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전주 재발견
③ 곰솔, 그 고고한 자태
벽송 김정길
끝없는 인간의 탐욕을 준엄하게 꾸짖는 곰솔이 있다. 예부터 그 곰솔은 여느 소나무 잎보다 억세고 강인함의 상징이었다. 바닷가에서 자라기 때문에 해송海松, 줄기 껍질이 검어서 흑송黑松, 학의 자태 형상이라서 학송鶴松 등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소나무는 대개 붉은 색인데 비해 그 곰솔은 회백색이었다. 해변에서나 살법한 곰솔이 내륙인 전주 완산칠봉 끝자락에서 독야청청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며 이백오십 성상을 살아 온 뿌리 깊은 나무였다.
십오 년 전 만해도 그 곰솔은 열여섯 가지가 사방팔방으로 펼쳐져서 마치 학이 땅을 차고 하늘로 비상하려는 웅장한 자태를 연상케 했다. 그런가하면 학이 땅에 내려앉을 듯이 날개를 땅을 향해 늘어뜨리는 형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본디 그 곰솔은 인동 장 씨의 선산을 지켰던 나무였다. 고요한 숲 속에 파묻혀 하늘보다는 땅을 좋아했다. 대지를 향해 사방으로 고르게 가지를 뻗을 줄 아는 조선 선비의 겸손함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선여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겸비한 나무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곰솔로 꼽힐 정도로 문화적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내륙지역에 자라는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았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곰솔로 여겼을까
하지만 2000년 초 전주 안행택지지구개발이 곰솔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곰솔 앞으로 8차선 도로가 뚫리는가하면 그 주변에 고층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기 시작했다. 1988년 천연기념물 355호로 지정된 곰솔 부근은 문화재 보호구역이라서 택지개발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택지개발로 곰솔 주변은 도심 한가운데 서 있는 외로운 섬처럼 변해갔다. 끝없이 이어지는 아픔과 상처로 곰솔은 속울음을 삼켜야했다.
자동차의 소음과 매연이 가득하고 고층 아파트들은 바람 길과 햇빛을 막았다. 날이 갈수록 곰솔이 생기를 잃어갔다. 솔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검은빛의 가지도 희뿌옇게 말라 죽기 시작했다. 안행지구 개발 붐이 불어 닥쳤을 때 커다란 상처를 입었던 탓이다. 설상가상으로 누군가 드릴로 곰솔의 몸통에 구멍을 뚫고 독극물을 투여한 사건이 벌어졌다. 토지개발이익을 노린 무지몽매한 사람이 저지른 만행이었다. 곰솔이 죽어야 천연기념물과 문화재 보호구역에서 해제될 터이고, 개발 이익도 챙길 수 있다는 탐욕이 부른 얄팍한 꼼수가 아닐 수 없었다.
곰솔의 생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도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죽어 가는 곰솔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도민과 행정기관이 팔을 걷어 붙이고 백방으로 뛰었다. 온갖 아이디어와 나무에 대한 우리나라의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05년 큰 수술을 받고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인조나무를 붙인 몸통과 죽은 열두 가지의 볼썽사나운 몰골이 시민들의 마음을 시리게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십 년의 강물이 흐른 지금의 곰솔은 생사의 기로를 헤매다가 열여섯 가지 중에서 겨우 네 가지가 살아남았다. 그 가지들은 남쪽으로 뻗어가며 학이 비상하려 듯 옛 모습을 되 찾아가고 있다. 나무 잎도 날이 갈수록 신비롭게도 푸름을 내비치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전문가들의 정밀 조사에 의해 사망 진단까지 받을 정도로 몰골이 참담했었다. 찢기고 부러진 곰솔의 상처를 볼 때 마다 애처롭기 짝이 없을 정도였다. 자칫 곰솔은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될 뻔했지만 온몸이 찢기면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줬다. 곰솔을 온전히 살려내지는 못했지만 그 후손들이 옆에서 조상의 아픔을 함께하고 있어 대견스럽다. 각종 건축행위 등으로 생육 환경이 나빴던 곰솔의 보호를 위해 주변의 사유지를 사들이고 시민휴식공간으로 조성하려는 계획도 세워져서 여간 다행스러울 수 없다.
불천노不遷怒, 그 곰솔은 인간들의 탐욕을 준엄하게 꾸짖으면서도 모진 아픔과 분노를 옮기지 않고 마음으로 삭일 줄 안다. 독야청청 학처럼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는 곰솔에게서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품위와 도리를 배워야할 일이다.
(2014.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