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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는 그 뿌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말그대로 看話즉 말을 보는것이 선인 것이 간화선이라고 보는데요.그 뿌리를 보는것은 대원문재현이나 혜거스님 같은분이 지도하는 법으로 이는 적적을 지으며 화두가 없으니 무기에 떨어진다고 보는데요.그리고 묵조가 무기가 아닌가 합니다.나옹스님법문에 적적한데서 화두가 없으면 무기에 떨어진다는 법문이 있어서 말입니다.그래서 적적을 정으로 화두를 혜로 성성이되니 그래서 성성적적이요 정혜쌍수라고 생각됩니다.방주님 말을 간해보십시요.말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간화인걸로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말하는 그 밑 뿌리를 보니 적적만 지어니 묵조가 무기가 되는 것으로 봅니다. 07.11.21 22:01
대혜스님 서장에 보면은 묵조와 고요한 경계를 경계하라는 법문이 있습니다.방주님께서는 대혜 서장을 한번 살펴보십시요. 07.11.22 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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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빈배님의 글을 몇 개 읽어 보았는데 제 생각으로는 빈배님은 스승님이 안계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은 아시는 것들이 정리가 안돼있어서 우리같은 사람들이 볼 때는 옆으로 갔다가 위로 갔다가 아귀가 맞지 않는 말씀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조금씩(일부 경전 중 한귀절씩이라도 배운) 읽어 본 팔만 사천 경전과 모든 조사의 어록들은 모두 다 같은 한말씀으로 인연이 닿은 분들에게 방편을 따라 나투어 내보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다 한통속이며 한줄이며 시작과 끝이 서로 닿아 있어서 서로가 상응하는데에 어긋남이 없는 것인데 빈배님의 글을 보면 답답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환화를 보신 것을 말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환화나 환마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현상입니다.(무속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다만 그러한 현상들을 접하게 되었을 때 참다운 도반이거나 스승이 계셔서 탁마를 해주거나 바르게 이끌어 주심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에 이끌리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당연히 본인이 실제로 보고 느낀 것이라는 관념에 잡혀있는 것이니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에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환화를 끊어 버리라고 하였을 때 과감히 버릴 수 있는 믿음을 갖는 스승이나 도반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문재현 거사님이나 혜거스님이 말씀하시는 뿌리를 본다는 말씀음 어떤 의미로 한지는 모르겠으나 제 말과 다르지 않은 뜻이 아니었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말(言)을 보는 것이라고 하신 빈배님이 생각시는 간화는 잘못된 견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看話禪은 말 뜻을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말을 하려면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니까 그 일으켜진 한생각을 보아야 하는 것이라서(그래서 말할 “話” 字 뒤에 마음 “禪” 字가 있는 것입니다) 말을 하기 이전에 한생각을 일어나게 하는 그 뿌리(본래마음=禪)를 보아야 한다는 의미로 알고 참선을 해야지 公案(화두와는 개념이 다르나 같은 의미로 쓰고 있으며 공안은 화두를 보기위한 것이니까 함께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라고 하는 의문을 일으켜서(의문을 일으킨다고 하였지만 의문이 되면 저절로 그의문에 잡혀지는 것임) 그 뿌리(또는 밑둥치)를 보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함이 간화선의 요체인데 “뜰 앞에 잣나무” 라거나 “간시궐” 이라거나 “무” 라고 하는 단어를 쫓아서 뜰 앞에 잣나무라거나 똥막대라거나 일체에 불성이 있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거나“無”자 화두는 일체는 공하니까 없는 것이다 라고 알거나 또는 절대적인 무를 말한 것이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치에 의한 알음일 뿐이지 그것으로 화두 공안을 타파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빈배님은 말을 보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위와 같이 해석해서 알고 계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평소에 올리셨던 글로 보아서..).
그리고 제가 묵조선(默照禪)을 한다고 하니까 無記를 말씀하셨는데 빈배님은 우선 무기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기란,
기억없음입니다.
기억이 없다는 것은 경험하지 못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10 가지 사량분별심에 무기로 응대하신 것은 세존의 무기가 아니라 만동자 등 질문자들의 무기(무경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독화살에 대한 비유로 말씀을 하시면서 경험이나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형이상학을 말해서 쓸모없는 논쟁을 하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서 흐릿한 정신 상태나 인식이 없는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더 깊은 의미도 있습니다만..불요해서 제외합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무엇에 충격을 받은 사람이 길을 가거나 무엇을 할 때에 정신을 또렷하게 차리지 못하고 거의 무의식 상태로 움직이는 넋 놓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횡단보도에서는 신호등 불이 어떤 색인지도 모르고 길을 건너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행을 돌아보는 자각 증상이 없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깨쳐날 기회를 챙길 수가 없게 됩니다.
좀 더 심하면 정신도 흐릿해져서(치매 등) 수면상태인지 깨어있는도 모르게 되며 생리적인 현상들도 조절 기능을(무인식) 상실하게 되어서 대소변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분들이 이러한 상태와 혼돈하기 쉬운 삼매가 무기와 다른 것은 또렷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일체 사량과 분별이 끊긴 寂寂에서도 마음챙김과 몸챙김(이 둘을 위빠사나와 아나빠나 수행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이 또렷해서 단 하나도 놓침이 없는 것이 간화선에서의 성성함입니다.
대충 정리가 된 것으로 생각하고 묵조선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우선 간화선 하면 공안(실은 공안이라고 해야 적확한 것이라고 생각함)을 들고서 話頭(=말을 일으키게 하는 생각의 뿌리 즉,근본)를 看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아는(실천하고 있는) 묵조선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간화선에서의 공안은 오래 씹은 껌 같아서 뱉었지만 또렷한 상태로 앉아서 한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그곳을 돌아보고 있거나 (번뇌든 망상이든 그 어떤 생각이라도)한생각이 일어난 곳을 되돌려 바라보는(回光反照=또는 照用同時라고 합니다) 수행법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 묵조선이 어떻게 무기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까?
무기에 빠지기 쉽다고 하는 말씀들은 간화선 수행을 하기 전의 묵조선 수행은 허허 벌판에 홀로 내던져진 나그네와 같아서 갈피를 잡기가 어려우니까(실은 묵조선도 간화선과 다를 바가 없지만) 공안도 없이 좌선을 하자면 혼침에 빠지기가 쉽고 멍청하게 앉아서 시간만 보내는 학인들에게 경계를 삼으라는 뜻로 하신 말씀이라 생각되며 공안을 붙잡고 하는 선공부인 간화선을 권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간화선 공부의 요체는(물론 모든 수행법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전에 말씀드린대로 성성 적적이고 적적 성성입니다.
빈배님이 우려하시는 대로 적적에만 빠지면 무기와는 다른 공견에 사로잡힘이니 세상사가 무의미와 허무요 의욕을 상실케 되는 것이라서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체는 공한 것이지만 열반경의 말씀대로라면 일체를 공하다고만 생각하는 것도 무명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법이 중요하고 요긴하며 일체의 불자가 함께 해야할 수행의 요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성에만 치우쳐도 얕은 지혜만 증장돼서 바른 중도를 실현치 못하고 들떠서 겉넘게 되니 이또한 경계해야 할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열반경에서는 선정은 많고 지혜가 적으면 무명을 여의지 못하고 선정을 적고 지혜만 많으면 삿된 견해를 증장하게 되니 定과 慧를 같이 닦아야 한다고 대주 혜혜선사는 돈요입도요문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상으로 답변을 드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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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님. 님의 가슴 아픔에 저도 동감합니다. 하지만 님 역시 다른 분들에게 아픔을 주고 계시는 듯 하네요. 무릇 참된 수행자란 타인의 비판에 언제나 내 허물을 먼저 돌아볼 줄 알아야 하는 법. 여기서 벌써 어긋나기 시작하시는 듯합니다. 님 정도의 공부 경계이시면 무슨 말씀인 줄 아실 걸 같아 굳이 사례를 들지는 않겠습니다. 07.11.21 17:12
선방에 앉아 있는 상구보리가 바로 하화중생이라면, 그 역도 성립할 것입니다. 님은 하화중생을 함으로써 상국보리하실 생각은 없는지요? 07.11.21 17:14
님은 조사어록 한번 읽지 않은(?) 연자들에 대한 한탄을 토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님은 조사 어록 말고 읽은 경전을 한번 말씀해 주십시요. 적어도 님이 한탄하신 저 연자 분들은, 조사 어록은 몰라도 경전은 읽으셨을테니까요. 선은 문자를 떠난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세요. 최소한 님이 조사어록을 읽지 않았다고 타인을 비판하시려면, 비판 당하는 분들만큼 경전은 읽어셨어야 형평이 성립할 겁니다. 07.11.21 17:18
참된 공부인은 항상 자신의 허물을 먼저 살피십니다. 어째서 오늘 날 한굴 불교계에 간화선이 이런 위치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위대한 공부법을, 오직 대중들이 우치해서 오해하고 망발하는 것일까요? 허허허.. 07.11.2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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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스스로 깨어있어서 스스로 아시고 계신다면 망발을 망발이라고 하시는 것은 잘 보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대중들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간화선이라고 하는 좋은 수행법을 잘못 알고서 비판을 하므로써 기술자가 기술이 부족한 것을 알지 못하고 연장이 나빠서 자신의 마음대로 연장질이 안되는 것으로 연장 탓을 하는 하근기 학자적 견해를 힐난하는 것임을 챙겨보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를 공연한 시비나 간섭으로 보는 분들도 계실 수 있으나 공공연하게 굽은 것을 바르다고 하며 여법한 수행법을 비판하고 그릇된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바른 견해로 보자는 탁마이니 어떻게 보시든 제각기 보는 시각은 다를지라도 본문의 간화선 수행법을 비판했던 견해들로 인해서 행여 오해를 하실 분들이 바르게 보시게 된다면 그로써 제 허물은 중도로 회향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경전은 얼마나 읽어 보았느냐고 물으셨는데 경전은 고사하고 조사 어록도 제대로 본 것이 없을 정도로 학문이 일천한 사람입니다.(물론 서장도 보지 못했습니다.다만 친근한 도반이 무비 큰스님의 서장 강의테입을 전해 주어서 그것을 들어보기는 했습니다.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러나 어록이나 경전이든 그 해석에 있어서는 일반분들과는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으며 말씀들에 의문은 없습니다.
이런 비유는 좀 어색하지만 후일에 육조가 되신 능 행자가 경전과 어록을 많이 읽어서 한소식을 했던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육조의 말씀인 단경이 경전으로 그 위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육조의 선지와(用) 이룸이(始覺) 그만큼 무변자재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후대에서 인정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허나 지적하신대로 말로 말 많음을 짓게 되었으니 이 또한 제 허물이 아닐 수 없지만 입을 닫고 있는 것만이 능사도 아니며 마땅한 그때에는 응당히 하는 것이 내가 배운 중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게 無記와 같은 상태를 견지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
첫댓글 유익한 말씀 유심히 보고 공감하는 바가 큼니다. 한가지 지적하자면 빈배님의 '말을 본다'는 것을 단순히 말뜻을 해석하거나 알음알이를 일으킨다고 단정하는 것은 다소 편견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빈배님의 '말을 본다'는 의미는 생각 이전의 근본자리는 관(말을=성성, 본다=적적)하는 것으로서 님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본다는 것은 말을 본다는 것입니다.그리고 방주님 나옹스님집을 한 번 보십시요.나옹스님법문에 적적한 경계에서 화두를 들지않으면 그것이 無記라고 하셨습니다.제말씀이 아니라 나옹스님 법문입니다.그리고 대혜서장을 보십시요.묵조와 고요한 경계를 경계하라고 하신 법문이 있습니다.루미나님도 간화의 정의가 저와는 다릅니다.
그럼 부처님이나 달마조사님도 무기에 빠진 분들이네요.. 결코 나옹스님이나 대혜종고스님처럼 화두를 들지 않고 선정에 드셨으니.... 간화선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시대조류와 사람의 사고체계의 흐름따라 그 시대에 적합한 수행방편이 화두선이나 묵조선이지 그 어느 것이 절대가 아닙니다. 달라이라마가 화두들고 깨달았나요.. 온고지신은 종교수행에도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석가모니가 화두가 없었다고요.달마가 화두가 없었다고요.생로병사는 화두아니고 뭡니까? 달라이라마가 화두들고 깨달았냐고 제가 말씀을 드린것은 성철이 불교를 화두만 들면 된다고 가르쳐서 그런 것이고 실재로 달라이라마가 우리가 아는 1700공안외에 다른 의문으로 깨달았다면요? 그 의문은 화두아닙니까? 그리고 달라이라마께서 인연을 가지고 오실 정도로 많이 공부를 하셨다면요.이제 공부하는 사람하고 비교하시면 안되지요.화두일법이 총섭제법을 한다지만 그래도 강원정도 수준의 공부와 불교의 기초정도는 책을 보고 공부를 해야지 바른공부가 되지.성철이 말따나 화두만 들고 깨친 도인 있습디까? 그리고 석가모니도 공부를 많이
석가모니부처도 다른 어느공부법으로도 생로병사의 그 답답한 가슴의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택하신 수행에서 깨달으신 것이지 석가모니가 진언을 염불을 호흡을 안했다고요.설산 고행6년동한 닦은 다른 수행법은 뭡니까? 그런 수행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근기가 수승한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지 그리고 석가모니의 후생들은 6년 고행했습니까?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로다!
방주님 수고많으셨습니다. 그동안 마음 경계가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아마 안목이 있는 분이라면 방주님의 흔들린 마음을 보셨을 겁니다. 답변이 흡족치는 않으나, 이것으로 님의 간화선 비판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말씀을 더는 하지 않겠습니다. 문제점은 본인이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세상 처처에 눈밝은 분들이 계십니다. 저를 포함해 그 누구도 내 경계에 속아 쉽게 말씀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심을 잊지 않습니다. 비록 말도 안 되는 말씀으로 비난하는 분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을 선지식으로 삼는 마음이 여법한 수행인의 자세라 할 겁니다. 위없는 자리에 이를 때까지, 겸손한 마음으로 끝없는 공부를 함께 하십시다._()_
방주님은 자비와 의로움과 인자하시고 현묘한 솜씨를 다 내어 보였으며, (지나가는 길에) 님은 칼날에 번뜩이는 섬광을 잡으셨으며, (빈 배)님의 박학다식함도 선을 보인 게 큰 자랑이나, 모름지기, 원상(圓相) 공안, 입야타 불야타(원상 안으로 들어와도 30방 이요, 원상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30 방이라는 공안을 타파하여야 비로소 가장 수승한 안목이 열리리라 생각됩니다.
직장생활이나 일상생활에서도 대안(대책)이 없는 비판은 무의미한 것인 바, 간화선을 비판하려면 대안(대체적인 수행방법)을 제시해야 하는데, 대안 제시가 없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간화선보다 더 수승한 수행방법은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몸과 마음을 사리지 않으시고 화광동진으로 중생가운데에서 스스로를 불태우신 숭산 행원선사야말로 가장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원오극근 선사를 이으신 대혜종고 선사께서 간화선을 크게 제창하기 위하여 부득이 묵조선을 크게 공격한 역사적 사실이 있으나 올바르게만 수행을 한다면 간화선과 묵조선 간에는 우열이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요는, 순간순간 맑은 마음을 가지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간화선도 잘못 수행하면 삿된 선이요, 염불수행도 바르게만 하면 둘이 아닌 것입니다)
타칠님의 말씀에 전체적으로 동감하지만 여법하신 참스님들은 의외로 계십니다.그분들은 말씀이 없지만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눈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그러나 어떤분이 존경받을만 하다 하여도 내(각기 낱낱의 존재)가 홀로 존귀함을 진실로 알아짐만은 못하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날마다 좋은날 만드시는 분으로 생각하겠습니다. ()
지나가다님이 뭐라고 하셔도 내(자신의)일은 내(자신이)가 제일 잘 압니다.단순하게 근거없이 남을 평가하려기 보다는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볼 줄 아는 일이 더욱 요긴하다 할 것입니다.내가 간화선을 놓고 묵조선을 한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간화선 화두 공안으로 두어 공안들을 들어 보라는 권유를 받고 참구해 보았으나 내 경우에는 어떤 화두를 들어도 "이뭣고?" 화두가 되기에 나중에는 이뭣고 화두를 들었더랬습니다.그러나 화두공안에 대한 의문이 없어져서 묵조선을 한다고 말을 한 것인데 이뭣고로 묵조선을 하고 있다고 하면 이해가 되시겠는지요.즉, 좌선시에는 이뭣고? 하며 묵조선을 한다는 뜻
인데 화두를 들고 묵조선이라고 표현한 것을 이해하시느냐는 말씀입니다.입야타 든 다른 화두든 의심이 없어졌는데 어떻게 더 화두를 들고 있겠습니까? 다만 이뭣고 화두는 간화선이라고 표현하든 묵조선이라고 표현하든 세상과의 인연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하여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저절로 함께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서로 할말은 하는 것이 좋으나 근거도 없이 자신의 견처를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함부로 평가부터 하는 버릇은 같은 길을 가는 도반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세상의 도리를 모르고서 어떻게 도를 닦는다 하겠습니까.세상을 사는데에 부처님처럼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지게 되기를 바라며 이길을 가는
것이 아닐런지요? 다 자신들의 몫이지만 말을 함에 있어서도 말을 하는 이유와 명분이 요긴한 것은 그것이 중도의 나툼이냐? 또는 업식으로의 나툼이냐? 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모든 화두공안은 하나를 풀면 다 풀린다는 말이 있듯이 화두공안의 답은 서로가 다 회통하게 돼 있습니다만 답을 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분수만이 알수 있기에 공연한 말다툼만 발생되기도 하더군요. 어쨌든 같은 길을 가는 분들이니 바르게 함께하여지기를 기대합니다.지나가는 길에님이 평안해지기 바랍니다. ()
한 가닥 버들 가지 휘어 잡지 못해서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걸어둘까 합니다.
산호 침상 위의 두 줄기 눈물, 한 편은 그대를 사모하고 한 편은 그대를 원망하도다.
원망도 치우침 사모도 치우침 푸른 허공에 흰구름 흐르듯 원망도 사모도 모두 놓아버리라네..
버들가지 애써 잡을려 하지 말고 일부러 난간에 걸어두려 하지말라~~ 지나가는 바람이 번거롭다 하노라!
재치문답은 선문답과 달라서 말 밖의 말인 격외선구는 재치로 답해지는 것이 아닌 줄로 알고 있습니다.(어느 법우님께 드리는 말씀인지..? ^^)/거량해 주신 법우님들께 감사드리며 다시 미풍에 갈대가 흔들리듯이 흔들릴 때를 기다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 ()
미풍에 갈대가 흔들리는가.. 갈대가 흔들리니 미풍이 일어나는가..
말 작난은 참구를 해 볼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게 됩니다.이 공부는 진중하고 친근하게 해 나가지 못하면 다음생을 기약하게 됩니다. 그 다음생이라는 것이 언제 올른지 참으로 難遭遇랍니다.
내 마음이 동쪽에 있으니 동쪽만 보이고 내 마음이 서쪽에 있으니 서쪽만 보이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