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루포(Lupus)
축일 9월 25일
프랑스 리옹의 주교였던 성 루푸스(또는 루포)는
부르고뉴(Bourgogne)의 왕
지기스문트(Sigismund)의 죽음 이후
그 지방에서 발생한 정치적 격랑으로 인해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았다.
================================
성 바오로(Paul)
성녀 타타(Tatta)
축일 9월 25일
성 바오로(Paulus)와 그의 아내인
성녀 타타(Tatta)는 다마스쿠스(Damascus)에서
결혼한 부부로 그들의 아들들과 함께 로마 당국의
교회에 대한 박해 중에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
성 빈첸시오 스트람비 (vincent strambi)
축일 9월 25일
성 빈첸시오 스트람비는
치비따 벡치아의 어느 약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주 짖궃게 장난치는 아이였지만,
맨발어거나 혹은 남루한 옷을 입은
부랑아를 보면 자기의 오바코트와 신발조차
벗어주는 갸륵한 소년이었다.
그는 교구사제가 될 마음으로 공부했으나,
서품 직전에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영향을 받고
고난회원이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극심하던 부모의 반대를 이기고 마침내
수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수도원 내의
여러 직책을 맡았고, 1781년에 관구장이 되었으며,
또 1801년에는 자신이 극구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체라따와 똘렌띠노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불굴의
노력은 이탈리아 전역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놀라운 쇄신을 불러 일으키는 주교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808년, 그는 나폴레옹의
정책에 반대하여 추방되었으나, 1813년에는
나폴레옹이 심각함으로써 교구로 돌아왔다.
교황 비오 7세 서거시에 그도 역시 사임하였으나,
그의 열렬한 친구이던 레오 12세의 등극과
더불어 그는 교황의 고문으로 활약한 것이다.
이 모든 직책에서도 그는 수도생활의 정신을
조금도 흐트리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복녀 안나 마리아 테지가 예언한
12월 31일에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셨고,
1824년 1월 1일, 79회의 생일날에 귀천하였다.
================================
성 세르지오(Sergius)
축일 9월 25일
러시아의 귀족 가문 출신인
성 세르기우스(또는 세르지오)는
로스토프(Rostov)에서 태어나 바르톨로메우스
(Bartholomae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5세 때에 그는 모스크바 통치자들의 로스토프
침략을 피하여 정처 없이 온 가족이 떠나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모스크바(Moskva) 교외인 라도네즈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1335년 부모와 사별한
세르기우스와 그의 형 스테파누스(Stephanus)는
마코프카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세르기우스란 수도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은수생활을 계속하였으므로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졌다.
이때부터 제자들이 몰려들자 세르기우스는
후에 유명해진 ‘삼위일체 수도원’을 세워
원장이 되었고, 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타타르족의 침략 이후 사라졌던 러시아에
수도 공동체를 재건한 것이다. 그 후 그는
헤르쟈크 강변에서 은수자 생활을 하던 중
모스크바의 총대주교 알렉시스의 부름을
받았으며, 모스크바의 드미트리 돈스코이
왕자는 세르기우스의 권고에 따라 타타르족과
싸워서 러시아를 해방시키게 되었다.
이 승리 이후 그의 명성은 더욱 퍼져나갔고,
러시아 왕가의 협조는 매우 관대하여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짓게 되었다.
1378년 그는 모스크바 총대주교 임명을 끝내
사양했고, 또 1392년에는 자기 수도원의
원장직도 사임한 후 6개월 만에 서거하였다.
성 세르기우스는 1449년에 시성되었으며,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
성 아나카리오(Anacharius)
축일 9월 25일
성 아나카리우스(또는 아나카리오)는
프랑스 오를레앙(Orleans)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젊어서 궁중생활을 하던 중에
세상을 이탈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 오툉(Autun)의 주교
성 시아그리우스(Syagrius)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분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그는 561년에 오세르의 주교로 피선되었는데,
당시 프랑스 국민과 종교계에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주교가 되었다.
그는 573년의 파리 시노드(Synod of Paris)
등을 비롯한 여러 회의에 참석하여 주교권을
강화하고, 고아와 과부 및 노예의 해방을
비롯한 인간의 기본권 회복에 크게
기여하였음은 물론 주일 의무를 부과한
장본인이다. 또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춤추거나 세속 노래를 부르는 등 세속적인
일을 행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또 미사에 오는
신자들의 복장까지도 규정한 인물이다.
그는 또한 신자들의 교회를 위하여 그는
성 아마투스(Amatus)와
성 게르마누스(Germanus)의 전기를 만들어
읽게 하였고, 교구사제나 수도사제를 막론하고
성무일도를 매일 기도하도록 규정하였으며,
각 성당과 수도원에서는 성대한 행렬을 지어
입장토록 하였다. 그의 이러한 개혁안들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전해오는 것이 많이 있다.
오네르(Aunaire)로도 불린다.
================================
성녀 아우렐리아(St.Aurelia)
성녀 네오미시아(St.Neomisia)
축일 9월 25일
성녀 아우렐리아St.Aurelia와
성녀 네오미시아St.Neomisia는 함께
로마 성지를 순례함.
순례중 하느님께서는 천둥, 태풍을 만나게 하시고
그들을 회교도에서 구해주셨다고 합니다.
성녀아우렐리아는 마체라따 근처의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하셨음.
================================
성 알베르토(Albert)
축일 9월 25일
이탈리아 베르첼리(Vercelli)의 주교인
성 알베르투스 히에로솔리미타누스
(Albertus Hierosolymitanus, 또는 알베르토)는
파르마(Parma)의 저명한 가문 출신으로
신학과 법률을 수학한 후, 롬바르디아
모르타라의 성 십자가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1184년 그의 나이 35세 때
보비오(Bobbio)의 주교로, 그 다음에
베르첼리의 주교로서 사목하였다.
그는 외교적인 수완이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교황 클레멘스 3세(Clemens III)와
프레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의 중재자로
선출되기도 했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Innocentius III)에 의해서는 북이탈리아의
사절로 임명되었다. 1187년경
사라센인들이 예루살렘을 재공격할 때,
신자들과 이슬람교 신도들로부터 공경을 받던
성 알베르투스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로
선임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성 알베르투스에게 다가오는 라테라노 공의회
(Council of Laterano)에 공헌하도록
요청하였으나, 그는 결국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
성 체올프리도(Ceolfrid)
축일 9월 25일
영국의 노섬브리아(Northumbria)에서 태어난
성 체올프리두스(Ceolfridus, 또는 체올프리도)는
18세 때 질링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리펀(Ripon)의 발프리두스 수도원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리펀의 수련장으로 일하다가
성 베네딕투스 비스코프(Benedictus Biscop)에
의하여 성 베드로(Petrus)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엄격성은 수도자들로 하여금
심한 반발을 사게 되어 리펀으로 되돌아와야만
하였다.
그는 베네딕투스 비스코프을 수행하여 678년에
로마(Rome)로 갔으며, 베네딕투스가 자로우
(Jarrow)에 성 바오로(Paulus) 수도원을 세울 때
체올프리두스를 그곳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흑사병이 자로우 전역을
휩쓸었을 때 그와 한 젊은 학생만 살아남았다.
690년에 비스코프가 사망할 때 그는 원장이 되어
광활한 수도원을 다스리고, 이 수도원을 학문의
전당으로 발전시켰고, 도서관도 세웠는데,
이곳은 성서를 연구하는 중심지였다.
716년 그는 고령과 질병을 핑계로 은퇴하였다가
프랑스 샹파뉴의 랑그르(Langres)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제자 중에는 성 베다(Beda)가 유명하다.
================================
성 클레오파(Cleophas)
축일 9월 25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발현하셨는데,
성 클레오파(또는 글레오파)는 발현을 목격한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루가 24,18).
어떤 학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었던
다른 마리아의 남편인 클레오파와
동일인물이라고 믿고 있다(요한 19,25).
그리고 아마도 성 야고보(차)의 부친인
알패오와도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
성 프란치스코(Francis)
축일 9월 25일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북부 리구리아(Liguria) 해안의
소도시인 캄포로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에 그는 콘벤투알 수도자 한 분을
우연히 만나 자신의 성소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세스트리 포빈테 수도원에 갔으나
3회원으로 받아 들여졌을 뿐이었다.
더욱 엄격한 생활을 원하던 그는 즉시
이곳을 떠나 카푸친회에 들어갔고,
여기서 프란치스코란 이름으로 서원하였다.
평수사인 그는 주로 병자를 돌보는 일을 하다가
원장의 지시를 받고 탁발을 시작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고통이 뒤따랐다.
어떤 때에는 빵 대신 돌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10년 동안이나 겸손하게 탁발한 결과
그는 뛰어난 성덕을 닦을 수 있었다.
그는 ‘파드레 상토’(Padre Sancto),
즉 성인 신부로 통할만큼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덕을 흠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866년 제노바(Genova) 지방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그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기 자신도 희생자가 되어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1929년에 복자품에 올랐고,
1962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피르미노(Firminus)
축일 9월 25일
성 피르미누스(또는 피르미노)는
에스파냐 나바라(Navarra)의
팜플로나(Pamplona)에서 태어났고,
성 호네스투스(Honestus)로부터 신앙을 배웠으며,
프랑스 툴루즈(Toulouse)의 성 사투르니누스
(Saturninus)의 제자로 성장하여 그곳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프랑스 지방 전역을 돌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 후 그는 아미앵에 정착하여
그곳에 성당을 지었다. 어떤 경로로 순교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는 아미앵에서
순교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또 그렇게
공경을 받고 있다.
================================
성 핀바르(Finbar)
축일 9월 25일
기록상으로 성 핀바르는 아일랜드 북서부
코노트(Connaught)에서 태어나 로칸(Lochan)에서
세례를 받고, 남동부 킬케니(Kilkenny)의
킬마카힐(Kilmacahil)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먼스터(Munster)에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베르(Bairre) 혹은
바르(Barr)인데, 킬마카힐의 어느 수도자가
피온바르(Fionnbharr)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 이름은 ‘흰 머리’라는 뜻이다.
그는 몇몇 수도자들과 함께 로마(Rome) 순례에
올랐는데, 돌아오는 길에 웨일스(Wales) 지방의
성 다윗(David)을 찾아보고 감명을 받았다.
두 번째 로마 순례에서 그는 주교품을 받았다.
기이한 것은 그 당시 교황이 환시를 보고
그에게 주교품을 주어야 한다고 직접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늘로부터
축성된 사람으로 불렸다.
아일랜드로 돌아온 그는 스코틀랜드를 순회하면서
설교하다가, 남부 아일랜드에서 집중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면서, 아이로우(Eiroe) 호수의
어느 작은 섬에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 후 그는 리(Lee) 강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코크(Cork) 시로 발전하였고, 따라서 그는
이 도시의 첫 번째 주교가 되었다.
그의 수도원은 남부 아일랜드에서 유명하게
되었고 수많은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633년경 클로인(Cloyne)에서 운명하였다.
================================
성 헤르만(Herman)
축일 9월 25일
헤르만 콘트락투스(Contractus)로도 불리는 그는
독일 남서부 슈바벤(Schwaben)의 알츠하우젠
(Altshausen)에서 불구자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유기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스위스 보덴(Boden) 호수의
라이헤나우(Reichenau) 섬에 있는 수도원 앞에
버려졌다. 그는 이 수도원에서 거의 모든 삶을
살았다. 20세 때에 서원을 하고 수도자가
되었는데, 그의 아름다운 마음으로 엮어내는
찬미가들은 전 유럽 학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의 대표적인 찬미가는
“구세주의 거룩하신 어머님”
(알마 레뎀토리스 마테르, Alma Redemtoris Mater),
"모후이시며“(살베 레지나, Salve Regina)이다.
그는 1054년 9월 21일 라이헤나우 섬에서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