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道德經 10章 – 인간과 다른 본성 癸1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전기치유 능영아호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爲(知)乎 척제현람 능무자호 애민치국 능무위호 天門開闔 能爲雌乎 明白四達 能無爲(知)乎 천문개합 능위자호 명백사달 능무지호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생지축지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불재 是謂玄德 시위현덕
의역: 육체에 내재한 혼과 백을 우주어미의 본성과 합하여 분리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氣를 집중하여 극도로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 처럼 生氣가 넘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본성의 거울을 닦아 흠이 없도록 할 수 있는가? 생명체를 사랑하고 천하를 無爲로 대할 수 있는가? 천문이 열리고 닫힘에 암컷(谷神)처럼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지켜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가? 세상의 이치에 통달하였음에도 無爲로 할 수 있는가? 道는 언제나 無爲로 행하기에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道는 만물을 생하고 德은 길러낸다. 생하면서도 소유하지 않고, 이루면서도 기대지 않는다. 만물을 기르면서도 다스리지 않는다. 이것을 玄德이라 부른다. |
一에 대한 老子의 설명이 이어진다. 39章과 22章에서는 우주, 자연을 다스리는 一을 설명했다면 10章은 인간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載營魄抱一 能無離乎(재영백포일 능무리호)
營魄을 실어서 一을 껴안아 분리되지 않을 수 있는가? 이 문장을 해석하는데 의견이 분분하다. 주로 “혼백을 실어서”라고 해석하지만 구조를 분석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載동사 + 營魄(먼저 할 일), + 抱(동사) 一 (나중에 할 일)로 구성된 문구이다. 혼(魂) 정신을 다스리는 넋과 백(魄) 육체를 다스리는 넋을 하나로 묶어서 抱一한 후 能無離乎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이 문장에 숨겨진 의미는 매우 깊지만 잘못 이해하면 삼천포로 빠지기 쉽다. 營魄이 떨어져 있으니 반드시 둘을 하나로 묶어 분리되지 않도록 하라는 설명이 아니다. 營 따로, 魄 따로 떨어져 있기에 하나로 묶으라는 의도였다면 老子는 載營魄合一이라 표현했을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혼백이 한 쌍이며 하나를 품어(抱一) 분리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것은 전혀 다른 의미다.
부연설명하면, 육체의 영백(癸, 丁)은 한 쌍으로 冲氣를 이루지만 진정한 一이 아니다. 우주 어미가 만들어낸 一(癸1)을 껴안아 色界를 벗어나지 못하는 營魄(癸2)과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 道의 본성에 맞춰서 살라는 주장이다. 이 문장에 숨은 의미들을 찾아보자.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時空圖에서 癸1과 癸2의 차이를 살펴보았다. 癸1은 道의 자식이자 色界 이전의 본성이요 癸2는 癸1의 본성을 가졌지만 중력으로 변질되었기에 癸1에 미치지 못하는 본성이다. 물질, 명예, 권력에 익숙해진 혼백은 癸1을 품지 못한다. 인간의 육체는 영백이 冲氣로 충돌하여 생명을 유지한다. 자동차 열쇠를 꼽고 시동을 거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충격으로 차가 움직이고 휘발유를 주입하면 계속 달릴 수 있다.
문제는 따로 있다. 이 문장의 핵심은 癸2와 癸1을 분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육체의 영백을 표현해보자. 정신을 다스리는 魂(癸, 확장하려는 욕망)과 육체를 다스리는 魄(丁, 물질을 축적하려는 이기심)이 冲氣로 갈등한다. 중력이 강해지면 재물, 권력에 심취하고 척력이 강해지면 학문, 교육에 심취하지만 수시로 변한다. 老子는 색계에서 이루어지는 대칭구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 언제나 물질만 좋고 정신은 나쁘다는 식으로 나누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따라서 색계에 물들기 이전의 癸1을 품으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載營魄抱一 能無離乎에 숨겨진 뜻은 분별을 버리라는 것이다.
能無離乎
丁壬癸, 有物混成이 하나로 섞여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 물질과 정신이 한 쌍이며 동일한 것임을 인정하겠는가? 분별하지 않을 수 있는가? 不離輜重할 수 있는가?
專氣致柔 能嬰兒乎(전기치유 능영아호)
氣를 집중하여 극도로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老子가 생각하는 어린아이는 生氣의 충만함이다. 색계에 물들지 않아서 물질과 정신은 동일하며 분별도 모른다. 成人은 재물, 명예, 권력이 최고라 생각하지만, 어린아이는 먹는 것에만 충실 한다. 老子는 生氣 충만한 상태를 道가 만들어낸 一의 본성이라고 간주한다. 生氣를 퍼트려 만물을 이롭게 하는 神의 의지는 아이와 같다.
滌除玄覽 能無疵乎(척제현람 능무자호)
본성의 거울을 닦아서 흠이 없도록 할 수 있는가?
愛民治國 能無爲(知)乎(애민치국 능무위(지)호)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무위로 할 수 있는가?
天門開闔 能爲雌乎(천문개합 능위자호)
천문이 열리고 닫힘에 암컷처럼 할 수 있는가? 천문은 본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상태요 雌는 암컷으로 谷神의 다른 표현이다.
明白四達 能無爲(知)乎(명백사달 능무위(지)호)
세상의 이치에 통달하였음에도 無爲로 할 수 있는가?
이렇게 道를 설명한 후 玄德이라는 단어로 마무리한다. 아래에 해석하기 까다로운 문장이 나오기에 집중하여야 한다. 道德經을 이해하는 지름길은 道의 정체를 時間으로 규정하고 살피는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 시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공간, 열과 중력, 무와 대칭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時間으로 상상하고 老子의 문장을 살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0章 후반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37章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道常無爲(도상무위)
道는 언제나 無爲로 행한다. 道가 행하는 모든 것은 자연스럽다. 억지로 행하여 이루지 않는다. 無爲가 道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道가 무어냐 물으면 아직도 답하기는 어렵다. 무위를 실행하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神이라고 규정하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神의 정체를 모르지만 全知全能한 神이면 모든 의문점은 명확해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老子의 道는 천지창조 과정을 설명하면서도 전지전능한 神을 표현하지 않는다. 谷神, 玄牝으로 극히 불분명한 존재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이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특징이 시간이다. 時間만이 노자의 神과 유사한 성향이면서 無爲로 모든 것을 움직이고 변화시킨다.
而無不爲(이무불위)
억지로 행하지 않으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이루어낸다. 이런 대단한 행위는 오로지 道만이, 時間만이 할 수 있다.
이제 51章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자.
道生之 德畜之(도생지 덕축지)
道는 만물을 생하고 德은 길러낸다.
生而不有(생이불유)
생하지만 소유하지 않는다. 道는 기르면서도 소유하지 않는다. 만물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그 존재를 모른다.
爲而不恃(위이불시)
이루면서도 기대지 않는다. 해석하기 까다롭지만 의미는 차이가 없다. 도는 무위로 모든 것을 이루지만 집착하지 않는다.
長而不宰(장이불재)
만물을 기르면서도 다스리지 않는다. 天地는 不仁하다. 그럴 수 있는 존재는 神, 道, 時間 뿐이다. 시간은 우리의 모든 것에 관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是爲玄德(시위현덕)
이것을 玄德이라 부른다. 一의 다른 명칭은 玄德이다.
위 표현들의 속뜻을 정리하면, 시간은 우주에 生氣를 퍼트려 생하고, 기르고 성장하게 만들지만 특별한 의도나 목적이 없다. 빅뱅 후 138억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道의 정체를 살펴보니 저런 작용이다. 만물을 다스리지만 특별한 의도나 목적이 없다.
이제 10章 첫 문장을 다시 보자.
載營魄抱一(재영백포일)
비록 육체에 갇힌 영과 백이 따로 놀지만 둘을 묶어서 一의 본성에 따르도록 하면 안 되겠니? 時間은 아이처럼 부드럽지. 만물에 생기를 부여하거든. 그러면서도 항상 균형을 유지하며 한쪽으로 쏠리게 하지 않아. 따라서 시간을 이해하면 부드러운 아이처럼 될 수 있단다. 老子는 아이처럼 순진무구하게 살아갈 맘이 없느냐고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