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 배창환
고등학교 다닐 때였지
노가다 도목수 아버지 따라
서문시장 3지구 부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할매술집에 갔지
담벼락에 광목을 치고 나무 의자 몇 개 놓은 선술집
바로 그곳이었지 노가다들이 떼서리로 와서 한잔 걸치고 가는 곳
대광주리 삶은 돼지다리에선 하얀 김이 설설 피어올랐고
나는 아버지가 시켜주신 비곗살 달콤한 돼지고기를 씹었지
벌건 국물에 고기 띄운 국밥이 아닌, 살코기로 수북이 한 접시를(!)
꺽꺽 목이 맥히지도 않고
아버지가 단번에 꿀떡꿀떡 넘기시던 막걸리처럼
맥히지도 않고, 이게 웬 떡이냐 잘도 씹었지
뱃속에서도 퍼뜩 넘기라고 목구녕으로 손가락이 넘어왔었지
식구들 다 데리고 올 수 없어서
공부하는 놈이라도 한번 실컷 먹인다고
누이 형제들 다 놔두고 나 혼자만 살짝 불러 먹이셨지
얼른 얼른 식기 전에 많이 묵어라시며
나는 많이 묵었으니까 니나 묵어라시며
스물여섯에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남몰래 울음 삼켰지
돼지고기 한 접시 놓고 허겁지겁 먹어대던 그날
난생 처음 아버지와의 그 비밀 잔치 때문에
왜 하필이면 그날 그 일이 떠올랐는지도 몰라도
지금도 서문시장 지나기만 하면 그 때 그 선술집에 가서
아버지와 돼지고기 한번 실컷 먹고 싶어 눈물이 나지
그래서 요즘도 돼지고기 한 접시 시켜 놓고 울고 싶어지지
- 시선집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작은숲, 2012
* 학생들이 산책하는 저녁 시간이면, 으레 운동장 구석의 평행봉에 올라 보란 듯이 몸풀기를 시작하는 선생님이 있었다. 뭐 그리 열심히 운동하시냐고 물었더니 학생들을 운동권으로 만들기 위해서란다. 그때의 대답이 재미있게 여겨졌는지 어쩌다 생각나곤 했다. 배창환 시인도 교육 운동을 오래 했으니 운동권이라고 하겠다. 운동의 방향성을 떠나 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밑바탕 힘이 있다면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운동도 쥐뿔도 없는 거다.
아버지 장례를 준비하면서 접대용 돼지고기 접시가 시인의 눈에 남았다가, 한순간 예전의 기억을 끄집어냈나 보다. 서문시장에서 아버지가 받아 주던 “돼지고기 한 접시”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두 사람만의 “비밀 잔치”에서 그 비밀의 내용은 부자간에 흐르는 ‘정’과 ‘사랑’이다. 그 정과 사랑은 어딘지 모르게 저장되었다가, 서문시장 지나다가 돼지고기 한 접시를 만나서 문득, 살아난다.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시간에 관계없이 지구는 여전히 운동하고 있다. 사랑도 운동이어서 시공간의 벽을 깨고 넘어온다. 시인은 그만, 눈물 한 방울로 짠해지고 만다. 별로 운동성이 없는 내게도 서문시장은 익숙한 장소다. 훗날, 집에 아이들이 국수 먹으러 다니던 시간을 기억하도록 비밀 하나 심어야겠다. (이동훈)
첫댓글 아 이런 아버지가 여기도 또 계시군요 저는 이런 어머니가 계셨었습니다 저는 돼지고기가 아닌 도마도(그 당시는 이렇게 발음했어요)였었죠 토마토
강가에 한명씩 불러 차례대로 먹이시던..
엄마 기일에 도마도 놓고 그때를 그리며 먼산 한번 바라보아야겠습니다 좋은시 올려주심 감사드립니다 이동훈시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