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伐草)와 소분(掃墳)
김 선구
금년에는 조상묘의 벌초에 참석해 보려고 미리 비행기 표를 샀다. 벌초하는 날이 언제인지 확인도 않고 평소에 하던 예에 따라 짐작하고 비행기 표를 예약했었다. 비행기 표를 구입하고 고향의 동생에게 간다고 전화했더니 1주일 후에야 벌초할 예정이라 했다. 입장이 난감했다. 비행기 표를 반환하고 벌초비를 송금해 주고 고향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옛날에는 벌초일이 정해져 있어서 예측이 가능했다. 그런데 요새는 친족 형제들 간에 의논해서 편한 날을 잡기 때문에 해마다 변하여 일정을 종잡을 수 없다.
나는 일찍 객지에 나와 생활을 하면서 벌초를 잊고 지냈다. 고향인 제주에 한번 다녀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고향의 모든 일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빈자리가 너무 컸다. 직접적인 표현은 안했지만 친척과 형제들에게 눈치가 보였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 사는 것 자체가 죄인인 것 같았다. 일찍이 예취기가 흔하지 않던 시절 예취기를 한대 마련해 드렸더니 대단히 좋아했다. 그러나 그 약발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벌초할 시기가 돌아오면 마음이 뒤숭숭하였다. 차라리 벌금을 분담 시켜줬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벌초 비를 눈치껏 내야하니 욕먹지 않을 정도가 얼마인지 계산이 헷갈렸다.
어린 시절 나도 아버지를 따라 벌초를 다녔다. 그 때는 벌초한다고 하기보다 소분(掃墳)한다고 했다. ‘벌초’라는 단어는 한창 성장한 다음에 쓰기 시작한 것 같다. 그때 나는 ‘소분’의 의미를 묘소에 풀을 깎아 단장해 드린다는 의미로 생각했다. 소분을 하고나면 봉분(封墳)이 어린애 이발한 머리처럼 묘소가 깨끗했다. 추석을 앞두고 우리도 이발하면 모두들 머리가 민둥산이 되었다. 개울에서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집도 새로 도배하고 창문도 새로 발라서 추석맞이 준비를 하였다. 소분하는 것도 추석을 앞두고 조상님들의 집을 정리해 드린다고 생각했다. 묘소는 혼령들이 사는 집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벌초하는 의미와는 좀 색다른 맛이 있었다.
최근에 소분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경사가 있을 때 조상의 묘에 가서 제사지내는 일’이라 했다. 옛날에는 벌초하며 제사도 지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실천했던 것과 사전적 설명내용이 달랐기 때문이다. 왜 제주에서는 소분한다고 했을까? 하고 의아해 했다. 제주에서는 추석이나 설날 성묘하러 묘소를 찾는 일이 없다. 소분함으로써 묘소에 대한 예의는 끝난 것이다. 다음해 벌초할 때까지는 묘소와 헤어져 있어야 했다. 그 때문에 벌초를 더 정중히 하는 뜻으로 소분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하고 혼자 추측해 보았다. 어쨌거나 추석 절을 맞이한다는 것을 조상에게 알리고 묘소를 단장해 드리는 일 자체는 경사가 아니었겠는가!
아버지는 내게 조상을 숭배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얘기해 주었다. “우리 선조들은 사람을 혼(魂)과 백(魄)으로 구성된 존재로 보았다. 백은 사람이 감각할 수 있는 형체를 이루는 것이고, 혼은 그 바탕 위에서 운동하고 작용하는 것이다. 혼백이 합하여 기(氣)를 발산한다. 기가 모여서 활동하면 살아있는 것이고, 기가 흩어져 활동이 중지되면 죽은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죽는 순간 혼은 유탈되어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가 흙속에 남아서 후손들과 소통한다. 이미 흩어져버린 조상의 혼백일지라도 후손들이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면 다시 모여서 흠향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논리이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철저히 믿고 따르려 했다.
분명 소분은 조상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위였다. 풀 한포기를 베더라도 반드시 정성을 수반해야 했다. 소분을 하고 술 한 잔 올리면 조상이 와서 흠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동안은 조상 묘에 예취기를 가져다 대는 것을 삼가고 낫으로만 벌초하였다. 예취기를 사용한다고 불경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왱왱 거리는 예취기 소리를 들으면 조상님 혼백이 편치 않으리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예취기 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소분한다’는 말도 사라지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벌초’란 도구에 구애 받지 않고 풀 베는 작업을 의미한다. 벌초는 점차적으로 조상 숭배의 개념보다 노동의 의미로 변질 되는 것 같다.
이제 벌초는 자손들이 감내해야 할 노동이 되었다. 노동은 고통을 수반하므로 고통분담이 필요하다고 본다. 차라리 고통분담을 양성화해서 할당해 갖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볼 때가 많다. 그것이 나처럼 객지에서 생활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조치일 것 같다. 벌초에 참석하는 사람은 육체적으로 고달프다. 반면 다른 제약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심적으로 고달프다. 벌초 비를 보내면서도 떳떳치 못한 심정이다. 이런 부담을 애들에게는 지우지 않기를 원한다. 애들에게 조상에 대한 공경심과 벌초에 대한 책임감을 떳떳하게 심어줄 방안이 무엇일까? 매년 벌초 때가되면 고민하게 되는 사항이다.(2015. 09. 30)
첫댓글 모두들 고민이 많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현대의 생활에 맞게 조금씩조금씩 바뀌어 가겠지요.
그 흐름에 함께하는 수밖에요. 잘 읽었습니다.
조상에게 자손으로써 도리를 다하지 못 할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소분에대하여 새롭게 알게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산소는 못다한 후손들이 효도를 할수있는 장소로 알고 관리하고 참배하고 있습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