수불의 명호를 지님’)만을 거론한 것이기 때문에 선도대사께서 이 글을 해석하시고, 아울러 『관경』 및 일대교법의 총결론을 지으시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비록 정산이문의 이익을 설하셨지만, 부처님의 본원을 바라보면 그 뜻은 중생들이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
따라서 『관경』에서 설한 모든 ‘관상’의 이익 역시 모두 칭명염불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선도대사께서 ‘제9관’을 해석하시면서 말씀하신 ‘광명은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염불중생을 섭취하여 버리지 않으신다’는 이익이 바로 ‘칭명염불’의 이익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말하는 ‘염불’이 곧 ‘칭명염불’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씀하신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 외에도 글들이 아직 많이 있다. 예컨대 『관경소』에서 ‘제9진신관’의 ‘광명은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염불중생을 섭취하여 버리지 않으신다’는 경문을 해석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물음: 온갖 행을 닦아 다만 회향만 하면 모두 왕생을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두루 비추
는 부처님의 광명이 오직 염불하는 자들만 섭취하는가?
대답: 여기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친연親緣을 밝힌다. 중생들이 행을 일으켜서 입으로 항상 부처님을 부르면 부처님께서
곧바로 들으시고, 몸으로 항상 부처님께 예배하면 부처님께서 곧바로 보시며,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께서 곧바로 아신다. 중생들이 부처님을 기억하고 생각하면
부처님 역시 중생들을 기억하고 생각하시니, 피차의 삼업이 서로 버리고 떠나지 않는 까
닭에 ‘친연’이라 부른다.
둘째, 근연近緣을 밝힌다. 중생들이 부처님을 뵙기를 원하면 부처님께서는 곧바로 응하여 눈앞
에 나투시므로 ‘근연’이라 부른다.
셋째, 증상연增上緣을 밝힌다. 중생들이 칭념하는 즉시 많은 겁劫의 죄가 사라지고, 목숨을 마
칠 때 부처님과 성중들이 자연히 영접을 하므로, 온갖 삿된 업의 계박繫縛들이 장애를 할
수 없는 까닭에 ‘증상연’이라 부른다.
그 외의 온갖 선衆善은 비록 선이라고 부르나, 만약에 염불과 비교한다면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여러 경전 중의 도처에서 염불의 공덕을 널리 찬탄하신 것이다.
예를 들어 『무량수경』의 48대원 가운데서는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 왕생을 하는 것
을 밝히셨고,
또 『아미타경』 가운데서는 하루에서 이레 동안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 왕생하는 것을
밝히셨으며, 또 시방세계의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모든 부처님들께서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주
셨고,
또 이 경(『관경』)의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의 글 가운데서는 오직 명호를 불러 왕생함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예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상으로 석존께서 <유통분>에서 말씀하신 “무량수불의 명호를 지닐 것”과 선도대사께서 해석하신 “부처님의 본원을 바라보면 그 뜻은 중생들이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는 글은 단지 전체 『관경』의 결론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일대불법의 총결론이며, 위로 『대경』 제18원의 본원의 바른 종지를 계승하였을 뿐더러 질문 없이 스스로 설하신 『소경』을 열게 된 유서(由序: 경을 설하게 된 까닭)임을 알 수 있다.
13. 5부9권의 일관된 종지는 본원칭명으로 범부가 보토에 들어가는 것이다
선도대사의 ‘5부9권’은 법문이 광대하고 의리義理에 끝이 없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한 까닭에 내용에는 진실과 방편이 있다. 초학자들이 만약 진실과 방편을 모르고 선지식의 지도가 없다면, 비록 스스로 5부9권을 모조리 다 읽는다 하더라도 방침과 종지를 모르고, 5부9권에서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마땅히 어떻게 실천수행을 해야 하는지를 모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관경사첩소』강요에서는 선도대사님의 정토사상의 요점을 간명하게 제시하여 행자들로 하여금 한눈에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으니, 누구든지 막론하고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한다면 백이면 백명이 왕생하고 천이면 천명이 왕생하여 모두 아미타불의 보토에 태어나게 된다. 쉽게 말하면 곧 ‘본원칭명으로 범부가 보토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른바 “부처님의 본원을 바라보면 그 뜻은 중생들이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음”, “바로 부처님의 본원에 의탁함을 강연强緣으로 삼은 까닭에 오승이 다 같이 들어감”이라는 것이다. 이는 선도대사 5부9권의 일관된 종지이자 불멸의 정론定論이다. 5부9권에서는 이 한 가지 일만 설하고 있을 뿐, 다시 다른 일은 없으며,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모두 방편이며, 방편이 비록 많으나 진실은 오직 하나 뿐이다.
이에 대사님 정토사상의 논리를 아래의 도표와 같이 열거한다.
두 가지 문·두 가지 선·두 가지 믿음→두 가지 행→두 가지 업→정정업(본원칭명)
‘정정업’이란 곧 오로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전칭불명專稱佛名’이며, 본원명호의 힘으로써 반드시 극락보토에 왕생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본원인 칭명염불로 범부가 (극락)보토에 들어감’의 뜻이다.
물론 대사님은 조사의 근기이시고, 부처님의 시현이시기 때문에 그분 자신의 수행은 남달리 뛰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대사님 자신의 수행이 어떻든 간에 상관없이 지혜롭든 어리석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학자든 농민이든 장인이든 상인이든 각자 근성에 따라서 모두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을 그 분들이 왕생하는 인행因行으로 삼고 있기에, 이것은 만인공통으로 고금에 모두 같은 것이며, 또한 대사님의 일관된 사상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할 수만 있다면, 왕생하여 과위를 증득(성불)하는 입장에서 말한다면 대사님의 지혜와 선은 늘어나지 않고 우리들의 어리석고 악함은 줄어들지 않으며, 금생에 다 같이 극락왕생하고 다 같이 무량광·무량수를 증득하는 같은 인과 같은 과(同因同果)가 되니,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오승이 다 같이 들어가는 것(五乘齊入)’이다.
그런 까닭에 『법사찬』의 상권에서 말씀하시길, “인간과 천상의 선하고 악한 근기들이 모두 왕생하여 저 나라에 이르면 아무런 차별 없이 다 같이 불퇴전에 오르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이는 더 이상 다른 원인이 없이 모두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말미암은 까닭에, 이것이 바로 ‘본원인 칭명으로 범부가 보토에 들어감’의 뜻이다.
나무아미타불_()_
출처 - 순정시대 (純淨時代) http://cafe.daum.net/sunsujeongto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