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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와 일지암
전남 무안군에 가면 무안읍 남쪽으로 몽탄면과 청계면 사이에 승달산(僧達山)이 있고 그 기슭에 법천사가 있다. 때는 조선조의 국운이 차츰 기울어가던 왕조 말기였다. 하지만 500년 내내 선비는 높이고 승려는 천대하던 억불숭유 풍조는 변함이 없었다. 어느 날 무안군수가 느닷없이 승달산으로 찾아왔다. 승달산 법천사에 이름난 고승이 한 분 찾아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군수의 생각은 이러했다. 그 자가 제아무리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과 교분이 두텁고 시문과 서화에 뛰어났다고 해도 결국은 보잘것없는 중놈이 아니겠는가. 내 오늘 이 자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본때를 한번 보여주리라. 절에 들어서서 그 고명하다는 스님을 대하자마자 군수가 대뜸 호통쳤다.
“중놈아, 너는 과연 승달(僧達)했느냐?”
승달이란 바로 그 산 이름도 되지만 ‘너는 중으로서 과연 깨달음을 얻었느냐’는 뜻이었다. 그러자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서슴없이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무안 태수 놈아, 너는 과연 무안(務安)했느냐?”
무안이란 바로 그가 다스리는 고을 이름도 되지만 ‘너는 과연 백성을 위해서 편하게 다스리는 일을 했느냐’는 뜻이었으니, 참으로 촌철살인과 다름없는 일갈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무안군수가 그만 고개를 숙이고 꽁무니를 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스님이 바로 초의선사(草衣禪師)이다.
초의선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조선조 500년간 간신히 명맥을 이어오던 우리나라 다도(茶道)의 중흥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같은 차에 관한 명저를 엮어 잊혀져가고 사라져가던 우리 고유의 차 문화의 역사와 우수성을 재조명ㆍ재정립한 큰 공로자이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우리나라의 ‘다성(茶聖)’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초의선사는 단순히 차 문화에 관해서만 큰 업적을 남긴 분은 아니다. 그는 조선왕조 말기인 19세기에 한국 선종사(禪宗史)를 크게 빛낸 대선사였고, 시ㆍ서ㆍ화에도 ‘삼절(三絶)’로 불릴 만큼 뛰어난 예술가였으며, 실학(實學)을 깊이 연구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몸소 실천한 생활철학가이기도 했다.
특히 한국불교사에서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를 통한 백파선사(白坡禪師)와의 선(禪) 논쟁은 유명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침체기에 빠져들어 있던 당시 불교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활로를 제시했다.
교(敎)보다는 선(禪)에 주력하여 선 우위설을 주장한 백파선사의 이론에 맞서 초의선사는 “모든 법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諸法不二),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라고 강조했다. 그는 선이나 교나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선과 교는 바로 하나라고 했으니, 이는 곧 보조 지눌, 태고 보우와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이은 것으로 서산종찰(西山宗刹) 두륜산 대둔사 13대 대종사(大宗師)다운 사자후라 할만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고승으로서 선(禪)과 차(茶), 시ㆍ서ㆍ화에 두루 뛰어난 거목이었으나, 무엇보다도 초의선사를 이야기하면 곧 차를 떠올리게 되고, 차 하면 이내 다성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가 머물며 우리나라 고유의 다도를 중흥시킨 차의 성지 일지암(一枝庵)을 떠올리게 된다.
일지암은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 대둔사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대둔사 경내에서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를 지나 동쪽으로 300m쯤 가면 대광명전이 나온다. 초의선사가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대광명전을 지나 두륜봉을 향해 1㎞쯤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양지바른 곳에 일지암이 서 있다.
초의선사가 ‘다선일미(茶禪一味)’의 높고 그윽한 경지에 이르러 한국의 <다경(茶經)>이라고 할 만한 <동다송>을 저술하며 만년을 보내던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입적한 이후 오랫동안 돌보는 사람 없이 버려진 채 폐허로 변했다. 그러다가 1980년 4월에 초의선사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차 문화를 부흥시킨다는 취지로 발족한 한국다인연합회에서 옛 모습을 복원했다.
현재의 일지암은 6.5평 크기의 다실인 모옥(茅屋), 15.3평의 정자인 초의다정(草衣茶亭) 및 3평 정도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졌다. 일지암 앞쪽 언덕에는 차나무숲이 있고, 뒤쪽의 돌 틈으로 흘러나오는 샘물은 통대나무 쪽으로 연결한 홈통을 거쳐 크고 작은 두 개의 못을 채우도록 만들어졌다. 샘 근처에는 찻잎을 다듬는 맷돌이 있고, 일지암 마루 뒤쪽에는 찻물을 끓이는 차부뚜막인 다조가 있다. 또 일지암과 연못 사이의 얕은 석축에는 ‘다감(茶龕)’이라고 새긴 면돌이 있으며, 그 앞에는 제법 널찍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은 초의선사가 앉아서 지고지순한 다선삼매(茶禪三昧), 다선일미의 경지를 누리던 유물이라고 한다.
두 개의 연못 중 큰 연못가에는 영산홍이 있는데, 초의선사가 <두륜산초암서(頭崙山草庵書)>에서 ‘연못가에 심은 영산홍이 피면 다홍색 꽃무리가 물에 비쳐 환희로운 정경 속에서 다선에 들고……’ 하던 바로 그 나무다.
일지암을 찾아와 당시 50세의 초의선사를 모시고 가르침을 받던 그의 제자 소치(小癡) 허유(許維)는 자신의 저서 <몽연록(夢緣錄)>을 통해 그때 스승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 그가 머무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 아래이다. 늘어진 버들이 처마에 닿아 있고, 풀꽃이 섬돌에 가득 차서 늘 그늘이 뒤엉켜 있었다. 뜨락 가운데는 아래위로 못을 파고 처마 아래에는 크고 작은 물통을 넣어두었는데 대쪽을 연결하여 멀리서 구름 비친 샘물을 끌어온다. “눈에 걸리는 꽃가지를 잘라 버리니 멋진 산봉우리가 석양 하늘에 더 잘 보이네.” 하는 시구들이 많은데 시가 맑고 고상하며 담박하고 우아하니 속된 기운이 없다. 눈 내리는 새벽이나 달 뜬 밤마다 시를 읊으며 흥겨워하였다. 향기가 일어나고 차가 한창 끓으면 흥이 내키는 대로 거닌다. 집마다 있는 난간에 기대어 우는 새 소리를 들으며 서로 마주보고 깊숙하고 굽은 오솔길에선 혹시 낯선 길손을 만날까봐 숨곤 하였다. -
‘돌샘물로 차를 끓이다(石泉煎茶)’라는 제목의 다음 시는 초의선사가 세속의 스승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을 뵙고자 서울로 올라와 한때 한강변에 머물면서 지은 작품이다.
- 하늘빛은 물과 같고 물은 안개와 같구나.
이곳에 와서 노니는지 어느덧 반년일세.
명월과 더불어 누워 지내던 좋은 밤 몇 번이던가.
맑은 강 바라보며 백구와 마주 잠드네.
남을 시기하는 마음 본래 없었으니
좋거니 싫거니 하는 말 어찌 귀에 들리리.
소매 속에는 여전히 경뢰소 남았으니
구름에 기대어 두릉천으로 또다시 차를 달이네. -
(天光如水水如烟 此地來游己半年
良夜幾同明月臥 淸江今對白鷗眠
嫌猜元不留心內 毁譽何會到耳邊
袖裏尙餘驚雷笑 倚雲更試杜陵泉)
여기에서 경뢰소란 당시 이름난 차의 이름이다.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조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 3년(828년)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김대렴(金大廉)이 차 종자를 가져왔으므로 왕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성하였다. -
이 기록에 따르면 흥덕왕 때 김대렴이 중국에서 차를 들여오기 이전, 즉 선덕여왕(632년~647년) 때부터 신라 사람들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도 문무왕이 즉위한 해인 661년 3월에 가락국 종묘의 제사를 올릴 것을 명령하는 내용에 차가 나오며, 김해지방의 전설 가운데에도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올 때에 차씨를 가지고 와서 김해 백월산에 심은 것이 죽로차라는 이야기도 있다.
신라에 비해 선진국이었던 고구려와 백제도 일찍부터 차를 마셨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쉽게도 이 두 나라의 차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전래된 차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김해ㆍ하동ㆍ보성ㆍ강진 등 영남과 호남 남부 지방에서 번성하기 시작하여 이곳이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기에 이르렀다.
고려시대까지 주로 왕실과 사찰을 중심으로 발전해오던 차 문화는 불교가 억압받고 승려는 천대받는 조선조로 접어들면서 함께 깊은 산중으로 묻혀버려 일부 스님들 사이에서만 간신히 명맥을 이어오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차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차의 보급에 힘쓰는 등 전래의 우리의 차 문화 중흥을 이룩한 이가 바로 초의선사였다.
초의선사의 저서명 <동다송>도 우리나라 차를 예찬한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동다송>은 차의 효능과 생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에 관한 내용을 담은 우리나라 최초의 차 전문서이다.
초의선사에게는 선과 교가 둘이 아니듯이 선과 차도 별개가 아니었다. 그는 차 한 잔 마시는 데에서도 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서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를 가리켜 다성(茶聖)이라 추앙함이 결코 지나친 찬사가 아니다.
초의선사의 생애와 업적을 전해주는 기록으로는 초의와는 동갑이며 승속을 떠난 지기였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수제자인 위당(威堂) 신헌(申櫶)의 ‘초의대종사탑비명’, 이희풍(李喜豊)의 ‘초의대사탑명’ 및 <동사열전> <몽연록> <조선불교통사> 등이 있다.
초의선사는 1786년(정조 10년) 4월 5일에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장씨(張氏), 본관은 흥성(興城), 이름은 의순(意恂), 자는 중부(中孚), 초의는 법명이다. 당호는 비록 250여 가지로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아호를 썼던 추사에 미치지 못하지만, 초의도 초사(草師) ․ 해사(海師) ․ 해옹(海翁) ․ 해노사(海老師) ․ 해양후학(海陽後學) ․ 해상야질인(海上也耋人) ․ 우사(芋社) ․ 자우(紫芋) ․ 일지암(一枝庵)이라고 했으며, 뒷날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선사의 가계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바가 없고, 어머니가 큰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초의를 잉태했다고 한다.
다섯 살 나던 해에 강가에서 놀다가 잘못하여 깊은 곳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스님이 구해주어 살아났다. 그것이 불문에 들게 된 인연인지도 몰랐다.
소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기록이 없고, 15세 때인 1800년(순조 원년)에 전남 나주군 다도면 용덕산에 있는 운흥사(雲興寺)에 들어가 벽봉(碧峰) 민성(敏性)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벽봉 스님이 어떤 분인지에 관해서도 자세한 기록은 없고, 그가 출가한 운흥사도 지금은 잡초 우거진 가운데 부도 몇 기만 서 있는 쓸쓸한 폐허만 남았다.
초의는 19세 때인 1804년에 운흥사를 떠나 영암 월출산에 올라 아름다운 절경에 감탄하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막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고 홀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월출산을 내려온 그는 해남 대둔사로 찾아가 완호(玩虎) 윤우(倫佑) 스님을 계사로 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초의라는 법호는 경(經) ․ 율(律) ․ 논(論) 삼장(三藏)과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을 수학한 뒤 받았다고 한다. 1807년(순조 7년)에는 전남 화순군 이양면에 있는 쌍봉사(雙峰寺)로 찾아가 금담선사(金潭禪師)에게서 선을 배우고 범자(梵字)와 불화(佛畵)를 배우는 한편 토굴 속에서 기거하며 참선 수행하다가 24세 되던 1809년에 다시 대둔사로 돌아왔다.
초의선사가 강진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유배생활을 하던 당대의 위대한 실학자요 대사상가인 다산 정약용을 만난 것이 그 무렵이었다.
당시 다산은 48세, 초의보다 24세 연상으로서 강진으로 귀양온 지 8년째였다. 다산과 초의, 그리고 뒷날 만난 추사, 이 세 사람이야말로 우리나라 차 문화를 중흥시킨 당대의 3대 거목이었으며, 따라서 초의선사의 생애에 있어서도 이 두 분과는 불가분의 관계로서 이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다산이 당쟁(黨爭)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서학파(西學派), 이른바 천주교 신자로 몰려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시작한 것은 1801년(순조 1년) 그의 나이 41세 때부터였다. 강진 보은산 고성사의 스님에게서 처음으로 곡우차(穀雨茶)를 얻어 마시고 우리 차의 맛에 빠져든 다산은 1808년 봄에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옮긴 뒤부터 본격적으로 차를 가까이 하게 된다. 특히 그에게 차의 진미를 전해준 주인공은 당시 같은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에 머물던 혜장(惠藏) 스님이었다. 대둔사 연담선사(蓮潭禪師)의 제자로 알려진 혜장은 다산보다 10년 연하로서 그때 백련사로 옮겨 수행하고 있었다. 의기상통한 두 사람은 곧 승속을 떠나 교유하게 되었으며, 차와 선에 관해 자주 논하는 사이가 되었다. 특히 다산은 혜장에게 <주역>의 깊은 뜻을 가르쳐주었고 혜장은 사찰에서 전래되어오던 다도를 가르쳐주었다. 혜장은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온 초의를 다산에게 인도하여 초의가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주역>을 비롯한 유학과 시문을 배우게 했다.
다산이 유배생활 18년의 반 이상을 보낸 다산초당의 다산은 본래 만덕산의 다른 이름이요 정약용이 자신의 아호로 삼은 것인데 그 까닭은 오로지 차나무가 많다고 해서 유래된 것이다. 혜장과 초의로부터 다도를 배운 다산은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제자들과의 정리를 끊지 않고 계속해서 차를 얻어 마시기 위해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었다. 그리고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로 돌아가 만년을 보내면서 해마다 초의와 제자들이 보내주는 차를 마셨다.
다산은 <동다기(東茶記)>와 <다무(茶務)> 같은 차에 관한 저술과 함께 70편이 넘는 차에 관한 시문도 남겼는데, 혜장에게 차를 얻으려고 써 보낸 ‘걸명소(乞茗疏)’만 보아도 그의 차에 대한 절실한 원망(願望)이 잘 나타나 있다.
- 나는 요즘 차만 탐식하는 사람이 되어 차를 약처럼 마신다네. 육우(陸羽)의 <다경(茶經)> 세 편을 모두 통달하고 ……. 몸에 병이 있어 차를 얻고자 하는 뜻을 전하네. 듣건대 고해(苦海)를 건너는 데는 보시를 가장 중하게 여긴다는데 이름난 산의 진액이며 풀 중의 영약으로는 차가 으뜸이 아니겠는가. 목마르게 바라는 뜻을 헤아려 달빛과 같은 은혜를 아끼지 말기 바라네. -
추사 김정희는 초의선사와 동갑이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30세 되던 무렵으로 알려졌다. 강진에서 다산에게 배우던 초의는 월출산을 거쳐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29세 되던 1815년(순조 15년)에는 호남의 명필 이삼만(李三晩) 등과 함께 전주 한벽당에서 시회를 즐기기도 했고, 이어서 생애 처음으로 서울 땅을 밟았다. 그때 다산의 두 아들인 정학연(丁學淵) ․ 학유(學遊) 형제를 비롯하여 신위와 홍현주(洪顯周) 등을 만나 교분을 맺었으며, 정학연의 소개로 추사와도 처음으로 만났다. 다산의 둘째아들 학유도 초의와 동갑이었다.
추사가 처음으로 차의 오묘한 맛을 깨달은 것은 24세 때 연경(燕京)에서였다. 당시 청나라의 대학자 완원(阮元)으로부터 승설차(勝雪茶)를 대접받고 그 맛을 못 잊어 자신의 아호 가운데 하나를 승설도인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초의와 만난 추사는 차와 선을 통해 이내 깊은 정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고 이 우정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경주 김씨인 추사가 안동 김씨들에 의해 뒷날 제주도로 귀양가 있을 때 초의는 위험한 뱃길을 무릅쓰고 다섯 차례나 찾아가 위로해주었고 추사는 고마운 뜻을 잊지 않고 자신이 쓴 시문과 글씨를 자주 보내주었다. 한 번은 반년이나 함께 지내며 차나무도 심고 참선도 하며 더불어 지낸 적도 있었다. 특히 추사가 제주도 유배 시 초의가 손수 만든 차를 받고 써서 보내준 ‘명선(茗禪)’이란 글씨는 유명하다.
추사도 차에 관한 욕심은 선배인 다산에 못지않았다. 다산이 혜장에게 ‘걸명소’를 보냈듯이 추사도 초의에게 여러 차례 차 구걸(?)하는 글을 보냈던 것이다. 그 가운데는 이처럼 애걸 반 협박 반의 재미있는 글들도 있다.
- ……다만 차에 관한 인연은 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다네. 그러므로 차만 보내주면 되고 답장은 필요없네. 이제 2년간 세금 못 받고 밀린 차를 보내되 다시는 미루는 잘못이 없어야만 하리. 그렇지 않으면 백천 겁이 지나더라도 마조(馬祖)의 할(喝 : 고함)이나 덕산(德山)의 방(棒 : 몽둥이)을 피할 수 없으리라. -
― 이제 며칠 뒤면 내 나이 칠십, 초의 또한 칠십이건만 차 보내는 일은 어찌하고 이리 누워만 있는고. ―
1817년 서울을 떠난 초의는 경주를 찾아 불국사와 기림사 같은 고찰들을 찾아다녔으며, 특히 기림사에서는 천불(千佛)을 조성하였다. 이 천불상은 이듬해 대둔사로 옮겨져 천불전에 모셔졌다.
초의는 1823년 <대둔사지> 간행사업에 편찬자로 참여한 뒤, 그 이듬해에는 일지암을 짓고 이후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의 명저 <동다송>을 비롯하여 시집인 <초의시고> <일지암시고>, <다신전>과 <문자반야집> <진묵조사유적고> 등 중요한 저술이 거의 모두 이곳 일지암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신전>은 1828년 지리산 칠불암에서 <만보전서(萬寶全書)> 가운데 ‘채다론(採茶論)’을 필사하여 돌아온 뒤 이를 정서하여 1830년에 펴냈으며, <동다송>은 전부터 교분이 두텁던 홍현주가 다도에 관해 보다 상세히 알고자 하므로 저술했다. <다신전>은 중국의 백과사전 격인 <만보전서> 중 명나라 사람 장원(張源)의 <다록(茶錄)>을 필사한 것이다.
초의의 나이 52세 때인 1837년(헌종 3년)에 펴낸 <동다송>은 차나무의 생태에서부터 차의 효능과 차에 얽힌 고사, 중국의 명차와 우리 차의 빼어난 점, 제다법과 차 달이는 방법, 그리고 초의 자신의 다도관 등을 담은 불후의 명저이다.
우리나라 남종화의 종조로 불리는 소치 허유가 일지암으로 찾아와 시․서․화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2년 전이었으며, 2년 뒤에 다산은 소치를 추사에게 보내 그에게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게 하였다.
초의선사가 시 ․ 서 ․ 화에 뛰어나고 빼어난 인품에 이름 있는 선비들과의 교분도 두텁다는 명성이 대궐에도 알려져 55세 때인 1840년에는 헌종이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선사라는 호를 내리기도 했다.
다시 2년 뒤에는 전주 봉서사로 찾아가 ‘석가모니불의 현신’이라는 전설을 남긴 진묵조사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수집하여 돌아와 그의 유적고를 지었다. 사실 초의선사의 저술인 <동다송>을 비롯하여 <진묵조사유적고> 등은 모두 스승인 다산과 종생의 지기인 추사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하는 실학의 학풍에 따라 저술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백파선사와 선에 관한 논쟁을 벌일 때 고증학적 입장에 입각하여 비판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하지만 초의선사는 대선배인 백파와 논쟁하면서도 일세의 선사요 법기(法器)다운 풍도를 잊지 않았다. 신헌은 뒷날 그의 탑비명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 스님이 백파 스님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며 내 의견을 묻는지라 내가 “스님도 그릇된 바가 있는 듯하오이다.” 하니 스님은 웃음으로 받아넘기며 말씀하시기를, “백파 스님과 나의 잘못은 실은 모두 허물은 되지 않나니, 이는 잘못된 곳이 곧 깨닫는 곳이기 때문이라” 하셨다. -
‘잘못된 곳이 곧 깨닫는 곳(誤處卽是悟處)’이라는 말은 백파와의 논쟁이 단순히 쟁론을 위한 논쟁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길의 하나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러 1856년에는 동갑이며 평생의 벗이었던 추사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보다 20년 전에는 세속의 스승인 다산이 한강변 마재에서 세상을 떴으며 절친한 차벗이었던 홍석주도, 한때 논쟁의 상대였던 백파선사도 모두 먼저 이승살이의 막을 내리고 저 세상으로 갔다. 초의도 어느덧 71세였다.
그리고 다시 9년이 흐른 1865년(고종 2년) 8월 2일 일세의 대선사요 예술가요 다도의 중흥조였던 초의선사는 조용히 입적했다. 이희풍의 ‘초의대사탑명’에 따르면 그날 저녁 시자를 시켜 서쪽을 향해 앉혀달라고 한 뒤 가부좌를 한 자세에서 조용히 입적했는데, 입적한 다음에도 몸에서 따스한 향내가 풍겨 나와 방안에 오래 남았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인 <동사열전>에는 초의선사의 입적일이 같은 해 7월 25일로서 당시 세수 80세, 법랍 65년이라고 하여 약간 차이가 있다. 또한 신헌의 ‘초의대종사탑비명’에는 입적일이 1866년인 병인년 8월 2일로 기록되어 1년의 차이가 있다.
그 뒤 1871년(고종 12년) 대둔사에 초의탑과 부도비가 세워졌고, 1941년에는 초의대종사탑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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