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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라는 직책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신규 유망 직종으로 CLO(Chief Listening Officer), 즉 고객의 목소리를 듣는 업무 총괄자를 꼽고 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블로그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유용한 정보를 찾아내는 것이 역할이다.
이는 최근 경영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빅 데이터(big data) 분석의 핵심이기도 하다.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경유·아스팔트로 활용하듯이 소셜미디어 등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분석하면 소비자 심리 분석, 제품 평가와 기획, 트렌드 예측 등 경영의 전(全)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고 해서 빅데이터는 '21세기 원유'라고도 불린다.
그 중요성을 증명하듯 '마케팅 사관학교'라 불리는 P&G는 지난 2월 마케터 1600명을 감원했다.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는 쪽으로 마케팅의 방향을 틀면서 기존 방식을 고수하는 마케터를 털어낸 것이다. 당신이 '빅 데이터? 그게 뭐야?'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발 빠른 기업들은 이미 빅 데이터를 활용하고 있다.
◇멍 치료제 출시에 빅 데이터 활용
유유제약은 베노플러스라는 연고를 출시하면서 빅 데이터 분석을 시도했다. 멍든 데, 부은 데, 벌레 물린 데 바르는 연고다. 이 중에서 어느 기능을 부각시켜야 할까? 벌레 물린 데 바르는 연고나 붓기 빼는 파스는 이미 시중에 많다. 그래서 멍 치료제로 포지셔닝하기로 했다.
그런데 '멍'을 키워드로 소셜미디어 분석을 해본 결과 예상치 못한 경쟁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멍에 관해 가장 많이 언급됐던 것은 바로 '계란'이었던 것. 심지어 두 번째는 '쇠고기'였다. 경쟁사의 연고들은 계란을 멍에 문지르거나 쇠고기를 붙이는 것 같은 민간요법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유유제약은 멍 시장을 선점하기로 했다. 또 소비자들은 멍을 치료하는 것보다 멍 자국을 없애는 데 4배나 더 관심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신제품의 효용이 '치료'보다 '미용'에 더 있다는 점을 확인한 유유제약은 성인 여성을 타깃으로 한, 화장품 같은 이미지로 제품을 포지셔닝해 큰 성공을 거뒀다.
◇타이밍 포착에 빅 데이터 활용
비즈니스는 타이밍이 생명이다. 특히 유통업은 팔릴 만하고 이익률도 큰 상품을 선정해 제때 내보내는 게 핵심 경쟁력이다. GS홈쇼핑은 올겨울을 맞아 블로그 26만건과 여성 커뮤니티 게시물 113만건을 분석해 30~40대 여성에게 무슨 상품을, 언제, 어떻게 팔지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기혼 여성이 겨울에 가장 많이 떠올리는 단어는 김장, 겨울방학, 보습, 크리스마스로 나왔다. 피부 보습은 8월 20일부터, 김장은 9월 20일부터, 겨울방학은 11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는 12월 18일부터 본격적으로 기혼 여성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GS홈쇼핑은 이런 '마음의 스케줄'을 이해했고, 무슨 상품을 언제 판매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반대로 SNS에서 여름휴가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기온이 '21도'가 될 때부터다. 그리고 휴가 시즌 2주 전에는 다이어트에 대한 언급이 최고조에 이른다. 이 점을 활용해 시리얼 브랜드인 켈로그는 여름휴가 전에 '비키니 몸매, 2주 동안 도전하세요'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매출 분석으로 필립스 다시 1위
2009년 필립스가 출시한 이유식(離乳食) 제조기는 없어서 못 파는 히트작이었다. 아기 이유식을 만들려면 1시간 이상 재료를 다지고 끓이고 체에 걸러야 하는데, 이 제품은 다지고 조리하는 모든 과정을 한 번에 알아서 해주니 엄마들 사이에 인기 만점이었다. 그런데 2년 만에 갑자기 판매가 급락했다. 회사 내부에서는 저가(低價)의 경쟁사 유사 제품이 많이 나왔으니 이제는 가격을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필립스는 육아 관련 블로그 1억4000개, 트위터 40만건, 육아 사이트 36곳의 90개 게시판에서 이유식과 이유식 제조기에 대한 소비자 의견을 수집했다. 분석 결과 필립스 제품의 매출이 떨어진 것은 주부들이 이유식 제조기를 구입하는 대신 이유식을 배달받아 아이에게 먹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필립스는 마케팅 전략을 바꿨다. '엄마가 직접 만들어 사랑이 듬뿍 담긴 이유식'을 강조했다. 그 결과 필립스는 6개월 만에 1위 자리를 되찾았다. 물론 가격은 한 푼도 내리지 않았다.
◇광고 모델 이미지 분석
광고 분석에도 빅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다. 사람들이 우리나라 톱 모델 5명에 대해 말할 때 많이 사용하는 단어를 기준으로 했을 때 공효진은 귀엽고, 멋있고, 어리고, 하얗고, 섹시하다. 공효진은 스타일리시하고 얼굴에 도드라진 부분이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배역에 따라 자유롭게 이미지를 입힐 수 있다. 이처럼 '베이직'한 공효진을 모델로 채택한 브랜드가 비오템이다. 베이직케어 위주이니 화려하지 않고 깔끔한 공효진의 얼굴과 어울린다. 2011년 1월 비오템이 공효진을 새로운 뮤즈로 선택하자 소셜미디어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이 폭발했다. 그동안에 나온 비오템 모델 중 가장 어울리는 모델이라는 것이다.
반면 소녀시대는 공효진과 이미지가 많이 다르다. 소녀시대는 예쁘고, 아름답고, 기분 좋은 모델이다. 이 미인들을 화장품 브랜드에서 놓칠 리 없었고, 과연 모 브랜드의 모델이 됐다. 그런데 결과는 공효진과 정반대였다. 부정적인 소문이 번져나갔다. 그 브랜드는 타깃 연령이 30~40대였다. 그들이 화장품을 쓴다고 해서 소녀시대 같은 20대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화가 난 것이다. '모욕적'이란 표현까지 올라왔다. 그 결과 비오템은 공효진과 2012년에 재계약을 이어나갔고, 소녀시대의 중년층 화장품 광고는 오래지 않아 교체됐다.
☞빅 데이터(big data)
마치 범람하는 홍수처럼 기존 기술로는 분석·처리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고 복잡한 데이터 집합을 말한다. IT 기술이 발달하면서 빅 데이터를 활용해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기업 경영이나 선거 등에 이용하는 기법이 개발되고 있다.
조선일보 2012.11.15
조상호 SPC그룹 총괄사장은 매일 날씨를 체크한다. 지난 월요일(12일) 주중부터 날씨가 추워진다는 예보를 보고받자마자 전화를 들었다. "호빵 생산을 늘리세요." 이 회사는 통상 2일 전에 대리점에서 생산주문을 받는데 요즘처럼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하루 전에도 호빵을 보내달라는 주문이 폭주한다. 문제는 오후 3시에 주문을 마감해 공장을 돌리면 다음 날까지 제품을 공급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이른바 '미출'(주문대로 출하를 못 시킨다는 업계 은어)이 생긴다.
이 회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날씨 예보로 수요를 예측, 생산량을 조절하고 있다. 초겨울 기온과 호빵 판매량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질까. 정답은 기온이 1도 떨어지면 호빵 판매량은 6만개 늘어난다는 것. 하지만 최저기온이 영하 1도 아래로 떨어지면 판매량은 다시 달라진다. "생산량을 다시 줄입니다. 너무 추워도 호빵이 안 팔리기 때문이죠."(SPC 관계자)
◇날씨 예측이 수익과 직결
날씨 정보를 활용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과거엔 발전·운수·보험 분야에서 재해 예방 차원에서 날씨에 관심을 가졌지만 최근엔 제조·유통 분야에서도 수요예측과 재고관리에 날씨 정보를 활용하고 있다. 매출 정보와 기상 정보라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활용하는 '빅 데이터(big data)' 기술이 정교해지면서 나타난 변화다.
유통업체 중엔 편의점이 날씨 정보 활용에 가장 적극적이다. CU는 각 편의점 단말기에 날씨 정보와 함께 권장 주문량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날씨 정보, 과거 매출, 재고량을 토대로 제품이 얼마나 팔릴지 예측한 자료다. 이 시스템을 도입한 후 물류센터 재고일수는 15일에서 7일로 줄었고 매출은 30% 늘어났다. 삼각김밥·샌드위치처럼 날씨에 영향을 받고, 유통기간이 짧은 제품의 경우 폐기량이 40% 줄었다고 한다.
SPC는 지난 6월 식품업계에서 처음으로 '날씨 판매지수'를 만들었다. 최근 5년간 전국 169개 지점의 기상관측 자료와 10억건 이상의 점포별 상품 판매 데이터를 분석한 자료다. 이 자료는 실시간으로 전국 3100여 파리바게뜨 점포의 단말기에 제공된다.
지난 9일 파리바게뜨 서울 종각 매장에서 박지애 매니저가 계산대 단말기 화면을 누르자 '일별 날씨 판매지수 최대 변동' 항목에 제품 이름이 떴다. 생크림 케이크 항목 옆에 '토요일 50.15%, 일요일 27.15%' 같은 숫자가 나타났다. 매장 주변 날씨 예보, 요일 등의 요소를 종합했을 때 최근 2주 평균보다 그만큼 매출이 늘어날 전망이라는 뜻이다. 박 매니저는 "비가 오면 피자빵 같은 조리빵이 많이 나가는 걸 감(感)으로 알았지만 이제는 구체적인 데이터가 있어 판매를 예측하고 주문할 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SPC는 날씨지수 도입 한 달 만에 조리빵 매출이 30% 늘었다고 밝혔다.
의류 회사들은 분기·연간 단위로 기상 예측 정보를 활용한다. 통상 6개월 전에는 생산계획을 확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웃도어 의류업체인 블랙야크는 기상정보업체 케이웨더와 함께 '제품 수요 예측 솔루션'을 개발, 올 봄·여름 시즌 제품 기획 때부터 활용하고 있다. 이 회사는 기온 변동이 평년보다 심할 것이라는 기상 정보를 바탕으로 재킷 주문량을 늘렸고, 실제 지난봄 재킷 매출은 전년 대비 60% 늘었다. 블랙야크는 기상 정보를 활용, 전년 대비 323억원 정도의 매출 증가 효과를 본 것으로 자체 평가하고 있다.
현대건설도 건설기상예보시스템, 전담 예보관을 둬 건설 비용을 연간 140억원이나 절감하고 있다. 장충동왕족발은 비가 오면 주문이 늘어난다는 점에 착안, 기상 정보를 분석해 생산량을 조절한다. 제습기를 만드는 위닉스는 습도 예보를 바탕으로 홈쇼핑 방송 스케줄을 잡는다.
◇국내 43개 업체 날씨 경영 인증
해외 업체들도 날씨와 경영을 접목하고 있다. 에어컨을 생산하는 일본 다이킨공업은 여름철 생산관리가 늘 골치였다. 부품 조달부터 제품 생산, 출하까지 1개월이 걸리다 보니 제품이 부족하거나 재고가 남을 때가 많았다. 이 회사는 날씨 정보와 기상 정보를 실시간으로 집계하고 생산량을 예측해 한 달 걸리던 이 과정을 3일로 단축해 재고를 줄였다.
한국기상산업진흥원은 지난해부터 날씨 정보를 활용하는 기업에 '날씨 경영 인증'을 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43개 업체가 받았다. 한국기상산업진흥원 안정준 기획이사는 "국내 기상정보업체가 16개 있고 날씨 관측·분석 기술도 세계 7위 수준이지만 이를 이용하는 기업은 아직 적다"며 "날씨로 인한 위험을 최소화하고 수익을 극대화하려면 날씨 정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