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0월 17일의 정변을 일컫는 말. 대통령 박정희에 의하여 행해진 일종의 초헌법적인 조처였고, 이로 인하여 이른바 유신체제라 불리는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가 성립되었다. 이른바 '10·17비상조치'의 내용을 살펴보면,
(1)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등의 정치활동을 중지시키는 등 헌법의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킨다.
(2)효력이 정지된 일부 헌법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가 수행하며 비상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3)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 개정안은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로써 확정한다.
(4)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절차에 따라 금년말 이전에 헌법질서를 정상화시킨다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시월 유신의 정치적 동기와 배경이 무엇이냐에 관하여는 그날의 대통령특별선언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한반도를 둘러 싼 열강의 세력균형관계에 큰 변화가 일고 있어서 한국의 안보에 위험스러운 영향을 미칠 것이 예상된다. (2) 남북한간의 사태 진전에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 (3)동족상잔의 민족적 비극의 재발을 막고 이산가족의 재결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남북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4) 그런데 우리의 주변에는 무질서와 비능률이 활개치고 있고, 대의기구는 파쟁과 정략의 희생이 되어 통일과 남북대화를 뒷받침할 수 없다. (5)현행 법령과 체제는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오늘날의 상황에 적응할 수 없다. (6)정상적 방법으로는 이러한 개혁이 어려우므로 부득이 비상조치로써 체제개혁을 단행하여야 하겠다.
유신의 이념은 10월 27일의 유신헌법을 위한 개헌안의 제안 이유서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 이유서에 의하면 현행 헌법하의 정치체제가 가져다준 국력의 분산과 낭비를 지양하고, 이를 조직화하여 능률의 극대화를 기하며, 민주주의의 한국적 토착화를 가능케 하는 유신적 개혁을 단행하는 것만이 국가의 안전과 조국평화통일을 기약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유신개헌안의 특징을 보면 (1)조국 평화통일이라는 역사적 사명완수의 지향, (2)민주주의의 토착화, (3)국력의 조직화와 능률의 극대화를 위한 통치기구와 관계제도의 개혁, (4)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의 안정을 유지하고 번영기저의 확고화, (5)국민기본권을 우리 실정에 맞게 최대한 보장, (6)항구적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것을 다짐한다는 것 등이었다.
정부는 10월 27일 이 유신헌법개정안을 공고하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 붙였다. 국민투표는 91.9%의 높은 투표율과 91.5%의 찬성을 얻었다(총유권자 84%의 찬성). 이와 같이 확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11월 25일 <통일 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과 그 시행령이 공포되고, 12월 15일 총대의원수 2,359명을 선출하는 선거를 1,630개의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하였는데, 투표율은 70.4%였다. 이어 12월 27일 취임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립된 유신체제는 기존의 정치체제와는 다른 여러 가지 제도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 특징들을 살펴보면,
(1)조국통일정책의 심의 결정과 대통령선거 및 일부 국회의원선거 등의 기능을 가지는 통일 주체국민회의가 헌법기관으로 설치되고, (2)직선제이던 대통령선거제도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간선제로 되었으며, (3)대통령의 임기가 4년에서 6년으로 연장되었고, (4)국회의원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의 후보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일괄선출하고, (5)국회의원의 임기를 6년과 3년의 이원제로 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의원은 3년으로 하였으며, (6)국회의 연간개회일수를 150일 이내로 제한하고, (7)국회의 국정감사권을 없앴으며, (8)지방의회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구성하지 않을 것을 못박았고, (9)대통령이 제의한 헌법개정안은 국민투표로 확정되고, 국회의원의 발의로 된 헌법개정안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시 의결함으로써 확정되도록 하였다.
그밖에 1972년 10월 17일의 비상조치와 그에 따른 대통령의 특별선언 등은 제소하거나 이의도 제기 할 수 없도록 헌법에 못박았다. 이것은 민주정치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통령의 간선제, 사실상 대통령의 임명제와 흡사한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대한 간선제 및 국회의 국정감사권의 박탈 등이 가장 중요한 국민의 선거권과 국정감독권을 제한, 위축시켰기 때문이다.
더욱이, 헌법개정방법을 이원화하여 대통령이 원하는 헌법개정은 비교적 용이하게 하고, 대통령이 원하지 않는 헌법개정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합법적인 체제개혁의 길을 봉쇄하였다. 한마디로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에게는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아니하는 대권을 장악하여 입법·행정·사법의 3권을 통합하고 조정하는 영도자적인 지위를 박정희는 차지하게 되었다. 그 위에 6년 임기만을 규정하고 중임이나 연임제한에 관한 규정을 전혀 두지 않음으로써 1인에 의한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비판론자들은 유신체제는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과 영도권강화를 위한 정략적 조치에 불과하다고 비난하였다. 유신 이후의 박정희 정권을 신권위주의 혹은 관료적 권위주의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정권이 구조적으로 이전의 권위주위 정치와는 다른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첫째로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권력집중의 상층구조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은 관·군·민의 기술 관료진이었다. 다시 말하면 박정희의 리더십은 잘 훈련된 경제전문가 및 군인을 중심으로 한 기술관료들의 후견하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위하여 '국력의 조직화' 및 '능률의 극대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둘째로 유신체제는 민중을 정치·경제적으로 더욱 배제하는 새로운 권위주의 정치제도였다. 이것은 민주주의적 대의기구가 파쟁과 정략에 희생되어 국력을 크게 소모시키며 낭비적이라는 유신의 논리와, '사회안정'의 명분으로 경제성장과정에서 소외된 계층의 요구와 저항을 무질서와 비능률적 사회혼란이라고 규정한 데서 알 수있다.
셋째로 국가의 강압장치가 비대화하고 그것이 남용되는 일이었다. 제1공화국이나 제2공화국에 비하면 제3·4공화국에서는 계엄령을 비롯한 여러 강압적인 수단들이 조직적으로 강화되고 남용되었다. 특히 박정권은 긴급명령·국가비상사태선포·위수령·대통령긴급조치 및 비상계엄등의 강압적인 방법들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행위를 초헌법적인 방법으로 처단하는 비상수단을 행사하였다.
넷째로 국가주도적인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의 자율성이 더 한층 강화되었다는 일이다. 유신체제의 특징은 한마디로 과도한 국가자율성의 일방적인 확보에 있다. 광복 이후에 강화일로에 있었던 국가는 국가주도적 경제성장을 위한 외자의 도입, 특히 외국의 차관을 도입하여 배분하는 과정등에서 그 물적 기초를 구축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한 국가의 계획적이며 조직적인 주도적 역할은 국가의 자율성 강화를 가속화하였다. 상대적으로 사회적 자율성은 약화되고, 정치적 자율성은 크게 위축됨으로써 유신체제하에서는 정치 부재상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정치적 정통성을 능률적인 경제업적으로 상쇄하려는 '행정민주주의' 발상과 일맥상통한다.
다섯째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정치권력의 개인화와 경직화이다. 1969년의 3선 개헌파동으로 촉진된 박정희에로의 정치 권력의 집중은 1971년의 대통령선거에서 거센 야당의 도전을 받게 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권력강화를 위한 또다른 전략적 비상조치를 강구하게 하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추구하던 정치권력의 개인화는 1979년 10월 26일 마침내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
첫댓글 유신이후 민주주의가 제대로 섰는지 반성해봐야합니다. 유신이후에 온 광주사태를 비롯하여 더 극심한 민주주의를 겪는건 아닌지요.지금은 민주주의가 제 방향으로 제대로 가고 있는지 반성이 더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