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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2일
말씀; 요9:1-7
제목: 은혜와 구원
오늘은 우리가 영적감각을 가지는 것이 무엇이며, 영적인 인식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즉, 간단히 표현하자면, 구원의 확신 속에 펼쳐지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영광의 길을 걷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위해 오늘은 은혜의 관점에서 신앙의 출발점인 구원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보기를 원하는데요, 특기 한 사건을 통해 은혜와 구원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본문의 사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할 것은, 원래 성경은 장절 구절이 없었습니다. 후대에 와서 성경학자들에 의해서 문맥의 내용에 따라 찾아보기 쉽도록 장절이 구분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붙여야하는데 떨어트려 놓은 구절들이 꽤 있다고 봅니다.
요한복음 9장 1절도 8장59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9장 전체의 내용은 8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한 소경을 고쳐주시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소경을 고쳐주시는 장면이라기보다는 구원에 관한 부분을 설명하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본문 말씀을 통해 구원의 근거가 되는 은혜에 대해 함께 나누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난 맹인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맹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었다가 시각장애자가 되었으면 답답하고 힘들 텐데 이 맹인은 빛을 본 경험도 없으니까 맹인 됨의 답답함은 못 느꼈을 것입니다. 이 맹인을 고치는 사건은 8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8장에서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진리와 구원을 제시하시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이렇게 말씀했더니 그들은 종 된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나쁜 종자여서 이것을 못 알아듣는다.’고 했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어찌 종자가 나쁘냐.’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단정을 지어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의 아버지는 하나님도 아니고 아브라함도 아니다 너희의 아비는 마귀니라’그러자 이스라엘백성들이 화가 나서 예수님께 ‘당신은 귀신 들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왜 안 듣느냐 나는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서 이야기하는데 너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서 왜 내 말을 안 듣느냐?’이 말을 듣고 이들이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저희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더라.’이 8장의 상황이 9장을 기록하게 한 배경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가장 혼돈을 일으키는 것은 ‘은혜’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서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과 진리와 생명에 대한 어떤 제안이나 권면을 하셔서 우리가 그것을 믿고 영접함으로 인해 구원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구원문제에 있어서 이 부분을 명확히 아셔야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혼돈 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기독교가 주장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설명하셨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즉 우리가 말씀을 알아듣고 주님을 영접하고 우리가 결단해서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여 구원을 얻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구원에 대한 감각도 없고 요구도 하지 않았는데, 다만 그 분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8장을 배경으로 해서 9장에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8: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이들이 반응을 하느냐하면 모세의 율법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죄를 비춰주면 자신들의 현실성을 보고 회개해야 되는데, 오히려 돌을 들어 죽이려고 하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복음서는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의 그 진리와 생명에 대해 얼마나 끔찍하도록 반대하였고, 그 빛을 꺼서 생명을 땅에 파묻기로 결의했느냐는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위해서는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죽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9:6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행동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이런 행동을 하셨느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는 상징적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생명과 구원을 베풀기 위해 육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진리를 펼치시고 기적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을 그의 능력으로 보여주시고 진리의 말씀을 설파하시고 우리가 죄인임을 우리의 마음을 찔려 쪼개어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구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대를 합니다. 그래서 9장에서 시각장애자를 붙잡았습니다. 맹인이 붙잡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붙잡았습니다. 왜요? 구원을 설명하기위해서입니다. 이 맹인은 날 때부터 맹인입니다. 그러니까 빛이 있는 줄 처음부터 모르는 자이며, 더구나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누가 붙잡아야합니까? 예수님이 붙잡으셔야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맹인이 눈을 뜨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9장은 구원이란 무엇이냐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주 앞에 요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구원을 달라고 외친 자가 없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 구원을 얻을 때 지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붙잡아서 나를 구원 좀 시켜 주십시오. 하고 매달리고 애원해서 오신 분계십니까? 없습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 자가 없습니다. 주를 믿겠다고 홀로 결단하고 주를 영접한 사람도 없습니다.
구원은 그래서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면 구원도 모릅니다. 우리가 날 때부터 맹인이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라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요 지적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인 우리를 그 분이 붙잡아서 눈을 뜨게 하고 붙잡아 끌고 왔기에 여기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지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여기서 ‘우리가’가 아니라 ‘내가’입니다. 단수로 되어 있어서 ‘내가 하리라’가 맞습니다. 직역하면 ‘내가 꼭 해야만 한다.’입니다. 영어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I must work the work of him that sent me’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내가 꼭 해아만 한다, 입니다. 왜 ‘must’꼭 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는가하면 8장에서 진리와 생명과 자유를 꺼내 놓았지만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꺼집어 내었더니 더 발악을 합니다. 인간들에게 더 이상 제시할 방법이 없습니다. 8장에서는 진리와 생명을 제시했는데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인간 쪽에서 안 되면 강제라도 끌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9장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길 갈 때 맹인을 붙잡고 고쳐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기독교가 은혜를 강조하는지 아십니까? 행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유일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겠다고 결정하시고 구원하시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반응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꼭 하셔야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은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반응을 촉구했으나 반응을 하지 않자 죽기로 했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인간이란 이런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죽으려고 오신 것입니다. 왜 오셔서 죽어야 구원이 이루어지는 지를 요한복음 9장에서 맹인을 통해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기적에서도, 떡을 때어주며 설명하셨고 성찬식에서도 설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눈을 뜨게 되자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은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자로 세워졌기 때문에 수없이 하나님을 아는 삶에 대해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주일에 나오는 것입니다. 나와서 졸더라도 왔다가 갈 때는 뭘 듣고 간 기억이 없습니다마는 이상한 힘에 의해서 오늘도 나오는 것입니다. 주일을 그냥 지나치면 불안하고 읽지 않은 성경책을 앞에 두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미 바뀐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었지만 다만 구원 받은 사람답지 않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알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 할 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이렇게 전합니다. 이렇게 전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전합니다마는 사실은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긴 것과 같이 저 영혼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는 간절한 기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기도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고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긍휼을 구하는 기도 외에 사실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믿었는데, 왜 너는 안 믿냐’이런 말을 안 하셔야 맞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똑똑하고 지혜가 있어서 예수님을 한 번에 알아봤는데, 너는 왜 못 알아보느냐하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음을 아셔야합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이 근본적으로 가기고 있어야할 자세는 ‘저 같은 것을 구원해 주셨다는 말입니까? 저는 한 번도 주님을 찾은 적이 없고 손을 내 민 적이 없는데 이 자리까지 이끌었단 말입니까?’하는 이 감격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그리스도를 모드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을 대하기에 죄스러움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과 무엇이 다르기에 저 같은 자를 데려다 놓았습니까? 저 사람은 어느 모로 보나 저보다 낮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학벌로나 집안의 배경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나 보다 훨씬 나은데 저를 먼저 불러 고쳐주셨습니까? 하는 감동과 책임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35-36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맹인은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주여 그가 누구오니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눈을 뜨게 했지만 맹인은 예수님을 못 알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눈을 뜨게 한 분을 알고는 있습니다. 알 수 있는 것은 옆에 사람이 이야기했을 수도 있고 눈을 떴을 때 예수님이 옆에 계실 수 도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는 본인 보다 옆에 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맹인이고, 우리는 이미 죽은 자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막8:22-24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그가 눈을 떠서 봤더니 무엇이 보인다고 했습니까? 사람을 보았다고 했는데 사람을 무엇으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나무 같은 것이 걸어 다닌다고 했습니다. 눈을 떠는 것과 눈을 뜨고 보고 인식하는 것과는 상당한 시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흡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었는데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것과 그것에 대한 인식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구원을 얻는 것과 확신을 동시에 얻는 것은 통계적으로 볼 때 대부분 중간에 믿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들락날락 거리시거나, 부모님의 강요에 억지로 따라오거나, 교회 절기 때나 예의로 오시거나 하시는 분들이 구원을 받는 경우에 대부분 언제 구원을 받았는지 특별히 꼬집어 이야기할 수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내 삶의 주인이시며,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 하는 고백을 하실 때, 그가 어떤 결단을 하고 고백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고백을 하나님이 받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함께하시며 성령님을 통해 간섭하셨으며, 우리를 빚어내시고 다듬어 내셨는가를 보셔야합니다. 말하자만 그가 선택한 모든 자들에게는 이런 고백을 받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을 언제로 보아야합니까? 그것은 열심을 냈느냐, 안 냈느냐 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눈을 떴느냐 안 뜯느냐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떴다는 것은 하나님이 감각을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이 여기에 와 있다는 자체가 구원을 받았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아내가 교회를 다니지만 그래서 더욱이 예수쟁이를 증오할 수도 있겠지만 옆집 아파트에 교 패가 붙어 있으면 상종도 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교회를 나온 겁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성도님들이 ‘감사합니다. 드디어 예수를 믿기로 했군요, 하나님을 참으로 은혜로우신 분이시지, 드디어 당신을 움직여 섰군요.’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속으로 말합니다. ‘내가 오늘 나오고 싶어서 나온 줄 아십니까, 부인이 하도 성화를 부리고 내가 크게 잘 못한 것도 있고 비위를 맞추어주기 위해서, 그리고 한 번 나와 주고 오후 내내 편안하게 쉬기 위해서요, 그런데 뭐 하나님이 내 마음을 움직여?’
여러분 누구 말이 맞습니까? 성도들 말이 맞습니까? 교회 새로 오신 분의 말이 맞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적개심을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참 이상한 것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품지 않은데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적개심을 품는지 모릅니다. 왜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죄가 도덕적 윤리적인 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이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만은 꼭 거부함을 가지고 극악무도하게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내의 핑계를 대고, 어떤 상황의 변명거리를 삼아 교회에 들어오지만 이미 그 사람은 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신경을 쓸 수 도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이렇게 저번 주에 설교를 했는데, 이러다가 정말 하나님이 ‘너 몰라’이러면 어떻하나? 그래서 주일을 꼬박 꼬박 나갔는데, 영 찝찝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에 대한감각이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주일에 등산을 갔다 왔지만 마음이 편안합니다. 오늘 이런 저런 핑계로 교회 안 나간 것에 대해 뿌듯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교회 안 간 것에 대해 후회가 되거나 찜찜해서 신경이 쓰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는 이미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자는 크게 하나님의 감각이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불신자들은 ‘나 오늘 예수 믿기로 했어’그러면 ‘그래 참 안 됐다, 불쌍하네.’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나 호기심이나 항복도 안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먼저 고쳐놓고 어느 날 엔가 그 분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드디어 인식시키는 날이 옵니다. 이런 일은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드디어 그 날에는 우리가 눈물 콧물 쏟으며 회개하는 날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우리가 새로 거듭나고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있고 구원이 이루어졌는데도,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에 머물러 있으면 성장하는 일에 크게 지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설교할 때 ‘아 나는 자신 없다, 어떻게 저렇게 살라는 말인가’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혹 있을 것 같아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이것으로만, 이런 방법으로만 구원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사실 우리의 삶속에서 젖어들 때, 하나님을 향해 감사와 감격이 있고 세상을 향해 동일하게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긍휼을 부어줄 것을 간곡히 기도하는 자로 세워 질 것입니다.
문제는 태어났으면 ‘성장’하자는 것입니다. 성장을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이 갑니다. 성장은 믿음이 자라는 것과 같이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문제에 대해 목에 핏대를 올리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믿음에 대해서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커는 것은 그냥 되는 일이 아닙니다. 먹어야하고 커가는 정도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하듯이, 영의 양식을 먹여야하며, 말씀의 영역에서 머물기 위해 말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그 받은 구원으로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 얼마나 엄청난 기업이 주어지는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반전의 드라마를 연출하는지, 그 나라에서 영원히 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님을 앎으로 그 영광 속에 거하는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