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6:1~14)
분별력, 통찰력!
유독히 현대 크리스천에게 결핍한 요소.
분별력과 통찰력은 공동체를 향한 시신이 강할 때
더욱 필요함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벽 재건 사업이라는
공동체적인 과업을 하는 느헤미아에게
그런 사업을 달갑게 보지 않는 세력이 미혹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느헤미아는 분별력과 통찰력으로 정확히 바라보고
판단하며 하나님 안에서 지혜와 용기로 극복해 나가고 있다.
오늘 아침 시사프로그램에서
’허경영‘의 황당한 범죄를 목격했다.
’불로유‘라는 먹으면 늙지 않거나 병을 고치는 우유를
만들어 장사하게 하고, 판매하는 내용이다.
특히 우유가 절대 부패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미 우유가 상했는데도 고집스럽게 먹다가 배탈이 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어떤 불치병 환자는 정상적인 치료를 거부하고
허경영식 치료를 받다가 숨졌다.
경찰 조사가 들어가자
선을 긋고 자신이 강요한 적이 없다는 논리를 피해 간다.
허경영은 특유의 뻔뻔함과 유머 감각으로 무시 못할 팬덤을 확보하고 있다.
극성팬들은 요즘 말로 ’그루밍, 가스라이팅‘을 철저하게 당한 상태이다.
이들을 어찌하나?
하나님은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여러 기제를 주셨다.
이성과 지성과 감성, 이 모두를 균형 있게 적절히 사용하고
공동체 안에서의 조언도 잘 들어야 한다.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전문적 소견도 들어야 한다.
이 모든 기제를 통해서 종합적으로는,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좋은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런데 악마는 이러한 하나님이 주신 기제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그런 하나님의 기제를 마치 ‘악한 것’이나 ‘금시 시’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따르게 한다.
정상적, 상식적으로 자신의 방향을 하나님이 주신 여러 기제로
점검했더라면, 정상인으로서는 유치하고 황당하게 여겨지는
상황까지는 치닫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런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은 정말 무섭다.
역사적으로 거기에 현혹되어 수많은 사람이 스스로 자살하는
참혹한 사건도 벌어지는 일이 있으니 말이다.
최근에는 비리를 저지른 목사가 실질적으로는 쫓겨나는 것인데
퇴직의 모양새로 나가면서
전별금 9억원을 착복하기도 했지만
수많은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에서는 그것을 막지 못했다.
그럼, 우리 크리스천들은 안전한가?
절대 그렇지 않다.
최근에 읽은 ‘스쿠르테이프의 편지’에 경각심을 일으키는
몇 가지 구절이 나온다.
악마가 경계하는 것은 진정성 있고 진실한 고민과 사색이다.
또한 논리적인 접근이다.
진정성, 진실, 논리,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인격 요소(지, 정, 의)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자 원리이므로
정상적으로만 사용하면
하나님의 진리에 다가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와 기독교는
마치 영적인 기적이 능사인 것처럼,
또는 감각적인 트렌드를 이용하는 대신,
지식이나 의지, 이성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노력으로만 치부하여
다소 거부하는 듯한 이미지를 부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것이 심한 교회들은
이미 어느 정도의 그루밍과 가스라이팅 효과가 잠입해 있어
교회 일을 빙자하여
세속적 교회 성장과 목회자의 욕망을 위해 헌신하게 만든다.
어제 책에서 읽은 구절 중에서
‘그네들은 자기들과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외부인들은
그야말로 어리석고 우스운 사람들일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억측을 가지고 있다.’
‘환자(성도)가 불신자들의 말을 우스워하는 태도로 받아들이도록
교육하라구’
악마가 성도들을 악에 빠뜨리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믿음의 교제를 하다 보면
나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은혜스럽게 오간 말 때문에 마치 내가 그런 수준에 올라온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사실 현실에서는 거의 변화가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하도 ‘세상, 세상’하다보면
세상을 너무 과도하게 죄악시하여 역기능이 발생하기도 한다.
사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영혼을 대상으로 ‘일’하시고 계시다.
교회 밖에 있는 영혼들에게는 악을 선택한 자들이기에
절대 건드리지 않고 미워만 하실까?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려고
노심초사 더 열심히 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서사는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믿지 않는,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는 세상에서는 초라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영혼, 죄인에게도 하나님의 서사가 끊임없이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직은 복음의 매뉴얼을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어떤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도전 중에서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의 원리를 말하게 되어 있다.
성도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원리를 말할 때 그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 복음을 시인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전부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비록 그 근본과 본질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다 해도)
타자를 향해서 샘솟는 긍휼의 마음, 선량한 행동에 대한 본능,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날카롭게 분석하는 옳은 말들.
과학의 올바른 접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당연히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믿지 않는 자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죄악의 발로이다라는 의식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경계해야 할 일이다.
물론 세상에서는(사실은 교회 안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선한 것을
이용하는 일들이 빈번하다.
그래서 분별력이 필요하다.
분별력은 믿지 않는 타자를 볼 때에도 필요하지만
우리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바라볼 때에도 필요하다.
항법장치 중에서 ‘자이로’라는 것이 있다.
기계의 일정한 형태와 모양이 항상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구조의 기울기가 변화되는 차이를 측정해서
내가 목표한 방향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알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정기적으로 그 오차를 측정하여 ‘보정’함으로써 올바른 목적지에 갈 수 있게
하는 용도로 쓰인다.
우리의 영적 상태도 이렇게 항상 점검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에서 아주 정확히 가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과 언행을 살펴서 오차를 보정하지 않으면
처음에는 미세한 차이였던 것이 엄청나게 벗어나
아주 딴 길로 가게 될 수 있다.
마치 허경영에게 그루밍 당한 사람처럼 말이다.
나는 지금의 우리 교회에게 상대적으로 결핍한 것이
분별력과 통찰력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것이 필요한 것인 현실은 항상 치열하기 때문이다.
악한 동기를 가진 존재들도
그럴듯한 선한 동기를 앞에 내세우고
거기에 그루밍 당한 이들이 추종하면 거대한 힘이 된다.
한 가지 사안으로 교회가 양분되고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
갈팡질팡한다.
분명 답은 있을텐데.....
솔로몬 앞에 선 두 여인이 있고
아이는 하나가 있는데
두 여인 모두 그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주장한다.
한 아이의 어머니는 분명 한 명인 것은 분명하다.
어떤 이는 A여인이 거짓말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B여인이 거짓말 한다고 아우성이다.
어떤 이는 한 가지 선택이 나머지 사람을 자극하므로
조용히 하라고 한다.
어떤 이는 그저 A, B 여인의 분쟁이 시끄럽고 스트레스 받게 만드니
그 상황 자체가 싫증이 나서 회피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아예 관심이 없다.
자신의 일도 처리하기 바쁘고 힘겨운데 무슨 남의 일까지... 라는 심리일 것이다.
나와 교회는 지금 그 여러 양상의 사람들 중에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모든 양상이 다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거짓된 여인을 옹호하는 성도,
다른 이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중용의 태도를 취하는 성도,
분쟁의 소란함을 혐오하는 태도,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들이 적절한가?
큰 차원에서 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수용해야 하는 것이
밑바닥에 깔려 있겠지만,
이 상황에만 집중해서 바라본다면,
가장 필요한 심성은,
두 여인 중에서 진짜 엄마인 한 여인의 고통에 눈과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기술적으로는, 하나님께 분별력과 통찰력을 주셔서
옳은 판단과 해결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해야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자유를 부과해 주셨다.(얼마전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응용하여)
그렇지만 고통 받는 여인을 위해서
우리는 누구의 신경도 건드리지 않을 중용의 자유,
분쟁의 소란함을 회피할 자유,
내 문제 해결을 우선시할 자유를 포기하고
진짜 엄마가 자기 아이를 찾게 해 주기 위해
비난과 협박 등의 공포와 어려움을 택할 자유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일하신다. 실제 그 상황에서도 일하셨다.
하나님은 다행히 당시 기준으로 온전했던 솔로몬에게
분별력과 통찰력을 주셔서
지혜의 질문을 통해 진짜 엄마를 구분할 수 있게 하셨다.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다.
양분화된 양태에서 갈필을 잡지 못한다.
다수가 피로감으로 강제된 중용을 택한다.
중용이 답은 아니다.
하나님께 올바른 길을 알고 선택할 수 있는
분별력과 통찰력을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할 때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으로 저 자신을 항상 바라보게 해 주소서.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분별력과 통찰력을 갖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