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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묵상글 들 ( 연중 제5주간 월요일. - 치유와 구원 중에서 나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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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치유와 구원 중에서 나는?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오늘은 수많은 병자가 예수님께 몰려와 주님의 옷깃에 손을 대자
모두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치유를 받았다고 하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 치유를 받았다고 하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고 했을까요?
별 뜻 없이 그렇게 묘사한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닐 거라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병자들은 고작 치유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것임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는 구원을 주셨지 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는 것은 주시는대로 받는 것이지
주시지 않은 것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구원은 주시지 않고 치유만 주시고자 하셨겠습니까?
예를 들어 부모인 우리도 사랑으로 돈을 주지 돈만 주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데도 자식은 돈만 받고 사랑은 받지 않을 수 있지만
자식이 그럴지라도 부모는 사랑하기에 돈을 준 것이지 돈만 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치유와 구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 치유는 병의 치유라면 구원은 만남입니다.
치유가 존재의 한 부분이 치유되는 거라면 구원은 전 존재가 치유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병 하나만 치유되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치유만 받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도 구원이 아니며,
하느님을 만나서 육신 뿐 아니라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치유돼야 구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해봅니다.
제가 지금 중병에 걸렸는데 주님께서 치유와 구원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시면
주님과의 만남 없이 병의 치유만 선택하는 나와
병이 치유되지 않더라도 주님과의 만남을 선택하는 나 중에 나는 어떤 나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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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 생긴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이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복음>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민수 15,37-41 참조)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전류가 만땅 충전된 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접속되고, 저희에게 당신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먼저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항상 당신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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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구원을 받았다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 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삼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는 흉내를 내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 환영을 받지 못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을 받겠습니까? 옛날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새로워진 사실을, 구원을 받은 사실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5,15).하고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의 능력과 더불어 우리의 간절함이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를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을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복음선포는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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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성전과 사도직
솔로몬은 하느님의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풀려나와 약속의 땅에 들어온 지 삼백여 년 만이었고, 이것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 성전의 맨 안쪽에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궤를 모신 지성소를 두었습니다. 성전도 지붕을 금박으로 둘러 화려하게 지었거니와, 지성소에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고 일 년 중 속죄일에 대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레위 16,32-33). 그래서 두터운 휘장을 드리워서 지성소를 가려놓았습니다(탈출 26,32-33).
그런데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숨을 거두실 때 이 두터운 휘장이 찢어졌다고 증언하였습니다(마르 15,38).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뿐만 아니라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으며,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고 증언하였습니다(마태 27,51-52). 이렇게 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동한 사제들과 이들이 장악했던 유다교 성전 질서가 모조리 무너지고, 다시 살아나신 그분께서 되살리신 성도들의 몸이 새로운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 속에 담긴 이 계시적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 그리스 이방인으로서 신자가 된 교우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1코린 3,17; 6,19).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예수님처럼 살고자 믿고 노력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야말로 새로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전에는 성령께서 살고 계시면서 신자들을 기도와 행동을 통해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계신다는 진리를 가는 곳마다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교의 역사 안에서 성전은 단순히 전례가 거행되는 건물로서의 상대적 의미만을 지니게 되었고, 진정한 성전은 신자들의 공동체라는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성전 신학이 신약에 와서는 공동체 신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교회론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성전인 신자들의 공동체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용처럼 고통 받는 이들을 구원하고자 하면 사도직 활동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말 그대로 사도의 직무로서, 예수님께서 살고 일하신 대로 복음선포 활동을 계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의 사도직 활동이 과연 사람들로 하여금 손을 대고 싶어 할 정도로 사회적 매력이 있는지, 또 손을 대면 다 구원을 받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이 강론에 덧붙여 '시대의 표징과 그리스도인의 기도' 메시지를 말씀드립니다>
현재 우리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자로 발표된 천주교인들의 시국호소문은 「이성과 신앙, 민주주의와 평화」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민족의 최고선과 나라의 공동선을 위해 정책 대결을 펼쳐야 할 선거에서, 합리적인 논쟁과 정책 경쟁은 사라진 터에 기득권 카르텔을 유지하기 위한 온갖 불법과 탈법이 저질러지고 있어도 이를 호도하는 거짓 뉴스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가 하면 심지어 주술과 역술에 노골적으로 의지하는 행태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권자의 집단이성에 호소하고 나라의 공동선 가치를 확인하며 민족의 최고선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호소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호소문에서는 공공의 이익과 공동선 가치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욕을 부추기며 공익을 외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바로 그것이 사람을 미혹에 빠뜨리는 미신이라고 비판하며, “아주 오랜 세월 사람들의 병고와 한을 어루만져 주던 무속의 역사”에 대해서는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는 공익에 기여하고 있다면 무속을 미신으로 볼 수 없으며, 사익을 위해 무속에 의지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신이라는 뜻입니다. 흔히 샤마니즘이라고 부르는 무속은 일제가 한민족의 정신 전통을 말살하려고, 기왕에 천시되어 오던 무교 신앙을 부르던 이름입니다.
우리 민족 역사는 반만년 전 단군왕검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단군은 무교의 사제였고, 우리 민족은 역사의 시초부터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의식을 중시했으며, 곳곳에 엄청난 공력을 들여서 고인돌을 축성하여 이를 제단으로 삼아 하늘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로 알아낸 하늘의 뜻이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 사상이요, 이를 온 세상에 알려야 할 주체인 한민족이 천손이라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배층과 지식층 사이에서 ‘천손의식’이 희미해지면서 왕조가 쇠약해졌고, 뒤를 이은 왕조들에서 불교와 유학을 받아들이면서 무교 신앙은 민간으로 숨어 들었습니다. 천손의식은 물론 최고선 가치가 흔들려서 나라가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하였고, 지배층과 지식층 안에서 공동선 의식도 희미해져서 사회적 신분으로 백성을 차별하고 억누르며 착취하면서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서도 공동선 의식을 일깨우는 이성이 아니라 편협한 하나의 사상이 5백 년 동안 이 나라를 지배했습니다. 종교도 아닌 유학을, 그것도 한 분파인 주자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떠받들면서 사상을 통제하던 조선 시대에 반대파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는 비이성적 사상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터에, 조선 사회의 개혁을 꿈꾸며 실학을 추구하던 선비들이 중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번역해 놓은 서적들을 통해서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천주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천주교는 하나의 종교운동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급속도로 백성 속에 퍼져나갔습니다. 한문도 모르고 따라서 유학도 알 수 없었던 일반 백성이 천주교를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무교 신앙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알고 있었고, 심성적으로 깊이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반 선비들이 제사금지령으로 말미암아 떨어져나간 후에도 무려 백 년이나 박해를 견디며 치명할지언정 배교를 거부하고, 입술로 배교했을지언정 집안에서는 더욱 자손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천시되어 오던 무교의 종교행사와 행위 또한 민족과 나라의 최고선이나 공동선을 위해 제사드릴 길이 막혀버리고, 영적 위계질서에 대한 기준이 없이 사리사욕으로 잡신을 불러들이는 우상숭배로 전락했기에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은 이를 철저하게 배격하였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위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행위는 신앙과 이성으로 토론하고 합의하여 실천해야 할 민주주의 질서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이래서는 최고선의 가치가 가려질 수밖에 없고 공동선의 가치도 또한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번 대선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민족적 최고선 가치와 국가적 공동선 가치를 지키기 위한 파수꾼 역할을 천주교 신자들이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동방의 빛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민족의 전통과 지혜로는 하늘의 뜻이 바로 최고선과 공동선이기 때문이며,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도 최고선을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가치로 가르치는 한편 공동선이란 인간 존엄성을 중심으로 모든 이에게 공평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가치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번 대선 과정에서 그 민낯을 드러낸 바,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과 공정하게 정의를 구현하기를 포기한 검찰과 양심과 헌법을 준수하지 않는 사법질서에 대한 개혁이 절실하다는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에 입각한 신앙적 판단이며 아울러 이는 건전한 이성을 추구하는 뜻있는 국민들의 여론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에 담긴 최고선 가치를 수호하고, 우리 사회의 공동선 가치를 증진시키기 위한 천주교 신자들의 네트워크 결성을 지지하며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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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간의 한자를 살펴보십시오. 사람 인(人)과 사이 간(間)의 조합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인간이 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람이 둘 이상 모여 그사이에 공간이 형성되어야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공간이 너무 떨어지면 외롭고, 이 공간이 너무 밀착되면 숨이 막힙니다.
적절한 거리감이 중요합니다. 무관심은 사이 공간을 떨어지게 하는 것이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간섭하면 숨 막혀 죽을 상황을 만들고 맙니다. 인정과 지지만이 적절한 거리감 형성에 도움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사랑’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이름으로 거절, 부정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자녀에게 “절대 안 된다”라면서 그럴 바에는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는 부모의 외침에 적당한 간격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다 너를 위한 것”이라는 부모의 말을 무조건 따르라고 말한다면, 숨 막히는 간격이 아닐까요?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황금률의 기초이며, 참 인간으로 사는 길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원칙을 따르셨음을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예수님께서 도착하시자 그 지방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동네방네 소식을 알리고 병자들을 앓고 있는 상태 그대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지요. 너무 사람이 많아 일일이 손을 얹어 주시거나, 한 사람 한 사람 축복해 주실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통해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병의 치유가 예수님의 관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자기네들 스스로가 믿음을 가지고 했던 행동(옷자락에 손을 대는 일)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갑곶성지에도 예수님의 발등을 잡고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알려지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미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표현했기 때문에 바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기도 한다는 점에 기대어 보면 어떨까요? 진짜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게 꼭 필요한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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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증명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다만 ‘그렇게 된’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고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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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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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70년이니까 52년 전입니다. 당시 성당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밖으로 행렬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성체거동’이었습니다. 지금은 교통상황도 그렇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도 쉽지 않기에 그런 행사를 하는 성당이 거의 없습니다. 풍수원 성당이나, 장호원의 감곡 성당이 성체거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성체현시, 성체강복, 성체거동과 같은 신심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 봅니다. 초대교회는 오랜 박해를 견디고 신앙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곳곳에 성당이 세워지고, 감실에 성체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자유에 감격한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였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성체조배를 하는 것도 감격이었습니다. 성체에 대한 신심은 성체강복과 성체거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도 중남미에는 이런 전통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성체에 대한 신심은 지금도 세계성체대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도 1989년에 44차 세계성체대회를 주관하였습니다.
한국교회도 박해를 받으면서 성직자 없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미사 없이,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신자들은 미사가 그리웠고, 성체가 고팠습니다. 드디어 1886년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한국에도 성당이 세워지고, 신자들은 성체조배, 성체현시, 성체강복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3년 처음으로 용산 신학교에서 성체거동이 있었고, 이런 전통은 197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성체거동은 주교님들의 관심이 있었고, 신학생들과 신자 분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관공서에서도 성체거동 행렬이 진행될 수 있도록 지원하였습니다. 성체거동은 신자들에게는 자부심을 주었고, 비신자들에게는 천주교를 알리는 선교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성체거동의 신심은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1984년 103위 시성식과 같은 행사의 기틀이 될 수 있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미사를 자국어로 봉헌 할 수 있게 되었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성체거동의 신심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철학과 신학의 이성적인 토대 위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상생활은 전례, 신심행사, 친교, 나눔의 감성적인 부분도 필요합니다. 이성이 없는 감성만의 신앙은 광신이 될 위험이 있지만, 감성이 없는 이성만의 신앙 또한 건조하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우리의 발과 손입니다. 우리가 오랜 전통의 설날, 추석을 기다리는 것은 가족은 이성으로만 맺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21세기의 밝은 세상에 초를 밝히는 것은 초가 가지는 전례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성탄과 부활의 전례와 축제는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삶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멈추어진 우리의 전례와 축제가 재현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 앉은뱅이, 나병 환자,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죽었던 사람까지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의 나라가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루라는 시간을 주십니다. 하루라는 시간을 채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통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만 잘 지키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즐겁고 보람된 생활이 될 것입니다.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하게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둘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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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참 고향집
- 주님의 집 -
누구나 옛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적 고향집과 마을의 개천이나 들과 산들을 뛰어 다니며 놀 때의 추억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따뜻해 집니다. 자연의 산을 배경한 다 그만의 모습을 지닌 고유한 장소에 고유의 집이라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에 따른 놀이도 스토리도 참 풍부했습니다. 돈 없어도 가난한 줄 몰랐고 좀 춥고 배고파도 따뜻한 인정이 있었고 대부분 무공해의 사람들이었기에 행복했습니다.
중학교 시절 중간고사나 학기말 고사 때면 시험 1주전 계획을 세워 하교후 뒷동산에 올라가 공부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중고교 6년 20여리 길 걸을 때도 동무들과 함께 했기에 힘든 줄 몰랐습니다. 진달래꽃 흐드러지게 핀 산을 끼고 봄길을 걸을 때에 마음 시리도록 그리움에 젖었든 추억도 선명합니다. 집에 귀가하면 맨 먼저 찾는 어머니였고 어머니는 대부분 집안일이나 주변 밭일을 하며 집을 지켰습니다.
참으로 스토리들 가득했던 50-60년대 시골의 산들 배경한 농촌이었습니다. 이 때의 고향집과 마을은 하나의 커다란 ‘가정의 품’ 같았고 아이들은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건강했습니다. 자살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면에서 오늘날 젊은이들은 불행합니다. 너무나 단조로운 환경에 자연을 배경한 특색있는 고향집이기보다는 천편일률적인 성냥갑같은 아파트 집들과 아파트 단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피정을 마치고 떠난 한 자매의 메시지가 반가와 소개합니다.
“정말 마땅히 갈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설 정초에 정말 갈곳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느님은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는 스물네시간 활짝 열려 있는 주님의 집인 이 수도원으로 나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행복하게 살다가 갑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아름다운 피정의 집에 또 올 것을 생각해 두었습니다. 남은 내 생애가 그리 외롭지 않을 것 같아요. 기쁘게 내 삶의 자리로 갑니다. 감사합니다. 수사님들 모두 무탈을 기도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2.2.3. 김까리타스”
우리가 한 생애 끝나고 귀가할 영원한 참 고향집이 상징하는 바, 바로 주님의 집인 수도원이요 교회입니다. 참으로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주님의 집 수도원에는 많은 이들이 고향집을 찾듯이 끊임없이 찾습니다. 잃어버린 고향집을 대신하는 영원한 참 고향집 주님의 집인 여기 요셉수도원입니다.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몸담을 영원한 참 고향집인 본향을 그리워하는 우리들이요, 이를 어느정도 앞당겨 충족시켜 주는 수도원이요 교회의 성전입니다. 성가정 축일 미사시 즐겨 부르는 화답송 시편 성구와 ‘좋기도 좋을시고’라는 성가 416장도 생각납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자 얼마나 행복되리.”-화답송 후렴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성가416장
믿는 이들 누구나 꿈꾸는 이런 주님의 집입니다. 생래적으로 주님을 믿는 이들 마음 안에는 이런 주님의 집을 찾는 갈망이, 주님의 집에 대한 사랑이 늘 깊이 잠재해 있습니다. 보이는 고향집들은 사라졌어도 주님의 집 수도원이, 교회 본당 성전이 참 고향집이 되어 고향을 상실한 영혼들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어느 정도 달래 주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34년 동안 여기 불암산 기슭에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늘 참 고향집에 머물 듯 참 편안함을 느꼈기에 찾아가고 싶은 곳도 없어 휴가 반납한지가 수십년이 지났습니다. 아마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영원한 참 고향집인 아버지의 집에 귀가할 것입니다. 읽을 때마다 반갑고 새롭지만 오늘 말씀에 대한 영문 주석을 읽으면서 새삼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반갑고 새로웠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의미는 여기 ‘치유되었다’ 라는 그리스어 동사안에서 참으로 완전히 밝혀진다. 그리스어 ‘에소존토(esozonto)’는 단지 ‘육체적 치유(physival healing)’ 이상을 함축한다. 초기 교회에서 이 어휘안에서 이 말은 구원의 온전한 체험을 뜻한다. 그것은 단지 ‘복지(wellness)’가 아니라 ‘온전함(wholeness)’이니 다른 말로 하면 ‘귀향(coming home)’이다.”
이미 우리말처럼 회자되고 있는 영어 ‘힐링’과 ‘컴밍홈’이라는 말마디가 반가웠습니다. 참으로 영육의 힐링에 주님의 집만큼 좋은 곳도 없고,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수행보다 더좋은 힐링의 수행도 없습니다. 그러니 컴잉홈, 주님의 집을 찾는 이들의 궁극의 바램도 이런 힐링에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집이야 말로 힐링센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선왕 다윗에 이어 솔로몬의 주님의 집 성전에 대한 사랑도 놀랍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은 주님의 집 성전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성전을, 미사전례를 사랑합니다. 영원한 참 고향집을 상징하는 성전을 완공한후 주님의 궤를 모시고 기뻐하는 솔로몬의 모습을 통해 그가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감지됩니다.
“주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을 위하여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그대로 영원한 참 고향집을 상징합니다. 참 고향집을 찾듯이 영육이 지치고 병든 이들이 주님을 찾아 온전히 회복됩니다. 참으로 영육의 치유와 건강에 주 예수님보다, 주님의 집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 다음 복음 묘사가 그대로 예수님이 치유의 참 고향집임을 입증합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참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고향 상실의 업보입니다. 어머니들이 가정을 보금자리 주님의 품같은 집으로 가꾸고 돌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참 고향집인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성전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의 중요성이 너무나 큽니다. 바로 섬김의 배움터이자 치유의 쉼터와 샘터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한 참 고향집을 앞당겨 만들어 살게 하시며 영육의 온전한 치유와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미사보다 더 좋은 주님의 선물도 없고, 미사보다 영육의 힐링에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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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는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꿈이기도 했던
성전을 완공하고서 그곳에 주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계약 궤를 모셔 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윗 시절에 계약 궤는 유다 바알라에 있다가
예루살렘의 다윗성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를 너무도 기뻐한 다윗이 주님 앞에서 마치 아이처럼
흥겹게 춤을 추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입니다(2사무 6장 참조).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솔로몬도 정성을 다하여 마련한 성전에
드디어 계약 궤를 모실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감격스러워합니다.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양과 황소를”
제물로 봉헌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주님께
드리는 장엄한 기도를 통해서(1열왕 8,22-53 참조)
솔로몬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 시대의 두 임금에게서 주님을
가장 좋은 곳에 모시고자 하는 열망과 기쁨을 배웁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제 주님께서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우리는 영성체를 통하여 다윗과 솔로몬도
누려 보지 못한 특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며 살고 있을까요?
평소 어떤 마음가짐으로 주님을 모시며 생활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가장 좋은 곳에 모시려면
늘 우리 마음을 가꾸고 보살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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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수많은 병자가 자기의 병을 치유 받기 위해서 모여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예수께 모여들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인간의 절박한 요구, 사람이 줄 수 없는 무엇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러한 은혜를 받고도 결국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조한 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이 군중 중에는 예수님을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분으로 이용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에서와같이 수많은 군중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인 모습이 아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세인가? 또 친구와 친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이용하고 또 도움만 받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나 않는지?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떤가이다.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이 필요하고 찾으면서도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성소인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의 조그마한 것이라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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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 56)
간절한 소망은
믿음이 된다.
믿음은
더 많은
사람으로
확대된다.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체험하는
보편적인
구원으로 넘어간다.
이와같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접촉은
인생 전체에
걸쳐 필요한
해방의 참된
여정이 된다.
병에서 치유되고
죄에서 해방되고
죽음에서 생명을
체험하는
구원이 있다.
우리 현실
안에서의
참된 구원이란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진실로
믿게되는 것이다.
믿기에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전폭적인
선물이다.
구원을 통하여
우리는
생명이신
주님의
참기쁨을
알게된다.
하느님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은총은
주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구원은 참된
나눔이며
선(善)을
행하는 참된
실천이다.
먼저 구원을
실천하시는
예수님이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삶의 변화로
우리를 이끈다.
맛보지 못했던
영적 자유를
우리가
체험하게 한다.
지금 여기서부터
구원이 시작되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다.
이 구원이
사람을
끌어당긴다.
우리의 현실을
우리의 생활을
구원하시는
구원자께서
우리의 생활로
들어오셨다.
생각을 바꾸는
구원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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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앞의 3장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마르 3,9-10).”
두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예수님의 몸이나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는데, 태도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3장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청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예수님을 만지려고
밀려들고 서로 밀쳐대는 상황이었는데, 지금 6장에서는 그런 상황은 아니고,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막무가내로 밀려들고 밀쳐대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태도가 바뀐 것은, 예수님께서 뒤로 물러나시면서
‘거리두기’를 실행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은 안 듣고
몸의 병을 고치기만을 원하는 것은 여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 라는 뜻인데,
이 말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병을 고쳐 준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그렇게 오해하면, 예수님은 안 믿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 믿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의 병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아니라 ‘예수님’이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루카 4,18) 라는 복음 선포를 실제로 실현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병자 치유 기적은,
‘병고의 억압’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킨 일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병고’는 사람들을 가장 크게 괴롭히는 고통이고 억압입니다.
‘구원’은 모든 고통과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서
참된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구원을 인류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시면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신앙인들이 예수님께 병의 치유를 간청하는 것은, 예수님의 자비를
믿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딱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과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고,
그리고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으니까 기도하고, 기다립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오늘날에는 왜 복음서의 치유의 기적 이야기와 같은
기적이 잘 안 일어나는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질문의 답은 두 가지입니다.
1) 옛날 사람들보다 현대인들의 믿음이 약해서.
2) 인간의 의술이 발달해서.
확실히 현대인들의 믿음이 약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것들이 옛날보다 많은데,
특히 현대인들은 생각이 너무 많고 복잡합니다.
신앙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생각들......
그리고 인간의 의술이 발달해서 믿음의 힘과 기도의 힘보다는
의술의 힘에 더 의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기적이 옛날보다 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의학과 의술이 발달할수록 종교와 신앙은 점점 더 밀려나게 될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학과 의술의 발달도 주님의 은총입니다.
종교와 신앙이 뒤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 서서히 바뀌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의학과 의술이 발달해도, 주님께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집회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온갖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아들은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집회 17,30).”
“인간의 수명은 기껏 백 년이지만, 영면의 시간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
바다의 물 한 방울과 모래 한 알처럼 인간의 수명은 영원의 날수 안에서 불과
몇 해일 뿐이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인내심을 보이시고,
그들에게 당신 자비를 쏟으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종말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고 아시며, 그런 까닭에 당신의 용서를 넘치도록 베푸신다(집회 18,9-12).”
인간의 과학과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또 그 덕분에 인간의 수명이
많이 연장된다고 해도, 과학과 의학으로는
‘먼지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의 허무함’(시편 90,3)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인간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결국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과학과 의학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와 권능입니다.
(과학과 의학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을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고,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병을 고치고 몸의 건강을 되찾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기도하지 않고 의술의 힘으로만 병을 고쳤다고 해서
의술을 주님처럼 떠받든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반대로, 병원에서 고칠 수 있는 병인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믿음의 힘으로
병을 고치겠다고 고집부리면서 기도만 하고 있다면, 그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인데도 하지 않고,
주님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하인 부리듯이 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의학과 의술의 발달도 주님의 은총이라는 말을 했는데,
정상적인 치료를 거부하고 기도만으로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은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총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믿음 없는 태도이고,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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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장터를 자유와 해방의 터로 바꾸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셨다.”(마르 1,34)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제자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에서 내리시는 예수님을 ‘곧 알아봅니다.’(6,54). 그만큼 예수님의 활약상은 대단했습니다. 그 결과 그분의 가르침과 치유를 듣고 본 사람들의 갈망과 기대도 커갔던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보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병고에서 해방시켜주는 놀라운 힘을 지닌 그분을 치유자로 알아본 것이지요.
사람들은 치유와 해방을 불러일으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그분의 인격을 만납니다. 그들은 부분적이긴 했지만, 그렇게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게 됨으로써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병고에서 해방되려는 절박함과 간절한 갈망이 있었기에, 더 빨리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고’, 그분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듣고, 보고, 받아들이며 믿었기에' 알아본 것입니다. 그들은 시간을 내서 예수님 곁에 머물렀고,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는 그분께 집중함으로써 그분을 '곧바로'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자석처럼 당신께 끌어들이고 알아보게 하신 분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시기만 하시면, 사람들은 기회를 놓칠새라 '두루 뛰어다니며'(6,55)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은 그분이 율법을 충실히 준수하셨다는 표시이지요(민수 15,39). 결국 하느님 백성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습니다(6,56).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장터에서"(6,56)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장터(agora)는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세력의 장소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현존과 치유로 장터는 더 이상 세상의 힘이 득세하는 곳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의 터'요 회복과 재생이 이루어지는 '생명의 낙원'으로 뒤바뀝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자유와 해방의 원천이십니다.
우리도 시간을 쓰고 공을 들여 예수님께 집중함으로써 그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나아가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을 잡음으로써 참 자유의 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억울함과 절망과 온갖 고통을 안고 다가오는 이들을 물리치지 말고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제자답게 거짓과 불의, 차별과 불평등, 온갖 반생명적인 실재에 맞서 하느님의 정의를 세워나가야겠습니다(6,56).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사랑의 눈길과 연민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신해야겠지요. 그렇게 살아갈 때 지배와 탐욕이 판치는 '장터'가 '자유와 해방의 성전'으로 바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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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성 생활 안에서 자만이나 방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이번 주간 첫 번째 독서인 열왕기 상권을 통해 우리는 솔로몬 왕(BC 971~931)의 삶과 신앙, 특히 그의 흥미진진한 흥망성쇠 스토리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가 다스렸던 시절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가장 잘 나가던 순간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주님을 향한 신앙 뿐 아니라, 탁월한 리더십, 건축과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 등등,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잠언을 3천 개나 지었으며, 천 다섯 편이나 되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지혜와 뛰어난 분별력과 넓은 마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따라서 주변의 많은 임금들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 칭송했고 배우고자 애를 썼습니다.
특히 남쪽에 위치한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을 한번 만난 뒤로 열혈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녀가 솔로몬을 찾아온 최초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정말 항간의 소문대로 지혜로 충만한 사람인가 시험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잔뜩 준비해온 그녀는 마침내 퀴즈 보따리를 솔로몬 앞에 잔뜩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문제를 내는 족족 그 자리에서 정답을 알아 맞췄습니다. 솔로몬의 탁월하고 비상한 지혜 앞에 스바의 여왕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칭찬에 칭찬을 거듭했습니다.
“임금님의 지혜와 영화는 내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언제나 임금님 앞에 서서 임금님의 지혜를 듣는 이 신하들이야말로 행복합니다.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의 마음에 드시어 임금님을 이스라엘 왕좌에 올려 놓으셨으니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놀랍게도 스바의 여왕은 자신이 가져온 금 120 탈렌트,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약 4톤의 금과 엄청난 양의 향료, 보석들과 당시 최고급 목재로 손꼽히던 자단나무도 내려놓았습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적(政敵)들을 하나씩 가차없이 숙청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정적들을 제거한 뒤 측근들을 군대·정부·종교기관의 요직에 앉혔습니다. 또한 여러 주변 국가들과 군사 동맹을 맺음으로써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백일 붉은 꽃 없다더니, 솔로몬의 지혜와 분별력, 부귀영화도 세월 앞에 부질없었습니다. 그 지혜롭고 영특하던 솔로몬도 나이를 들어가면서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 뭐든 적당했어야 했는데,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그 끝이 참으로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대적인 건축에 대한 솔로몬의 과욕이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솔로몬이 대대적인 건축 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동원해야만 했습니다. 장정들은 3개월마다 한번, 1개월씩 강제노동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제성을 띤 행정구역 개편, 이해할 수 없는 세금 징수 방법 등이 백성들의 대대적이고 노골적인 반대에 불을 지폈습니다. 말년에 자기중심을 잃어버린 솔로몬은 우상 숭배에 깊숙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거듭된 주님의 만류와 경고에도 전혀 ‘말빨’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상 숭배를 위한 산당을 지었습니다. 잡신들 앞에 향을 피웠고 재물을 바쳤습니다.결국 왕국이 둘로 분열되고 마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솔로몬이 그토록 급격히 추락하게 되기까지는 아무래도 그가 거느렸던 이방인 아내들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사리분별력이 흐려진 그는 이미 간교하고 요사스런 이방인 아내들을 감당할 내공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주님으로부터의 큰 진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초심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솔로몬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깊은 신심에다 겸손까지 겸비했던 솔로몬,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솔로몬이었지만, 잠시 방심하는 틈에 초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세상 초라하고 부끄러운 말년을 보내다가 쓸쓸히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영성 생활 안에서 자만이나 방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주님의 안전한 날개 아래 자리 잡고 있다 할지라도, 절대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늘 우리 자신의 발밑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부족함을 헤아리고 가슴을 치며,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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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되기 위하여
여기저기 아파보면서 얻게 된 깨달음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질병, 예를 들면 피부병이라든지 타박상, 찰과상이라든지 골절상 같은 병은 꾸준히 치료하면 대체로 빨리 낫습니다.
빠르게는 한두 주일, 길게면 한 달 두 달 길어봐야 6개월, 1년입니다.
그런데 치료하기가 더 어려운 질병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질병입니다.
위장이나 대장 질환, 간이나 혈관질환 등등. 우선 잘 보이지 않기에 치료도 복잡하고 힘들뿐 아니라
질병이 만성질환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내부의 질병보다 더 치료가 어려운 질병이 있습니다.
마음이나 정신의 질환, 영혼의 질병입니다.
이 질병이 무서운 것이 사람에 따라서 자각증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질병의 상태가 어디까지 진전되었는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본인이 잘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환자는 자신 겪고 있는 영혼의 질환이 마치도 ‘말기 암 증상’과도 같은 데도 불구하고 우선 살아 숨쉬기에 그걸 깨닫지 못하기도 합니다.
치료를 위해서는 현재 병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 그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질병의 심각성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간 몰랐었는데 강렬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등장하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빛으로 인해
자신들의 어두움, 자신들이 앓고 있는 질병의 심각성을 낱낱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만사 제쳐두고 치유자이신 예수님께로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마르코 6장 54~55절)
예수님 앞으로 달려온 환자들은 앞 다투어 자신들의 깊은 상처를 가감 없이 그분께 보여드렸습니다.
마치 놀다가 다친 어린아이가 울면서 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그 결과가 기적적인 치유의 은총이었습니다.
기적적 치유에 이르기까지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스스로 심각한 환자임을 솔직히 고백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환부를 예수님께 보여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자비하신 분, 우리를 향한 무한한 측은지심을 지니고 계신 분, 그래서 우리를 죽음의 질병에서 구원해주실 전지전능한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굳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런 저런 내과적 질환, 외과적 질환, 정신과적 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은 아무래도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이 최상책이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질병, 영혼의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우리 마음과 영혼의 주치의이신 예수님께로 달려가셔야겠습니다.
영혼의 질병을 가장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보물인 성경을 손에 드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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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옷자락 술'은 '성사'의 상징
안젤라 스터길이 중학교 1학년 때 자신이 사는 한 동네에서 간호사를 돕는 봉사를 했었습니다.
여름 방학 내내 일주일에 서른 시간정도를 일을 했는데, 그 대부분의 시간을 길레스피 씨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서 보냈습니다.
길레스피 씨는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그의 상태에 신경을 쓰는 사람도 없는 듯했습니다.
안젤라는 그의 틈나는 대로 그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아주 가끔 안젤라의 손을 꼭 쥐는 것 외에 길레스피씨의 반응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장기간 의식불명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일주일 동안 부모님과 여름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그가 병원으로 갔을 때는 길레스피 씨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안젤라는 간호사에게 차마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 두려워서였습니다. 안젤라는 그 후로도 병원 봉사를 계속 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그녀는 주유소에서 아주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누구라는 걸 떠올리는 순간 안젤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길레스피 씨가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혹시 다섯 해 전에 동네 병원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해 있었던
길레스피 씨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안젤라는 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병원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길레스피 씨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혼수상태에 있을 때 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고, 이야기 하는 동안 내내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안젤라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한 인간이 아니라 천사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길레스피씨는 자신을 소생시킨 힘이 바로 안젤라의 목소리와 그녀의 손길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둘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 눈물을 쏟고 포옹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안젤라는 길레스피 씨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길레스피 씨는 안젤라에게 언제나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를 천사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참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나를 천사로 만든 사람]
‘안젤라’라는 이름의 뜻은 ‘천사’입니다.
어쩌면 진짜 하느님께서 안젤라를 통하여 길레스피 씨를 살려냈는지 모릅니다.
안젤라 안에 천사가 정말로 있으면서 그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의식불명의 상태였던 길레스피 씨가 자신이 살아날 수 있었던 힘이 그녀로부터 왔다면 그녀는 어쩌면 생명의 힘을 전달해주는 통로였던 것입니다.
그녀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살리는 힘은 하느님에게로부터만 나오게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녀를 통해서 그 힘을 주실 수는 있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병자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라도 만져보려고 노력하였고, 그 술을 만지는 사람들은 누구나 병이 나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옷자락 술은 무엇입니까? 옷에 달려있는 가장 끝자락입니다.
그 끝자락에 병은 치유하는 성령님이 숨어계신 것일까요? 옷은 분명 예수님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입은 옷도 그 옷 자체로만은 어떠한 힘도 지니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 옷을 통해 당신 에너지를 내보내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 옷이 예수님 자신은 아닐지라도 그 옷 술을 통해서도 그분은 생명의 에너지를 전달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안젤라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의 ‘옷자락 술’의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분의 성령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도구들, 그것이 무엇일까요?
분명 예수님은 아니지만 그분을 연결해주는 것, 우리는 이것을 ‘성사’라 부릅니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 그분의 성령을 받고 새로운 삶으로 변화됩니다.
성사는 7성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나에게 들어오시는 모든 도구들이 다 성사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내 안에 모시는 행위를 넓은 의미의 ‘기도’라고 합니다.
마치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려 했다면 우리는 7성사는 물론이요, 성경읽기나 성체조배, 좋은 강의 듣기 등을 통해서 그분의 에너지가 나에게 흘러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만약 내 삶의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기도를 찾아서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서는 어떤 에너지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즉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뜻은 마치 당시의 병자들이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잡아보려 했던 것처럼 그분의 에너지가 흘러오는 모든 성사들, 모든 기도들을 찾아서 하려고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 어쩌면 매 순간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으려 손을 뻗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도 의심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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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5 주간 월요일-묵상과 기도
열왕기에서 솔로몬은 다윗이 시작하고 마친 성전에 주님의 계약 궤를 모십니다. 다윗 성에서 원로들과 함께 사제들이 계약 궤를 매고 성전 안쪽 지성소 안 커룹들이 날개 아래 들여다 놓았습니다. 궤약 궤는 10개명 말씀의 두 개의 돌판이었습니다. 사제들이 성소를 나올 때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습니다. 솔로몬은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짙은 구름 속에 계시고, 당신을 위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마을이나 고을 촌락이든 어디서나 장터에서 그분 앞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게 해달라고 하였고, 댄 사람들은 모두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시고 예수님께 오는 이들은 영육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그 무렵 솔로몬은 주님의 계약 궤를 시온, 곧 다윗 성에서 모시고 올라오려고,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각 가문 대표인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예루살렘으로 자기 앞에 소집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에타님 달, 곧 일곱째 달의 축제 때에 솔로몬 임금 앞으로 모였다. 이스라엘의 모든 원로가 도착하자 사제들이 궤를 메었다. 그들은 주님의 궤뿐 아니라 만남의 천막과 그 천막 안에 있는 거룩한 기물들도 모두 가지고 올라갔는데, 사제와 레위인들이 그것들을 가지고 올라갔다.
솔로몬 임금과 그 앞에 모여든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함께 궤 앞에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양과 황소를 잡아 바쳤다. 그러고 나서 사제들이 주님의 계약 궤를 제자리에, 곧 집의 안쪽 성소인 지성소 안 커룹들의 날개 아래에 들여다 놓았다.
커룹들은 궤가 있는 자리 위에 날개를 펼쳐 궤와 채를 덮었다. 궤 안에는 두 개의 돌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돌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 둔 것이다.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 사제들은 그 구름 때문에 서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던 것이다.
그때 솔로몬이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을 위하여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 1열왕 8,1-7.9-13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53-56
실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다윗이 시작하고 아들 솔로몬이 완성하였습니다. 40여년 건축 기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성전 짓는 열망과 성실함이 있었습니다. 웅장한 성전의 지성소 안에 돌판 두 개가 있습니다. 두 개의 돌판에는 십계명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자신과 이웃 돌보며, 사회와 공동체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내용을 담은 말씀입니다. 지성소의 계약 궤는 곧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핵심입니다. 웅장한 성전 안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 곧 당신은 지성소의 계약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모시고 사는 것은 그분의 지성소에 머무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 부활을 보여 주시고 성령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분의 말씀의 지성소 안에서 당신을 찬미합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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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말씀으로 영혼의 때를 지울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생각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알려면 또 성찰을 하려면 자기내면을 들여봐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겉을 보면서 내면을 보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단 겉모습에서는 뭔가 보이기 때문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로 눈으로 확인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도 많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가 자신의 눈이 맑아야 합니다. 자신의 눈이 맑지 않으면 어떤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성찰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찰은 하나의 관찰입니다. 관찰을 하려고 하는데 잘 볼 수가 없다면 어려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관찰의 근원은 바로 눈과 관련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일단은 먼저 눈이 열려야 볼 수 있습니다. 그 눈은 단순히 보이는 것만 보고 그 형체가 어떤지를 우리의 뇌가 인식을 해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사과와 배는 똑같은 과일입니다. 우리는 일단 사과와 배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모양만으로는 구분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모양을 흑백 사진기로 촬영을 했다면 쉽게 구분을 할 수가 있을까요? 아마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과와 배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색깔입니다. 색깔로 과일을 구분할 수 있듯이 우리의 내면 상태를 알 수 있는 눈을 가지려면 그냥 단순히 우리가 보는 시각적인 눈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마음의 눈이 명징한 상태가 되어야만이 제대로 우리의 마음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은 시력이 좋지 않으면 눈이 좋아지는 약을 먹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은 어떻게 하면 맑아질까 하는 고민을 해봤습니다.
눈의 시력은 인간이 노쇠하면 자연적으로 퇴화가 되기 때문에 떨어지는 게 당연할 겁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은 시간이라는 것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마음의 눈은 인간의 욕심과 같은 탐심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이런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마음은 청춘이다. 이 말은 어떤 말과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역으로 말하면 지금 육체는 늙었지만 마음은 늙지 않고 예전과 그대로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일면 맞는 말입니다. 이 말은 또 달리 표현하면 마음의 때가 묻지 않았을 땐 맞는 말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될 때가 있지만 보통의 경우는 세월이 흐르면서 또 나이가 들면서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의 순수한 마음 그대로 유지를 하는 경우가 좀처럼 드문 게 사실입니다. 그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파에 찌들다보면 그렇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때도 금방 묻은 때는 옷을 보더라도 때가 금방 묻었을 때 바로 세탁을 하면 깨끗하게 되지만 찌들었을 땐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경험을 통해서 알 수가 있을 겁니다. 바로 우리 마음의 눈도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게 됩니다. 마음의 눈이 혼탁하면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세상도 깨끗하지 못하게 되는 이치와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사람과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도 여기서 결판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누구나 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인데 누구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누구는 체험하지 못하는 것의 근원적인 이유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맑느냐 혼탁하냐에 달려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길과 정답은 의외로 아주 쉬울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정답은 '사랑'입니다.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보려고 하면 자연적으로 그에 따라 마음의 눈도 혼탁하다면 정화가 될 것입니다. 마음의 눈에 있는 수정체가 마치 수정처럼 맑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도 우리의 가슴에 전달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더라도 하느님의 심판대에서 만나는 하느님과의 조우를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때가 아니라 먼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심판대 앞에서 만나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또 한편으로는 설램으로 기대가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기대가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세상을 살면서 하느님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은 하느님을 언젠가 만난다는 그 사실 자체가 행복한 꿈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많이 몸소 체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느낌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그냥 되는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힘은 바로 우리가 늘 접하는 말씀에 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더러운 영혼을 씻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말씀을 먹어야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내 영혼이 영원의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 나라에 입성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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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제1독서 (1열왕8,1-7.9-13)
"궤 안에는 두 개의 돌 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돌 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 둔 것이다." (9)
이것은 계약궤 안에 오로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계약을 상징하는 두 돌판, 즉 십계명을 새긴 돌판들만이 들어 있었음을 뜻한다. 사실 계약궤라는 명칭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계약의 돌판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 차원에서 계약궤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영원한 증거, 즉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탈출19,5.6)는 약속의 증거로서, 이스라엘에게는 하느님 앞에서의 계약 준수 책임을 깨닫도록 하는 증표가 되었다.
신약의 히브리서 9장 4절에는 온통 금으로 입힌 계약궤 안에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와 계약의 판들이 들어 있었습니다."라고 두 개의 돌판(계약의 판들)과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열왕기 상권 8장 9절과 히브리서 9장 4절의 상충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우선 본래 계약궤안에 '만나가 든 금항이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 그리고 계약의 두 돌판'이 들어 있었지만, 모세 시대 이후 엘리 사제 시절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전쟁에 져서 계약궤를 일시적으로 빼앗겼던 시절에(1사무4,3-11)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를 유실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또 다른 견해는 본래 계약궤에는 그것을 만든 목적과 부합하게 십계명 두 돌판만 들어 있었고(탈출25,16; 40,20; 신명10,5),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는 '주님 앞에 두어'(탈출16,33) 즉 '증언판 앞에'(탈출16,34), '증언판 앞으로'(민수17,25) 있었을 뿐인데, 신약의 히브리서 저자가 정확한 고고학적 검증없이 해석에 따른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전자의 견해가 히브리서의 증거와 상충되지 않고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열왕기 상권 8장 9절의 '아무 것도 없었다'라는 표현 역시 그 전에는 그 무엇이 있었음을 전제하는 표현으로 볼 수가 있어 우세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둔 것이다.'
이것은 계약궤안에 보관된 두 돌판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시기를 나타낸다. '계약을 맺으신'에 해당하는 '카라트'(karath)는 일차적으로 '자르다'(1역대19,4), '잘리다', '끊다'(1사무5,4)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계약과 관계될 때에는 '계약을 맺다'(예레34,8)라는 뜻을 가지기도 한다.
이것은 고대의 계약 체결 의식에서 계약의 당사자들이 가운데를 자른 제물 사이를 통과했던 것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이러한 계약 체결 의식을 거행했던 것은 계약을 어길 경우에 제물이 둘로 갈라진 것같이 그렇게 죽게 될 것이라는 계약 준수의 엄정한 결정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계약은 단순한 약속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의 신뢰와 신의를 확인시키는 엄숙한 선언이었다 (창세15,17~18; 예레34,18~22).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이후에 그들과 이렇게 엄정하고 엄숙한 계약을 체결하셨다(탈출24,1~8).
그리고 이러한 계약이 체결된 후에 이스라엘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 즉 계약의 산물이 열왕기 상권 8장 9절에서 강조되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었다(탈출24,12).
따라서 솔로몬의 성전에 계약의 두 돌판을 넣어 두었던 계약궤가 안치되었다는 것은 과거 모세를 통하여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 변함없이 실행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2022년 02월 07일 월요일
[녹]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오늘 제1독서는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꿈이기도 했던 성전을 완공하고서
그곳에 주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계약 궤를 모셔 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윗 시절에 계약 궤는 유다 바알라에 있다가 예루살렘의 다윗성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를 너무도 기뻐한 다윗이 주님 앞에서 마치 아이처럼 흥겹게 춤을 추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입니다(2사무 6장 참조).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솔로몬도
정성을 다하여 마련한 성전에 드디어 계약 궤를 모실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감격스러워합니다.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양과 황소를” 제물로 봉헌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주님께 드리는 장엄한 기도를 통해서(1열왕 8,22-53 참조)
솔로몬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 시대의 두 임금에게서
주님을 가장 좋은 곳에 모시고자 하는 열망과 기쁨을 배웁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제 주님께서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우리는 영성체를 통하여 다윗과 솔로몬도 누려 보지 못한 특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며 살고 있을까요?
평소 어떤 마음가짐으로 주님을 모시며 생활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가장 좋은 곳에 모시려면 늘 우리 마음을 가꾸고 보살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5주간 월요일]
願하는 것이 있어 누군가를 의지하고 붙든다는 것은 나의 無力함, 希望 없음,
곧 나의 모든 것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自己否認, 버림으로 하는 것이다.
(마르6,53-56)
53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 땅에 배를 대었다. 세상에 하느님의 교회(배)를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아본 것일까? - 肉의 치유 자, 靈의 치유 자?
*사람들은 소문으로 肉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容恕를 받는 교회가 아닌, ‘나의 精誠, 열심을 드릴테니 내 뜻을 들어 주세요, 병 고쳐 주세요.’ 라고 거래하는 그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았다 하신 것이다.
(마태16,15-16) 15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속죄 제물)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병자들을 장터에 놓았는데도 치유, 용서, 구원을 받았다? - 옷자락 술(袕)에 손을 대었기 때문이다. 곧 옷자락 술의 의미가 그들을 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옷자락 술만이 아닌 그 전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던(민수기, 탈출기, 레위기 등) 옷자락의 술인 것이다.
(민수15,38-39) 38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말하여, 대대로 *옷자락에 술을 만들고 그 옷자락 술에 *자주색 끈을 달게 하여라. 39 그리하여 너희가 그것을 볼 때마다, 주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실천하고, 너희 마음이나 눈이 쏠리는 것, 곧 너희를 배신으로 이끄는 것에 끌리지 않도록 하는 *술이 되게 하여라.
= 옷자락 술의 자주색 끈을 보며 하느님을 배신하는, 즉 하느님의 마음, 그분의 뜻을 敵對하는 인간의 마음과 눈에 쏠리지 말라는 것이다. *자주색 끈의 의미는, 죄로 죽어 흘리는 피를 뜻한다.(붉은 피, 자주색 같은 것) *띠는 허리의 띠, 진리의 성령을 뜻하는데(에페6,14참조) 대속의 죽음, 그 자주색 피가 구원의 진리임을 증언하신다.
그러니까 옷자락의 술은 대속의 죽음, 피가 진리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자주색 옷을 입게 하신 것이다.(마르15,7)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피였기에 그 예수님의 자주색 피가 구원의 새 계약의 피인 것이다. 그 자주색 피로 모든 죄가 깨끗이 씻겨 거룩하게 된 것, 하느님의 계명이다.
(민수15,40) 40 그래서 너희는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실천하여, 너희 하느님에게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라.
=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 구원의 실천이다.(로마10,10)
오늘 병자들이 하느님의 마음, 뜻이 아닌 사람의 마음, 뜻을 위해 살았기에 온갖 잘못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배반한 죄를 지었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용서를 청하며, ‘옷자락 술에 손을 대게 해 주십시오.’ 하는 그 의미 였을 때,....
본문 56절에 그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치유가 아닌) 구원 받았다’가 되는 것이다.
(탈출30,10) 10 아론은 그 제단의 뿔에 해마다 한 번씩 속죄 예식을 거행해야 한다. 너희는 대대로 해마다 한 번씩, 속죄하려고 바치는 속죄 제물의 피로 그 제단을 위한 속죄 예식을 거행해야 한다. 이 제단은 주님(야훼)에게 바친 가장 거룩한 것이다.”
= 속죄 제물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새 계약의 피 이며 그분의 제물이 되어 올려지는 제단, 또한 예수님을 뜻한다. (그래서 성당 제대위에 아무나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레위6,18) 18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속죄 제물에 관한 법은 다음과 같다. 속죄 제물은 번제물을 잡는 곳, 곧 주님(야훼) 앞에서 잡는다. 이 제물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 20 그 고기(제물)에 닿는 것은 다 거룩하게 된다. 그 *피가 옷에 튀었을 때는, 피가 튄 데를 거룩한 곳에서 빨아야 한다.
= 속죄 제물의 제단과 제물에 닿으면 영원히 거룩해 진다. 대속으로 모든 것이 깨끗해 졌기 때문이다.
그 하느님의 규정으로 사람들이 제물과 제단이신 예수님, 그 옷자락 술에 손을 대게 해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인간의 마음과 눈으로 보고 그대로 하는 것,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곧 그분의 마음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사제들의 옷자락을 잡는 것은 용서,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대속의 죽음,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남이 하니까 따라 하는 것, 의미가 없는 잘못인 것이다. 그러나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지금은 모두 의미가 없는 헛된 것이다, 제단과 속죄 제물의 피로 거룩해 지는 것은 우리 주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에, 그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어서 받는 용서, 구원을 믿지 못하고 계속 자신들의 마음과 눈으로 본 것을 고집한다. 그래서 다음 구절에 배신자들에게~
(마르7,6-9. 13)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9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 하느님의 마음(뜻, 말씀)을 위한 신앙을 사는지, 사람의 마음(뜻, 말 전통)을 위한 신앙을 사는지,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의로움을 거저 받은 구원 그 진리의 신앙을 사는지! 구원의 힘이 없는 無力한 인간 스스로의 그 자기 의로움을 고집하며 그 하늘의 의로움을 헛되게 하는 신앙을 사는 것은 아닌지요~~~~
☨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를 충만하게 하시어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하소서. 행위의 신앙이 아닌 믿음의 신앙을 살게 하소서 ~아멘. !!!
연중 제5주간 월요일 복음(마르6,53~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시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56)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으로 번역된 '에이세포류에토'(eiweporeueto; he entered; he went)는 원형 '에이스포류오마이'(eisporeuomai) 동사의 직설법 미완료 과거 3인칭 단수로서, 예수님께서 여러 장소를 계속적으로 이동하여 들어가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표현이다.
마르코 복음 6장 56절에서 직설법 동사가 다섯 개 쓰였는데, 그 중에서 네 개가 미완료 과거 시제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여러 장소들을 계속해서 들어가고 계셨고, 사람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병자들을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끊임없이 데려다 놓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병자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계속해서 청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들은 누구나 치유를 받았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쉬지 않고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이렇게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계속적 동작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표현한 이유는, 마르코 복음 6장 56절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에서 행하신 모든 반복적인 치유 행위들을 요약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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