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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3장 1-10절, 누가복음서 18장 9-14절
“이 예식은”
(성령강림후 열째주일)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오늘 오후 독서 모임에서 다루게 될 헨리 나우웬의 <두려움에서 사랑으로>라는 책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고요한 중심이 없는 삶은 쉽게 망상에 빠지고, 내 활동의 결과물을 자아 정체감을 확인하는 유일한 길로 보고 거기에 집착하게 되며, 내 거짓 정체들에 대하여 소유하려 들고, 내 거짓 정체들에 대하여 방어하기 급급하며, 내 거짓 정체들에 대하여 의존하는 태도를 취하게 됨으로써 삶의 길을 잃게 된다.’
헨리 나우웬은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확고한 정체성이 당신에게 이미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이 글을 통해 묻습니다. ‘이미 당신에게 주어져 있는 정체성이 당신을 두려움으로부터, 거짓된 삶으로부터 해방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평안은 내 환경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환경, 조건과 상관없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알 때, 성도는 참 평안을 누리고, 올바른 믿음의 길로 갈 수 있게 됩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묵상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정체성은 성도님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더 중요합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이 확고한 정체성으로 자유의 삶과 평안의 삶 누리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이 예식은’입니다. ‘예식(禮式)’의 사전적 의미는 예의와 규범에 따라 행하는 종교적 의식을 말합니다.
예의와 규범에 따라 드리려면 절차가 있어야 하고, 정성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식을 행함으로 계속해서 ‘기억하고, 지키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와 누가복음에서 어떤 예식이 지켜지고 있는지 그래서 오늘 우리의 삶에서는 어떤 예식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져야 하는지 이야기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출애굽기의 말씀입니다.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태를 제일 먼저 열고 나온 것 곧 처음 난 것은, 모두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에게 바쳐라.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처음 난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처음 난 것’은 단순히 태어난 순서의 첫 번째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태어난 것, 장자는 한 가정과 가문의 기력의 시작이자, 생명과 소유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처음 난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선언은 첫째 아이나 첫 새끼만 소유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의 생명과 소유 전체가 다 나의 것이다.’라는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 선언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이 두 구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이집트의 소유, 이집트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 자유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았음을 말씀하십니다.
3절 이하의 말씀은 이집트의 소유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된 새롭게 부여받은 이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또 기억하기 위해 어떤 예식을 행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3 모세가 백성에게 선포하였다.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곧 당신들이 종살이하던 집에서 나온 이 날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거기에서 당신들을 이끌어 내신 날이니, 누룩을 넣은 빵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급히 탈출하느라 부풀릴 시간조차 없었던 고난과 절박함의 상징인 ‘누룩 없는 빵’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6 당신들은 이레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하며, 이렛날에는 주님의 절기를 지키십시오. 7 이레 동안 당신들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하며, 당신들 영토 안에서 누룩을 넣은 빵이나 누룩이 보여서는 안 됩니다. 8 그 날에 당신들은 당신들 아들딸들에게, '이 예식은, 내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일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이다' 하고 설명하여 주십시오.”
무엇을 기억하기 위해 이 예식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까?
‘주님께서 나와 우리 모두에게 해주신 일,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 이집트의 소유로 노예였던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소유로, 자유인으로’ 되었음을 기억하기 위한 예식입니다.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이 나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중요한 건, 이 예식이 하나님을 위한 예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예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예식입니다. 생명과 삶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속적인 안녕과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누룩이 없는 빵을 이레 동안 먹으라고, 이 예식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아가 이 예식은 정체성의 회복, 과거의 은혜를 회상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주 이 ‘기억’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성경 곳곳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에서는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객이나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신 24:18-19) 하셨고, 레위기와 출애굽기에서도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으니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예식을 행함으로 자신들이 종이었고 나그네였던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곧,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지금 곁에서 밀려나고 억울하게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 소외된 이주민과 약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동참하는 자리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9 이 예식으로, 당신들의 손에 감은 표나 이마 위에 붙인 표와 같이, 당신들이 주님의 법을 늘 되새길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에서 구하여 내셨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므로 당신들은 이 규례를 해마다 정해진 때에 지켜야 합니다.”
항상 몸에 붙여서 떨어뜨리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 ‘당신들의 손에 감은 표, 이마 위에 붙인 표’처럼 무교절의 이 예식을 행함으로 당신들이 이집트의 소유에서 하나님의 소유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당신들이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은혜의 사건을 잊지 않도록,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해마다, 정해진 때에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예식을 행하면 누구에게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강한 손을 기억한다면 누구에게 좋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에게 좋은 일입니까? 하나님은 누구의 경배도 받지 않으셔도 되시는 분이십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이 예식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도행전 17:24-25 “24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25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은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좋은 일입니다. 바로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고, 두렵지 않을 것이며,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식은 스스로가 잘났음을 증명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자랑하는 시간도 아닙니다.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관자 되심을 겸손히 고백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이런 겸손의 태도가 중요함을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사람은 율법과 규례를 철저히 지키며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바리새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매국노라 손가락질받던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꼿꼿이 서서 십일조와 금식 등 자신의 훌륭한 종교적 성취를 나열하며 하나님 앞에 과시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한껏 부풀어 오른 유교병과 같았습니다.
반면 세리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며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은 흠 잡을 데 하나 없는 삶을 자랑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스스로 한없이 부족하다고 여기며 엎드려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한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선언하십니다.
세상의 눈에는 완벽해 보이는 바리새인이 칭찬받아야 마땅할 것 같지만, 오늘 말씀은 낮아지고 무력해 보이는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구하는 자가 하나님께 칭찬받는 자이고 의로운 자임을 말해줍니다.
이상중 목사가 매일 집을 나서면서 그리고 집으로 들어오면서 보게 되는 플래카드가 있습니다. 이 플래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조합설립 동의율 75% 중 현재 70.39% 달성,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도님들은 이 플래카드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드디어, 얼마 남지 않았구나.’하며 기회라고 여기시겠습니까? 아니면 ‘아 .. 얼마 남지 않았구나.’하며 불안한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어렸을 때는 집의 문제는 저의 문제가 아니었고 단지 부모님의 문제였습니다. 전임 사역을 하면서부터는 집 걱정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40 중반이 되고서야 저는 처음으로 집에 관한 고민과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끄럽게도 ‘불안정한 거주지’를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성도님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늘 이런 잠재적이고 또 실재적인 불안감을 갖고 살아가겠구나.’, ‘이런 불안 위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 정문과 후문에 걸려 있는 이 플래카드를 볼 때마다 하나의 예식을 행합니다. 플래카드에 적혀 있는 문장을 눈으로 읽는 것이 저에게는 무교병을 먹는 행위와 같습니다.
불안함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래서 더 하나님이 내 삶을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를 기억하게 하고, 또 내가 가장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결과는 아닐지라도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구원의 하나님을 플래카드에 적혀 있는 문장을 눈으로 읽으며 찬미하게 됩니다.
성도님들께 ‘언제, 어디서나, 또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라고 질문하면서 나 자신이 불안정한 삶의 상황에서 ‘정말 평안할 수 있는가?’를 시험할 수 있는 시간도 되고 있습니다.
저만의 이 예식은 저의 삶이 누구에게 달려 있는지를 기억하게 합니다. 내 힘과 소유가 아니라 내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깨닫습니다. 삶의 연약함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 예수님, 말씀을 보는 시각은 달라집니다. 바리새인의 자리에 있느냐, 세리의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같은 말씀을 읽어도 다르게 해석하게 됩니다. 바리새인의 자리에 있느냐, 세리의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이상중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차이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 예식을 통해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필요 없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뭐야, 저런 인간이랑도 내가 같은 급이 되는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지금의 정체성으로도 삶이 전혀 불편하지 않고, 편안하고, 인정받고, 누군가보다 우위에 서 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과 태도로 사는 이가 바로 누가복음의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해방을 가져다주는 성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전에 한 가지만 묻고 가겠습니다. 성도에게 유일하게 필요한 정체성인 ‘하나님의 자녀’가 정말 성도님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게 합니까?
세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런 세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자유이고 해방이며 구원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무교절. 누가복음에서 기도. 이 두 예식 속에서 오늘 우리에게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삶이 전적으로 누구에게 달려 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나의 보잘것없는 힘과 소유가 아닌 하나님께 내 삶이 달려 있음을 깨닫는 것, 삶의 연약함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을 누리는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어떤 예식을 행하고 있습니까? 이 예식은, 바리새인처럼 나의 의로움과 성공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 예식은, 세리처럼 무력함 속에서 가슴을 치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는 겸손의 자리입니다.
이 예식은, 우리가 본래 이집트의 종이었고 나그네였음을 기억하며, 불의한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노동자와 약자들을 향해 기꺼이 손 내밀기를 결단하는 연대와 실천의 자리입니다.
이 예식은, 세상의 눈에 실패한 것 같고 무력해 보이는 그 바닥의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가 시작되는 때임을 굳게 믿고 다시 일어나 거룩한 삶을 일구고자 하는 자리입니다.
세상의 헛된 정체성에 기대지 않고, 아니 그 정체성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라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정체성으로,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 참된 평안과 해방의 예식을 매일 지켜내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