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27
ㅡ 후삼국시대 (889~936) 4 ㅡ (고려를 건국한 '태조왕건' 편)
왕건!
'왕건'(877~943)은 후삼국 시대 혼란한 난세속에서 뛰어난 전술과 외교력으로 명성을 쌓아 고려를 건국한 인물이다.
<견훤, 궁예, 왕건>은 중국 삼국지 <조조, 유비, 손권>과 비슷하게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난세 속에 태어나 나라를 건국했거나 이어 받았다.
<견헌 궁예 왕건>이 당시 살아온 생들을 살펴보아도 중국 삼국지 속 <조조 유비 손권>에 별로
뒤 떨어지지 않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중국 삼국지 인물들에 비해 새발의 피에 불과한 것은 아쉽다.
'태조왕건'이라는 드라마처럼
더 멋진 소설이 나와 우리나라 후삼국 난세시대 인물들을 중국 삼국지 속 못지 않은 인물들로 그려냈음 한다.
내게는 '삼국진연의를 쓴 나관중' 같은 재능이 없음이 한스러워 질 뿐이다.^^
견훤(867년 출생), 궁예(869년 출생), 왕건(877년 출생)은 거의 동시대에 태어났다
왕건은 견훤이나 궁예에 비해 10살 정도 나이 차도 있었지만, 거친 환경에서 스스로 일어나 나라를 일군 견훤과 궁예에 비해 당시 금수저라 할 수 있는 만큼 좋은환경이었던 '송악'(현재 개성) 출신 해상세력가이자 호족출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왕건 아버지 '왕륭' 또는 왕건 할아버지 '작제건'은 서해를 중심 으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 하며 지역에서 날로 영향력을 키워 갔다.
'서긍'이 북송 사신으로 고려에 와서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는 왕건 조상이 고구려 대족(大族)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왕건 가문은 고구려 멸망 후 신라로 들어온 고구려유민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런사정이 있었기에 왕건가문은 시간이 흘렀어도 고구려계로서 의식은 여전했고, 이들을 통합한 궁예는 그들을 우대하기 위해 국호를 처음에 '고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앞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지금은 궁예가 901년 처음 칭한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훗날 왕건이 정식 국호로 정한 '고려'와 구분하기 의한 편의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예 고려 흔적을 지우고자 한 의도이기도 하다. 당시 궁예는 '후고구려'가 아니라 그냥 '고려'라 했다. 여기서 또 알아두어야 할 것은 당시는 '고구려'를 모두 '고려'로 불렀다는 것이다. 고구려도 '장수왕' 이후부터는 공식적으로 '고려'라 칭했다. 우리는 지금에 와서 태조왕건 고려와 구분하기위해 고구려로 부르고 있을 뿐이다.
즉 우리 역사 속 '고구려' '고려'는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궁예는 '고려'라는 국호를 904년 경 '마진'(摩震) 으로 변경 하였고, 최종적으로 '태봉'으로 바꾸었다. 후에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다시 '고려'로 되 돌렸다.
궁예가 고려 국호를 '태봉'(泰封) 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때문 이었을까? 그 이유를 추정 해 보자면,
첫 째, 궁예는 신라 쇠퇴 속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했지만, 단순히 고구려의 계승을 주장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국가를 독자적 정체성을 가진 새로운 왕조로 만들고 싶어 했다. 태봉이라는 국호를 사용함 으로써 기존의 고려(고구려)와 차별화 하고, 자신이 창건한 새로운 국가라는 점을 강조했다.
둘 째,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 (彌勒佛) 화신으로 자처하며 불교를 기반으로 한 정치를 펼쳤다. '태봉(泰封)'은 태평성대(太平聖代)와 연관된 의미를 지니며, 이는 미륵불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하는 이상적 국가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궁예는 자신 통치를 신성화 하고, 백성들 충성을 유도 하고자 했다.
셋 째, '고려(후고구려)' 국호는 고구려 계승을 강조하는 의미가 강했지만, 이는 반대로 왕건과 같은 고구려 계승 세력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었다. 이에 궁예는 국호를 변경함으로써 자신의 독자적인 정치적 노선을 확립하고, 반대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결국, 궁예의 '태봉' 국호변경은 종교적·정치적 정당성을 확립 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궁예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왕건은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된 상황에서도 별다른 불평없이 해상세력들과 연계하며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다져 갔다.
왕건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왕건이 청소년 시절 통일신라는 진성여왕 시절로 거의 망해가고 있는 나라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건도 여러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할 때 892년 궁예가 반란을 일으키고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즈음에 왕건은 아버지 왕륭과 함께 궁예 군대에 합류하여 장수 가 되었다.
왕건의 나이 15살 때 일이었다.
이 당시 견훤과 신라는 강력한 해상세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궁예는 해상세력이 약했다. 이러할 때 왕건가문이 해군을 이끌고 서해를 장악하기 시작 한다. 견훤 해상교역을 차단하며 궁예세력 확장에 기여한 것이다. 이를 통해 궁예는 경제적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왕건가문은 해상무역망과 송악지역 경제력을 동원하여 궁예 정권을 지원하며 신뢰를 얻었다.
이후 견훤이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한 직후 궁예도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한다.
이 때 왕건은 스물네살이었다.
후고구려가 건국되자 왕건과 아버지 왕륭은 '궁예' 밑으로 들어가 궁예 주요 신하가 되었다.
궁예는 신라를 공격하며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왕건 해상장악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중용하기 시작한다.
왕건은 젊은나이 때부터 공을 세우며 벼슬도 '한찬'(현 해군 대장급)을 넘어 계속 승진했다. 왕건 아버지 왕륭이 송악의 큰 세력을 지닌 호족인 점도 작용 했겠지만 왕건 개인 능력이 더 크게 작용했다.
왕건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그런데 고려측 사료에서는 궁예가 왕건을 얻자마자 궁예가 이상할 정도로 일선 군사지휘에서 바로 물러나, 젊은 왕건에게 총사령관 을 위임 한듯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정황상 개연성이 너무 떨어진다.
왕건에 의해 고려가 건국된 후 시조왕건을 부풀리기 위해 고려측 역사조작이 어느 정도 가미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삼국사기 궁예전>을 보면, 궁예는 왕건을 얻은 이후에도 한동안 왕건 조력없이 자신이 직접 군지휘를 하는 대목들이 나온다.
사실, 왕건 아버지 왕륭이 궁예 신하가 되었을 때 송악세력은 패서일대 평주, 정주, 황주등 다른 지역 호족들을 압도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새 왕건이 호족세력 수장격이 되었다는 것은 왕건 능력과 지략이 출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태조왕건 드라마를 보아도 왕건은 나이는 어려었도 아주 신중한 모습으로 나온다. 궁예가 관심법 에 빠져 신하들을 마구 죽일 때도 왕건에게 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왕건 또한 궁예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나름 궁예랑 잘 지낸다.
역사기록이나 여러가지를 통합해 생각해보면 왕건은 위 아래로 다 잘하는 체세술 고수였던 거 같다.
왕건은 역사 속에서 포용력과 전략적 판단력, 온화하면서도 결단력있는 성품지닌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왕건 성격 덕분에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하고 그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 초 왕건 사후에는 '혜종'이 호족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가 고려 4대 왕 '광종' 때에 이르러서야 호족들 대숙청이 이루어져 호족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이처럼 호족들은 고려로 통일이 된 후에도 엄청난 세력을 보유할 정도로 강했다.
고려 초기 '태조왕건'은 혼인외교 등을 통해 어느 정도 호족세력을 잘 구슬리긴했지만 상당부분 왕건 개인적인 인격, 카리스마, 능력등 으로 호족들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나라를 건국하는 인물들은 인간적인 면에서 뭔가 달라도 다른 특별함이 있다.
혼잡한 난세 속에서는 강한 힘을 가지고 무자비하게 밀어붙이는 장수보다는 적도 끌어 안을줄 아는 덕장들이 더 빛을 보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초한지'에 나오는 '유방'과 '항우'일 것이다.
왕건도 여러 뛰어난 면도 많이 있었겠지만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덕성'이었다.
그 '덕성'이 태조왕건이 되게 해 준 것이다.
이어서 <후삼국시대 공방전 편> 이 계속 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아래 사진은 태조왕건 상상 초상화이다. 태조왕건 드라마에서 왕건역을 맡은 최수종을 닯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