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앉으세요"
종이에 이름이 먼저 앉는다
"태어난 날짜와 시간은요"
나는 여러 번 죽은 사람처럼 대답한다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임이 점처럼 종이 위에 떨어지고
이해와 동의가 아닌 잠깐의 중력
"사주가 좀 독특하시네, 천문도 있고 귀문도 있고......"
그가 살짝 웃는다
웃음이 아니라
기호를 읽는 소리 같다
바깥에서는 바람이 지나가고
천막이 아주 천천히
누군가의 숨처럼 들린다
"역마가 세네요.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팔자예요."
연필이 종이를 긁는다
쓰는 게 아니라 긁는 쪽에 가까운
문이 조금 열린 채로 있고
모르는 이의 웃음소리 계속 들려오고
"뭐, 어쨌든......"
그가 말한다
"올해 귀인을 만날 거예요"
그가 다시 살짝 웃는다
그에게 웃음은
자신을 거두는 방식에 가까운 방울소리
바람이 없는데
내가 앉아 있는 간이의자가
조금씩 뒤로 밀리는 느낌이 든다
"어디에서요?"
내가 묻는다
그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종이를 한 장 더 꺼낸다
이번에는 쓰지 않는다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이미 써 있는 걸 다시 보는 것처럼
오직 보는 것으로 지워지는 걸 미룰 것처럼
"다시 볼게요"
종이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손을 뻗어 종이를 잡으려다 순간 놓친다
다시 주웠을 때
구겨진 축이 조금 달라졌고
우리는 동시에
머리를 맞대고 천천히
책상 쪽으로 기울어진다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문학동네,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