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고대 근동의 창조 설화가 유사하다는 사실은 더 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창세기가 고대근동의 신화(에누마 엘리쉬 등)로부터 많은 영감을 갖게 된 사실은 기독교계에서도 기정사실로 받아드리고 있다. 그러나 신화로부터 창세기가 영감 받았다고 이야기하면 무언가 불편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직통계시로서 절대불변한 말씀이어야 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상상력으로부터 나온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불편하여 창세기를 고대근동 문헌과 떨어뜨려 바라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신화라는 것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즉, 우리에게는 고대인들의 시각에 맞춰 신화를 바라보아야 한다.
오늘날이나 고대나 인간사의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세계를 이해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인간이란 무엇이고, 세계가 어떻게 실존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인간사를 관통하는 질문이다. 오늘날은 과학이 고도로 발달했기에 과학이 이 질문을 설명한다. 과학에 기반하여 세상을 이해하고 여러 세계관을 정립한다. 반면, 과학적 지식도 없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은 본인이 살고 있는 도시, 시골 마을 정도가 전부였던 고대인들은 신화라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이해했다. 따라서 신화라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이야기이다.
창세기는 고대근동 문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창세기만의 분명하고 독특한 점들이 나타난다. 창세기는 아주 혁명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이는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고대근동의 신화는 대부분 지배자들의 이야기이다. 왜냐면 신화를 통해 도출되는 결론이 '인간은 하등하고 강제 노역이 운명'이라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는 지배자들의 이야기를 거부한다. 창세기는 출애굽이라는 구원을 경험한 이들이 작성한 이야기로 타향살이에서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한 이들의 이야기다. 즉, 구원이라는 사건 이후 자신들의 공동체에서는 그러한 일(억압과 착취)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신들의 이야기에 확고한 정체성과 세계관을 담아냈다. 창세기는 철저히 파괴된 민중들로부터 나온 이야기이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알게되면, 창세기는 새롭게 읽힌다.
먼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창1:2). 무언가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이 표현이 땅에 관한 첫 번째 묘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명령하신다. 빛이 생겨라. 그리고 물을 갈라 창공 위의 물과 창공 아래 있는 물로 나누시고, 땅을 드러나게 하신다. 땅은 원래 물에 덮여 있었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공허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빛을 비추시고, 땅을 드러내신다.
고대 근동 문헌에서 물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창세기에서 물은 혼돈으로 표현되며 복음서, 계시록에서도 물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즉, 창세기는 의도적으로 물을 갈라 땅을 드러냄으로 땅의 밝아짐을 강조한다.
앞서 창세기는 출애굽을 경험한 민중들이 작성했다고 했다. 따라서, 창조 이야기에서 땅은 어쩌면 민중들이라 일컬을 수 있다. 어둠 속에서, 혹은 지배계급의 논리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에게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고 물(어둠)을 갈라 버린 것이다. 창세기는 세상을 지배하는 지배논리 속에 전혀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오늘날도 자본의 논리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많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의 세계관과 신화는 무엇이고 그것을 거부하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어떻게 다가오는가?
이후 하나님은 밝아진 땅에게 명령한다. '푸른 움을 돋게 하고, 열매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에 돋게 하여라'.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다. 보통 창조는 하나님께서만 이루실 수 있는 권능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이미 하나님은 공동창조 과정을 이루신다. 땅(민중)과 하나님은 함께 세상을 일구어나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바 되어, 하나님과 같은 공동창조를 담당한다. 왜냐면 인간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이 '경작하고 지키는 것'(창2:15)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작하는 것은 히브리어 '아바드'로 이는 노동이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이고,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 참여한다. 하나님도 세상을 단번에 창조하지 않고 수정보완을 거치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창조과정을 지금도 이루시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노동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직업의 업무를 넘어 일상에서 어떠한 노동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아담(인간이라는 보통 명사)은 만물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여기서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분류를 단행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버스타는 옆자리 사람의 이름이 필요없는 것처럼,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담은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온생명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오늘날은 온생명과의 관계가 단절된 시대이다. 내가 먹는 것, 누리는 것이 어떠한 과정으로 내 앞에 왔는지 도무지 관심없고, 온생명보다는 나의 편안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온생명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이다. 그것은 생명파괴적인 시대흐름에 거슬로 저항하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한편,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겨 돕는 베필을 지어준다. 여기서 돕는 베필은 인간의 몸을 보호해주는 상징인 갈비뼈로 지어졌다. 즉,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돕는 베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의 살'(창2:23)인 관계이고, 너가 나인 사이이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교회 관계가 이러한지 고민해본다. 단순히 일주일에 한번 모여 예배 드리는 행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옆의 생명이 일주일 간 어떠한 삶을 살고, 어떤 고민이 있고, 어떠한 사건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가? 우리는 그저 고상한 지식과 신앙을 잠깐 나누는 사이는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서로가 돕는 베필로써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말이다. 아담과 하와는 본래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럽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는 서로 가면을 쓴 채 만나는 곳이 아니다. 나의 약함이 드러나도 안전한 곳이다. 창세기 강의를 들으며, 교회의 본래 모습은 어떻고, 우리는 어떠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배워갔으면 좋겠다. 추상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 분명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