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신 安敬信 (1888 ~ 미상) "평남도청 투탄 의거"
1888년 7월 22일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재경리면(再京里面) 오금리(梧琴里)에서 태어났다. 평양숭실학교(平壤崇實學校) 예비과를 마치고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技藝科)에서 수학하였으며, 기독교 감리교 신자였다.
1919년 평양 서문동(西門洞)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시위를 이끌었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며, 29일간 유치장에 갇혀 고초를 겪었다. 그 해 11월 평양에서 오신도(吳信道)·안정석(安貞錫) 등이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를 조직할 때 참여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가 군자금 2,400여 원을 모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낼 때, 강서지부(江西支部) 재무원(財務員)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이 노출되어 임원들이 붙잡혔다.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와해되자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하였다. 1920년 2월 김행일(金行一)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로 이동하였다.
상하이에서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5월 임시정부에서는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의 국내 시찰을 앞두고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자 국내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임시정부 요원 황병무(黃丙武)로부터 “듣자하니 미국 의원단이 동양을 시찰하기 위해 조선에 들른다고 한다. 여러분들이 지금 평양으로 가 큰 사건 하나를 일으킨다면, 미국 의원들은 반드시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기를 알게 될 것이고 쉽게 동정을 얻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듣고 평양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 해 7월 장덕진(張德辰)·김창수(金昌洙)·문현철(文賢喆) 등과 함께 폭탄과 권총을 가지고 평양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중 일제 경찰이 삼엄하게 수색하자 처단하였다. 8월 1일 대동군 박치은(朴致恩) 집에 도착하여 피신하였다가 평양에 잠입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같은 시각에 평남도청·평양부청·평남경찰국에 일제히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정하였다.
8월 3일 평안남도 경찰국에 가서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후 대동강(大同江) 움막으로 피신하여 밤을 보냈다. 8월 4일 아침 기자릉(箕子陵) 숲 속에서 문현철을 만나 폭탄 한 개를 받고 다시 거사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일제 경찰의 수색이 날로 심해져 평양을 벗어나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남면(南面) 호상리(湖上里) 최용주(崔龍周)의 집으로 이동하여 몸을 숨겼다.
1921년 3월 중순 아이를 출산하였으나, 그 직후인 3월 20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1년 6월 10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았다. 즉시 항소하여 1922년 4월 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았다. 판결을 받고 “내가 무슨 죄가 있기로 3년간이나 가두어 두었다가 10년 징역에 처하느냐”라고 판사를 꾸짖었다. 1927년 12월 14일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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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신 검사국 송치 보도(『동아일보』 1921. 5. 2) [판형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