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
(사 9:2-7)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연약한 아기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유난히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탄의 즐거움을 누려야 할 시민들이 겨울밤마다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때로는 험한 말도 해야 합니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미움은 평화를 깨뜨리는 폭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권력자를 권좌에서 내쫓아 모든 시민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누구를 미워해 본적도 없는 선량한 시민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우리나라의 미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혼란과 무질서를 잠재우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진통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끝나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더욱 단단해지고, 시민의식은 높아져서 꽃을 피우리라 확신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가 간절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이후 국가 간의 전쟁은 없었습니다. 중동에서 소규모 분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전쟁이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3년이 되어갑니다. 이스라엘-가자 전쟁은 주변 나라로 확대되는 기미가 보입니다. 도시는 파괴되고,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습니다. 협상도 중재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전쟁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전쟁을 끝내는 것보다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생명이 희생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총을 들지 않은 어린이, 여성, 노인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생명들의 울부짖음, 신음, 고통의 외침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이기고 지는 것만 계산합니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희생 정도로 생각합니다. 45년 전 광주 민주화 운동 때 계엄군 내에서는 2, 300만 명쯤 희생되어도 괜찮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하는데 그만한 희생은 감수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민 몇 사람, 국가기관 몇 군데 정도는 희생하고, 파괴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주장을 하든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범죄입니다. 전쟁이든 쿠데타든 폭력이든, 그 어떤 것도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불법행위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전쟁은 이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폭력입니다. 그런데 무기로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더 인간을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전쟁이 인간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 믿음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는 이유도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살길을 찾습니다. 자기를 지키는 방법은 군대를 늘리고, 군사력을 강화하고, 엄청난 무기들을 개발하고 보유하는 것입니다. 무기를 쌓아두고, 군사 훈련을 하면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제 우리의 평화는 우리가 지킨다.’ 사람들은 핵무기로 무장하고, 엄청난 폭탄을 쌓아놓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니 평화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거짓 평화입니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멸망으로 가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것을 전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범죄와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보통 시민들의 삶도 전쟁입니다. 출근 전쟁부터 입시전쟁도 있고, 취업 전쟁도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표현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전쟁’이란 표현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전쟁의 참상을 겪었으면서도 그 아픔과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전쟁은 결코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전쟁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합니다. 신뢰를 깨뜨리고, 공정과 정의를 무너뜨립니다. 전쟁은 생존본능을 자극하여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모든 책임을 남 탓으로 돌리는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전쟁의 피해자가 폭력의 가해자로 둔갑합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폭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폭력을 마주할 용기를 낼 때, 전쟁과 폭력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나도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전쟁과 폭력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왔습니다. 그 원인은 한가지입니다. 탐욕과 교만입니다. 이것은 이기심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개인의 이기심은 작지만 이것이 모여 집단이기심이 되면 전쟁도 일으키고, 쿠데타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계엄사태로 어리석은 권력자의 탐욕과 교만이 집단이기심으로 확대되어 전 국민에게 고통을 준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원했지만, 간절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평화에 속아 미움과 증오,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평화를 갈망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원한다고 평화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내적, 외적 폭력부터 제거해야 합니다. 전쟁과 폭력, 차별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미움과 증오도 함께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평화에 대한 희망을 주시려고 아기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말씀하십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5절) 전쟁이 끝난다,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아기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어떻게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요? 전쟁은 ‘힘’이 승리하는 게임입니다. 무력(武力)입니다. 그러나 아기는 힘이 없는 무력(無力)입니다, 보잘것없고, 약하고, 작습니다. 보잘것없는 아기가 힘센 군대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을 때 간디는 비폭력저항을 주장하였습니다. 영국 군대가 무기로 억압할 때 비폭력으로 맞선 것입니다. 비폭력은 무기를 이깁니다. 무기가 생명을 해치고 정복할 것처럼 보이지만 최후의 승리는 비폭력입니다.
각 나라가 무기 경쟁을 합니다. 엄청난 무기를 가졌지만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무기는 상대를 해치는 수단이지만 자신을 해치는 수단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폭력은 상대도, 자신도 해치지 않습니다. 비폭력의 힘은 어디에서 올까요? 평화의 왕이 통치방법을 이야기합니다. 7절에 보면 ‘정의와 공의’로 그 나라를 보존할 것이라고 합니다. 평화는 힘의 균형으로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와 공의’로 통치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정의와 공의’는 정치용어가 아니라, 신적 권위의 통치,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법을 말합니다. 완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인간의 생각이라면 하나님께서 ‘힘’을 가지고 세상을 바로잡아주시기를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 평화, 거짓 정의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 없는 아기’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의심하고, 비폭력으로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가끔 그런 공상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세상의 악한 것을 불살라버리고 평화롭고 사랑 넘치는 그런 세상이 오면 좋겠다. 하나님은 충분히 그런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대로 심판하신다면 나도 안전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꺠닫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힘과 능력이 없어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돌이켜 구원 받기를 원하셔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불의와 부정, 불공정은 사라져야 합니다. 악한 것을 비판해야 합니다. 그 악이 사라진다고 세상이 선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을 비판하면서 내 안의 폭력성은 남겨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연약한 아기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 아기를 우리 마음속에 모시고 보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교만과 탐욕, 불신과 미움을 버리고 완전한 평화를 소망해야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방법은 세상에서 실패하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방법이 옳다고 믿고 따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과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으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개입하는 방법은 직접 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개입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역사에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평화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가 있듯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