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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이 시 영
잠자리 한 마리가 감나무 가지 끝에 앉아
종일을 졸고 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차가운 소나기가 가지를 후려쳐도
옮겨 앉지 않는다
가만히 다가가 보니
거기 그대로 그만 아슬히 입적하시었다
이 시 영
나도 저 잠자리 문상을 간적 있었다
시골길 억새풀 대궁에나 앉아서 이륙할 듯. 바람에 흔들리던.
살금살금 다가간 까치발 민망하게 꼬리를 움켜잠아도 미동도 하지않던.
게송마저 삼킨 좌탈.미물이어도 하늘을 꿈꾸던 날개가 두 쌍이다.
몸은 차갑게 식었지만 어떤 정신의 염열(炎熱)이 남아 있어
주검마져도 균형을 읺지 않는 걸까.
눈꺼풀 없는 천수천안의 겹눈이 죽어서도 아주 눈감지 않고 시방 세계를 응시 한다.
평생 하늘나라 꿈꾸던 잠자리는 왜 푹신한 구름밭 묘지 다 놔두고 땅으로 내려온 걸까?
삶이 꿈이고 죽어서 깬다는 뜻일까? 이불 한 채 요때기 하나 없이 바지런히 날아다녀도
잠 자리라 불리던 잠자리.어느 아득한 화원에서 보내온 조화일까?
서릿발로 지핀 다비식에 들판 가득 쑥부쟁이 만발한다.
곧 겨울이 내리면 떠들썩하던 들판도 잠자리.
반칠환
<<시집 속의 칼/김소원
김소원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수학과를 졸업
2002년 <문학과 경계> 로 등단.
현재 오정 문학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mail:sophia-Ksw@hanmail.net
302-791
대전시 서구 월평동 누리 아파트 107돈1305호
302-485-5640
016-9360-5640
시집 속의 캍
묵혀 두었던 시집을 넘기다
문득 손을 베었다.
집안일 십여 년 굳어진 살갗을
날래게 스치고 간 시 한 구절
내 허영의 화티(불씨를 보관하는 작은 아궁이) 한구석에 꽂힐 때
칼 하나 오롯이 품었구나.
눈길 멀어 보얗게 잊혀지며
칼날 세우고 있었구나
바람 잘 지나는 침대에 누워
남의 시 거저 읽으려다
쇠리쇠리 벼린 풀잎에 영혼을 베인 저녁
핏방울 꽃 선연히 벙글어
노을같이 취기같이
하얀 머리속에 번지다
내 두터운 시안詩眼의 각막 저몄음인가
안 보였던 별이 보이는 것은
초사흘 눈썹달이 저리 눈부신 것은
달빛 곰국
아덜 손지 메누리 모다 와서 절간 같던 집 혼 빼놓디만
아들들은 까치 추석 동창회 가삐고 손자들은 달도 못 보
고 잠에 빠져뿟네 집안 가득 니끼한 지름 냄새 잠이 고마
달아빼서 휘영청 달빛 아래 무새솥 내걸었제 장수오메
보내온 암소 엉치빼 잘 꼬아 한 그륵썩 믹이 보낼라꼬
달빛 국물 보얗게 일나고 수숫대 살살 실어주던 달님
도 중천인데 아들이 어째 너무 늦네 메누리는 뺏국 삼탕
이 고작이라재 일삼아 불마 때마 다섯 번도 진국인데 아
적 묵직한 저 잉걸불도 아깝고 대낮겉이 환한 달빛 고마
버서 다시 한 번 물을 부서보네 달과 나라이 가는 저 별
은 떨어질 중도 모리고 의도 참 좋네 오순도순 가다 보마
밤길도 금방이겠제 아슴아슴 자불고 있는 잉걸불 위에
마른 깻단 언지고 장작 몇개비 들개주네
장작도 외로바서 혼자는 못 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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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타자의 삭막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의 서사가 시인의 가슴으로 들어가
서정으로 승화하여 따뜻하게 껴안는 모습이 감동적인 울림으로 다가왔다.
오로지 미화 하는 것도, 또 정감 화 하기만하는 것도 서정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현실성 없는 미학성은 울림이 없기에.
다 올리지 못한 그녀의 다른 시들은 고통 받는 이들을 포용하는
가슴 따뜻한 영혼의 울림이라 참신하게 다가왔다.
한 편 한 편 모두 뽑아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2편만 뽑아야 했다.
날이 밝자말자 시인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의 다른 시집도 읽고 싶었고 목소리도 듣고 싶었다.
그녀의 시집은 첫 시집이라 하기에 너무 완숙하였다.
나는 이제 그녀의 시를 따라 갈 것이며
간절하게 다음 시집을 기다린다.
2006년 7월 17일
점안식 하는 날
최명란
춘천시 의암호 근처 그 어디쯤을 지나다가
장승을 빚고 있는 한 사내를 만났던 것이다
사내는 마무리 칼질을 하기 위해 장승의 눈자위를 다듬고 있었는데
마침 점안식 하는 날이라고 한다
장승을 두고 점안식 한다는 말은 금시초문
얼씨구 이것이 바로 부처를 만나는 길이다 싶어 작정하고 지켜보는 나에게
점안식이란 죽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라며
사내는 마당에 장승들을 쭉 둘러 눕혀놓고
툭 불거진 눈자위에 시커먼 먹물을 꾹꾹 찍어넣었는데
막 점안이 끝난 장승들이 일제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덥석 내 손을 잡아끌었던 것이다
엉겁결에 잡아버린 까칠하고 뜨듯한 장승의 손에서
생명의 온기가 순식간에 내 이십만 리 혈관을 타고 좌르르 흘러
그때 나도 영락없이 한 사람 장승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장승들을 따라 이리저리 마당으로 문간으로 춤추듯 돌아다니다가
밤늦도록 막걸리를 마시며 한바탕 웃고 떠돌며 놀았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당신을 생각하다가
점안은 정작 나에게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눈을 뜨지 못한 장승처럼 살아오던 내가 당신 곁에 누워
한평생 점안식 하는 날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툭툭 불거진 내 증오와 죽음의 눈자위에
장승의 손이 시커먼 먹물을 꾹꾹 찍어 나를 점안해주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손목
윤제림
나 어릴 때 학교에서 장갑 한 짝을 잃고
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부지깽이로 죽도록 맞고 엄마한테 쫓겨났지
제 물건 하나 간수 못하는 놈은
밥 먹일 필요도 없다고
엄마는 문을 닫았지
장갑 찾기 전엔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며.
그런데 저를 어쩌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저 늙은 소년은
손목 한 짝을 흘렸네
몇 살이나 먹었을까 겁에 질린 눈은
아직도 여덟 살처럼 깊고 맑은데
장갑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한하운처럼 손가락 한 마디도 아니고
발가락 하나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어찌할거나 어찌 집에 갈거나
제 손목도 간수 못한 자식이.
저 움푹한 눈망울을 닮은
엄마 아버지 아니 온 식구가, 아니
온 동네가 빗자루를 들고 쫓을 테지
손목 찾아오라고 찾기 전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찾아보세나 사람들아
붙여보세나 동무들아
고대로 못 붙여 보내면
고이 싸서 동무들 편에 들려 보내야지
들고 가서 이렇게 못쓰게 되었으니
묻어버려야 쓰겠다고
걔 엄마 아버지한테 보이기라도 해야지
장갑도 아니고
손목인데.
<좋은 시>2006. 삶과꿈
안녕
박진성
주치의 춘천으로 발령나서
새 병원 찾아가는 길
잘못 나온 꽃잎 몇 개
안녕,
대기실 의자에 앉아
아까 본 목련 꽃잎을 자꾸만 바라보는데
간호사 하나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거라
허만하 시집 갈피 사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모래알.
안녕, 이라고 애써 고개 파묻고 있었는데
박진성님…… 카운터로 걸어가는데
뒷목덜미를 꽃이 잡아끌었는데
저기, 진성이 아니니…… 간호사가, 안녕,
고등학교 동창 선경이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으로
안녕,
미래 신경정신과 수간호사가 되어 있는거라
상습 불면, 자살충동, 공황발작,
차트를 오래오래 쳐다보는거라
조제실에서 알프라졸람과 바리움을 봉지에 넣고 있는
스물일곱의 네 손가락은
기다란 의자에 앉아 약을 기다리는 스물일곱의 내 엉덩이에
근육이완제를 주사하겠지
엉덩이를 까고 창문을 바라보는데
바람을 못 이긴 목련이 툭, 떨어지는거라
자주 보겠네, 그 말 한 마디가
입 안에서 궁글고 있는 알약처럼 서걱거리는거라
안녕, 안녕,
병원 문 열고 나오는데
목숨 끊고 거리를 자유 비행하는 목련 한 꽃잎
안녕,
<목숨> 천년의시작 2005
방을 얻다
나희덕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 계신 저녁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 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까,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걸.
시집<사라진 손바닥> 문학과 지성사 2004
미꾸라지
안도현
추어탕집 양동이에 미꾸라지들이 우글거린다
진흙뻘 속을 파고들 때처럼 대가리 끝에 꼿꼿이 힘을 주고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우글우글,
몸부림 쳐도
파고들어 가도
뚫지 못하는 게 몸인가
양동이에는 미끄러운 곡선들만 뒤엉켜
왁자하게 남는다
그 곡선들 위에
주인 여자가 굵은 소금을 한줌 뿌린다
그러자 하얀 배를 뒤집으며,
소금과 거품을 뱉어내며,
수염으로 제 낯짝을 치며,
잘도 빠져나가던 생애를 자책하는지
미꾸라지들은
곧바로 몸에서 곡선을 떼어낸다
그리고는 직선으로 뻣뻣하게 一字로 축 늘어져 눕는다
현대시 (2005년 3월호)
철학자 산들이
문복주
이 놈은 처음부터 수상했다
잘못 태어나 개가 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자신이 개를 선택한 것이다
인간이 사슬로 묶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을 거부하고 개가 되었다
먼 산을 보며 사유하는 눈
목줄을 매든 풀든 상관치 않는 자유로움
밥을 주어도 며칠 굶겨도 절대로 비굴하지 않는 의연함
흠씬 두들겨 패면 팰수록 내가 측은하다는 듯
한참을 쳐다보는
때로 인간사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잔디밭을 걷는다
개장수의 다섯 마리 새끼 가운데 선택되어 온
천박한 출신과 비극적 운명을 아는지
눈은 언제나 슬프고 깊다
행동은 어눌하지만 결국은 지혜에 닿는다
한결 같은 신조
개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다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경박하게 아무 때나 짖지 않는다
인간의 행복은 나의 행복과 다르므로 탐하지 않는다
눈 내리는 깊은 산골
하얀 산천을 바라보며 의젓이 앉아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6번 <비극적>을 들으며
꼬리를 간간히 흔들고 있는 저 놈을 보라
철학자인가 삶을 거부하는 똥개인가
[현대시] 2004년 12월호
춤
박형준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연습을 한다.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려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무늬로 뒤덮힌다
발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녁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박형준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등이 있음.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민족문학작가회의 웹진)
리필
이상국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서문학> 2004 가을호
절 골
송진권
고종내미 갸가 큰딸 여우살이 시킬 때 엇송아지 쇠전에 넘기구 정자옥서 술국에 탁배기까정 한잔 걸치고 나올 때는 벌써 하늘이 잔뜩 으덩그려졌더랴 바람도 없는디 싸래기 눈이 풀풀 날리기 시작혔는디 구장터 지나면서부터는 날비지 커튼 함박눈이 눈도 못 뜨게 퍼붓드라는구만
금매 쇠물재 밑이까지 와서는 눈이 무픞꺼정 차고 술도 얼근히 오르고 날도 어두어져오는디 희한하게 몸이 뭉근히 달아오르는디 기분이 참 묘하드라네 술도 얼근허겄다 노래 한자락 사래질 꺼정 해가며 갔다네 눈발은 점점 거치고 못뚝 얼음 갈라지는 소리만 떠르르하니 똑 귀신 우는 거거치 들리드라는구만
그래 갔다네 시상이 왼통 허연디 가도 가도 거기여 아무리 용을 쓰고 가두 똑 그 자리란 밝고 뺑뺑이를 도는겨 이러단 죽겄다 싶어 기를 쓰며 가는디두 똑 그 자리란 말여 설상가상으로 또 눈이 오는디 자꾸만 졸리드랴 한걸음 띠다 꾸벅 이러면 안된다 안된다 하믄서두 졸았는디
근디 말여 저수지 한가운디서 누가 자꾸 불러 보니께 웬 여자가 음석을 진수성찬으로 차려놓고 자꾸 불런단 말여 너비아니 육포에 갖은 실과며 듣도 보지 못한 술냄새꺼정 그래 한걸음씩 들어 갔다네 눈은 퍼붓는다 거기만 눈이 안 오구 훤하드랴 시상에 그런 여자가 옶겄다 싶이 이쁘게 생긴 여자가 사래질하며 불런께 허발대신 갔다네
똑 꿈속거치 둥둥 뜬 거거치 싸목싸목 가는디 그 여자 있는 디 다 왔다 싶은디 뒤에서 벼락커튼 소리가 들리거든 종내마 이놈아 거가 워디라고가냐 돌아본께 죽은 할아버지가 호랭이 커튼 눈을 부릅뜨고 지팽이를 휘두르며 부르는겨 무춤하고 있응께 지팽이루다가 등짝을 후려치며 냉큼 못나겄냐 뒤징 줄 모르구 워딜 가는 겨
얼마나 잤으까 등짝을 뭐가 후려쳐 일어서 본께 당산나무에 쌓인 눈을 못 이겨 가지가 부르지며 등짝을 친겨 등에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시상이 훤한디 눈은 그치고 달이 떴는디 집이 가는 길이 화안하게 열렸거든 울컥 무서운 생각이 들어 똑 주먹 강생이 거치 집으로 내달렸다는디 종내미 갸가 요새두 당산나무 저티 가믄서는 절해가며 아이구 할아버지 헌다누만
(2004 창비 겨울호 제4회 창비신인상 당선작)
어둠
이상국
나무를 베면
뿌리는 얼마나 캄캄할까
<어느농사꾼의 별에서> 2005 창비
우는 손
-유홍준
오동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아이 하나가 다가온다
동그랗게 말아 쥔 아이의 손아귀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얘야 그 손
풀어
매미 놓아주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평생 우는 손으로 살아야 한단다
(시안 2004 가을호)
낚시 이후
함민복
늦게 일어나 수돗가에 나가보니
고무대야에 피라미와 붕어가 떠 있다
죽음을 머리 위에 허옇게 인
잉어가 아가미를 움직인다
그늘 흔드는
지느러미
두려웠나 물 밖으로 뛰쳐나와
죽음 속으로 헤엄쳐 간 잔 고기 몇 마리
부패와 호흡이 한 물 속이고
심장들은 제자리뜀으로 경계를 넘는다
시집<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05
모퉁이
안도현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 테고
하굣길에 그 계집애네 집을 힐끔거리며 바라볼 일도 없었겠지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거야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 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 훗날, 내가 너를 배반해볼 꿈을 꾸기나 했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골목이 아냐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드는 거야
남자가 아냐 여자들이 모퉁이를 만드는 거야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2004 창비
봄비
정진규
미리 젖어 있는 몸들을 아니? 네가 이윽고 적시기 시작하면 한 번 더 젖는 몸들을 아니? 마지막 물기까지 뽑아 올려 마중하는 것들 용쓰는 것 아니? 비 내리기 직전 가문 날 나뭇가지들 끝엔 물방울들이 맺혀있다 지리산 고로쇠나무들이 그걸 제일 잘 한다 미리 젖어 있어야 더 잘 젖을 수 있다 새들도 그걸 몸으로 알고 둥지에 스며들어 날개를 접는다 가지를 스치지 않는다 그 참에 알을 품는다
봄비 내린다
저도 젖은 제 몸을 한 번 더 적신다
시집<本色>2004 천년의 시작
들쭉술
노정균(고려대문창과2004학번)
오랜만에 집에 갔더니 들쭉술이라는 것이 있더라. 아버지 금강산 다녀오시면서 가져왔다는데 온통 한글 밖에 없으니까 더 외국 술 같더라. 난생 처음 보는 북한 것이라서 신기한 듯 보다가 내려놓았는데, 이놈도 따지고 보면 탈북한 동포라는 생각이 들더라. 애처로운 눈빛으로 다시 보니 키도 작고 야윈 것 같고 안색도 안 좋더라.
양주 진열대에 놓여있는 모습이 장군들 사이에 있는 졸병 같기도 하고, 10년 전 잡지 모델처럼 촌스러워서 보기 그렇더라. 안되겠다 싶어서 요놈을 냉장고 속 소주 옆에다 두었는데 맞춤 양복 한 것처럼 딱 맞더라. 조선·평양 이라고 고향이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이놈도 가족이 그리울 것 같은데, 일단 내가 냉장고 문을 닫아줘야 지들 끼리 얘기를 좀 할 것 같더라.
한밤중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여니, 낯선 잠자리에 뒤척이는 들쭉술. 할머니께서 처음 침대에 누우신 날 등이 배겨서 못자겠다고 하신 것처럼, 이놈도 허리가 빳빳해져 있더라. 한번 보듬어주려고 들었더니 이미 누군가에게 입술을 빼앗겼더라. 냄새나 맡아볼까 하고 가까이 하니까 글쎄 이놈이 맛도 한번 보라고 속삭이더라. 그래서 혓바닥만 대볼 셈으로 슬쩍 들이키는데 순간,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한 모금의 백두산!
금기를 어긴 동승처럼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이상하게 창문이 파랗더라.
꽃 속의 음표
배한봉
꽃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제 몸 속 암술 수술의 음표들이 가락
퉁기기 때문이리, 벌 나비 찾아드는 것 또한
그 가락 장단이 향기를 뿜어내기 때문이리
그대여, 사랑은 눈부신 그 음표들이
열매 맺고 향기롭게 익는 일과 같을 것이니,
우리는 어떤 가락 장단으로 세상을 걷고
어떤 열매를 키우며 서로 바라보는 것이냐
나 오늘, 만개한 복사꽃 보며
내 몸 속에서는 어떤 음표들이 가락을 퉁기는지
궁금하여 햇살 속에 마음 활짝 펼쳐본다
시집<악기점> 2004 세계사
시린 생
고재종
살얼음 친 고래실 미나리꽝에
청둥오리 떼의 붉은 발들이 내린다
그 발자국마다 살얼음 헤치는
새파람 미나리 줄기를 본다
가슴까지 올라온 장화를 신고
그 미나리를 건지는 여인이 있다
난 그녀에게서 건진 생의 무게가
청둥오리의 발인 양 뜨거운 것이다
시집<쪽빛 문장>문학사상사 2004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내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현대시학 2004년 9월호)
꽃냉이
최문자
모래 속에 손을 넣어본 사람은 알지
모래가 얼마나 오랫동안 심장을 말려왔는지.
내 안에 손을 넣어본 사람은 알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말려왔는지.
전에는 겹 백일홍이었을지도 모를
겹 동백이었을지도 모를
꽃잎과 꽃잎 사이
모래와 모래 사이
나와 그 사이
그 촘촘했던 사이.
보아라. 지금은 손이 쑥쑥 들어간다.
헐거워진 자국이다
떠나간 맘들의 자국
피마른 혈관의 자국.
신두리 모래벌판 가본 사람은 알지
피마른 자국마다 꽃 피는 거
헐거워진 모래자국으로도 노랗게 꽃 피우는 거
지금, 신두리 모래벌판 꽃냉이 한철이다
슬픔도 꽃처럼 한 철을 맞는다.
(현대시학 2004 7월호)
개펄마당
안학수
밀릉슬릉 주름진 건
파도가 쓸고 간 발자국
고물꼬물 줄을 푼 건
고둥이 놀다 간 발자국
스랑그랑 일궈 논 건
농게가 일한 발자국
오공조공 꾸준한 건
물새가 살핀 발자국
온갖 발자국들이 모여
지나온
저마다의 길을 펼쳐 보인 개펄마당
그 중에 으뜸인 건
쩔부럭 절푸럭
뻘배 밀고 간 할머니의 발자국
그걸 보고 흉내낸 건
폴라락 쫄라락
몸을 밀고 간 짱뚱어의 발자국.
안학수 동시집 [낙지네 개흙잔치](창작과 비평사 2004)
콩나물국, 끓이기
이동호
사내는 뚝배기 속으로
지휘봉을 가져간다
도에서 끓기 시작한 뚝배기 속의 음표들을
사내는 지휘하듯 휘휘 내젓는다
음계는 금세 높은음자리로 음역을 높인다
이 음악은 너무 뜨거워 맛보기가 힘들다
사내는 입술을 오므려 솔,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이 뚝배기 속으로 뛰어든다
음악소리가 완전히 익기까지는
시간을 조금 더 끓여야한다
사내는 잠시 식욕을 닫고
기다리는 동안 창 밖을 바라본다
창 밖 나뭇가지가 세상을 휘젓는다
공중 부양하는 수많은 손바닥들
손대기에도 너무 뜨거운 세상 때문이다
땅의 뚝배기 속에 떨어지기도 전에
나뭇잎이 몸을 굴린다
사내가 삶의 안쪽으로 몸을 돌린다
뚝배기가 심장처럼 펄펄 끓어오른다
뚝배기를 식탁 쪽으로 옮긴다
사내는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에 숟가락을 끼운다
뜨겁게 김이 오르는 음표들을 입으로 분다
음표들이 낮은 음계에 도달한다
뒷모습이 콩나물인 사내가
음악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다
한 소절의 생이 고스란히 입안에서 씹힌다
창 밖 저녁노을이,
얼큰하다
(현대시학 2004 12월호)
젖은 돈
박윤일
빨래를 탈탈 털어 옷걸이에 걸다가
작은 아이 반바지 호주머니에서
천원 짜리 지폐 다섯 장을 꺼낸다
어제 다녀간 손님이 준 것이다
한 장 한 장 펴서 베란다 바닥에 깔아놓는다
햇볕에 젖은 돈을 널고 있는 아침,
하루벌이 구겨진 종잇장을 아이들 몰래
장롱 깊숙이 쑤셔 넣으시던
젊었을 적 어머니도 옥상에서 돈을 널고 계신다
이불 속에서 종이돈이 부풀어 오르는 동안
장롱 속 어둠은 소녀의 가슴에 봉긋이 쌓여 갔다
작은방 문은 안으로 걸려 있고 벌어진 문틈으로
소녀의울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누런 구들장판에 축 늘어져 있는 소녀와
아버지 발 밑에 깔린 부러진 회초리도 언뜻 보인다
아버지는 그날 아침내 뒷간 똥물에서
소녀가 훔쳐 내던진 종이돈을 한 장 한 장 건너내셨고
어머니는 몇 번이고 맑은 물에 헹구어 내셨다
똥물이 첨벙거리는 뒷간 깊숙한 곳에
소녀가 묻어 버리고 싶었던 돈 뭉치 냄새
장롱 속을 빠져나온 묵은 어둠을
나는 지금 내 베란다 햇볕에 말리고 있다
(현대시학 2004 12월호)
독살
박지웅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는 거의 굶다시피 겨울을 났다한다
그리고 짧은 메모
저 남은 초록으로는 며칠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의 몸에선 죽은 뒤에도 술내가 났다한다
그에게 길든 짐승처럼 술이 시신을 지키고 있었으니
배를 따보나마나 사인은 뻔한 일이었다
그가 몸을 몸처럼 낭비할 때
너무 이른 나이에 짐을 싸고 있다고 우려했던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수요일,
봄이 거의 다 된 그냥 평범한 수요일 오후.
그러나 그가 함부로 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밤을 조심하여 하모니카를 불었으므로
울먹울먹 서툴게 창을 넘어오던
그것은 고향의 봄이었으므로
그의 연주에 TV를 낮춘 일도 있었으므로
수요일 밤 나는 그를 기록한다
그것이 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병을 비우듯 그가
몸을 비웠더 수요일 오후
불모의 봄을 서둘러 지니가야 했던 한 인물
그 죽음에 타당한 제목 하나쯤 드는 일이 큰 허물이 아니라면
그곳에 있는 것들 대부분은 말라 있었다한다
부엌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대파들은
제 이파리 깨물며 건기를 견디고 있었다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의 몸은 죽은 뒤에 이상하게 푸르렀다한다
(현대시 2004. 11월호)
정선생 수족관을 만들다
우진용
첫째날은 교장의 결재를 받고 내려왔다.
둘째날은 틀을 짜고 유리를 맞추었다.
셋째날은 냇가에 가서 모래와 자갈을 가져왔다.
넷째날은 수초를 심고 수포기를 끌어왔다.
다섯째날은 물을 채우고 물레방아를 돌렸다.
여섯째날은 돌고기 송사리 붕어를 잡아들였다.
(일곱째날은 비가 왔고,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다)
놀라워라, 현관 한가운데 떠다니는 물고기들.
수족이 없는 수족관에 수족도 없는 물고기들,
이유도 없이 항명도 없이 입만 껌벅거리며
魚眼이 벙벙한 채 이쪽에서 저쪽까지 쉴새없다.
몰려다니는 송사리나 혼자 뒷짐진 붕어나
일년치 출퇴근을 하루만에 해치우고 있다.
(열린시학, 2004년 가을호)
가오리 날아오르다
장옥관
경주 남산 달밤에 가오리들이 날아다닌다.
아닌 밤중에 웬 가오리라니
뒤틀리고 꼬여 자라는 것이 남산 소나무들이어서
그 나무들 무릎뼈 펴서 둥싯, 만월이다.
그럴 즈음은 잡티하나 없는 고요의 대낮이 되어서는 꽃, 새, 바위의
내부가 훤히 다 들여다보이고 당신은 고요히 자신의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때 귀 먹먹하고 숨 갑갑하다면 남산 일대가
바다로 바뀐 탓일 게다.
항아리에 차오르는 달빛이 봉우리까지 담겨들면
산꼭대기에 납작 엎드려 있던 삼층석탑 옥개석이 주욱, 지느러미 펼치면서
저런, 저런 소리치며 등짝 검은 가오리 솟구친다.
무겁게 어둠눌러 덮은 오랜 자국이 저 희다흰 배때기여서
그 빛은 참 아뜩한 기쁨이 아닐 수 없겠다.
달밤에 천 마리 가오리들이 날아다닌다.
골짜기마다 코 떨어지고 목 사라진 돌부처
앉음새 고쳐 않은 몸에
키다리소나무 같은 굵은 팔뚝이 툭, 툭 불거진다,
2004년 제15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작
아내의 꽃
김경진
꽃들은 얼굴을 마주볼 때 아름답다
술패랭이꽃이 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아내의 얼굴에 핀 기미꽃을 본다
햇볕의 직사포를 피하기 위해
푹 눌러쓴 모자에도 아랑곳없이
자꾸 얼굴에 번져가는 아내의 꽃,
사시사철 햇볕이 없을 수 없듯 피할 수 없이
아내의 얼굴엔 피어난 꽃이 늘어간다
아내는 몸 꼭대기에 꽃밭을 이고 다니는 것이다
기미꽃, 죽은깨꽃, 주름꽃
다양한 아내의 꽃밭에서 그래도 볼 위에
살짝 얹어진 웃음꽃이 가끔씩 위안으로 피어난다
술패랭이꽃들이 몸을 부비는 산책로를 걸으며
나는 아내의 손바닥에 글씨를 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항상 내 곁에 있다고
시집 <사랑은 낮은 곳에서 운다> 2004 문학의전당
여,라는 말
나희덕
잊혀진 것들은 모두 여가 되었다
망각의 물결 속으로 잠겼다
스르르 다시 드러나는 바위, 사람들은
그것을 섬이라 할 수 없어 여,라 불렀다
울여, 새여, 대천어멈여, 시린여, 검은여......
이 이름들에는 여를 오래 휘돌며 지니간
파도의 울음 같은 게 스며 있다
물에 영영 잠겨버렸을지도 모를 기억을
햇빛에 널어말리는 동안
사람들은 그 얼굴에 이름을 붙여주려 하지만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바위,
썰물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그 바위를 향해서도 여,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여가 드러난 것은
썰물 때가 되어서만은 아니다
며칠 전부터 물에 잠긴 여 주변을 낮게 맴돌며
날개를 퍼덕이던 새들 때문이다
그 젖은 날개에서 여, 라는 소리가 들렸다
시집<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 2004
詩
정 일 근
통도사 서운암 대안 스님 새벽마다 된장 장독 간장 장독 닦는다. 정성이 맛을 만든다고 한 말씀 건네자 스님 정색하신다. 아닙니다. 장은 사람이 만들지만 맛은 자연이 만들지요. 그 말씀 詩같아 받아 적는데 스님 더더욱 정색하신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건 처음부터 다 있는 것이지요. 맛도 그렇고 詩도 그렇지요. 처음부터 있는 것을 우리가 찾아 쓰는 것이지요.
<현대시학 2004 9월호>
가족사진 - 조성식 2005-05-20 15:06:38
이정록
가족사진
조성식
집에 들어서면 대문 옆에 헛간이 서고처럼 서 있는데 처마 끝에 도서대여목록 카드처럼 여섯 자루의 호미가 꽂혀 있다. 아버지 호미는 장시간 책을 반납하지 않은 책처럼 한번 들고 나가면 며칠씩 밤을 지새고 들어온다. 산비탈을 다듬는지 자갈밭을 일구는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자루만 조금 길다면 허리 한번 구부려 본 적 없는 삽에 가까운 호미. 그 옆에 어머니 호미는 가장 많이 빌려보는 연애 소설처럼 표지까지 닳고닳아 테이프 여러 번 붙인 책처럼 거울 같이 빛나는 손잡이에 밥주걱의 둥근 날을 가진 넉넉한 호미. 땅을 파는 일보다 아버지가 파 놓은 흙을 다시 훑어보는 돋보기 알 같은 밝은 눈의 호미. 나란히 서 있는 아내와 내 호미는 주말이나 가끔 들고 나가는 장식용 백과사전. 철물점 쇳내도 아직 가시지 않은 두 자루의 쇳덩어리. 제대로 땅 한번 파지 못하고 마늘이나 고구마 살점만 물어뜯는 날선 칼날. 그 옆에 장난처럼 걸려 있는 아이들의 호미가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밭에 나가실 때 말동무로 따라 나서는 동화책같이 착한 호미가 한집에 산다
서문
이덕규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녁,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올린다.
화성에서
이덕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란 시집의 서문. 문학동네 2003
선어대 갈대밭
안상학
갈대가 한사코 동으로 누워 있다
겨우내 서풍이 불었다는 증거다
아니다 저건
동으로 가는 바람더러
같이 가자고 같이 가자고
갈대가 머리 풀고 매달린 상처다
아니다 저건
바람이 한사코 같이 가자고 손목을 끌어도
갈대가 제 뿌리 놓지 못한 채
뿌리치고 뿌리친 몸부림이다
모질게도
입춘 바람 다시 불어
누운 갈대를 더 누이고 있다
아니다 저건
갈대의 등을 다독이며 떠나가는 바람이다
아니다 저건
어여 가라고 어여 가라고
갈대가 바람의 등을 떠미는 거다
『사람의 문학』2004년 여름호
선어대 갈대밭
안상학
갈대가 한사코 동으로 누워 있다
겨우내 서풍이 불었다는 증거다
아니다 저건
동으로 가는 바람더러
같이 가자고 같이 가자고
갈대가 머리 풀고 매달린 상처다
아니다 저건
바람이 한사코 같이 가자고 손목을 끌어도
갈대가 제 뿌리 놓지 못한 채
뿌리치고 뿌리친 몸부림이다
모질게도
입춘 바람 다시 불어
누운 갈대를 더 누이고 있다
아니다 저건
갈대의 등을 다독이며 떠나가는 바람이다
아니다 저건
어여 가라고 어여 가라고
갈대가 바람의 등을 떠미는 거다
『사람의 문학』2004년 여름호
칼과 어머니
이덕규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칼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 칼을 가장 능숙하게 잘 쓰는 사람, 자르고 썰고 족닥이고 생선대가리를 아무 생각없이 뎅겅뎅겅 날려 칼집을 내고 저녁상을 차리는 어머니
한밤중에 물 먹으러 부엌에 나갔다가 움푹 파인 도마 위에 파랗게 실눈을 뜨고 누워 있는 식칼을 보고 들어와, 반월도半月刀처럼 웅크리고 칼잠 자는 어머니를 반듯하게 고쳐주면 날을 세우듯 다시 모로 눕는 어머니
자는 척 늘 깨어 있는......, 이제는 당신 마음을 다스리던 인내忍耐의 사원 그 시퍼렇게 빛나는 천근 칼날 지붕아래에서도 평온한 어머니, 칼을 들었을 때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칼끝이 오직 자식을 향해 열려 있는
도마 위의 그 날렵한 칼솜씨를 보면 무인가문의 후손이 확실한 어머니, 그러나 칼의 볼모로 잡힌 이래 집 밖으로 칼을 내돌리지 못하는 몰락한 칼잡이의 딸, 쓰ㅡ윽, 나도 모르게 감쪽같이 내 가슴을 가르고 들어온 날선 비수匕首 한 자루
시작 (2004. 여름호)
감자의 몸 - 길상호
감자를 깍다 보면 칼이 비켜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과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하지夏至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가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댈 씨눈이
옛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2004 문학세계사
첫댓글 있잖아요....ㅎ/이 시들을 한글기에 옮겨 복사해두고 보세요. 저도 가끔씩은 시집도 사지만 모아둔 복사본만큼 애독하지 못해요, /시집에서 좋은시 고르기가 힘들거든요/ 시인들 먹고 살라고 시집을 많이 팔아줘야 하는데..../ 인터넷에서 좋은시 그르기가 더 쉽거든요ㅛ...ㅎ
감사합니다. 사랑의 채찍으로 여기고 컴 퇴원하는대로 꼭 꼭 씹어 삼키겠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