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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단테의 신곡, 일상
(2023 신년 무교회전국집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진 영 선
(대방동집회)
ㄱ) 세계 최고 문학인 성서를 단테의 신곡, 일상과 연관해 알릴 수 있을까?
그리해야만 한다. 오늘은 이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올리기로 한다.
왜냐하면 성서 인물들의 일상에 일어났던 일들을 듣고 읽고 배우고 느낀 성령의 감동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또한 믿는다. 그리고 그런 삶의 모범대로 살고자 믿음의 공동체 모임의 하루 일상을 이처럼 갖기도 한다.
구약성서란, 구약시대에 세상을 살던, 주요한 인물과 생애의 주요 사건들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의 감화로 선택된 저자들이 하나님에 관한 기록을 썼다. 구약의 저자들이 각자의 시대를 달리하지만 반복하듯, 그들이 살던 일상에서 일어났던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성서역사 사건을 기록했다.
그 주제는 죽을 운명의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주시고, 그분 가르침을 믿고 진실히 살면 죽어도 영원히 살도록 구원해주신다는 위업이다.
신약성서는 어떠한가.
하나님 약속대로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생생한 기록이다. 인류의 생명을 구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짧은 생애 일상에 일어났던 사건들 기록이다. 그리하여 인류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믿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는다는 기록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살아야 주께서 오실 재림의 날에, 죽은 우리를 다시 부르시어 하늘로 올리시고 환희로 만날 수 있게 해주신다. 신약성서의 주요 저자들의 생애가 이 사실을 전하다 순교 당했다. 기독자는 전도에 힘쓰기 마련이다.
신곡을 써서 전도한 단테가 있다. 단테가 신곡에 올린 성서의 주요 인물들이 그 당시 세태를 반영하며 전도하기 때문이다. 신곡이 르네상스에 주요 영향을 끼쳤다. 하나님의 세계를 그 당시 세태에 알맞고 바르게 그렸기 때문이다. 단테가 희극이라고 책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서의 주요한 인물들의 일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당시 유명 인사들과 샅샅이 비교한 설득력이 대단해서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닌 속마음을 흔드는 강한 힘이 짙어서다.
ㄴ) 1969.11 결혼, 1973년 2월말 주일, 종로집회 참석, 노평구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성서연구’지를 통해 선생님께서 알리는 진실한 기독자들의 삶과 죽음에 감동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잡지의 특징은 출판 광고다. 무슨 책을 내니까 독자들께서 그 책을 미리 주문하고 책값부터 보내고 널리 알리라는 광고다. 이렇게 당당한 선생님의 자신감을 받아들여 무조건 그 책들을 주문하고 읽었다. 주로 김교신 관련 책들이라 김 선생께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1980년 초에 김교신의 ’성서조선‘ 영인본 두 질이 집에 도착했다. 즉시 한 질을 원주 1군사령부 교회에 드렸다. 예배당엘 처음 다니며 사병들이 주일예배에 참석한다는 사실에 감격해서다. 젊은 그들이 김교신 선생님을 진정으로 읽어, 그분의 삶을 알고 영향을 받기 바랐다. 그 나이 때의 자신은 종교와 인생에 관심 없는 철부지로 지낸 반성이었다.
또한 선생께서 잡지에 소개하신, 녹색 장정의 The New English Bible을 서울서 사 왔다. 몇 년 후엔 그 성서 개정판 The Revised English Bible도 구했다. 이 책들을 바라만보다 읽기 시작했다. 그때 ‘88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되어 전국에 영어 열풍이 몰아쳤다.
ㄷ) 2000년 연말에 홍동 농업회관 겨울집회에 참석, ‘단테의 신곡 독해’ 공부를 듣고, 2001년 봄부터 다녔다.
어린 대학생들과 신곡을 영어로 읽으며 그저 헤맸다. 그런데 그해 초여름에는 유 선생님 성서 창간지에 반드시 성서공부를 기고하자고 미아집회에서 강조했다. 최병인, 박찬운, 김영웅 선생께서 예배 후 광고시간에 심히 매달 압박 독촉했다. 이래서 ‘단테의 신곡독후감’ 1회가 곡절 끝에 2002.1 ‘성경말씀’ 창간호에 실렸다.
실은 성서에 관해, 중2 여름방학 마지막 국어시간에 처음 들었다(1958년). 그해 봄에 갓 부임한 이정숙 국어선생님이 중2부터 고3까지 5년간 국어, 국문법, 한문을 가르치고 담임을 두 번 하셨다. 그때 여중 2년생들에게 성서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많이 읽히고, 잘 팔리는 최고 책이라 알려주셨다. 성서가 신구약이니 구약에서 욥기, 신약에서 마태복음을 읽어들 보라고. 숙제가 아니다 하셨다. 사춘기는 거꾸로 가니, ‘숙제 아님, 읽어야지.’ 마침 집에 주먹 크기의 진남색 장정에 진분홍이 칠해진 성서가 있었다. 그래서 펼쳐든 욥기는 2장 이후엔 도대체 뭐래? 하며, 몇 번을 읽으려 애쓰다 접었다. 다음엔 마태복음을 읽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유명하셨지만 실제로 성서로 읽기는 처음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분이 세상에 계셨는데 그렇게 돌아가셔야만 했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이게 정말 사실인가?
소설은 되 읽는 버릇이 있었는데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눈물이 쏟아져 몇 날 며칠 조용히 울었다. 누구에게도 이를 물어볼 수도, 물어볼 어른도 계시지 않았고, 선생님은 너무 어려웠다.
ㄹ) 2005년 8월말 대방집회에서 ‘단테의 신곡’에 관해 처음 말하기 시작했다.
그 국어선생님이 우등생들만 모인 연극반과 방송반 학생들을 지도하셨다. 한 번도 그런데 들지 못하고 빈약한 학교 도서실만 드나들었다. 좋은 영화 보시면 이야기를 정말 잘해주시던 선생님이셨다. 그분께서 동서양의 고전소설을 많이 소개해 주셨다. 이를 읽는 좋은 독자이자, 연극, 영화, 음악, 미술의 좋은 관객으로 크라고 알려주신 셈이다. 단테의 신곡에 관해선 듣지를 못했다.
유행소설인 베스트셀러보다 고전읽기를 적극 권한 이유가, 고전으로 수백 년 살아남으려면 작가의 좋은 정신이 그 작품에 베어서라는 간단한 설명을 해주셨다. 성서가 세계 최고문학임을 중2 때 국어선생님이 가르쳐주셨으나, 이를 깨닫기에 평생이 걸린 셈이다.
문학의 한 가지에 해학과 풍자와 비유가 한몫한다. 이는 예술의 주요 덕목이다. 이로써 세상사는 재미와 삶의 활력을 얻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선한 예술가들이 이를 감당한다. 사람들을 바르게 하는 근거를 좋은 문학작품이 먼저 제시해준다. 다음에 미술가들이 나오고 음악이 온다고 한다. 과학은 그 다음이라 한다.
ㅁ) 김교신 ‘성서조선 영인본’에서 작은 글씨의 한자투성이 일기만을 어렵게 찾아 읽었다.
노 선생께서 이를 풀어서 다시 주제별로 읽기 쉽게 김 선생 전집을 내셨다. 영인본은 무겁고 여러분의 글이 섞여, 계속 읽기가 버거웠다. 성서도 잘 모를 때라 더 심했다. 자그마한 김 선생 전집이 읽기에 좋았다.
그분의 일상이 적힌 일기가 어떤 전도사의 생애보다 고품격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해방 직전에 그리도 갑자기 떠나가시다니.
몇 친구에게 이 전집을 선물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책을 잘 읽었는지 알 수 없다. 김 선생께서 훌륭하시다는 말을 들은 일이 없다. 지금에야 참 어려운 선물이 책 선물임을 깨닫는다.
한번은 대학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동창 중, 한 친구에게 문의한 일이 있다.
‘기독교 문학서적에는 무슨 책이 있는가?’ 선생님들께 좀 여쭈어서 가르쳐달라고. 1980년대 중반쯤이다. 며칠 후 학교 도서관까지 오랜만에 찾아가 들은 친구의 대답인즉, ‘얘, 영선아, 세계고전문학전집이 대부분 기독교문학이라신다.’
언젠가 노 선생님께서 톨스토이는 비기독교 성향의 작가이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기독교를 작품에 반영한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그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안 가서 그런 사실에만 유념했다. 그 이유는 그 두 작가의 작품들을 좋아했고 러시아 작가들을 참 좋아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대문호들의 나라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좋아해서 읽기는 물론, 세계의 유명 여배우들 세 명이 각기 다르게 주연한 영화들을 보면서 슬퍼했다. 왜 그렇게 죽어야만 했는가를.
이런 감정이 세익스피어의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 오셀로 등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까지 계속 갔다. 고전소설 속의 남녀주인공들의 그런 암담한 죽음들이 참고 견디기 힘들었다. 슬픔의 골이 깊었으나, 누구에게 물어볼 일도 아니었다. 그런 길을 택하는 사람들 인생 행로를 수십 년 고심한 셈이다.
ㅂ) 그런데 이젠 이를 밝혀내서 스스로 기쁘다.
성서가 보는 원점의 시선으로 이를 돌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테의 신곡은 원 제목대로 읽어야 한다. 단테의 일생에서 보카치오가 이를 ‘단테의 일생’ 9장부터 12장까지 잘 설명하고 있어 더는 부연할 필요가 없다.
특히 ‘단테의 연옥’ 1-2곡이 이를 밝히 환히 드러낸다. 이러한 단테의 신곡 해석에 가장 적극 호응하여 주신 유 희세 선생님께 감사한다. ‘단테의 신곡읽기 3’에서 이를 자세히 설명했고, 이를 집회에서 공부하는 동안 경청하시고 의문시에는 반드시 전화를 주셨다.
‘신곡’을 한두 번 읽어 알기 어렵다고들 하나, 못할 일이 있는가,
영원한 생명의 길로 화끈하고 재미나게 안내해주는 성서안내서가 ‘신곡’ 외에 또 있는가. 단테가 원래 쓴 이름인 ‘희극’이 대변하듯, 그야말로 일품의 최고 명작이다.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힘이 약동한다.
위에 열거한 세계 유명작가들의 소위 명작이라는 작품들 속에 깃든 정신에는, 성서가 내뿜는 그리스도 정신이 없다. 그저 단지 손쉽게 빠지기 쉬운 사람들의 어두운 면인 인간 내면의 감정만 고조할 따름이다. 심약한 사람들이 슬픈 감정에 휩싸이기 더욱 쉽다. 소위 사회의 약자들인 힘든 경지의 사람들이 침잠하기 마련이다. 각종 비극의 주인공들이 마음 불안한 독자들에게 어두운 면을 강조하여 더욱 상심하게 한다.
고로 이런 작가들을 비기독교 성향의 작가들이라 칭할 수 있다.
그런 선하지 아니한 작품에는 하나님 성령의 생명력이 아닌 어둠의 힘만 있다.
ㅅ) 단테가 연옥을 얼마나 대단한 솜씨의 풍자로 그렸는가.
지금의 혼란한 기독교 세상이 다시 1400년대 중반처럼 돌아가면 좋겠다. 단테의 ‘희극’을 바르게 풍자로 읽어 이를 바르게 이해하던, 그 시절처럼 말이다. 그러면 그때보다 훨씬 더 밝은 세상이 오리라, 확신한다. 그 느리던 중세와 달리 우린 스마트한 첨단 속도의 시대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인간의 정의가 아닌 하나님의 정의를 밝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테가 ‘신곡’에서 기독교 정신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성서가 희귀한 시대에 전도의 일환으로 많은 세상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
좋은 예술 작품 속에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힘이 있다. 주인공이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을 보거나 듣거나 읽은 독자들이 그 삶의 자세에 공감하고 우러르게 이끈다. 삶이 힘들어도 잘 견디고 힘껏 살게 하는 생명력이 넘친다.
많은 문학가 중에는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힘든 삶을 살아간 작가가 많다. 생전에 빛을 발하기보다 이들은 사후에 작품을 통해 알려진다. 그들의 신앙이 작품에 아름답게 스며서 삶의 향기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각 분야에 걸친 다양한 위인전기들이 이를 대변해주어 알 수 있다.
세계역사에 많은 기독자가 등장하도록 하나님께서 구약 역사는 물론 세계 역사에 역사하셨고, 지금도 이끄신다. 문학의 역사 속에 문학가들의 좋고 나쁜 작품들이 기록에 남는다. 우리가 이를 가려내 읽는 힘을 길러야 한다.
ㅇ)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역사서다.
하나님께서 인류와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위한 과정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분의 역사를 알리는 기록이 성서니, 그분에 관한 역사라 할 수 있다.
역사공부란 역사의 인물을 통해서 그 시대의 상황, 발전, 퇴보와 역행에 관해 주요점들을 배운다. 소위 반면교사 노릇을 역사공부가 알려준다.
성서에서 구약 역사서가 사무엘서부터 느헤미야서까지 343쪽 차지한다. (REB.성서 참고; 모세5경-룻기406, 에스더-아가서217, 이사야-다니엘87, 호세아-말라기74쪽. 부연; 구약; 828, 신약; 236, 외경; 205쪽.)
‘신곡읽기 4권’이 ‘히브리서 읽기’다.
이를 위해 2012년부터 5년간 모세5경, 여호수아, 룻기, 사사기를 히브리서에 반영해야 했다. 히브리서 공부는 단테의 연옥 마지막에 나온 지상천국의 행렬 속 단테의 암시 때문에 시작해야만 했다. 히브리서 읽기는 신학자들처럼 히브리서 1장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히브리서에서 가장 유명한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 11장에서 시작한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려면, 창세기를 거듭 읽어야 이해가 가능해진다. 모세는 기원전 1500년대, 사도 바울은 기원 1세기 인물이다. 성서역사 선상에, 두 인물이 1500년의 차이가 나지만 나란히 서 있다. 인류를 다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선민들과 이방 사람들에게 알리는 사명이 모세와 바울이 각각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었다. 우리 또한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이후에 살아온 기독자니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밝히는 사명에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 역사는 영원히 진행 중일 터이니 우리도 그 일직선상에 놓여있고 싶지 아니한가.
기독자의 사명을 사도 바울이 그의 많은 서한에서 밝힌다. 바울 사도의 생전의 일상이 어떠했는가.
ㅈ) 종교개혁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들었다.
이의 원동력인 ‘단테의 신곡’을 처음처럼 해석하면 가능해진다. 새로운 종교개혁 신풍이 이 자리에 모인 소집단에서 일어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단테의 연옥’이 기독자의 바람직한 일상을 오롯이 깨우치듯 알려주기 때문이다. (202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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