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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3월 15일 주일
[(자) 사순 제4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파스카 성야에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받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세례 준비로 둘째 수련식을 이 주일에 거행한다. 이 수련식에서는 고유 기도문과 고유 전구를 사용한다.>
오늘은 사순 제4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늘 전례에서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기회를 가집니다. 입당송에 나오는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라는 성경 말씀에 그 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기쁨은 희생과 극기를 실천하며 주님 수난의 길에 기꺼이 함께하려는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하여 사순 시기에 요구되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를 더욱 새롭게 합시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사이의 아들 가운데 막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세우게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며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 눈먼 사람을 보시고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게 하시어 보게 하시자, 눈이 멀었던 이가 예수님을 믿고 경배한다(복음).
제1독서
<다윗이 이스라엘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6,1ㄱㄹㅁㅂ.6-7.10-13ㄴ
그 무렵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이 6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10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12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5,8-14
형제 여러분, 8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9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10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11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
12 사실 그들이 은밀히 저지르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
13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14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5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0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11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12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18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19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20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22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23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이다.
24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25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26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 하고 그들이 물으니,
27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28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29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30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31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32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33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39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지난해 3월 유례없는 산불로 안동교구의 여러 지역이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아름답던 자연과 삶의 자리를 집어삼킨 화마는 쉽게 치유될 수 없는 흉터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바라보면 절망스럽기만 한 검게 타 버린 숲이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뜻밖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푸른 희망입니다. 숯처럼 그을린 숲 바닥 사이로 새싹이 조용히 고개를 들고, 죽어 버린 듯한 숲은 생명의 숨을 들이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복구하기보다 자연의 회복력을 믿고 기다릴 때, 숲은 스스로 되살아날 뿐만 아니라 생명 또한 더욱 다양해진다고 합니다.
자연스러움이란 결국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단호히 경고하시지만, 그 엄중함 뒤로 오늘 복음의 왕실 관리처럼, 당신을 향한 믿음으로 내맡기는 이들에게 새로운 회복을 위한 희망과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돌려 그분께 돌아갈 때, 하느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펼쳐 주십니다. 상처로 얼룩진 자리 위에 새 생명을 일으키시고, 고통 속에서 울부짖던 이들에게 잔잔한 기쁨을 선물처럼 내려 주십니다. 이는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결국 우리를 살리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깊은 마음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우리 일상에도 마음이 재처럼 타들어 가는 때가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 속에서 견뎌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자연스럽게 하느님께 내맡겨야 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신 그분께서 우리가 변할 수 있도록,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든든히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김재형 베드로 신부)
그분의 따뜻한 손길에 우리 인생이 활짝 꽃피어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치유과정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동은 꽤 색다른 것이어서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그분께서는 땅에 침을 뱉습니다. 진흙으로 갭니다. 그 지저분한 것을 눈 먼 사람의 눈에 바릅니다. 눈먼 사람이나 그 부모 입장에서 보면 꽤 불쾌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냥 말씀 한마디로 간단히 고쳐주시지. 그도 아니라면 깨끗한 물이나 기름으로 눈을 닦아주면서 치유시켜 주면 좀 좋아? 그렇게 하면 모양새도 좋을 텐데, 왜 하필 침이냐구? 왜 더럽게 침을 흙에 개어서 눈에 바르느냐 말야?’
눈먼 사람 입장에서도 난감했을 것입니다. 침에 갠 진흙을 눈에 바르니, 얼마나 느낌이 답답했을까요? 눈도 따가웠을 것입니다. ‘도대체 뭘 하시려고 그러시나? 내 눈 갖고 장난치려고 그러시나?’
그렇게라도 하고 즉시 눈이 떠졌으면 아무 군소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난감하게 해놓고 그게 다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시는 말씀은 눈먼 사람의 속을 더 긁어놓았습니다.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그간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치유과정을 보면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그분의 옷깃만 만져도 병이 낫곤 했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로 즉석에서 오그라든 손이 펴지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으면 죽었던 사람이 일어서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여간 복잡하지 않습니다. 지저분하게 침으로 갠 흙을 바르셨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근처 아무 연못이나 찾아가서 씻으라는 것이 아니라 굳이 실로암 연못을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럴경우 자존심이 상해서, ‘이게 도대체 뭐야?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뭐야?’라고 소리 지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눈먼 사람은 예수님의 치유과정에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능동적이고 협조적입니다. 그 결과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입습니다.
오늘 눈먼 사람이 겪은 축복의 기적, 그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침과 진흙으로 제조하신 기적의 고약 때문일까요?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비위생적인 고약으로 인해 병이 더 악화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침과 진흙으로 만든 고약을 바르는 행위는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위가 상징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재창조’, ‘말씀의 강생’, ‘인간의 자연생활에 대한 은총의 주입’과도 같은 해석. 여기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 그래도 보이지 않는 눈에 진흙을 바름으로서 그 눈을 더 확실하게 막아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눈에 진흙을 바른 것은 다른 생각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바라보지 말고,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예수님 자신만을 따르라는 초청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향한 전적인 믿음, 그분께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 그분 외 부차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차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오랜 세월 눈 못 뜬 상태로 어둠 속에, 죄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생명과 희망의 창을 하나 열어놓으셨습니다. 그 창으로 하느님 사랑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둠뿐이던 우리 인생이었으나 빛이신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우리 인생이 활짝 꽃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랜드마크(Land Mark)’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는 에펠탑, 중국 북경은 만리장성, 미국 뉴욕은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립니다. 저는 미국 텍사스 달라스의 랜드마크를 말하라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을 떠올리고 싶습니다. 나라에 랜드마크가 있듯이, 세계의 미술관에도 그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는 ‘모나리자’가 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는 ‘돌아온 탕자’가 있으며, 뉴욕현대미술관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작품을 통해 사순 제4주일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고흐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고흐 역시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신학교 입학에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의 열정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특별전도사’의 자격으로 혹독한 탄광촌으로 자원했습니다. 고흐는 깨끗한 사택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주고, 자신은 탄을 캐다 다친 광부들이 머무는 숙소에서 지냈습니다. 월급은 모아 가난한 아이들에게 빵을 사주었고, 광부들과 함께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가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탄광촌에 예수님이 오셨다.” 그러나 얼마 뒤, 그를 파견했던 교회는 뜻밖의 결정을 내립니다. 고흐를 파면하였습니다. 전도사의 옷차림이 남루하고, 얼굴이 더럽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먹고 지낸다는 이유로 ‘전도사의 품위’를 실추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흐는 탄광촌을 떠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화려한 교회 건물 안에만 계신 분이라면, 나는 그런 예수님은 믿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그림으로 전하기로 결심합니다.
고흐의 그림 속에는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에 나오는 농부들은 초라하지만, 정직한 노동으로 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식탁은 제대와는 달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가장 깨끗한 자리가 아니라 가장 진실한 자리에 계십니다. 「성경책과 에밀 졸라」에서 펼쳐진 성경의 말씀은 이사야 예언서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그는 멸시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고통을 아는 사람이었다.” 고흐는 말씀을 덮지 않았고,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말씀과 고통의 현실을 나란히 두며, 말씀이 인간의 상처 속으로 내려와야 함을 고백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서는 농부보다 태양이 더 크게 그려집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 하늘에는 별이 소용돌이치듯 빛나지만, 마을 한가운데 있는 교회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습니다. 고흐는 일부러 교회를 어둠 속에 남겨 둡니다. 하느님의 빛이 교회 건물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스럽고 불안한 밤하늘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고백입니다. 고흐의 삶을 노래한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노래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당신이 살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혼탁했다.” 고흐가 너무 약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의 빛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의 말씀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다윗은 형들 가운데서 가장 작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는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본다고 하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사순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가! 이 말씀은 저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교회의 질서와 품위를 지키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하느님께서 먼저 바라보시는 마음과 고통을 충분히 보고 있는가! 사람들의 시선에 맞는 사제가 되려 하느라,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용기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고흐를 파면했던 교회의 시선이 혹시 오늘의 내 안에도 남아 있지는 않은지, 장미 주일의 기쁨 속에서 조용히 저 자신을 성찰해 봅니다. 교회에 불이 꺼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이미 밤하늘에 별을 켜 두셨습니다. 오늘 장미 주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둠 속에서도 기뻐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 세상의 눈이 아니라 주님의 눈으로 보게 하소서. 어둠 속에서도 이미 빛을 켜 두신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우리들 또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볼 수 있는 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0-33)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요한 9,3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마음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믿음
희망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희망
사랑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사랑
살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살림
사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사람
하느님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하느님
오늘의 성인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Clement Mary Hofbauer)
신분 : 신부, 선교사
활동연도 : 1751-1820년
같은이름 : 글레멘스, 끌레멘스, 클레멘쓰, 클레멘트
체코 동부 모라비아(Moravia)의 타스비츠(Taswitz)에서 1751년 12월 26일 태어난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Clemens Maria Hofbauer)의 본명은 얀 드보락(Jahn Dvorak)인데 독일 이름인 호프바우어로 개명하였다. 그는 푸주한인 부모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빵 굽는 기술을 배웠다. 비록 어려운 생활을 하였으나 그는 항상 은수자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얼마 동안은 로마(Roma)와 빈(Wien) 사이를 오가는 방랑생활을 하다가 오스트리아의 브루크(Bruck) 근교 프레몽트레 수도원에서 빵 굽는 일을 하다가 마침내 은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제국의 요제프 2세(Joseph II) 황제가 은수소들을 폐쇄하였을 때, 그는 빈으로 돌아와서 다시 빵 굽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가 친구인 베드로 쿤즈만(Petrus Kunzmann)과 함께 이탈리아 티볼리(Tivoli)의 주교 키아라몬티(Chiaramonti, 후일의 교황 비오 7세)의 승낙을 받고 재차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그 후 빈과 로마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구속주회에 입회하여 178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파견되었으나, 황제가 많은 수도회를 축출하였기 때문에 구속주회 수도원 건립이 불가능하게 되어 돌아오는 길에 옛 친구인 쿤즈만을 만나 평수사로 입회시켰다. 그 후 교황대사의 요청에 따라 그들은 폴란드의 바르샤바(Warszawa)로 갔으며, 그곳에서 20여 년 간 선교활동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는 늘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일했으며, 고아원과 학교를 세웠고 독일과 스위스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나폴레옹이 수도회를 탄압할 때 그와 그의 동료 구속주회 회원들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각자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는 끝내 빈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의 이탈리아 구역에서 일하였으며, 우르술라회의 지도신부로도 활약하면서부터 그의 설교와 성덕 그리고 지혜와 고해신부로서의 이해심 등이 그에게 높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빈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였고, 독일 지역의 수도생활 재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는 요셉주의자들의 그릇된 사상과 대치하여 힘찬 싸움을 하였다. 그는 1820년 3월 15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1888년 1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09년 5월 20일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14년 빈의 사도이자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라이문도 (Raymund)
신분 : 수도원장
활동지역 : 피테로(Fitero)
활동연도 : +1163년
같은이름 : 라이문두스 레이먼드
에스파냐 북동부 아라곤(Aragon)에서 태어난 성 라이문두스(Raymundus, 또는 라이문도)는 타라조나(Tarazona) 주교좌성당의 참사회원으로 활동하다가 프랑스로 가서 시토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그는 에스파냐로 파견되어 나바르(Navarre)에 피테로 수도원을 설립하고 원장의 소임을 수행하였다.
당시 그곳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에스파냐와 무어인들간의 전투의 최전방이었다.
1157년 말과 1158년 초 사이에 칼라트라바(Calatrava)의 전초기지인 톨레도(Toledo)에 대한 무어인들의 대규모 공격이 있을 때 그 도시의 군인이 절대 부족하여 왕과 온 도시가 위급한 상황에 빠졌다.
이때 성 라이문두는 카스티야(Castilla)의 왕 산초(Sancho)를 설득하여 도시를 수호할 군대를 만들었다.
그는 톨레도의 대주교의 도움으로 사람들을 모아 대규모의 군대를 조직하여 무어인들에게 맞섰다.
결국 무어인들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그 후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규칙을 따르는 칼라트라바의 기사회를 조직하였다.
위대한 기사와 수도자로서 존경과 사랑을 받던 그에 대한 공경은 1719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승인되었다.
성녀 마트로나 (Matrona)
신분 : 하녀 순교자
활동지역 : 테살로니카(Thessalonica)
활동연도 : +350년경
같은이름 : 마뜨로나
성녀 마트로나는 테살로니카의 어느 유대인 여주인을 모신 하녀였는데, 자신은 그리스도를 몰래 섬기는 그리스도인 이었으므로 매일같이 비밀리에 열리는 기도 모임에 참석하다가 그녀의 여주인에게 그리스도인임이 발각되었다.
성녀 마트로나는 여주인으로부터 모진 매를 맞아 죽었다.
이때 그녀는 용감하게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자신의 순결한 영혼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Louise de Marillac)
활동년도 : 1591-1660년
신분 : 과부, 설립자
지역
같은 이름 : 루도비까, 루이즈, 루이자, 마리악
1591년 8월 프랑스의 뮤(Meux)에서 태어난 성녀 루도비카(Ludovica)는 아기 때에 어머니를 잃었으나 수녀들의 도움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이윽고 그녀는 안토니우스 레 그라(Antonius Le Gras) 백작과 결혼하여 12년 동안 행복한 생활을 한 후 남편과 사별하고 말았다. 한동안 실의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뜻하지 않게도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로부터 영적지도를 받는 계기가 생기면서부터 일대 전환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녀는 잘 알고 있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us, 9월 27일)를 찾았다. 그 당시에 성인은 ‘애덕회’를 조직하여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빈첸시오 성인은 성녀 루도비카의 소망을 받아들여 ‘애덕의 수녀회’를 설립하여 초대원장으로 루도비카를 임명하였다. 이 수녀회가 오늘날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라고 불리는 수녀회이다. 그때부터 그들의 수도원은 병원이요 성당은 교구의 모든 성당이며 봉쇄 구역은 길거리가 되었다. 회칙 초안도 그녀가 작성하였다. 그녀의 명석한 두뇌와 관대한 사랑은 이 수녀회의 급속한 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1660년 3월 15일 성녀 루도비카가 파리에서 임종할 때 프랑스 내에는 이미 40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병자와 가난한 이를 돕는 구호소는 수없이 많았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봉사하라.…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말 것이다. 그대가 섬기는 이는 곧 그리스도이시니…” 그녀는 1920년 5월 9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3월 1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60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사회복지사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론지노 (Longinus)
신분 : 군인 순교자
활동연도 : +1세기경
같은이름 : 론지누스, 론기노, 론기누스
전설에 의하면 성 론지누스(또는 론지노)는 빌라도의 지시를 받고 주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다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백부장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지진과 그 밖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하며 몹시 두려워했다는 바로 그 백부장이라 한다.
그 후 그가 병들어 누웠을 때, 창에 묻은 주님의 피를 자기 눈에 갖다 대자마자 병이 나았음을 보고 군인 생활을 포기한 뒤 사도들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지내다가 박해를 맞았다.
집정관은 그의 이를 뽑고 혀를 잘랐으나, 그의 설교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는 도끼를 들고 이방인들의 신상을 때려 부수면서 “이게 무슨 신들이람!” 하고 외쳤다.
그러자 집정관은 즉석에서 참수하도록 명하였다.
그의 유해는 만투아(Mantua)에 보존되어 있고 성인으로서 공경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