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 에셔, 바흐(박여성 옮김)』 번역 비판 비판
퀄리아qualia 씀 (2006. 07. 29. 토요일. 비-흐림...).
먼저 이덕하 님의 좋은 비판글에 감사드립니다. 아래 사이 사이에 낀 파란 글들은 이덕하 님의 박여성 님 번역 비판에 대한 퀄리아의 짧은 의견입니다. 잘못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덕하 님의 비판문을 먼저 제시하고, 제 글을 덧붙였습니다.
이덕하 님이 최초로 밝혀낸『괴델, 에셔, 바흐』의 오독/오역/비문의 실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괴델, 에셔, 바흐』는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번역자 박여성 님과 도서출판 까치는 이 경악할 만한 오역의 종합판에 대해서 사과하고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양측은 (본의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독자들을 기만했고, 원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R. Hofstadter를 욕되게 했으며, 한국 번역계의 신뢰도를 떨어뜨렸습니다. 그 정도가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독자 님들은 『괴델, 에셔, 바흐(박여성 옮김, 도서출판 까치 발행)』 번역판(상, 하 전2권)을 거금 4만 원씩이나 들여 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번역판은 원저의 내용을 심각하게 훼손했음은 물론 우리말 번역 문장까지 비문 투성이 망쳐 놔서, 독자 님들이 읽는다 해도 거의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번역판보다 값이 싼(2,7140원) 원전을 사서 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어떻게 해서 서울대는 이런 최악의 오역판인 『괴델, 에셔, 바흐』를 권장 도서 100권의 하나로 선정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선정자들은 이 번역판을 읽어 보기나 했을까요? 도저히 읽어나갈 수가 없는 책입니다. 말이 되지 않는, 뜻이 통하지 않는, 생각의 논리를 이끌어나가지 못하는 오역과 비문들로 점철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도 이것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당장 권장 도서 100권 목록에서 저 까치의 번역판은 지워야 할 것입니다. 사정도 모르는 수많은 독자들을 얼마나 많이 심각하게 오도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돈을 헛되이 쓰게 만들 것인가?
앞으로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신작 저서가 출간됩니다. 아마존(
www.amazon.com)에 가보면,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신작 『나는 이상한 고리다(I am a strange loop)』의 출간일이 2006년 7월 31일로 나와 있습니다. 의식consciousness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라고 하는군요. 정말 무척 마음 설레는 책입니다. 그런데 어떤 번역가 분에 따르면,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 계약이 이미 오래 전에 있었다고 합니다. 어서 빨리 원전과 번역판 모두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책의 번역판은『괴델, 에셔, 바흐』와 같은 최악의 사례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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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성(567쪽) : 왜냐하면 그것이 기호를 조작하는 체계들에 있는 의미와 지시관계에 대한 모든 개념들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Hofstadter(438쪽) : for that idea is related to the whole notion of what meaning and reference are, in symbol-manipulating systems.
이덕하 : 왜냐하면 그 착상은 기호-조작 체계들에서 의미와 지시관계가 무엇인가하는 개념 전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a. “의미와 지시관계에 대한 모든 개념들”은 문제가 있는 번역이다.
퀄리아 : the whole notion of what meaning and reference를 [의미와 지시관계에 대한 모든 개념들: 박여성] 혹은 [의미와 지시관계가 무엇인가하는 개념 전체: 이덕하]로 옮기는 것은 적절치 못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문의 문맥에 따르자면, whole은 "전체"라는 뜻으로 쓰이기보다는 "온전한" "완전한" "정확한" 따위의 의미로 쓰였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reference는 여기서 "지시관계"가 아니라 그냥 "지시"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문맥을 고려할 때, reference를 "지시" 이외의 다른 번역어로 옮기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그리고 symbol-manipulating systems에서 이음표(-, 붙임표, hyphen)는 단지 복합어를 만드는 기능을 할 뿐입니다. 즉, 여기서 이음표는 명사인 symbol과 분사인 manipulating을 이어서 systems를 꾸며주는 복합 형용사를 만들 뿐이죠. 따라서 이음표(하이픈)를 우리말 번역어에 넣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말글에서는 (품사가 다른) 두 개 이상의 단어들이 명사 앞에서 이음표 없이도 얼마든지 수식어 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어 원전에서 이음표가 들어간 사례의 유형들이 다 이와 같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분명 이음표를 살려서 번역해줘야 할 때가 있기도 하죠. 한편, 복합적인 전문용어나 학술용어는 한데 붙여서 쓰는 것이 바람직할 때가 많은데, 여기서도 "기호조작체계"로 붙여 쓰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물론 "기호 조작 체계"도 괜찮지만요.
퀄리아 번역안 : 왜냐하면 그 착상은 의미와 지시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정확한 개념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박여성(569쪽) : 아래에 두 개의 평행적인 보기가 있다 – 첫번째 보기는 단지 TNT-증명쌍인 듯하며, 두번째 보기는 유효한 TNT-증명쌍이다. 여러분은 그것들을 서로 구별할 수 있는가? … 간단히 옛 표기방식으로 역번역해서 이하의 사실을 점검하면, 그것이 어느 것인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Hofstadter(439쪽) : Here are two parallel examples, one being merely an alleged TNT-proof-pair, the other being a valid TNT-proof-pair. Can you spot which is which? … It is quite simple to tell which one is which, simply by translating back to the old notation, and making some routine examinations to see
이덕하 : 아래에 두 개의 평행적인 보기가 있다 – 하나는 단지 TNT-증명쌍인 것처럼 보일 뿐이며, 다른 하나는 유효한 TNT-증명쌍이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유효한 것이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를 알아낼 수 있는가? … 단순히 옛 표기방식으로 역번역함으로써 그리고 이하의 사실을 기계적으로 점검함으로써 어떤 것이 유효한 것이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를 매우 쉽게 알아낼 수 있다:
a. “첫번째 보기”, “두번째 보기”는 잘못된 번역이다. 저자는 첫번째 보기가 가짜고 두번째 보기가 진짜라고 말하지 않았다. 둘 중 하나가 가짜고 나머지 하나가 진짜라고 말했다.
b. “그것들을 서로 구별할 수 있는가”와 “그것이 어느 것인지를”은 문제가 있는 번역이다. 둘을 구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문제다.
퀄리아 : by translating back to the old notation을 굳이 [옛 표기방식으로 역번역해서: 박여성] 혹은 [옛 표기방식으로 역번역함으로써: 이덕하]라고 옮기기보다는, 그냥 [옛 표기법으로 고쳐 써서]라고 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역번역"이라는 직역은 너무 딱딱하고 생소한 한문투 번역이니까요.
박여성 님은 making some routine examinations를 [사실을 점검하면]으로 얼버무렸고, 이덕하 님은 [기계적으로 점검함으로써]로 직역하였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일련의 과정을 검토하면]이나 [일련의 절차를 검토함으로써]라는 번역이 더 적절한 듯합니다. routine은 여기서 "기계적 일"이나 "틀에 박힌 일"이 아니라, 알고리듬적인 "절차"나 증명의 "과정"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박여성(576쪽) : 이상한 동시에 경박한 생각은 그 공식 자체의 괴델 수가 자기 스스로를 대입한다는 것이다.
Hofstadter(445쪽) : A curious and perhaps frivolous-seeming notion is that of substituting a formula’s own Gödel number into itself.
이덕하 : 이상하면서도 아마도 실없어 보이는 착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공식 자체의 괴델 수를 바로 그 공식에 대입한다는 착상이다.
a. “자기 스스로를[괴델 수 자체를]”를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공식에” 대입하는 것이다.
퀄리아 : 박여성 님의 번역문을 죽 살펴보면, 원문의 문맥을 한참 빗나가거나 원저자의 표현 의도를 섬세히 살리지 못하는 엉뚱하고도 생뚱스러운 번역이 너무 많이 눈에 띕니다. 그런 보기 가운데 하나가 curious and perhaps frivolous-seeming notion을 번역한 [이상한 동시에 경박한 생각]입니다. "경박한"이라는 번역은 여기서 너무나 동떨어진 번역입니다. 경박하다는 말은 주로 언행이 가볍거나 속됨을 비난할 때 쓰는 부정적 느낌이 담긴 말이니까요. 그러나 여기서 저자는 전혀 비난하고 있지도,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지도 않죠. 따라서 원문의 문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번역입니다. 이와 같은 엉뚱한 번역은 번역자가, 지금 원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도 못한 채 번역하고 있음을 드러내 줍니다. (이런 유형의 오역들은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전체에 걸쳐 부지기수로 나타납니다.)
저자가 curious and perhaps frivolous-seeming notion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 한 가지는 이 책의 핵심 개념들 중 자기지시(self-reference)나 재귀성(recursiveness) 따위와 관련된 기묘한 특성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죠. 예문의 아래 쪽에 quite simple and lovely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위 표현과 거의 같은 맥락에서 쓴 것입니다. 즉, 저자는 "이상하면서도 얼핏 별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는" 착상 속에 숨어 있는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특성들을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여성 님은 self-reference를 거의 전편에 걸쳐 "재귀-준거"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더불어 이덕하 님 또한 이 사안에 대해선 비판이 없는데요, 이것은 전혀 올바른 번역이 아닙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문맥에서 self-reference는 "자기지시"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재귀-준거라는 잘못된 번역어와 그 개념을 가지고 박여성 님이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의 길고 긴 번역 여정을 어떤 수로 헤쳐나갔는지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네요. (앞에 나오는 self-scrutiny와도 관련된 개념인데, self-scrutiny도 자가 점검보다는 자기점검으로 옮겨서 "self=자기"로 번역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게 좋을 듯하네요.) 자기지시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에 좀더 자세하게 논의해 봤으면 합니다.
박여성(581쪽) : 일정한 조망을 얻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콰인의 처리방식이 에피메니데스의 이율배반과 가지는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Hofstadter(449쪽) : The best way I know to give some perspective is to set out explicitly how it compares with the version of the Epimenides paradox due to Quine.
이덕하 : 어느 정도의 조망을 얻기에 내가 알기로 가장 좋은 방법은 콰인에게 돌릴 수 있는 에피메니데스의 이율배반과 그것[괴델의 정리]이 어떻게 비교되는지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a. “due to Quine”의 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겠다.
b. 콰인의 처리 방식과 에피메니데스의 이율배반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괴델의 정리]과 에피메니데스의 이율배반을 비교하는 것이다.
퀄리아 : 박여성 님은 the version of the Epimenides paradox due to Quine을 [콰인의 처리방식이 에피메니데스의 이율배반과 가지는 관계]라고 옮겼는데, 이것은 원문의 맥락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창작 수준의 오역입니다. 이덕하 님의 번역 [콰인에게 돌릴 수 있는 에피메니데스의 이율배반]도 그다지 썩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 하필 멀쩡한 번역어 "역설"을 제쳐놓고 paradox를 이율배반이라고 번역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네요. 이율배반은 antinomy라는 원래의 임자가 있지 않습니까? 통상적으로는 역설paradox과 이율배반antinomy을 같은 개념으로 보기도 하지만, 어떤 학자는 조금 다른 개념으로 구분하기도 하더군요. 역설과 이율배반은 논리학과 칸트 철학에서 각기 다른 개념으로 쓰이고 있기도 하고요. 또한 논리학 문헌에서도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을 에피메니데스의 이율배반이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적어도 국내 문헌의 경우에는). 따라서 원래의 의미대로 paradox는 역설로, antinomy의 경우에는 이율배반으로 각각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The version of the Epimenides paradox due to Quine은 "에피메니데스 역설의 콰인판" 혹은 "콰인이 고안한 에피메니데스 역설의 변형판" 정도로 옮기면 좋을 듯합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말해 "콰인의 역설Quine's paradox"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써 놓은 비판글이 더 있기는 하지만, 더 올릴 시간이 없군요. 다음에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