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199 (5권 9. 김홍신. 펌글)
은은한 음악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도모코는 옷을 벗었다.
대형 커튼을 젖히자 침대가 보였고 침대 주위엔 꽃밭처럼 꾸며져 있었다.
도모코는 나신 위에 수건을 걸쳤다.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 끝이 뜨거웠다.
그녀의 이글거리며 타는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나는 옷을 벗었다.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
밤은 깊었다.
우리의 육체도 밤처럼 그렇게 깊어만 갔다.
매끄러운 율동이었고 난해한 욕정이었다.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마구 끌어당겼고 나는 그녀에게 깊숙이 끌려 들어갔다.
마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깨어 있었다.
그것은 탐험이었다.
신비스런 동굴이었고 그 안에 묻혀 있는 값진 것들을 찾느라고 나는 정신을 팔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뜨거웠다.
어디서 밀려오는 뜨거운 음악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를 뜨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우리는 대낯처럼 서로를 확인하려 들었다.
아침이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서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비칠 무렵에야 우리는 눈을 떴다.
커튼을 젖히자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다는 평온했지만 내 가슴은 평온하지 않았다.
그녀는 애잔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있었다.
어젯밤부터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야기미에코와 병규가 기다리고 있었다.
"밤배를 타야 하니까 구경이나 해두지요. 다카사키야미하고 수족관이 볼 만해요."
야기미에코가 차문을 열어 주었다.
나와 도모코가 뒷자리에 탔고 병규와 야기미에코가 앞자리를 잡았다.
"형님,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실컷 잤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길래 무슨 일 났다 했어요. 야기미에코는 방에다 처넣고 나오지 말라며 밖에서 잠가 버렸어요."
"그건 병규씨와 장총찬씨를 보호해 드리려고 그런 거예요."
야기미에코가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 꼴이었다."
내 말에 병규 녀석만 웃었다.
야기미에코의 눈빛이 백미러로 의미있게 빛나고 있었다.
수족관 마당에 차를 세우고 이쳔여 마리의 각종 물고기가 전시된 수족관으로 들어섰다.
시간 맞춰 먹이 주는 장면도 보았고 진열된 물고기들의 쇼도 보았다.
배구시합하는 물고기나 축구나 탁구하는 모습의 물고기들을 보며 돈 벌 만큼 만들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센티미터 두께의 유리벽 속에서 대이동을 하는 온갖 물고기들과,
표본어항에 들어 있는 수많은 물고기들은 일본의 경제력을 과시 하는 것 같았다.
수족관을 나와 육교를 건너자 원숭이로 유명한 다카사키야미 공원이 시작되었다.
작은 원숭이 새끼들이 입구까지 내려와 있었다.
"현재 천육백스물일곱 마리가 있는데 그것도 세 마리씩 두목 밑에 세 파로 가라져 치열한 싸움을 하루에도 세 차례씩 합니다.
먹이를 일정한 시간에 공급하는 본부를 점령하기 위해서죠. 보시면 알겠지만 두목과 간부급들의 위세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어떤 원숭이든지 눈을 똑바로 보지 마세요. 달려드니까요. 중요한 물건은 조심하고요. 빼가거나 채가니까요."
야기미에코가 주의부터 주었다.
도모코는 내 팔짱을 자연스럽게 끼고 걸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들의 정은 참으로 깊숙하게 통하고 있었다.
원숭이 본부엔 수백 마리의 원숭이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망을 보는 원숭이와 새끼들을 감시하는 원숭이들이 나누어져 있었고 전투력을 가진 수컷들이 주위를 지키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저게 바로 두목입니다."
야기미에코가 가리킨 두목 원숭이는 아주 늙었지만 생김새에 기품이 넘쳤다.
어슬렁거리며 자리를 옮기면 모든 원숭이가 길을 비켜 주었고 그의 주변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싸움을 하고 있는 원숭이들의 날렵한 모습과 유연한 움직임을 눈여겨 보았다.
"여기 오면 인생을 배운대요."
도모코의 말을 받아 야기미에코가 설명했다.
"또 여기서 작전을 배운대요. 싸움도 치열하면서 사상자 없이 퇴각하고,
배가 부르면 다른 파에게 양보하는 미덕까지도요. 어쩌면 치졸한 사람들보다 낫다는 생각도 든대요."
"나도 지금 그런 생각을 했소. 나도 여기서 뭔가를 배우고 있는 중이오."
나는 수백 마리가 엉키면서도 질서와 조화가 있는 원숭이들과,
두목의 몸놀림이나 싸움질 하는 새끼들의 율동에서 무엇인지 모르지만 배우는 게 있었다.
아마 그것은 전술일 수도 있었고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주먹일 수도 있었다.
"일곱 시 이십 분에 떠납니다. 언니는 더 잡고 싶대요. 그러나 나중을 기약하기로 할 거예요."
"나도 꼭 만나겠어요. 난 살아 있을 거요. 이젠 당신들의 충고를 듣기로 했어요.
여길 떠나는 일만은. 그리고 나가시마 잡는 일만은."
"무서운 분예요. 아무튼 뒷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마음 놓고 떠나세요.
여섯 시 사십 분부터 승선하는데 장총찬씨는 일곱 시 십 분쯤에 타세요.
병규씨는 미리 타시고요. 저녁 식사는 배에서 하세요. 그러는 편이 나을 거예요.
페리호의 구조와 비상계단과 구명대 사용법은 이따가 미리 알려드릴 게요.
언니가 직접 승선하고 싶지만 눈치 채게 될지 몰라서 다른 방법으로 자리를 마련하겠대요."
"고마워요. 내 고집을 꺾겠어요."
"그러시는 게 좋아요. 여긴 한국 여자들도 별로 없는 곳이고 하니까요."
나를 원숭이 공원으로 데리고 온 것도 바로 그런 점을 노린 것 같았다.
원숭이들의 혈전을 구경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무모한 대전보다는 한발쯤 뒤로 빼는 유연성이었다.
원숭이들은 결코 무모한 고집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한발을 빼내어 도망치듯 하다가 갑자기 기습하는 식으로 유연성을 가지고 공격했다.
또 상대가 아무리 약하더라도 악착같이 뒤쫓지 않았다.
더군다나 강자에게 덤빌 때는 정면 공격보다는 측면에서 공격하거나 도주로를 확인한 뒤에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지금 벳푸 바닥에서 하카다의 야쿠자 두목 나가시마와 정면으로 맞선다는 건 내 자존심 문제일 뿐 승산이 희박한 일이었다.
그들은 집단이며 총으로 무장하여 무차별 쏘아댈 계획이었고 나는 표창과 내 주먹 실력만 믿고 있던 터였다.
도모코가 제안한 한발 물러서듯 페리호를 타 버리면 보다 쉽게 승부를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아무리 버텨 보았자 나가시마와 정면으로 만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페리호로 뛰어들면 나가시마와 맞상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
"나를 왜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 이제 알았어요."
내 말에 야기미에코가 아주 환하게 웃었다.
도모코는 힘주어 팔짱을 끼기만 했다.
아쉬운 작별이었다.
도모코가 문간에 서서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었다.
병규가 고개를 돌린 채 먼 산을 바라보았다.
"잊지 마세요."
야기미에코가 몇 번이나 다짐을 했다.
"안 잊어요."
나와 병규는 일부러 큰길로 해서 수족관 쪽으로 갔다.
그 앞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우리는 세후 호텔이 바라다보이는 중심가에 내려 빠찡꼬 클럽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순전히 야기미에코가 일러준 작전이었다.
병규와 나는 두 개의 기계에 앉아 정신 없이 쇠구슬을 챙겼다.
오색 쇠구슬이 큰 상자로 가득 모여질 무렵에 병규가 시계를 가리켰다.
"나가자."
우리는 환전을 한 뒤에 계산이 틀리다는 시비로 구슬로 유리창을 깨어 버리는 실력을 보여 주고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잡았다.
그만하면 충분히 소문이 나리라는 계산이었다.
나가시마 일당이 우리의 잠적에 혈안이 되어 있고 흑장미가 소문을 자연스럽게 흘려 버릴 것을 알았다.
병규는 먼저 떠나면서 모뚱이를 돌아 지하도 근처에서 택시를 타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이백여 미터쯤 되는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 택시를 잡았다.
페리호가 정박해있는 부두에 도착한 시간은 내 계산보다 빠른 일곱 시 오 분이었다.
나는 검표를 한 뒤에 뛰어나갔다.
병규 녀석이 초조한지 몸을 드러낸 채 손을 흔들었다.
나는 숨듯이 페리호로 뛰어 들어갔다.
우리가 예약한 선실은 선수의 오른쪽 편 복도를 끼고 있었다.
가운데 이등실과 앞쪽의 특등실 사이엔 전자오락실과 각종 판매대가 늘어서 있었다.
"신호가 와요."
나가시마와 그의 일당 여섯 명이 승선한다는 신호가 왔다.
어둠 속으로 약정한 신호가 섬광처럼 깜박거리고 있었다.
병규는 선미 쪽으로 다가가 플래시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계단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급하게 올라오는 녀석들을 살펴 보았다.
성큼성큼 앞서 올라오는 녀석은 짧은 머리에 키가 별로 크지 않은 중년 사내였다.
"맞아요. 나가시마예요."
병규가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합해서 일곱 명이다. 넌 선실을 확인해 두고 목욕탕의 위치를 알아놔라."
병규가 잽싸게 뛰어나갔다.
나는 머리칼을 쥐고 이를 앙다물었다.
머리가 길어서 대번에 눈에 뜨일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선실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가슴이 부르르 떨렸다.
'하나님, 당신은 내 편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