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4년 가해 4월10일 (자)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수원] 말씀에 대한 생명력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예레 20, 10 - 13
† 복음 : 요한 8, 31 - 42
★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통하여 아브람을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 곧
'신앙인들의 조상'이 되게 하시며 그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 그리고
그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우신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
선언하시자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들며 논박하려고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젊은이들에 대한 교회의 좋은 선물 가운데 하나가 '청년 성서 모임 연수'라는
사실을 본당에서 청년들을 사목하며 자주 실감합니다. 연수를 마치는 파견
미사 뒤 인사하러 온 청년들을 만날 때 눈부시게 빛나는 그들의 얼굴을 대하며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그들의 표정에는 참으로 깊고 무거운 허물을 벗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과 평화가 넘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머리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순 시기를 '은총의 시간'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성서 모임 연수와 마찬가지로,
이 기간 동안 지난날의 습관과 무거운 허물에서 벗어나 온전하고 생생하게
살아가는 순간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리학의 세계적인 거장으로 신앙과 심리학을 조화시키려 했던 폴 투르니에는
기계적으로 생명을 이해하는 과학자들에게 경고하며, 『인간의 가면과 진실』
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은 그 이상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메커니즘들의 지독한 단조로움에도 불구하고, 간헐적 폭발이 일어나
기계적 행위의 족쇄가 끊어지는 것처럼 생명은 우리 존재의 깊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재탄생한다. 이런 식으로 실제 인간은 석고처럼 굳어 버린
등장인물을 갑자기 변모시키며 새로운 얼굴을 새겨 넣는다."
또한 투르니에는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의 대표적인 저서 『창조적 진화』
의 유명한 말을 인용합니다. "지성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완고하게 거부하듯이, 우리도 지난날의
나쁜 습관이나 그릇된 선입관, 기계적 사고방식 등에 묶여 자신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할 기회를 놓치곤 합니다. 이 은총의 시기에 진정 빛나고 생기 있게
하는 삶이 무엇인지 깊이 깨달아야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천상에 마음을 두라.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4월10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요한 8,51-5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 8,51-59
천상에 마음을 두라.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앞서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요한1,1-2)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11,3)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음이
있어서 주님을 따랐다기보다 따름으로써 믿음이 굳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입니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다른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에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우십시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머리 조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인간적인 좌절과 실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하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성공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비둘기가 콩밭으로 날아가는 것은 비둘기 마음이 콩밭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나무위로 오르는 것은 원숭이 마음이 나무위로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마음이 가 있는 곳으로 따라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좋은 곳에 두어야 합니다. 천상에 마음을 두면 지금의 모두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시며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어 주시고 “자손을 많이 낳을 축복”을
허락하시며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맺어주신 일방적 계약입니다. 그야말로 하느님
측면에서 본다면 손해를 보는 계약입니다. 그러나 그 계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둘 곳은 분명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주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7).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나의 눈썰미를 키워봅시다.
2014년 가해 4월10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 8,51-59
저는 주로 끝기도를 하고나서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걷다보면 저절로 운동도 되고, 묵주기도 20단을 바치는데 그리 힘들지가
않지요. 그런데 요즘 제가 걷는 길에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벚꽃이
만개를 해서 밤에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젊은 연인들도 많고,
가족이 나와서 사진을 찍으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지요.
어제도 많은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면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오던 젊은 연인 중에 한 명이 저를 보더니만 “신부님!”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 시간에 그리고 사람들이 많은 틈 사이에서
저를 알아본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신부님”이라고 크게 부릅니다.
며칠 전의 일도 떠올려 집니다. 그때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동네를 돌아다니며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맞은편에서 제가 아는 자매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모른
척하고 지나가기가 뭐해서 제가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지요. 그런데
이 자매님의 표정이 ‘누구지? 왜 나한테 인사를 하지?’라는 표정입니다.
그래서 “저, 조명연 신부에요.”라고 하자,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 신부님! 사복 입고 계시니까 못 알아봤어요. 웬 젊은 아저씨가 제게
관심이 있어서 인사를 하나 했죠. 호호~~”
누구는 도저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인데도 알아보고, 누구는 먼저 인사를
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눈썰미가 좋아서 그렇겠지요. 그런데 이 눈썰미도
어느 정도의 관심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만약 눈썰미가 없다면 대신
깊은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절대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애쓰십니다. 그런데 직접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으십니다. 또한 직접 당신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의 이웃을 통해 당신께서 함께 하시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웃을 나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로
생각하면서 사랑보다는 미움으로 대하고, 이해하기보다는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유다인들을 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나 예언자들보다 예수님을 훨씬 못한 존재를 생각하면서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놀라운 표징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주어도 그러한 부정적인 마음으로 인해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썰미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도 똑같은
모습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떠나지 않았을 때, 자신의
작은 생각만을 내세워 판단하고 단죄하려 할 때,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썰미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나의 눈썰미를 키워봅시다. 만약 도저히 키울 수 없다면 내 마음이라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주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이른바 사랑을 경험하려면 당신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독특함과 아름다움에 민감해야 합니다(앤소니 드 멜로).
'A. P. 로셴코, 아브라함이 이삭악을 바침'. 그의 믿음을 봅니다.
꿈
초등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장차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물었습니다. 대통령, 과학자, 의사, 판사, 장군, 경찰관 등등 참으로 다양한
직업군이 나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이를 자신의 꿈으로 생각했지요. 저 역시
초등학교 다닐 때, 장래 희망을 물으면 항상 ‘신부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신부님’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 꿈이 완성된
것인가요? 예전에는 목표가 꿈인 줄 알았지요. 그래서 신부가 되면 꿈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꿈은 목표
너머에 있는 것이지요. 목표를 너머서 있는 어떤 이상이 바로 진정한 내 꿈인
것입니다.
요즘 보면 목표만 있는 학생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무엇이 되겠다.’라고
말하지만, 목표 너머에 있는 비전이 없는, 그저 돈 많이 벌고 사람들의
인기만을 얻고자 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게 되는지요. 오로지 자기 한 몸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것이 꿈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 초라한 삶입니까?
목표 너머에 있는 진정한 ‘꿈’을 키워야 합니다.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지,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에 맞게 움직이는 진정한 하느님 나라를 만들 것인지를
꿈꾸는 것. 이 꿈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실패한 인생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4월10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창세17,3-9 요한8,51-5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 8,51-59
실패한 인생들(?)
어제 광희문과 당고개, 새남터 순교성지 세 곳을 순례하며 미사도 드렸고
기도도 했으며 확인 도장도 받았습니다. 새남터 순교성당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 묵주기도 15단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9분의 성인과 '하느님의 종' 이성례(마리아)가 순교한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는 거룩한 땅입니다. 또 순교성지 새남터 성당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아홉 분 등 총 14분의 성인유해가 안치된 곳입니다.
순교성인들의 소개 글을 읽으며 우선 확인하는 것이 생몰연대입니다.
거의 모든 순교성인들이 20-30대 한창 나이에 순교하셨습니다.
무려 저는 이분들보다 2-3배는 살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과연 오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분들의 삶을 보면서 언뜻 스친 생각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한결같이
'실패한 인생들'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참하고 불행한 불쌍하기 짝이
없는 실패한 인생들이라는 것입니다. 저희 수도자들 역시 세상적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들(?)'이라 쉽게 이분들의 삶에 동병상련의 느낌도 들곤 합니다.
세상적으로 실패한 인생들로 하면 예언자들은 더 말할 것 없고 성경의 대부분
인물들이 실패한 인생들입니다. 뭐니뭐니 해도 실패한 인생들의 원조로 하면
예수님일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실패한 인생들이 행복하다고(마태5,3-12)
선언하십니다.
과연 순교성인들이 실패한 인생들일까요?
이분들이 계시지 않다면 교회는, 세상은 얼마나 가난하고 삭막할까요?
부박하고 천박하고 각박하고 경박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생생한 이정표와도 같은 순교성인들이 계시기에 많은
이들이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하느님을 찾고 위로와 치유, 평화와 기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순교성인들은 결코 실패한 인생들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사는 분들입니다.
도대체 이분들이 온갖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고 항구히 주님을 섬기다가
순교할 수 있는 비밀은 어디 있을까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중심에 깊이 영혼의 닻을, 즉 믿음의 닻, 희망의 닻,
사랑의 닻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내밀한 믿음과 사랑의
관계만이 세상 것들의 유혹에서 벗어나 초연의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이분들은 결코 세상의 밝고 가볍고 화려한 것들을 추구하지 않았고 깊이의
하느님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이분들의 내적 충만의 행복과 기쁨을
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세상적으로 '실패한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 항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중심에 깊이 믿음의 뿌리 내리고
있었기에 가능했고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Amen, amen, I say to you, before Abraham came to be, I AM)“
'하느님 이름(I AM)'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애초부터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렸던, 아니 '하느님(I AM)' 이심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아브라함의
주님과의 내밀한 깊이 역시 상상을 초월합니다.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예수님처럼 아브라함 역시 하느님의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을 받았던 '기도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려 하느님과 하나 되어
사셨기에 아브라함은 어떤 곤경 중에도 실패한 인생 여정에 항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뿌리의 깊이에 닿았던 아브라함이요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하느님과 아브라함간의 계약은 예수님을 통해 완성됨을 봅니다. 실패
인생이냐 성공 인생이냐의 잣대는 순전히 하느님과의 내적 깊이에
달려있습니다. 하느님 뿌리에 닿아있는 깊이의 사람들, 비록 실패 인생듯
하지만 성공 인생입니다. 세상 그 누구, 무엇도 이런 깊은 내면에서 샘솟는
영원한 생명의 평화와 기쁨을 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중심에 깊이 영혼의 닻을 내려
내적 충만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마음은 가꾸는 것이어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마음은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꾸는 것이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4월10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요한8,59)
---
우리 인류는 너무도 많은 폭력으로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왔고, 그 폭력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폭력 안에는 서로가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인 우리가 있습니다. 어떤 형태, 어떤 내용의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없고,
그것은 죄악입니다.
일단 복음적으로 폭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무엇을 폭력이라고 할까요? 한마디로 폭력은 상대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폭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언어의 폭력이던 물리적인 폭력이던, 그 어떤 표현 가능한 폭력이던 간에,
하나같이 모두 일그러진 마음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라는 말을 덕담처럼 들어왔던 문화 속에서 우리는
자라왔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이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감정이나 마음의 움직임을 비록
숨길 수는 있다 하더라도, 이미 일어난 감정은 그대로 남기 마련입니다. 마음은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앞날의 시간을 위해서 ‘가꾸어야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폭력에 대한 식별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민감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필요한 것조차 폭력이라고 단정하는
수도 있고, 때로는 폭력임에도 자연스럽게 방관의 태도를 보입니다.
부모나, 스승이 진정으로 자녀나 제자를 위해 매를 들었다면 그것은 폭력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매를 들어야 하는 이의 마음이 더욱 아픈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자리나 위치가 주는 권위를 폭력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병적 히스테리로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들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인성교육이 전혀 안 된 선생들의 폭력이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했던 이들의 병든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그들은 분명히 돌을 던져서라도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는 공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돌을 든 명분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에 대하여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들고 일어선 명분 뒤에는 진실에 대한
몰이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뒤틀린 생각으로 잘못된 명분을 만들
수 있고, 잘못된 분위기와 힘에 공감할 수 있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음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기도해야 합니다. 올바른 식별의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말씀에 담긴 생명력
2014년 가해 4월10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복음 : 요한 8,51-59
< 말씀에 담긴 생명력 >
우리는 말을 먹고 자랍니다. 어떤 말을 듣고 자랐는지에 따라 그 결실이
달라집니다. 미국 어느 교도소의 재소자 90%가 성장하는 동안 부모로부터
“너 같은 녀석은 결국 교도소에 갈 거야”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보이는 대로 대접하면 결국 그보다 못한 사람을 만들지만, 잠재력대로
대접하면 그보다 큰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희망적인 말을 습관화해야 합니다. 특히 자녀에게는
격려의 말이 보약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감동적인 예화가 있습니다. 미국 존스 홉킨스병원 소아신경외과 과장인 벤
카슨은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수술에 성공한 의사입니다. 국내에도
소개된 “크게 생각하라”의 저자인 그는 흑인 빈민가 출신의 열등생에서 세계
최고의 소아과 의사로 성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하루는 그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오늘의 당신을 만들어 준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어머니 쇼냐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흑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때, ‘벤, 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려주면서 내게 격려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처럼 큰 인물들 뒤에는 그들을 먹여 키운 격려의 말이
있습니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격려의 말을 했을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출처: 무지개 원리]
모든 사람이 나에게 말을 한다고 해서 다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에는 그 사랑의 힘이 들어있습니다.
아니 그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과 존재가 들어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여 무언가를 해 줄 때, 나는 그것 자체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나의
생명과 존재를 함께 얹어서 주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밥상을 정성스럽게 차려 주었는데 아이가 반찬이 맘에
안든다고 밥 먹기를 거부한다면, 어머니는 분명 화가 날 것입니다. 그 화가
나는 것은 자녀가 밥을 먹지 않아서 굶는 것이 안타까워서가 아닙니다. 나의
성의가 무시당하는 것 때문인 것입니다. 밥을 차려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옷을 입혀 줄 때는 그 행위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어머니의 존재도
함께 주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받고 해 주는 것과 어머니가 해 주는 것이
비록 같은 일일지라도 자녀가 느끼는 것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주는 선물을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면 선물을 주는 사람은
자신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그 선물 안에 자신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성체’입니다. 그 성체는
겉보기에는 밀떡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당신의 존재와 생명을 넣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체가 우리에게 양식이 되어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인 힘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말씀’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은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지도록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중에도 그분의 사랑의 에너지가 스며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유다인들은 이 말에 크게 반발을 가지지만, 말씀 안에
당신의 생명을 함께 주시고 계심을 깨닫는다면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라고 따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한 어머니의 말이 아들의 삶을 온통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하느님이신 그분의 말씀 안에는 어떠한 힘이
숨어있겠습니까? 말씀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지키는 이’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하신 이유는, 그 말씀을 지키는 이라야 그 말씀을 믿고
사랑했음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 보면 말을 듣고 변화한 물의 모양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의 말은 사랑스런 모양으로, 미움의 말은 미운 모양으로 물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사랑 자체의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읽든지, 쓰든지, 묵상하든지 그
순간 동안 하느님의 생명력인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또 사람들을 만날 힘이 없을 때면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에너지를 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에너지가 다 떨어지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어 질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청하는 것처럼 매일매일 말씀을 통해 내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채워 넣는 시간을 꼭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고 한
이유는 당신의 말씀에 당신의 영원한 생명이 들어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사순 제5주간 목요일
2014년 가해 4월10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 8,51-59
한국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보다는 ‘서열’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보다는 서열과 직책, 나이와 신분에 의해서 의사를 결정하곤
합니다. 이것은 ‘長幼有序’와 같은 동양적인 사고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직과 서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집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군대, 조폭, 검찰과 같은 곳이 그렇습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주교, 사제, 평신도의 구별이 있고, 직책과 신분에 따라서 의사가
결정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다툼이 있을 때 종종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이도 젊은 놈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나이가 무슨 벼슬입니까? 나이를 드셨으면 나이 값을
하십시오. 내가 예전에 너의 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사람이다.’ 일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그 일이 원칙과 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인지, 공정하고, 올바른
것인지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원칙과 법은 따지지 않고
감정에 따라 움직이곤 합니다. 그래서 서열과 직책으로 일의 시비를 따지려고
합니다.
시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천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오니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이옵니다.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풀잎이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열과 직책, 신분과 나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서열, 신분, 직책, 나이라는 틀에 맞추어서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서열이 높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대사제인
가야파와 안나스와 같은 존경을 받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나 사두가이파와 같은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시골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과 대화를 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 다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유와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것에서는 찾을 수 없는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분의
생각과 사고는 온 우주의 질서를 바꿀 수 있을 만큼 획기적이고
창의적이었습니다.
어제는 예비 신학생 담임 부제님들과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저는 곧 사제가
될 부제님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제 생활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사제가 자유로울 때 신자들은 그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마음껏 그 꿈을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1년이나 2년은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살 수 있지만 사제 생활은 평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쁘고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사제가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신앙인들이 기쁘게 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성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2가지의 이야기지만 주제는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계명을 지키면 후손들을
번성하게하고,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늘어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서 많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켰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졌습니다. 물론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 것입니다. 실제의 삶에서 우리는
언제나 두 갈래 길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고 따르는지, 아니면 나의 생각과 나의 목적을 먼저 생각하는지.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신앙인은 신성과도 벗이 되는 겁니다.
2014년 가해 4월9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 8,51-59
신앙인은 신성과도 벗이 되는 겁니다.
3차원의 제약 속에서 인간의 언어는 제대로 구사하고 전달되니 답답합니다.
그러나 이 제약을 벗어난 말을 곧 잘 하는 능력이 인간속성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사랑, 무한, 하늘과 대화 등 정신과 마음의 고차원인 인간속성입니다.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본다면 믿음이란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3차원 인간과 고차원 인간이 다르고 신앙인은 신성과도 벗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속성을 신성까지 믿어야 자연초월의 말씀에 공감이 절로 가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여한 8,58)”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