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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사랑할 시간] 12
# 1. 지석 침실 - 아침
자고 있는 지석의 얼굴에 햇살이 가득 쏟아져서 부서진다. 그런 지석의 얼굴 위로 고사리 손이 얹혀진다. 지석의 얼굴을 이리저리 더듬으며, 눈썹도 만져보고, 입술도 만져보고, 콧구멍 속으로도 손가락을 넣어보기도 하고, 볼을 주물럭주물럭하기도 한다. 그 위에 꿈결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혜진E 아빠.
지석 ...
혜진E 아빠아빠.
지석 (눈꺼풀이 움직이는) ...
혜진E 아빠아빠아빠!
부스스 눈을 뜨는 지석. 햇살을 등지고 앉아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웃고 있는 혜진의 말간 얼굴. 순간 천국에 온 듯한 착각. 말갛게 웃는 지석.
혜진 엄마가 아빠하고 같이 세수하래.
천사인가 싶었던 얼굴을 혜진의 얼굴.
# 2. 지석 욕실 - 아침
지석, 혜진의 목에 수건 두르고 혜진 얼굴을 씻기고 있다. 지석, 혜진의 코를 잡고 ‘코 흥’ 하자, 외할머니에게 많이 해본 솜씨로 ‘흥!’ 푸는 혜진. 지석, 서툰 손길로 딸의 얼굴을 깨끗이 씻긴다.
혜진 내가 혼자서 세수 할 수 있는데.
지석 혼자서 씻을래?
혜진 (설레설레)
지석 (웃으며 씻기는)
혜진 아빠.
지석 응?
혜진 혜진이 크리스마스 때 뭐 해줄 거야?
지석 크리스마스 선물은 산타 할아버지한테 달라고 해야지.
혜진 (뭔가 서운한 듯 입을 꽉 다무는)
지석 왜.. 뭐 갖고 싶은데?
혜진 (지석 눈을 올려다본다)
지석 ...갖고 싶은 거 있어?
혜진 (지석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지석 (혜진이에게 키를 맞추며) ?
혜진 (지석의 귀로 바짝 달라붙어 뭐라고 얘기한다)
지석 (황당한듯) 뭐라고?
혜진 (아이참.. 다시 속삭이는데) 데..이..트! 아빠랑 데이트!
지석 (혜진을 보며 잔망스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환한 웃음)
# 3. 미연 주방 - 아침
태훈, 우유에 시리얼을 타고 먹고 있다. 맞은 편 비어있는 미연의 의자. 태훈, 마지막 스푼을 떠서 개수대로 가져가 그릇을 물에 씻친다. 물기 탁탁 털어내 올려놓고, 휑한 거실을 가로 질러 방으로 들어간다.
# 4. 미연 침실 - 아침
태훈, 미연이 없는 공간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맨다. 다 맸는데 길이 안 맞다. 풀어서 다시 매는 태훈. 손이 잘 안 놀려진다. 화가 치올라오는 태훈. 넥타이 마구 풀어 해치고, 고개 숙여 심호흡 한번 하고, 다시 거울을 보며 천천히 맨다.
# 5. 미연 집 앞 - 아침
나란히 세워져 있는 미연과 태훈의 자동차. 대훈, 출근하며 나오며 전자키 누른다. 삐빅 울리는 자신의 차로 오는 태훈. 미연의 차 옆을 지나며 들고 있는 키로 미연 차를 지익- 긋는다. 운전석에 오르는 태훈. 빠르게 빠져나간다.
# 6. 미연 작업실 - 아침
담요도 없이 소파에 옹송그리고 누워 자고 있는 미연.
미연, 깨어난다. 추위와 불안에 스스로 몸을 감싸는 미연.
왈숙이 출근하며 노트북 매고 한 손엔 커피를 들고 들어온다.
왈숙 어? 뭐야? 방송국 그만 둔 애가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나왔어?
미연 ...
왈숙 (미연 기색 살피곤) 아닌가보네. 여기서 잤나보네.
미연 ..그거 커피야?
왈숙 그럼 쌍화차겠니? ..줘?
미연 ..응.
왈숙 (수상한 듯 미연을 보며 건네면)
미연 (받아 양손으로 모아 쥐고 호.. 불며 마신다. 그나마 좀 따뜻해진다)
왈숙 (옆에 앉아 걱정스런 얼굴로 미연 보며) ..여기서 잤어?
미연 ..응.
왈숙 태훈씨가 나가래? ...쫓겨났어?
미연 ...아니.
왈숙 아니긴 뭐가 아냐! 그럴 줄 알았어.
미연 (커피 마시는) ...
왈숙 아무리 태훈씨라도 거기까지는 힘들지. 밤새 딴 남자랑 있다 온 여자를... 용서가 안되지. 용서하면 건 사이코지.
미연 ...용서했어.
왈숙 !! 뭐?
미연 내가 나온 거야.
왈숙 왜?
미연 옆에 있을 수가 없어서. ..못 견디겠어서.
왈숙 왜 못 견뎌?
미연 ...
왈숙 적당한 변명 둘러대고 무조건 미안하다 그러고 무조건 옆에 붙어서 애써서 전보다 더 잘해주면 돼지, 왜 못 있어?
미연 ...
왈숙 아 변명거리 많잖아. 차에 기름이 떨어졌다, 오도 가도 못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 이 갑자기 쓰러지더라, 환자를 그냥 둘 수 없어서 병원에만 데려다주고 왔는데 이 렇게 늦을 줄 몰랐다.
미연 ..(풋.. 웃는)
왈숙 왜 웃어?
미연 (설레설레) 아니야.
왈숙 뻔뻔하지만 그렇게 둘러치고 미안한 맘 갖고 더 잘해 주면 되지, 뭘 못 견디고 집 을 나와?
미연 ...
왈숙 !! (설마) 너.. 무슨 일.. 있었어?
미연 ...
왈숙 야, 고미연...!
미연 (O.L.) 아니야.
왈숙 근데 왜 집을 나와? 그것도 니 발로. 뭘 잘했다고? 뭐가 잘났다고!!
# 7. 지석의 드레스 룸 - 낮
혜진, 정란의 하이힐을 신고 화장대 의자 위에 올려서서 정란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립스틱까지 빼들어 거울 보며 입술을 칠하고 있다.
E 띵똥, 초인종 소리가 나자 의자에서 깡총 내려오는 혜진.
# 8. 지석 거실 - 낮
혜진 (달려 나오며) 누구세요?
현관문을 여는 혜진. 택배 아저씨가 큰 선물상자를 들고 있다.
택배 현혜진씨 댁입니까?
혜진 제가 현혜진인데요.
혜진, 얼굴이 함박꽃이 되어 저보다 더 큰 선물상자를 들고 거실로 뛰어 들어온다.
혜진 엄마~! 나한테 선물 왔어!
혜진, 방까지 가지 않고 거실 중간에 털썩 주저앉아 상자를 열어본다. 너무너무 근사한 드레스가 들어있다.
혜진 우와~!
눈이 동그래지며 입이 쩍 벌어지는 혜진. 카드도 들어있다. 펼쳐본다. 대충 읽어보더니 카드에는 별 반응 없는 혜진. 정란이 방에서 나오자,
혜진 엄마 아빠한테 선물 왔어. (카드 엄마한테 넘기고 옷 펼쳐본다) 우왁!
정란 (카드를 본다)
지석E (카드 INST.와 함께) 지상에서의 마지막 데이트를 청합니다. ....아빠
정란, 혜진이가 들고 좋아라 하고 있는 옷을 본다. 단정하고 새하얀 드레스. 정란, 드레스와 혜진을 보며 심장이 후드드득 떨려온다.
# 9. 태훈 사무실 - 낮
미연으로 마음이 짓눌려져 있는 태훈, 일을 하고 있다. 서류 자료들과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전화 상담을 하고 있는 태훈.
태훈 (PPL용 전문적인 대사) ....................... (끊고, 대기 중인 다른 전화 연결하는)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MCS 김태훈입니다. (애써 온화하게 상대하는) 아, 안녕 하세요. 별고 없으시고요? (하하 웃는) 고객님 수익을 올리는 게 저희가 하는 일인 데요.. 고마우시다니 저희도 고맙습니다. 네? (사양하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러 실 필요 없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저녁 먹은 걸로 하겠습니다. 저 혼자서 한 일 도 아니고 다른 팀원들하고 저희 회사가 한 일인데...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네.. 네.. (어쩔 수 없다는 듯)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태훈, 전화를 끊고 관자놀이를 누른다. 머리가 무겁다. 다시 마우스 클릭해 컴퓨터 화면 본다.
# 10. 지석 침실 - 낮
정란, 혜진에게 지석이가 보낸 드레스를 입히고 있다. 함박 얼굴로 옷을 쓸어 보며 만족감을 감추지 못하는 혜진. 아빠와 보낼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될 지도 모른다. 정란, 혜진이 옷을 입히고 머리를 매만져 주는 손길 하나하나에 애틋함이 묻어난다.
정란 혜진이 데이트가 뭔지 알아?
혜진 아빠가 뮤지컬도 보여주고 근사한 데서 맛있는 것도 먹는자 그랬어.
정란 ...그래도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안 돼. 아빠 피곤해.
혜진 ...
정란 자꾸 뭐 사당아 어디 가자 조르지도 말고. 그냥 뮤지컬 보고 밥 먹고 오는거야. 알 았지?
혜진 아휴.. 내가 애긴가? 걱정도 팔자셔.
정란 뭐? (손길 잠깐 멈추고 혜진 보고 웃는) ... (혜진이 머리 핀 꽂아주며) 혜진이 태 어나서 데이트 처음 하는 거지?
혜진 응! (데이트란 말에 히이익! 간지러운 듯 웃는)
정란 나중에 커서도.. 오늘 아빠랑 데이트 했던 거 잊으면 안 돼?
혜진 응!
정란 (딸아이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엄마 한 번 안아주고 가.
혜진 (정란 목을 양 팔로 감아 안는다)
정란 (꽉 안으면 부서질 아이를 안고 울음이 잘 참아지지 않는다)
# 11. 지석의 집 앞 - 낮
지석, 병색을 말끔이 지우고 정장을 하고서는 차를 대기시켜 놓고 혜진이를 기다리고 있다. 혜진이 손을 잡고 나오는 정란. 지석, 혜진을 보자 깜찍하고 예쁜 모습에 환한 미소가 지어진다. 아빠를 보며 새침한 얼굴이 되는 혜진. 지석, 혜진을 향해 이리 오라고 팔을 벌린다. “아빠~” 부르며 달려가는 혜진. 지석, “어?” 놀라는 얼굴을 해 보이자, 혜진, ‘아차’ 하며, 천천히 사뿐사뿐 걸어간다. 정란, 지석에게 다가가는 혜진을 본다.
지석 앞에 다가온 혜진. 아빠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어 보인다.
혜진을 내려다보며, 지석 역시 환하게 웃는다.
지석 (차 문을 열어주며) 타시죠.
혜진, 오르고, 지석, 문을 닫고, 정란을 돌아본다. 정란, 지석에게서 시선 돌린다. 다시 지석을 보는데, 지석,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낸다. 정란, 외면하고 돌아서서 들어간다. 정란, 지석의 죽음이 이렇게 처연하게 다가온 적 없었다.
지석 ...
지석, 본네트를 돌아 운전석으로 간다. 차 안에 앉아있는 혜진, 상기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양 손으로 볼을 감싸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
# 12. 크리스마스의 거리 - 밤
왈숙, 커플들이 즐비한 거리를 솔로로 걷고 있다. 형형색색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무거운 노트북 매고 일에 찌든 30대, 왈숙.
왈숙 (중얼중얼)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예수가 나한테 뭐가 해준 게 있다고..
왈숙, 뒤에서 “저기요!” 부르는 소리가 난다. 못 듣는다. 왈숙을 향해 달려오는 또 한 명의 30대 노트북 사내, 덕구.
덕구 (뛰어오며) 저기요..!
왈숙 (덕구 목소린 줄 대충 짐작한다. 괜히 짜증나는) ...
덕구 여보세요, ...201호!
왈숙 ...
닥구 ..와..왈숙씨!
왈숙 (이름을 부르자 아이씨.. 본격적으로 짜증내며 뒤돌아본다)
덕구 (헉헉.. 뛰어오는) 아니 벌써 가는 귀 먹었어요?
왈숙 난 누가 내 이름 길거리에서 크게 부르는 거 딱 싫거든요?
덕구 그러게 누가 안 돌아보래요?
왈숙 남이야 돌아보든, 말든!
덕구 (벙 쪄 왈숙 보는) ...
왈숙 대충 눈치 까고 그냥 갈 것이지.. 뭐 반갑다고 불러재껴요? (가는)
덕구 (가며) ... 뭐 안 좋을 일 있었어요?
왈숙 글쎄 신경 끄시라고.
덕구 (신경 끄고 올라가는) ...
왈숙 ..그 친군 어쩌고 있어요? 요즘 뜸 하대?
덕구 어쩌고 있긴요.. 무사히 돌아와서 치료 잘 받고 공주님 집에 모셔두고 시중들고 있 죠.
왈숙 웬 공주?
덕구 지석이 딸이요. 미국에 있다가 크리스마스라서 왔나 봐요.
왈숙 (황당해지는) !
덕구 (혜진 생각에 절로 미소 지어지며) 지석이하고 지 엄마하고 이쁜 데만 쏙쏙 빼닮아 서 어찌나 사람 애간장을 녹이는지.. 그냥 쳐다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그냥 가요.
왈숙 (기막혀 멈춰 서는)
덕구 (혼자 가며) 크리스마스 날 뭐해요? 할 일 없으면 나하고 같이 삼겹살에다 쏘주나 한 잔.. (옆을 보는데, 왈숙 없다. 뒤 돌아본다)
왈숙 (저만치 서 있다가 성큼성큼 다가오며) 지 인생 다 포기하고 미연이한테 돌진해서 기어이 무너뜨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애하고 크리스마스를 보내?
덕구 ?
왈숙 이 파렴치한 놈!!
덕구 ??!!
# 13. 뮤지컬 전용극장 - 밤
뮤지컬 ‘라이온 킹’의 동물들이 무대를 장악하고 있다. 웅장한 환타지의 세계. 혜진, 넋을 놓고 보고 있다. 주인공 ‘심바’가 위험에 처할 땐 흠칫, 놀라기도 하고, 진짜 동물들이 있는 정글 같은 장면에 환희의 표정을 짓기도 하며 아빠 손을 꽉 붙잡고 동물들보다 더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며 보고 있는 혜진.
지석의 손가락 두 개를 꽉 잡고 있는 혜진. 손이 작아 그걸로도 손이 꽉 찬다. 그런 혜진의 손을 본다. 지상에 혼자 떨어뜨리고 가기엔 너무나 작고 여리다.
# 14. 플래시백. 지석 침실 - 아침
정장을 입고 있는 지석. 넥타이를 매고 있다. 정란, 마이 들고 지석이 다 맨 넥타이에 핀을 꽂아준다.
정한 그냥 작년처럼 인형이나 책 같은 거 선물해주면 되지, 뭐하러 굳이 이래요. 몸도 안 좋은데.
지석 마지막이잖아. 마지막 크리스마스.
정란 ..애가 뭐 아나.. 괜히 당신만 피곤하지.
지석 그게 아니라.. 오늘 혜진이.. 20살 대접을 해줄려고.
정란 스무 살? 여덟 살짜리 애한테?
# 15. 레스토랑 - 밤
VIP석에 앉는 지석과 혜진. 지석, 냅킨을 무릎에 깔고, 주위를 둘러보느라 정신없는 혜진. 지석, “혜진아” 불러 냅킨을 들어 보이자, 혜진, 얼른 아빠를 따라 냅킨을 무릎에 깐다. 중년의 지배인이 다가와 혜진에게 ‘어서 오십시오. 뭘 고르시겠습니까?’ 며 혜진에게 먼저 메뉴판을 건넨다. 혜진, 입이 귀에 걸린다.
지석E 혜진이하고 겨우 8년밖에 같이 못 있어줬는데.. 오늘 스무 살 숙녀 대접을 해주면 20년 동안 같이 있는 거잖아.
지석 뭐 먹을래?
혜진 (도도한 자세로 메뉴판 보는) 안심 스테이크. (또는 적당히 영어 이름으로)
지석 (웃는. 지배인에게) 같은 걸로 2개 주세요. 와인도 주시구요.
지배인, 물러나면, 지석, 혜진을 보며 웃는다. 답하듯 함박꽃으로 웃는 혜진.
지석E 크면서 아버지 존재가 필요할 때가 있을 텐데.. 그때마다 오늘을 기억하면.. 혼자가 아닌 거야. 아버지가 옆에 있는 거야. ...적어도 스무 살까지는.
혜진 앞에 놓인 와인 잔에 와인이 따라진다. 만화캐릭터가 그려진 어린이용 알콜리스 와인을 정중하게 따르는 지배인. 혜진, 너무 좋아 자꾸 벌어지는 입을 다무느라 입을 오물락조물락 한다. 지석의 잔에도 와인이 채워지고. 지배인 물러나면,
지석 (잔 들며) 건배
혜진 (잔을 든다)
지석 혜진이의 스무 번째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며.
혜진 나 여덟 살인데?
지석 여덟 살이면 다 컸지. 혜진이 숙녀잖아. 아니야?
혜진 맞아. (잔 부딪히고 마신다. 달다. 입맛을 쪽 다신다)
지석 (참을 수 없이 귀여운 딸 아이. 웃으며 마신다)
# 16. 레스토랑 화장실 - 밤
굳은 얼굴로 손을 씻고 있는 태훈. 티슈를 뽑아 손을 닦으며 핸드폰을 꺼내 열어본다. 미연에게서 연락이 없아. 태훈, 핸드폰 도로 집어넣고, 손 닦아 구긴 티슈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나간다.
# 17. 레스토랑 - 밤
태훈, 중년의 고객이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온다. 태훈, 애써 웃어 보이려고 하는데, 어색하고 힘들다. 그때 레스토랑에 바이올린 선율이 흐른다. 태훈, 소리가 나는 곳을 보는데, 혜진을 둘러 싸 있는 연주자들. 혜진, 양 손으로 볼을 가리며 너무 부끄러워하고 있다. 태훈,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본다. 혜진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 지석!
태훈 ...!
딸 아이를 지극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석. 옆구리를 손으로 짚고 있지만, 태훈에게 그것까진 보이지 않는다. 태훈, 지석의 얼굴을 본다. 딸을 보며 지극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
중년의 고객, 태훈에게 다가온다.
태훈 (고개 숙여 인사하는) 저녁 잘 먹었습니다.
고객 술까지 한 잔 사주고 싶은데..
태훈 아니요, 술은.. 잘 못 합니다.
고객 (흠흠.. 웃으며 태훈이 만족스럽게 보며) 그렇다고 들었어. 가지. (나가고)
태훈 (나가며 지석을 한 번 더 돌아본다)
지석, 혜진의 스테이크를 잘라주고 있다. 포크 들고 아빠가 다 자르길 기다리고 있는 혜진. 지석, 다 잘라 접시를 혜진 앞에 놓아주면, 혜진, 포크로 콕 집어 오물오물 먹는다. 귀여운 딸을 바라보는 지석.
태훈 .....
태훈, 묘한 질투감이 있다. 그에겐 아이가 없고, 저 남자는 아내와 바람이 났던 남자다. 태훈,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 돌아서는데,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모든 잡음들을 몰아낸다. 돌아보는 태훈. 지석, 한손은 옆구리를 집고, 한 손을 테이블을 집어 쓰러지지 않으려 버티고 있다.
태훈 !
# 지석 테이블
놀라 아빠를 보고 있는 혜진. 웨이터 다가와 바닥의 물 컵을 치우고,
지석 아빠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혜진 ... (놀라 눈 동그랗게 뜨고 아빠 보며 끄덕끄덕)
지석, 일어나는데 눈앞의 사물들이 한 바퀴 공전을 한다. 휘청하며, 의자를 잡고 버티는 지석. 혜진, 흠칫, 한다. 지석, 정신 똑바로 차리고 걸어간다.
태훈의 옆을 스쳐가는 지석. 태훈, 그런 지석을 보는데, 지석, 태훈을 알아보지 못한다.
# 18. 레스토랑 밖 일각 (복도 혹은 계단) - 밤
지석, 한 손은 옆구리를 짚고 한 손은 벽을 짚고 걸어와 적당한 곳에 주저앉아 약을 꺼낸다. 약이 그새 3개로 늘었다. 몸이 많이 힘든지 약을 꺼내는 손도 부들부들 떨린다. 지석, 종류별로 하나씩 꺼내 입에 털어 넣는데, 물 컵이 내밀어진다. 지석, 보면, 태훈이 지석의 눈을 화난 눈으로 바라보며 물 컵을 내밀고 있다.
지석 고맙습니다. (받아서 먹고)
태훈 (그런 지석을 본다)
<인서트 - 태훈의 사무실, 일하고 있는 태훈을 보며,
‘나 당신 아내 사랑해’ 했던 지석. 들리지 않는 말에 ‘?’ 했던 태훈>
태훈 (다리 접고 앉아 바닥에 널려진 약통 뚜껑을 닫아 준다) 딸 아이.. 입니까?
지석 ..네.
태훈 ... (약통 뚜껑을 힘주어 꽈악 조인다)
지석 지난번에.. 무례했던 것.. 죄송합니다.
태훈 (지석을 보며) 뭘 어쩌셨는데요?
지석 ......
태훈 (허.. 기막히다는 듯 웃는다) 아이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지석 (옆구리를 꽉 짚고, 통증을 참는다)
태훈 내 아내한테 같이 살자고 했다기에.. 죽어도 못 잊을 만큼 절절한 사랑을 했다기 에.. 내 아내한테 목숨 걸고 인생 다 포기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이렇게 아이하고 같이 외식을 하러 나오는 평범한 남잔 줄은 몰랐다구요!
지석 ...
태훈 어떻게 뻔뻔하게 아이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남의 여자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지석 ...! (태훈을 본다)
태훈 (일어나 돌아서서 화를 누른다)
지석 (일어난다) 미연이.. 무슨 일 있습니까?
태훈 (돌아서서, 적수의 야수에게 으르렁거리는 짐승처럼) 무슨 일? 내 아내하고 야반도 주를 했던 주제에 무슨 일?!!
지석 ...
태훈 (죽일 듯 지석을 노려본다)
지석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차 속에 고립 되서..
태훈 (O.L. 참지 못하고 지석 멱살을 쥔다. 붉게 충혈 된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 질 것 같다) 죽을래?
지석 (그런 태훈의 눈을 본다. 화는 났지만 선한 눈이다) ...
태훈 (멱살 놓는다) ... (뚫어질 듯 바라보며 주먹을 부르르 쥔다)
지석 (무방비 상태로 태훈을 본다) ...
태훈 (있는 힘을 줘 주먹을 꽉 쥐어놓고 결국 때리지 못하고) ...다신 미연이 앞에 나타 나지 말아요.
지석 ...
태훈 부탁드립니다. (간다)
지석 (미연이에 대한 걱정과 혼란, 미안함과 범벅이 되어) ........
# 19. 거리 - 밤
휘적휘적 걸어오는 태훈. 아내의 남자를 무방비 상태에서 멱살까지 잡아놓고 한 대 패주지도 못했다. 자괴감과 억울함 분노가 뒤섞여 휘적휘적 걸어온다. 외투를 여미지 않아 찬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휘적휘적 걸어온다. 마주오던 불량 청년과 어깨를 부딪치는 태훈.
불량청년 눈에 쇠를 박았나.. (태훈과 부딕힌 어깨를 털고 가는데)
태훈 뭐? (청년의 어깨를 잡고)
청년 아이씨.. 뭐야! (태훈의 손을 탁 쳐 내는)
태훈 니가 부딪혔잖아.
청년 뭐야, 이거?
태훈 니가 잘못해놓고 왜 나한테 그래? (청년의 멱살을 쥐는데)
청년 이게 미쳤나? (그대로 태훈에게 주먹을 날린다)
휘청하며 무릎이 꺽이는 태훈. 일어나더니 청년에게 거센 주먹을 날린다!
제대로 나가떨어지는 청년. 청년, 일어나더니 샛 소리를 뱉으며 눈에 불을 켜고 태훈에게 달려든다. 태훈, 지지 않고 맞서는데, 청년에게 대할 게 못된다. 주변 사람들 말리고, 순찰 나온 경찰들, 호루라기 불며 달려와 뜯어말리고, 간신히 떨어지는 두 사람. 옷과 얼굴이 엉망이 된 태훈. 다스려지지 않은 분노로 숨을 몰아쉰다.
(F.O.)
# 20. 편의점 앞 - 밤
편의점에서 나와 걸어오는 미연. 추위에 한 손으로 옷깃을 여미는 미연. 다른 한 손엔 컵라면 따위가 들은 편의점 작은 봉투가 들려있다. 미연, 작업실 건물로 들어간다.
# 21. 미연 작업실 - 밤
미연, 냉장고에 편의점 봉투를 열어 김치, 생수, 삼각 김밥을 넣어 문 닫고, 컵라면은 냉장고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도 들어있는 비누와 칫솔, 수건을 꺼내놓는다. 못마땅한 얼굴로 보고 있는 왈숙.
왈숙 뭐하는 거야?
미연 며칠이라도 있으려면 필요하잖아.
왈숙 식량은 며칠인데 얼굴은 아주 작정한 얼굴이야.
미연 ... (대꾸 없이, 소파에 앉아 옷가지 몇 개 챙겨온 작은 가방에서 갈아입을 티셔츠 꺼내며) ...
왈숙 정말 안 들어갈 거야?
미연 ...
왈숙 태훈씨가 뭐 심하게 했니?
미연 ...
왈숙 심하게 했어도 넌 할 말 없어.
미연 ...
왈숙 (포기한다) ...모르겠다. 니가 알아서 해라. 니 남편이고 니 인생인데.. 니가 언제 내 말 들었니? (화 나서 탁탁 가방 챙기는)
미연 (그런 왈숙 보며 미안해지는..)
왈숙 일도 안 되고, 친구 하나 있는 건 지 멋대로 살고.. 갈란다. 문이나 잠그고 자.
(문 쾅 닫고 나가고)
미연 ...
# 22. 지석 침실 - 밤
정란, 혜진에게 잠옷을 입혀주고 있다. 아직 상기된 기분이 가라앉질 않아 엄마에게 쫑알쫑알 얘기하는 혜진.
혜진 티본 스테이크 먹었어. 엄마 식당에 돌아다니면서 바이올린 연주해주는 아저씨들 있잖아. 그 아저씨들이 나한테 와서 나를 이렇게 삥 둘러싸고 바이올린 켜줬어. (다시 생각해도 좋다. 히익 웃는) 식당에 있는 사람들은 연주 안 해줬어. 나만 해줬 어. 원래 스무 살이 된 숙녀한테만 해 주는 건데, 아빠가 나도 해주라고 그랬대.
정란 ... 그리고 또 뭐했어?
혜진 아빠하고 와인도 마셨어.
정란 와인? 술?
혜진 응! 무지무지 달콤했어.
정란 ... (웃는)
혜진 엄마 근데.. 아빠 아퍼.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금세 뚝 떨어진다)
정란 ...! (끌어당겨 꽉 안아주는.. 눈물이 고이는)
# 23. 지석 서재 - 밤
책상에 우울하고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앉아 있는 지석.
지석E 미연이.. 무슨 일 있습니까?
태훈E 무슨 일? 내 아내하고 야반도주를 했던 주제에 무슨 일?!!
일어나 방 안을 서성이는 지석. 안되겠는지, 차키를 챙겨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 24. 왈숙 원룸 - 밤
뻥튀기를 오징어 씹어 먹듯 먹으며 주성치 영화를 보고 있는 왈숙. 무지하게 재미있는 영화를 보며 웃지는 않고 신세한탄을 한다.
왈숙 인생이 저런 코미디면 얼마나 좋겠냐... (한숨 푹 쉬는) 에휴...
누군가 현관문을 쾅쾅 두드린다.
왈숙 또 술 처먹었어, 또. 으휴!
왈숙, 짜증내며 일어나더니 거울을 본다. 머리 매무새를 다듬고 입고 있던 츄리닝을 벗고 가디건 꺼내 입는 왈숙. 그 사이 쾅쾅쾅쾅, 다급한 듯 더 세게 문을 두드리자,
왈숙 나가요, 나가. 문 부서지겠네.
# 25. 왈숙 현관문 앞 복도 - 밤
왈숙 어디서 또 술을 처먹고.. (하다가 놀라 본다)
지석 (불안한 얼굴로 서 있다)
왈숙 뭐에요?
지석 미연이..
왈숙 (지석을 도끼눈으로 노려보더니 문을 닫는데)
지석 (O.L. 막으며) 미연이한테 무슨 일 있습니까?
왈숙 무슨 일 있습니까?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지석 ...
왈숙 미연이 집에서 쫓겨나길 바랬던 거 아니에요?
지석 !
왈숙 탈 쓴 늑대가 아니고서야 인간이 어떻게 그래요? 당신도 남자고 가정이 있을 거 아니야. 남의 가정 파탄 내놓고 니 새끼하고 크리스마스라고 알콩달콩 보내지대?
지석 제가 도와줄..
왈숙 (O.L.) 빨리 죽어요! 그게 미연이 도와주는 거니까! (문을 꽝! 닫아버린다)
지석 !! ....
# 26. 왈숙 원룸 - 밤
말이 너무 심했다. 왈숙, 현관 문 고리 꽉 잡아 붙들고.. 후회하지만 늦었다.
왈숙 ..에이 몰라..! ...그런 소리 들어도 싸!
# 27. 미연 작업실 건물 앞 - 밤
건물 앞을 서성이는 지석. 핸드폰을 들고 망설이며 건물을 올려다본다. 수 많은 창문 중에서 어디가 미연이 있는 곳인지는 알 수 없다. 지석, 버튼을 누른다.
# 28. 미연 작업실 - 밤
미연, 난로를 소파 근처로 가져와 온도를 높인다. 쿠션 머리맡에 놓고 담요 펼치는데, 테이블 위에서 핸드폰이 진동되며 돌아간다. 집어 들고 액정 보곤 살폿.. 미소가 지어지는 미연.
미연 여보세요?
지석E ...자는 거 깨웠니?
미연 아니. 이제 막 자려고 했던 중이야.
지석E ...어디야?
미연 ...집. ...어딘데?
지석E 나도 집.
창문 밖. 저 아래 서성이고 있는 지석.
미연 왜 잠 안 자고...
지석E (말 없는) ...
미연 여보세요?
지석E ...보고... 싶어서..
미연 (엷은 미소)
# 29. 미연 작업실 건물 앞 - 밤
지석 (눈물 고이는) ...
미연E ..오늘.. 뭐 했어?
지석 ..혜진이가.. 와서.. 종일 시중들었어. 공연 보여주고.. 외식하고..
미연E ..마지막이었겠네.. 아이한테 해주는..
지석 (통증! 견디며!)
미연E ..아기는 자?
지석 ..응
미연E ..옆에서 같이 자. 그만 전화 끊고.
지석 ...
지석이 전화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저만치, 태훈이가 보인다. 옷과 얼굴이 흐트러져서 떨궈진 손에서는 담배가 타들어 가고 있다.
미연E 끊는다?
지석 ...
미연E ...잘 자.
지석 ...잘 자.
미연E ...
지석 ...
입으로 담배를 가져오는 태훈. 필터 끝까지 타 들어가 있어서 태울 게 없다. 쓰레기통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는 태훈. 멀찌감치 있는 쓰레기통까지 가서 담배를 버리고 건물 입구 쪽으로 간다.
전화를 끊고 차로 가 올라타는 지석. 가고,
태훈,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 30. 지석 침실 - 밤
정란, 혜진이를 토닥이며 재우다가 같이 잠이 들어있다. 조용히 들어오는 지석. 외투를 벗고 침대 끝에 걸터앉아 엄마 품에서 잠든 혜진이를 본다.
혜진의 콧방울을 슬쩍 집어보는 지석. 정란, 잠이 깬다.
정란 내내 자랑하다가 금방 잠들었어.
지석 ...
정란 안 자요?
지석 자.. (혜진 옆에 눕는다)
정란 (보다가) ... 여보.
지석 ....
정란 (지극한 눈으로 지석을 바라보는) ...
지석 ...왜?
정란 ...아니야...
지석 ...
# 31. 미연 작업실 - 밤
핸드폰을 쥐고 아직 남아있는 지석의 여운을 느끼는 미연. 그만 누우려는데,
노크소리가 들린다.
미연 ..누구세요?
태훈E ...
미연 ... (그냥 누우려는데)
태훈E 나야.
미연 ...!
미연, 다가가 문을 연다. 태훈, 들어온다. 미연, 문을 열어주긴 했지만 태훈을 외면하는데, 태훈, 들어오더니, 그 기세로 미연의 가방과 외투를 챙기고 난로 불을 끈다.
미연 뭐하는 거에요?
태훈 (미연 앞에 외투 빌려 주며) 입어. 집에 가자.
미연 (화나서 보는)
태훈 미안해. 무조건 내가 잘못했으니까,
미연 (O.L.) 태훈씨..
태훈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그냥 집에 가. 나랑 있어. 그 사람 생각해도 좋고, 그 사람 하고 전화도 해. 만나고 싶으면 나 모르게 만나. 다 해. 다 하고, 저녁 땐 집에 들 어와. 잠은 내 옆에서 자고, 밥은 나하고 같이 먹어. ..그렇게 해.
미연 (기막힌 슬픔으로 태훈 보는)
태훈 나 더 이상 무너뜨리지 마. 여기서 더 무너지면 완전히 밑바닥이야.
미연 ..집에 돌아가도.. 예전처럼 못 돌아가. 다른 남자 생각하는 여자.. 다시는 안을 수 없을 거야. ..나도 당신한테 더 안기고 싶지 않아.
태훈 ...!
미연 서로 각방 써야 될 거고 거실에서, 욕실에서, 주방에서 부딪힐 때마다 어색하고 무 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모르고.. 없었던 일로 무마하려고 해도 이제 안 돼. ..우리 이제 예전처럼 못 돌아가.
태훈 시간이 지나면..
미연 (O.L.) 시간에 기대기에는.. 상처가 너무 커.
태훈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포기해?
미연 ...
태훈 나하고 9년 동안 산 세월 아무 것도 아니야? 그 남자한테 버려져서 만신창이가 된 당신 감싸준 사람은 나야. 나하고 살면서 당신 때때로 그 남자 생각했고, 그런 당 신 기다려줬어. 나 그렇게 애썼던 거 당신 것도 아무 것도 아니야? 한 번 실수로 이렇게 와르르 무너질 만큼 아무 것도 아니야?!! (눈물과 분노)
미연 (죽도록 미안한) ...
태훈 도대체 왜 그래? 그 놈이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미연 ...
태훈 지난번에 도망갔을 때.. 무슨 일 있었어? (핏발서며) 안아,주기,라고 했니?
미연 (다급하여) 태훈씨.
태훈 당신 나랑 끝내고 그 자식한테 올인 할 생각이지만, 그 자식은 아니야. 아내, 아이, 다 곂에 두면서 당신 자리 조금 비워두는 거야. (버럭) 알아?
미연 ...알아요.
태훈 ..!!
미연 와이프도 알고, 아이가 있다는 것도 알아요. 그 와이프가 그 사람 얼마나 사랑하는 지, 그 사람이 자기 아이를 얼마나 아끼는 지.. 알아요.
태훈 !!
미연 나한테 뭘 원하는 지도 알구요.
태훈 ...!!
미연 해줄거에요. 옆에 있어달라면 있어주고 물러나 있어달라면 물러나 있고, 그래서 당 신하고 헤어지게 되면, 그것도 감수하고.. 그렇게 해주고 싶어요.
태훈 (이미 참을 수 있는 한계까지 다다랗다. 무슨 힘으로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 죽 고 나선 어떡할 거니?
미연 ...
태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 몰래 만나면 되잖아. 그 사람 금방 죽는다면서 그 이후 의 당신도 생각해야지.
미연 ..이혼.. 원하면.. 해줄께요.
태훈 !! (순간 자기도 모르게 미연의 뺨을 후려친다!)
미연 ...!!
태훈 !! (온 몸을 불에 덴 듯 하다) 입 닥쳐.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야. 건방지게!
미연 ... (조심스럽게 고개 돌려 태훈을 보는데)
태훈 ... (깊은 슬픔으로 미연을 보다가 고개 돌리는!) ...
(맞은 미연이보다 더 아픈!)
# 32. 지석 침실 - 밤
지석, 모로 누워있고, 정란, 천장을 보고 있다. 가운데 누워있는 혜진.
지석, 옆구리를 집으며 약한 신음소리를 낸다.
정란 ...! 또 아파요?
지석 약 먹었어. ...괜찮아... 사그라들거야.
정란 ...
지석 (윽! 이 앙 물어 입 밖으로 소리 나지 않게!)
정란 아프면 소리 내요.. 혼자서 견디지 말고..
지석 엄마.. 장모님.. 혜진이까지 있는데.. 어떻게 그래...
정란 ...미안해요... 이럴려고 불러들인 거 아닌데... 당신 아프다고 소리도 못 지르게 하려고...
지석 (O.L.) 괜찮아, 이제... (숨을 좀 쉬어본다)
정란 여보
지석 ...
정란 (천장 보며) 나는... 그러니까... 나는 (어디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얼른 정리가 안된다) 다른 여자.. 가슴에 품고 오는 남자한테 잘해주고 싶지 않았어요.
지석 ...
정란 그치만 혜진이 낳고는 아니에요. 혜진이하고 같이 웃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자 고... 혜진이하고 있는 당신은.. 내 남자였어요.
지석 ...!
정란 자존심 때문에.. 마음 풀기가 쉽지 않아서 그랬던거지.. 여보... 나... 나.. 당신...
지석 (다시 통증이 인다! 소리 내지 않고 참는!)
정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
지석 (윽!)
정란 (눈물 고이는)
지석 (통증 참는)
정란 ......
지석 ......
# 33. 미연 작업실 건물 앞 - 밤
태훈, 절망으로 서 있다. 태훈의 손가락에서 담배가 길게 타들어가고 있다. 태훈의 발아래 십 수개의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다.
# 34. 미연 작업실 - 밤
소파에 겨우 앉아 있는 미연. 눈물을 흘린다.
(F.O.)
# 35. 지석 침실 - 아침
혜진이와 나란히 자고 있는 지석. 정란, 아침 햇살에 들어오는 창문에 블라인드를 친다. 침대 곁으로 다가와 잠든 남편과 아이를 보는 정란. 몸을 숙여 혜진에게 뽀뽀를 하고, 지석에게도... 다가가다 멈칫... 다가가다 멈칫... 손으로 이마 쓰는.
# 36. 왈숙 원룸 앞 복도 - 아침
왈숙 (자다 깬 얼굴로 문을 여는데)
덕구 메리~ 크리스마스~!
왈숙 (옴마야!)
어설픈 산타 복장에 얼굴에 흰 수염을 덕지덕지 붙인 덕구, 선물박스를 들고 인공 눈까지 뿌리며 서 있다. 황당한 왈숙.
왈숙 (얼굴 앞에 알랑거리는 눈 거품 손으로 휘저어 치우며) 뭐에요?
덕구 크리스마스라구요! 선물 주러 왔어요.
왈숙 오늘이 며칠인데 크리스마스에요?
덕구 아니.. 우울 한 거 같애서.. 며칠 좀 땡겨서 하면 어때요?
왈숙 (좀 감동)
덕구 (선물 내미는) 선물이요.
왈숙 (받는) ...뭔데요.. 이게?
덕구 돼지고기 삼겹살이요.
왈숙 (벙 찐 얼굴로 덕구 보는데)
덕구 냉장고에 뒀다가 크리스마스 날 같이 꿔먹어요. 할 일도 없는데..
왈숙 (감동 다 깨진다)
덕구 선물까지 줬는데.. 커피 한 잔만 얻어먹고 가면 안돼요?
왈숙 ...
# 37. 왈숙 원룸 - 아침
덕구, 들어오며 모자와 수염을 뗀다. 왈숙, 선물박스 어루만지며 에 벌어지는 입을 다문다. 선물 한쪽에 놓고 커피 타며,
왈숙 설탕 몇 스푼 넣어요?
덕구 아니 저기.. 그보다도..
왈숙 (보면)
덕구 지석이요..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왈숙 ?
덕구 지석이한테 미연이는요... 그러니까.. 근데..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거에요.
왈숙 ??
덕구 1년동안 착한 일 하면 겨울에 산타할아버지가 주는 선물... 지석이 30년동안 꽤 괜 찮은 아들이었고, 멋진 친구였고, 괜찮은 남편, 좋은 아빠였어요.
왈숙 ...
덕구 그거 다 지키느라고... 미연이 놓친 거에요.
왈숙 ...
덕구 우리 아니더라도.. 지석이 힘들거에요.. ..우리까지 힘들게 하지 마요.
왈숙 ..누가 뭐했나..
덕구 어제.. 파렴치한 놈이라고..
왈숙 그거야... (쩝...)
덕구 커피는 다음에 마실께요. 아침부터..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나가는)
왈숙 ...아이...씨.. (미안하고 무안하다. 그러다 거을을 보고 막 자고 일어난 대책 없는 자신의 몰골에, 히익! 으아악!!)
# 38. 지석 거실 - 아침
김치 통에서 김치를 꺼내 석석 써는 지석모. 가스렌지엔 찌개가 끓고 있고 다른 반찬들 할 재료들도 싱크대에 널려있다.
거실 소파에 있는 정란모와 혜진. 토스트에 혜진이는 우유, 정란모는 커피를 마시며 같이 신문을 펼치고 앉아있다.
정란모 제!
혜진 제!
정란모 주!
혜진 주!
정란모 도!
혜진 도!
정란모 제주도!
혜진 제지도!
정란모 (포기하며 웃는) 그래, 제지도다. (신문에 제주도란 글자가 나와 있었나보다)
지석, 방에서 나온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부엌에서 아침준비를 하고 있는 엄마를 본다. 지석, 엄마 주방으로 간다. 식탁에 차려진 반찬들과 다다다닥.. 찌개에 넣을 파를 써는 엄마의 뒷모습.. 지석, 그 옆으로 다가간다.
지석모 일어났어? 얼른 가 세수라고 와 다 됐어.
지석 엄마.. 하지 마..
지석모 뭘?
지석 아무도 아침에 밥 안 먹어. 정란이가 하지 말랬는데 왜 자꾸 해.
지석모 너 먹잖아. 너 먹으라고 하는 거지 내가 뭐..
지석 나 요새 소화 안되서 아침부터 이렇게 된 거 못 먹어.
지석모 아침을 안 먹으니까 소화가 안 되는거야.. (하면서 도마소리 느려지는)
지석 하지 마.. 엄마..
# 39. 지석 욕실 - 아침
지석, 세면대에 물 틀어놓고 거울 속의 자기와 마주하고 있다.
지석 ......
# 40. 병찬 진료실 - 낮
병찬 앞에 앉아 있는 지석과 정란. 언제나 그렇듯 지석은 묵묵부답으로 앉아 있고, 정란이 지석의 증상을 얘기한다.
정란 통증도 더 잦아지고 구역질도 더 자주 해요. 먹는 것도 별로 없는데, 그나마 다 토 해내고, 지난번에 눈 속에서 실려 온 담부턴 기력이 떨어졌는지 밤에 자다가 식은 땀도 자주 흘려요. 방 온도를 높이긴 하는데... 그리고...
병찬 (지석 보는) ...
지석 (그냥 얌전히) ...
정란 다른 건 몰라도 밥은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뭘 어떻게 해서 먹여야 되는지..
병찬 (차트 작성하며) 넌 꿀 먹었냐?
지석 (흠.. 웃기만)
병찬 통증 어떻게 와?
지석 ..똑같애.
정란 약 먹어도 금방 안 수그러들어요. 전엔 금방 괜찮아졌는데..
병찬 면역이 돼서 그래요. 두 개씩 양을 늘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약으로만 버틸려 면.
정란 ...
지석 ...
병찬 (차트 간호사 주며, 지석에게) 간호사 따라가.
지석 (일어나 간호사 따라가면)
정란 저기...
병찬 (보면)
정란 지난번에도 물어봤었는데.. 그때보다 지석씨 상태가 안 좋아졌는데.. 그래도 여 행.. 할 수 있을까요?
병찬 ...어디루요?
정란 제주도...
# 41. 몽따주 - 제주도
/ 지석이 사랑과 이별 고백을 하던 미연방의 작은 창문 앞.
/ 귤 밭에 숨어들어 귤을 훔쳐 따먹던 고등학생의 미연과 지석, 그 일당.
/ 손을 잡고 낮은 물을 차박차박 건너가던 풍력 발전소 풍경.
/ 제주도 바다 위 창공에서 내려오는 비행기.
# 42. 제주도 미연모의 집 거실 - 낮
문을 여는 미연모. 놀란다.
미연모 미연아!
미연 (환하게 웃고 서 있다) 뭘 그렇게 놀래?
미연모 아니..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미연 (들어오며) 웬일은.. 연말이고 크리스마스니까 왔지.
미연모 너 혼자 온 거야? 김서방은 어쩌고?
미연 아빠는? 학교 갔어? 요새도 방학 때 보충수업 하나? 엄마 밥 있어? 비행기가 없어 갖고 새벽 비행기 타고 오느라고 아침도 못 챙겨먹고 왔어. 찬 밥 남은 것 좀 없 어?
미연모 (두서 없이 말이 많은 딸) ..어.. 뜨신 밥 있어.
거실에 상 놓고 밥을 먹고 미연. 배가 고프다기보다 마음이 허기져 밥을 꾸역꾸역 우겨넣는 먹는다. 미연모, 그런 딸을 보며 물 컵을 옆으로 밀어준다.
미연모 물 마시고 먹어.
미연 (마신다)
미연모 ..싸웠어?
미연 누구랑? (무슨 말이냐는 듯) 아아니.
미연모 근데 왜 왔어?
미연 엄마 보러 왔다니까.
미연모 언제부터 엄마 생각했다고.. 너 그렇게 효녀 아니야.
미연 (꾸역꾸역.. 허한 마음 채우려.. 눈물이 날 것 같은..)
미연모 진짜 아무 일 없어?
미연 없어.
미연모 근데 왜 소박 맞어 온 며느리마냥 밥을 먹어?
미연 (엄마 보다가 못 말린다는 듯 웃고, 밥 먹는)
미연모 (웃으며 김장 김치 쭉 찢어 미연 그릇에 놔주며)
눈 빠지게 보고 싶다가두, 갑자기 오면 뭔 일 있는 건 아닌가 싶구... 옛말에 시집 간 딸내미 연락 없이 친정에 들이닥치면 곧 사단이래잖아. 하기사. 김서방만 같으 면야.. 석 달 열흘 소식 없어도 걱정 안 해.
미연 ...
미연모 암만 생각해도 사위 하난 잘 얻었어. 뭐 내 딸이 잘났으니까.. 건강하기만 하면 돼. 애는 안 생기는 거 할 수 없는 거구, 그저 둘이 건강하게만 잘 살면 되지. 요새는 세상이 하도 지저분해서 젊은 사람한테도 암이다 뭐다.. 기막힌 병들 막 걸리잖어. 그저 건강이 최고야.
미연 (밥 먹는) 엄마... 현지석... 기억해?
미연모 누구? 현지.. (뒤늦게 생각난 듯) 현상만 아들? 지석이? 그 집안사람들 본지 꽤 됐 지. 할머니 상 당했을 때 보고 못 봤으니까 십 년두 넘었다 얘. 근데 걔는 갑자기 왜?
# 43. 태훈 회사, 본부장실 - 낮
기막힌 얼굴로 앞에 서 있는 태훈을 보고 있는 본부장. 태훈, 하룻 동안 한없이 까칠해져 있다.
본부장 너 방금 뭐라 그랬냐?
태훈 미서부 지점 발령.. 철회해 주십시오.
태훈 ...죄송합니다.
본부장 장난하냐? 윗선에 로비 뚫어서 낚아채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뭐?
태훈 ...
본부장 너 대체 뭐 믿고 이러냐? 위선에 스폰서라도 잡고 있냐?
나 같은 거 엿 먹여도 확실하게 너 보호해줄 놈 있어서 이러는 거야?!!
# 44. 동. 밖 사무실 - 낮
본부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태훈. 엿듣고 있던 직원들, 시치미를 떼며 제자리로 돌아가고, 태훈...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푸는 태훈. 지갑을 꺼내 명함 한 장을 꺼낸다. 오래 넣고 다녀서 모서리가 나달해진 지석의 명함. 태훈, 명함 속 지석의 이름을 뚫어질 듯 바라본다.
태훈 .....
# 45. 지석 거실 - 밤
지석, 들어오는데, 혜진, 방에서 포르르 나오더니 달려와 지석의 다리를 끌어안는다.
혜진 아빠 캔써(cancer)야?
<자막> cancer : 암
지석 (적잖이 놀라) 어?
혜진 캔써가 뭐야?
지석 누가 그래?
혜진 엄마가 전화하는데 아빠가 캔서가 있대. 근데 비행기 타두 되냐구.
지석 ...
혜진 ..캔써가 뭐야?
지석 (혜진이를 안더니) 음.. 방귀를 아주 크게 뻥..! 하고 뀌는 사람을 캔써라 그래.
혜진 (크크 웃으며) 아빠처럼?
지석 음. 아빠처럼.
혜진 근데 왜 비행기를 못 타?
지석 비행기 안에서 방귀뀌면 어떻게 돼. 큰 일 나잖아. 창문도 못 여는데. 그러니까 타 기 전에 검사를 해야지. 이 사람이 캔썬가 아닌가..
지석모, 다용도실에서 바가지에서 김치 한 포기를 담아내오고, 혜진, 지석에게서 내려오더니 그리로 포르르 달려가.
혜진 할머니!
지석모 (눈으로 이뻐 죽겠다는 인사) 응.
혜진 아빠 캔서야! 대빵 큰 캔..
지석, 혜진의 입을 막는다. 지석모, 아무렇지도 않게 주방에서 등지고 일을 보고, 그때 방에서 나오는 정란과 눈이 마주친다.
# 46. 미연 침실 - 밤
태훈, 불안함에 서성이며 핸드폰을 하고 있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계속 들린다. 태훈... 잠깐 생각하더니, 여러 개의 버튼을 누른다.
미연모E 여보세요?
태훈 ..장모님, 접니다.
미연모E 어, 그래, 김서방.
태훈 ..미연이.. (혹시..)
미연모E 지금 잠깐 나갔는데... 왜 핸드폰이 안되나?
태훈 ... (안도, 한편으로 미연이 도망갔음에..!)
미연모E 아이구... 갑자기 쳐들어와서 난 또 자네랑 무슨 일 있나 싶었는데...
미연이도 왔는데 한번 안내려올텐가? 영 시간이 안 나?
태훈 예.. 내려가겠습니다. 예...
전화를 끊고 침대에 대자로 눕는 태훈.
태훈 당신은 좋겠다... 엄마두 있고, 아빠두 있어서... 좋겠다...
(잠시 후, 돌아누우며) ...
# 47. 지석 침실 - 밤
지석, 외투들을 벗고, 정란, 받아들어 옷장에 넣는다.
정란 더 나빠지기 전에 한 번.. 갔다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고향이잖아...
지석 ....
정란 혜진이랑... 셋이 여행 한 적 한 번도 없고.. 백일 사진 말고는 셋이 같이 찍은 사 진도 한 장 없어, 우리.
지석 ...
정란 병찬 씨도 무리만 안하면 된다 그러긴 했는데.. 약하고 잘 챙겨가면 그다지 먼 곳 도 아니니까.. 당신이 피곤할 것 같으면 안가도 되구요.
지석 ...
정란 가기 싫어요?
지석 ...아니야. 가. ...(나가는)
# 48. 지석 서재 - 밤
들어오는 지석. 책상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제주도는 미연과의 추억이 있는 곳. 가족과 가기에는 미안한 생각이 드는 곳이다.
지석 ........
# 49. 제주도 미연모의 집 거실 - 밤
무너진 듯 앉아있는 미연의 손을 잡고 있는 미연모.
미연모 웬일이래니, 웬일이래... 아이구 참 그 젊은 나이에... (두근거리는 심장 누르는) 참.. 그 집 양반 드러운 핏줄로 타고 났다고 애를 그렇게 패더니.. 그게 곯았네. 그 게 곯았어.
미연 (고개 숙인 채)
미연모 어쩌니? 지금 니 또랠텐데... 결혼도 했을 거 아냐.
미연 ..(끄덕)
미연모 애도 있을텐데..
미연 ..(끄덕)
미연 아이고 참나.. 그 집이 어떻게 되니? (그러다 미연 보며) 근데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알어? 서울서 알고 지냈어?
미연 (고개 드는. 처연한 얼굴. 엄마 보며) 어떡해, 엄마..
미연모 뭘 어떡해.. 암 말기면 뭐.. 손 쓸 수도 없는 걸..
미연 (나) 어떡해 엄마.. (후들거리는)
미연모 (딸 보는) 너 왜 그래?
미연 (우는) ...
미연모 왜 울어? 그럴 수도 있지, 너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미연 (엄마 끌어 안는)
미연모 !! (설마, 미연 떼며) 얘! 미연아!
미연 (운다)
미연모 너 무슨 일 있지? 뭐야? 말해!
미연 ...
미연모 너.. 쫓겨난 거야? 도망 나온 거야?
미연 ...
미연모 빨리 말해, 이것아. 김서방 내려온다 그랬어!
# 50. 제주도 고등학교 교무실 앞 복도 - 밤 (*서울서 촬영!)
불 꺼진 조용한 복도. 열린 교무실 안으로 미연부가 가방을 챙기고 있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태훈. 미연부, 나온다.
태훈 (웃으며 인사하는)
미연부 뭐하러 이리와. 집으로 가지. 미연이도 와 있다는데..
태훈 아버님하고 술 한 잔 하려구요.
미연부 나야 좋지만... 안 피곤해?
태훈 괜찮습니다.
미연부 그럼 가.
# 51. 선술집 - 밤
태훈, 미연부에게 정중하게 따라준다. 미연부, 따라주며,
미연부 싸웠어?
태훈 예? ..아니요.
미연부 근데 왜 따로따로 왔어? 연락도 없이. (마시고)
태훈 (고개 돌려 마시는)
미연부 말해봐. 뭐야. 미연이가 뭐 속 썪여?
태훈 (흠.. 웃는)
미연부 그런가보네. (잔 채워주려하면)
태훈 (받아서 먼저 채워준다. 채워주며) 미연이.. 학교 다닐 때 남학생들한테 인기 많았 어요?
미연부 많았지. 그 놈들 처리하느라고 졸업할 때까지 아주 수업을 제대로 못했어.
(태훈 잔 채워주며) 미연이 쫓아다니는 놈들은 그나마 나아. 나 쫓아다니면서 장인 어른 장인어른하면서 설날에 세밸 오질 않나, 나닌 굿을 치는데... 내 딸 좋다는 놈 들을 팰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받아주자니 모양새가 요상하고.. (마시는)
태훈 (고개 돌려 마시는)
미연부 왜? 미연이 바람 펴?
태훈 (하하..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으며) 그럴리가요.
미연부 근데 그런 걸 왜 물어? (술 채워주고)
태훈 (잔 들어 받으며) 좀 싸웠는데... 얼만큼 숙이고 들어가야 되나 싶어서요..
좋아하는 남자들이 많았으면 네 발로 기면서 잘못했다 그러고, 그저 그랬으면 당당 하게 뻗댈려구요. 결혼해준 게 어딘데 감히.. 그러면서요..
미연부 미연이도 늙었어. 뻗대. 갈 데 없어. (마시고)
태훈 (가라앉는 얼굴.. 혼잣말처럼) ...아니에요... 아직두 아름다워요... 기막히게...
(마시는)
# 52. 제주도 미연모의 집 거실 - 밤
미연모, 문 열어주며 안절부절이다. 들어서는 미연부와 태훈. 적당히 기분좋게 취한 두 사람.
미연모 아니 어떻게 둘이 같이 와요? (태훈에게) 와.. 왔어? 오.. 온다길래 내일이나 모레 나 올 줄 알았지.. 오늘 오면 오늘 온다고 하지..
미연부 사람들이면서 뭔 말이 그래 많어..
태훈과 미연부, 들어서고, 미연, 태훈을 본다. 태훈도 미연을 본다.
미연 ...
태훈 ...
미연 (아빠에게) 다녀오셨어요.
미연부 명절 때두 다 못 챙겨 오더니... 왠일들인지 모르겠네. (방으로 들어가고)
미연모 (눈치 보며) 저녁.. 먹었나?
태훈 네.
미연모 그래? 그럼..
태훈 그래도 밥 조금만 먹었음 좋겠는데.. 빈 속에 술을 넣었더니.. 좀 울렁거려요.
미연모 그래.. 이리와. 차려줄게. (미연에게 눈짓해보이며 주방으로 가고)
미연 (태훈 보는) ...
태훈 (보는) ... 집에 오니까 좋아?
미연 (보는) ...
태훈 난 일 때문에 내일 올라가야 되지만, 당신은 며칠 쉬었다 와.
미연 ...
태훈 ...
# 53. 지석 침실 - 밤
지석모, 빼꼼이 문을 연다.
지석모 ...지석아...
지석 (일어나는)
지석모 자니?
지석 아니, 엄마. (문 쪽으로 가며) 왜요?
지석모 잠깐 나와 봐. (순 잡아 이끈다)
# 54. 지석 주방 - 밤
지석모, 지석 손잡아 끌고 오더니, 찬장 깊고 깊숙한 곳에서 신문지에 싼 뭔가를 꺼낸다. 몇 겹의 신문지 속에서 나온 건 산삼뿌리 하나.
지석모 이거 씹어 먹어.
지석 뭔데 이게?
지석모 (양 손 열 손가락을 펴 보이며) 50년 묵은 산삼이야. 엄청 비싸게 주고 샀어. 너만 몰래 먹여야 되는데, 니 처가 시종일관 니 옆에 붙어있어서 틈이 나야지. 혜진이가 갑자기 들어오질 않나, 사둔어른까지 들이 닥치고.. (가슴 쓸며) 아이고... 내 이거 들킬까봐.. 부엌에서 발을 못 뗐네.
지석 (황당해 웃는)
지석모 얼른 씹어 먹어. (지석 팔 쓸며) 아, 모래도 씹어서 넘길 나이에 왜 소화가 안돼. 밥도 못하게 하니 밥을 멕일 수가 있나.. 살은 점점 빠지는게 아주 내 살이 다 녹 아내려..
지석 (심장이 오그라드는...)
지석모 아, 뭐해, 얼른 씹어 먹어.
지석 (씹어 먹는다)
지석모 그렇지.. 자근자근 소화 잘 되게 아주 녹아지도록 씹어서 넘겨.
지석 (눈물이 난다)
지석모 지 애비 죽을 때까지 평생을 뚜드려 맞고.. 시답잖게 콧대만 치솟은 처가에서 눈치 밥 먹으면서 맘 고생하고.. 그러니 몸이 남아 나. 밥을 먹어도 살이 빠지지..
지석 (고개 돌린다. 눈물 떨어질 것 같다)
지석모 아, 어이 씹어 먹어. 혜진 애미 오줌 누러 나오면 우짜..
지석 엄마도 좀 먹어.
지석모 나는 안 그래도 명 길어. 이것까지 먹으면 불로장생 해야.
지석 그래도 좀 먹어. (좀 떼 주는데)
지석모 (그대로 지석 입 속에 넣어주며) 니가 먹는 게 내가 먹는겨. 어이 먹어. 자근자근 씹어.
지석 (순간 울컥..! 참지 못하고 눈물이 흐른다)
지석모 울기는.. 얼른 먹어.
# 55. 제주도 미연방 - 밤
누워 자고 있는 미연과 태훈. 미연, 태훈에게서 등 돌려 돌아누워 있고, 태훈, 이마에 손 올리고 있다. 간격도 떨어져 있는 두 사람.
태훈 뭐 하나만 물어볼게.
미연 ...
태훈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당신이 돌아올 수 있는지... 방법 생각한 거 있어? 나한테 너 무 미안해서 말 못하는 거...
미연 ....
태훈 있음 괜찮으니까 맬 해 줘. 난.., 난 정말 모르겠어.
미연 ... (마음 아픈)
태훈 ... (돌아눕는다)
(F.O.)
# 56. 김포공항 앞 - 낮
택시가 와 서고, 지석, 정란, 혜진, 지석모 내린다.
정란, 트렁크로 가서 가방을 내린다.
지석모 (혜진이 옷을 여며주며) 에우, 우리 강아지 얼어 죽겠네. (손을 잡고, 종종종 뛰어 가며) 가자, 가자, 가자.
지석, 정란을 도와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는데,
정란 내가 하께요. (트렁크 1개. 가방 1개)
디석 줘... (트렁크 끌고 가는)
정란 (쫓아가는)
# 57. 김포공항 - 낮
정란 혜진아 이리와. 화장실 가자. 어머니 가방 좀..
지석모 (가방 받고, 혜진이 손 넘겨주는)
정란 (혜진이 데리고 화장실로 가고)
지석 ... (지석모를 보다가) 엄마... 고마워.
지석모 뭐가?
지석 ....... (미소) 무식해서.
지석모 (지석의 머리를 콩! 때리고)
지석 (에이) 쪽 팔리게.. 사람들 많은데..
지석모 내 많이 배운 것들 치고, 싸가지 있는 것들을 못 봤어. 똑같애, 혜진 에미나 혜진 이 할미나. 무식한 니 에미가 백배 낫지?
지석 응. 천배 나아.
지석모 잠깐 있다 가는데도 저렇게 찬바람 쌩쌩이니, (짠해지는) 너 미국서 처가댁에 얹혀 살면서 기죽어 살았을 꺼 생각하믄... 에우, 돈이 왠수지.
지석 엄마...
지석모 왜 또?
지석 미안해요.
지석모 옘병 밑도 끝도 없이..
지석 낳아줘서... 고마워요.
지석모 (좋으면서도 흘기는) 곧 죽을 놈마냥...
지석 (모친의 손을 잡는다)
지석모 (감동이긴 하나, 어색하기도 해서 퉁박투로 말이 나간다) 에이구, 왜? 니 새끼 보 니까 에미 맘 알겠냐?
지석 ... (환하게 미소 지어보이는)
# 58. 탑승구 앞 - 낮
지석 정란 혜진, 탑승하기에 앞서 지석모친에게 인사한다.
정란 죄송해요. 저희들끼만 가서.
지석모 니들 쫓아다니는 것보다 집에서 쉬는 게 백배 나. 얼른 들어 가.
지석 담엔... (말하고 나니 우습고) 같이 가요.
지석모 (귀찮아 들어가라는 손짓) 됐어됐어. 여러 말 말고 얼른 가. 얼른 들어가.
혜진 할머니 빠이빠이!
지석모 빠이빠이!
지석, 정랑, 혜진, 탑승구 안쪽으로 간다.
지석모, 얼른 들어가라는 손짓.
들어가고 나면, 지석모, 돌아서서 걸어 나온다.
아무 생각없이 걸어가는 지석모의 뒷모습. 그러다가 문득 멈춰 선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무나를 붙들고...
지석모 저기. 캔서가 뭐유?
행인 에?
지석모 (최대한 혜진이의 발음을 흉내내보는) 캔서! 캔서!
행인 캔..서? 암... 말씀하시는 거에요?
지석모 암? 암이 뭐... 암? ...암?? !!!!
지석모, 한 방 먹은 얼굴로 지석이네 사라진 뒤를 돌아보는데!
그 시야에 입국하여 들어오고 있는 태훈이 보인다!
지석모 옆을 스쳐 오는 태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