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걸리 공골계곡을 다녀와서
대룡산을 넘으려면 느랏재 고개를 넘어야 한다.
대룡산 899미터로 예전에는 거두리 방앗골을 지나 감툰고개를 넘어 종일 걸어서 넘었던 기억이 난다.
시집간 딸을 보러 두어번 대룡산을 넘던 어머님이 생각난다. 교차해 시내로 가던 산골 청년들은 어깨에 화전곡식을 지고
감투니 고개를 넘어 말탕개미로 내려와 곡식을 팔고, 돌아 험한 고개를 넘어 집에와서 조밥을 들었다고 한다.
요즘은 고성 잼버리 국제 행사 때 도로를 닦아 30분이면 간다. 느랏재 고개를 넘어 가면 상걸리 上傑里 학교가 반긴다. 물놀이동네도 갈 수 있다. 여기서 다시 홍천, 인제로 가기위해 가락재 고개를 넘는다. 넘기 전 작은 마을이 상걸리 공골,잣밭골, 토당말 마을이 있다.
공골 깊숙이 이방인이 삼십 여년 전 홀로 들어와 계곡과 함께 살아간다. 平野 이영수 시인 ㅡ, 공골에 식당이 있다. 산골쉼터ㅡ.
산나물에 뽀글장으로 순박하게 끓여낸 음식이 MSG로 범벅을 한 도시음식과 다르게 산뜻하다. 칼칼하다. 구수하다.
德田인 나와 인맥이 흘러 애착심 또한 크다. 우리 엄니를 닮은 첫째 누님( 9남매 중)이 南陽홍씨네 가문으로 시집간 곳이다.
누님 큰 아들의 아들이니 손주가 운영한다. 큰 아들이 낳은 두명의 아들내외가 고향을 지키며 식당을 한다.
두부를 만들고 조카며느님이 옥수수로 술을 빚어 한 때는 백화점에도 납품을 할 정도였다.. 맑은 청산 계곡물로 빚어 먹을 땐 무한정 마시는데, 막상 일어나면 팽 -------그래서 혹자는 앉을뱅이 술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 뻘인 나는 靑山을 문인들과 자주 찾는다. 아무리 더워도 이곳은 별천지라 강원대 교수들 단골이란다.
엊그제도 글쟁이 다섯이 점심을 먹고 한잔 술에 취해 청산을 노래했다. 심히 빠른 세월을 원망하기도 했다. 12월 초---
식당은 점심만 운영한다. 맛있게 먹고 平野 이영수님이 글을 쓰는 별장으로 향했다. 어찌나 길이 험한지 애마가 멈칫멈칫한다.
배가 아픈 모양이다. 계곡 깊숙이 아니 끝까지 간다. 지난번 폭설때도 완전 발이 묶였다는 곳엔 온천처럼 퐁퐁 인정이 샘솟는다.
시인 평야는 언제나 계곡을 자랑한다. 번쩍이는 게 다 금이라는 둥, 희한한 돌 두어개를 주워놓고 운석이라고 난리다.ㅎㅎ
워낙 달변인데 과대포장해 천하를 몇번씩 들었다 놓았다 하신다. 군대 담 넘어 입대한 얘기며, 대통령 김영삼에게 북한에 쌀을 퍼주고 뺨을 맞고 왔다고 경천동지하게 호령했다는 둥 도저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무용담이지만, 언제나 마음은 온천이었다.
그날도 쌓인 고갯길을 지나 도착하였더니 계곡사이 폭포는 변함없이 반겼다. 10년 된 돌배酒를 왕창 꺼내 댓병 하나씩
안긴다. 해묵어 술이 아니라 완전 약술이다. 시조 권위자인 수암 이근구님과 德田은 감사의 글을 한 수씩 올렸다.
* 공골 산막에서/ 수암 이근구 시조시인
산 첩첩 작은 폭포
벽계수가 졸졸졸
멧새들도 마실 갔나
홀로우는 실개천
시인만
홀로 앉아서
하이얀 시를 쓴다.
*돌배 술/德田 이응철 수필가 시조시인
靑山을 찾아가니
계곡에 은둔 시인
반기는 눈길마다.
촉촉한 인정 샘물
돌배주
명약이 되어
문인가슴 적시네.
日日是好日이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