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청(聽)
한문(漢文)의
'들을 청(聽)'을 보면,
여러 부수(部首)가 모여 구성(構成)되어 있습니다.
귀이(耳),
임금왕(王),
열십(十),
눈목(目),
한일(一),
마음심(心)
이렇게 여섯 글자가 합(合)하여
'들을 청(聽)'이 만들어졌는데,
그 뜻이 너무 감동적(感動的)입니다.
귀이(耳)와 임금왕(王)이 합(合)하여,
임금은 듣는 것을
우선(于先)하여야 한다는 의미(意味)이고,
열십(十)과 눈목(目)은 열 개의 눈으로 보듯 하고,
한일(一)과 마음심(心)은
일관(一貫)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는
의미(意味)입니다.
공자(孔子)는
눌언민행(訥言敏行)이라 하여,
말은 사려(思慮)깊게 하고
행동(行動)은 민첩(敏捷)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동양(東洋)에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하여
상대방 입장(相對方 立場)에서
내가 행동(行動)해야 할 자세(姿勢)를
취(取)하여야 한다 했고,
서양(西洋)에서는
정언명법(定言命法)이라 하여
내가 하는 행동(行動)이 남이 따라해도 무방(無妨)하다면 해도 된다는
도덕적 가치(道德的價値)가 존재(存在)합니다.
칸트(Kant)는
철학(哲學)을 통(通)해
사람의 행위(行爲)가 절대적(絶對的)인 책임(責任)을 갖는 사회(社會)를 우선(于先)했습니다.
이처럼 동서양(東西洋)의 도덕적( 道德的)가르침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사람 사는 세상(世上)의 근본(根本)은
어디서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말보다는 행동(行動)이,
행동(行動)에 앞서
경청(敬聽)할 줄 아는 지혜(智慧)가 필요(必要)한 시기(時期)입니다.
세상(世上)이 너무
변화무쌍([變化無雙)하여 방향 감각(方向感覺)을 잃고
삶의 지침(指針)마저 혼란(混亂)스러운 때이지만,
이러한 가르침이
우리 사회(社會)의 중심(中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은 짐승들과 달리,
배불러야만 편(便)하고
행복(幸福)을 느끼는 존재(存在)가 아닙니다.
우리가 느끼는
행복(幸福)의 비밀(秘密)은
나만의 것이 아닌
이웃과의 관계(關係) 속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