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244/0917]임실장任實場과 오수장獒樹場
군소재지인 임실任實에 서는 오일장五日場장은 1, 6, 11, 16, 21, 26일이고, 면소재지인 오수獒樹에 서는 오일장은 5, 10, 15, 20, 25, 30일이다. 재밌는 것은, 시골에 사니까 그러겠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바쁘지 않으면 어쩐지 꼭 장에 가야 할 것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시계가 있으면서도 ‘오늘이 무슨 장이지?’서로 물어보며 날짜를 헤아리는 습관도 생겼다. 어제는 16일이므로 당연히 임실장. 외식을 하러 네댓 명이 또 몰려갔다. 시장통에 순대국으로 군내에서 소문난 ‘포천집’과 ‘개미집’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다투고고 있다. 아니면 ‘이웃사촌 보리밥집’도 별미다.
그런데, 십 수년 전만 해도 군소재지이긴 하지만, 임실장은 오수장에 비하면 게임(비교)이 안됐다. 오수장은 전라북도에서도 내로라하는 큰 장이었다. 지금은 쇠락해졌지만, 역사적으로도 임실, 남원, 구례, 순창, 장수 등으로 가는 한때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 영조대인 1712년에 ‘경로청’이 이미 설치되었고 ‘오수역참’이기도 했다. 대부분 기억하리라? 술 취한 주인이 취해 강둑에서 잠을 자는데, 불이 났다고 한다. 항상 같이 따라다니던 개가 제 몸의 털에 물을 묻혀 주인을 구한 후 죽었다던가. 주인은 개의 죽음을 가상히 여겨 무덤을 만들어 묻어주고 항상 갖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놓았다던가. 그 지팡이가 몇 백년 자라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되었다던가. 그래서 '큰 개 오獒' '나무 수樹' 오수다. 서울 인사동에 가면 오수 출신이 하던 '오수별채'라는 흑두부 잘하는 식당도 있다. 한번쯤 가보시라. 그 주변이‘원동산園東山공원’이 되었고, ‘의견축제’를 하고 있기도 한, 내 고향 오수. 그 원동산에서 김대중도 대통령 시켰달라고 연설을 했고, 손주항도 국회의원 시켜달라고 연설을 했다. 나는 뭣도 모르면서 그 양반들 말이 맞는 것같아 박수를 쳐대기도 했다. 그렇게 ‘70년대 정치’도 흘러갔다.
이 의견義犬설화가 고려때 최자의 『파한집』에 실려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방학책 뿐만 아니라 교과서에도 실렸던 내 고향 오수. 교과서에 실리는 데는 한 상업인(오수번영회장)의 애향愛鄕의 노력 덕분이었다. 50년대말 가람 이병기선생의 자문을 받고 당시 문교부에 거듭 청원을 한 그의 공로가 공원에 송덕비로 남아있다. 그런 의견의 고장에 ‘신포집’이라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보신탕집이 수년 전까지 그것도 공원 바로 옆에 있어, 늘 빈축을 사곤 했다. 할머니 신포집은 없어졌지만, 따님들이 전주에 진출해 두 곳서 영업을 하고 있다던가. 영화 ‘광복절 특사’에 ‘오수역’이 몇 커트 나오는데, 그나마 건물은 헐지 않아 면민들의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십리길을 걸어 활동사진(영화) 단체관람을 하기도 한, 유일하게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중학교때는 서점도 처음 생겼다. 농부인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그 서점에서 나에게 대하소설 등 3질을 사주실 생각을 했을까?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박종화의 『삼국지』 5권, 송강 정철의 스토리인 『자고가는 저 구름아』 5권, 김교신의 『광복 20년』 5권. 얼마나 좋았으면, 쬐간한 놈이 이 15권을 악착같이 메고 십리길을 걸었을까. 자식 사랑에 ‘통큰’ 아버지 덕분에 나는 ‘생활글 작가’가 되었으리라.
당시 오수리 인구가 2만여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큰 리里였다고 한다. 제사공장 등이 활발히 돌아가는 덕에 예쁜 한복을 입고 서빙하는 ‘명월관’ 등 음식점이 네 곳이나 성업했다고 한다. 지금은 면민이래야 고작 1500명, 40곳이 넘는 음식점이 서로 제살 깎아먹기 바쁘다고 한다. 북적대던 오일장은 파리를 날리고 있다.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간 오수장. 하얀 얼음뭉치들이 쌓여 있어 지나가면서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다 혼쭐이 났던 일도 있다. 그것이 양잿물일 줄이야?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정신없이 뛰어 홍시를 사먹여 타들어가는 혀를 식혀 주셨다. 그 어머니 가신 지 어언 1년 하고도 8개월. 지금도 시시때때로 눈물이 난다. 우리 다섯 살 손자가 “할아버지가 백 번도 넘게 보고 싶다”고 속삭였지만 “아가야, 이 할래비도 할래비의 엄마가 백 번도 더 보고 싶단다” 말해주고 싶다.
그 오수에 군소재지에도 없는 ‘군립도서관’이 생겼다. 나의 귀향선물인가 싶었다. 정신없이 들락거리며 도올 선생의 쾌저 등 인문서를 읽다가 전대미문의 코로나가 덮쳤다. 잠정폐쇄. 출입 금지. 유감 천만이다. 농한기때 면민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특강’을 무료로 해드리겠다고 이력서도 전달했건만. ‘역사 이야깃꾼history storyteller’이 고향에서 재능기부할 게 그것 뿐인데, 그리고 아마도 모두 귀를 쫑긋하실 터인데. 그날이 오긴 올 것인가.
임실장 얘기를 하려다, 이야기가 또 나의 ‘악습’인 샛길로 빠졌다. 장날이든 평일이든 오수를 갈 때마다 애잔한 마음이 든다. 구십 평생 아버지의 발길이 머물지 않은 곳이 어디 한 곳이나 있을까? 면사무소에, 이발소에, 목욕탕에, 농약사에, 농협에, 하나로마트 등 어디에 가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꼭 있을 것같아 눈길과 발길이 머물곤 한다. 물론 지금도 아버지는 계셔 오래된 단골시계방에도 들르고, 농약사에서 각종 채소씨앗도 사오시긴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어디 채소씨앗을 사오셨을까? 당신이 모두 씨를 받아 심었는데. 나는 왜 맨날 이런 것에 마음에 쓰이고 애린한 마음이 들면서 눈물을 나는 걸까? 가는 세월을 어느 누가 막을 수가 있다고? 헌칠한 키에 메주같은 네모얼굴의 가수 서유석이 부르는 ‘가는 세월’이라는 노래구절이 떠오른다. 내 고향 오수여! 영원하라.
첫댓글 아침부터 친구의 애잔한 엄마 그리워하는 글에 나도 울엄마 보고잡다.
울엄마 2014년4월14일8시43분에
돌아가셨다.
엇그제 같은데 벌써 육년이 지났네
울엄마 좋아하는 단팥빵. 시장표 도나쓰라도 사다 드리고싶다.
^찾아가 반길이 없으니 이를 서러워하노라^
쌈구경.장터구경이 으뜸이라 장터에 가면
약장수.각설이.야바위꾼.대장간.벼라별것 다 있었는데
요즘은 고추파는 고추장 말고는 허접한 장터가 된지 오래다
친구덕에 오늘도 오수장구경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