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산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옥대운유로를 따라 걷다가 중화사에서 내려옵니다.
비가 많이 내려 내려가는 길은 진흙탕 길이었습니다.
아래로 내려오니 따리 고성이 보이고 비는 더는 내리지 않습니다.
중화사로 오르는 것은 케이블카가 아니라 리프트네요.
오늘 같은 날 창산을 오르는 여행자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비 내리는 날 저런 리프트 타고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9시 30분부터 걷기 시작해 11.5km를 4시간을 걸어 1시 30분에 중화사에 도착했습니다.
중화사를 잠시 구경한 후 바로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해 3시 40분에 인민로에 도착했으니
내려오는 길이 2시간이나 걸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창산 트레킹만 6시간 걸렸다는 말입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비가 많이 내려 길이 미끄럽고 진흙 범벅에 말이 다닌 길이라 험해 그랬나 봅니다.
오늘 다녀온 곳의 지도를 올려봅니다.
왼쪽으로 차를 타고 가 그곳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다음 4시간을 걸어 중화사까지 온 후 다시 그곳에서 2시간을 걸어 내려와 고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우리의 트레킹이 끝난 것은 아니죠.
리프트만 노는 게 아니라 오늘 같은 날은 말도 휴일입니다.
이제 고성 안을 천천히 걸어 다니며 구경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 걸어야 할 길이 더 남았다는 말이네요.
고성 안으로 접어드니 문묘가 보입니다.
문묘란 공자를 모시는 곳이 아닌가요?
공자는 관우와 더불어 문무의 대표가 아닐까요?
따리에는 이렇게 관우를 모신 관제묘도 있고 공자를 모시는 문묘도 있네요.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는 그런 기분일까요?
이곳 따리에 사는 바이족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가 얼하이에서 잡힌 물고기라 합니다.
그 이유로는 얼하이에는 이곳 따리를 침략했던 원나라와 그 이전에 침공했던 당나라 군대의 많은 병사가
수장을 당해 고기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아직도 이들은 당시의 슬픈 역사를 잊지 않고 아픈 기억으로 남겨두었단 말인가요?
물론, 요즈음 입맛이 변해 바다에서 잡힌 고기 맛을 알고 난 후에 호수의 물고기보다는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가 더 맛나다고 합니다.
이제 이들이 바닷고기 맛을 알고 나면 세상은 또 한 번 난리가 나겠지요.
그래서 매번 우리 서해바다를 불법으로 넘나들며 목숨을 걸고 조업하는 게 아닌가요?
내일 샹그릴라로 가려고 합니다.
버스는 박애문 건너편에 있는 매표소에서 샀습니다.
버스 타는 곳은 바로 그 집 앞에서 기다렸다가 타면 된다고 하네요.
따리에서 샹그릴라까지는 120원/1인이네요.
중국은 차 크기나 종류에 따라 가격이 다른가 봅니다.
다행히 고성으로 내려오니 비는 그쳤습니다.
그렇다고 맑은 날은 아닙니다.
만약, 날씨가 좋았더라면 창산을 휘감은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 그리고 창산의 푸른 빛을 함께 볼 수 있었을 텐데...
쿠빌라이는 저 산을 그냥 말을 타고 넘었다는 말입니까?
그들에게는 말 등에만 오르면 세상 어디나 길이 되었을 겁니다.
그들은 천하가 말 등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천하를 얻는 것은 말 등이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말 등이 아닙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말이 달릴 수 있는 곳까지 달려 그들의 영토를 만들었지요.
서쪽으로는 유럽까지도 말입니다.
설마 저 산을 넘어온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샹관과 샤관만 눈이 빠지라 지켰던 따리.
그 때문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지요.
위의 지도를 보시면 따리의 지형을 아실 수 있습니다.
정말 하늘이 내린 그런 곳 아닙니까?
이런 곳을 왼쪽 창산을 넘는 길을 알려준 나시족의 길잡이 때문에 하루아침에 바이족은 쿠빌라이에 함락되고 말았다지요.
아름다운 곳이라 하여 윈난을 치짜이 윈난(칠채 운남:七彩 雲南)이라 했나요?
그곳에서도 이곳 따리는 풍화설월이라는 고장이잖아요.
컬러풀하다고 했지만, 늘 그런 것만 아닌가 봅니다.
문제는 날씨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제 따리 여행은 모두 끝내고 내일은 샹그릴라로 갑니다.
따리에 있는 사흘 동안 내내 비가 내려 이번 따리 여행은 고행길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고 해도 날씨가 따라주지 않으면 이 또한 힘든 길이 되고 말았네요.
첫댓글 지도에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나오는데 김용의 무협지중 하나이지요.
중고등학교시절 무협지 등이 나오면 돌아가신 형님의 명령으로 책 대여점에 달려가서 첫번째 대여인으로 예약하였던 것이 생각납니다. 저와 형님은 네살 차이인데 싸우면서 맞기도 무척 많이 맞았지만 형제중 제일 친했었지요.
형님이야 그래도 나이가 제일 비슷한 형제가 저이니 그랬겠지만 저는 취향이 형님과 제일 비슷했습니다. 만화, 무협지, 바둑, 장기 등 오락, 잡기를 무척 좋아했지요.
부모님이 아시면 꾸중했던 만화책, 잡지, 무협소설 등을 몰래 같이보고 빌려오는 심부름은 거의 제 차지였지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형님이 갑자기 많이 생각납니다.
천룡팔부의 내용이 이곳 따리국의 이야기였던가요?
그래서 여기에 영화 세트장을 만들어 촬영했나 봅니다.
지기님도 형님께서도 잡기에는 무척 강하셨나 봅니다.
아직도 나이는 많지 않으신데 이미 고인이 되셨네요.
원래 형제간에 많이 다투며 자라면 나중에 나이들어 더 가깝게 지내지 싶습니다.
사실 다투는게 아니라 동생이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며 자라겠지만요.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다양한 놀이가 없기에 주로 무협지가 아닐까요?
저도 한때는 서부 영화에 반해 서부극은 모조리 본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무협지를 보셨으면 지금쯤은 축지법이나 장풍 정도는 쉽게 하시겠지요?
그런게 무협인의 기본 덕목이니까요.
나중에 만나면 꼭 보여주세요.
제가 테스트해봐야 믿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