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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우스갯소리 중에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이 있다. 지난 가을과 겨울 사이 내가 꼭 그랬다. 강연과 공연, 술자리 뒤풀이와 여행이 줄줄이 이어졌다. 여전히 돈 안 되는 일로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짬을 내 3박4일 동안 중국의 황산을 다녀왔다. 지리산 촌놈이 된 지 18년, 농담 삼아 “한반도에도 아직 가볼 곳이 너무 많다. 그래서 공짜가 아니면 절대로 ‘외쿡’ 안 간다”고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씨가 됐는지 정말로 공짜 황산행이 이뤄졌다. 대전의 늘 고마운 벗 설산(雪山) 김영기의 무한배려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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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산의 몽필생화, 이른 아침 별빛이 사라지기 전에 장노출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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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영화로만 보던 중국 최고의 명산이라 불리는 황산의 서해대협곡 등을 거닐었다. “황산을 보면 다른 산은 산이 아니다”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돌계단만 걷다 보니 다리 근육이 마비될 정도로 아프고, 주왕산에서 둥근잎꿩의비름을 찍다가 벼랑에서 미끄러져 금이 간 갈비뼈와 온몸이 쑤셨다.
황산의 운해와 소나무, 기암괴석 등이 유명하지만 사실 내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것은 시인 이태백의 사연이 깃든 몽필생화(夢筆生花)였다. 이곳은 지리산처럼 1년에 200일 이상 흐리거나 비가 온다는데 운이 좋게도 너무나 청명하기만 했다. 오히려 운해를 못 본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연변 조선족 출신 가이드의 “아주 죄를 많이 지은 분이 오셨나 봐요. 황산이 이렇게도 맑은 것을 보면요”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3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다’는 지리산 천왕봉 일출을 떠올렸다. 이 얼마나 여유로운 농담인가.
북해빈관, 그러니까 산정의 북해호텔 바로 앞에 꿈에도 그리던 몽필생화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황산의 시신봉 길목 아래에 서 있는 몽필생화는 거대한 붓 모양의 기암절벽 꼭대기에 살아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다.
아직 어린 이태백이 ‘꿈속의 붓끝(몽필)에서 꽃이 활짝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생화)’는데,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황산에 올랐다가 이 기암절벽 꼭대기의 소나무를 보았다고 한다.
“예전에 내 꿈속에서 보던 생화거필(生花巨筆)이 바로 여기 있었구나!”
어린 시절의 꿈과 너무나 똑 같아 두 무릎을 쳤다는 것이다.
지리산의 고운 최치원 선생의 전설 같은 얘기처럼 그것들은 늘 그렇듯이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어찌 됐든 1,300년의 몽필생화를 보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만약 이 거대한 필로 대지를 벼루 삼아 바닷물에 먹을 갈고 푸른 하늘을 종이로 삼아 인간사 아름다움을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태백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소나무는 1970년 초에 고사하고 말았다. 그후에 소나무 모조품을 꽂아 놓았다가 불과 몇 년 전에야 그와 비슷한 소나무를 옮겨 심은 뒤 그 높은 기암절벽을 오르내리며 지극정성으로 살려냈다고 한다.
시인 이태백이 이 몽필생화를 본 뒤부터 명시들이 줄줄 흘러나오는데 걷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언제나 이런 명필을 가져보나’ 내심 부럽기도 했지만, 얼른 그러한 생각마저 꼭꼭 씹어 삼켰다. 내게는 이름하여 족필(足筆)이 있지 않은가. 한반도 이곳저곳을 직립보행의 자세로 두 발로 직접 걷고 걸으며 사진을 찍고 시를 쓰는 족필, 이보다 더 좋은 붓이 어디 있겠는가.
황산 이태백의 몽필생화, 그 명성 그대로
중국 황산에서 운해를 못 본 것은 참으로 아쉬웠다. 하지만 귀국하자마자 청송 주왕산의 주산지에서 이른 아침의 황홀한 안개를 보았다.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객주문학관’에서 <한국산문>의 세미나에 참석한 뒤 하룻밤 자고, 이른 새벽 영상 2℃의 주산지에 가보았다. 물안개와 어우러진 왕버들 고사목은 몽환적이었다. 김기덕 감독의 아름다운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무대다운 곳이다.
만약에 이 영화의 세트인 ‘물 위의 암자’를 철거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출신인 김기덕 감독과는 몇 차례 인연이 있었다. 오래 전 홍천의 오지마을 작업실에서 만났을 때 수상사찰 철거 문제로 분개하던 그의 모습이 선연하다. 저예산 영화를 고집하던 그가 처음으로 돈과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예술작품이었다. 단순한 영화 세트가 아니라 물살에 따라 빙글빙글 도는 상상력 최고의 걸작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립공원관리공단이나 청송군에서는 이 ‘물 위의 절집 한 채’의 가치를 몰라봤던 것이다. 허울 좋은 법대로를 따지다가 대어를 놓친 것이다. 뒤늦게 불교계 등에서 다시 세트장 복원 시도를 했지만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에 나왔던 나룻배는 주산지가 아니라 그의 작업실 마당, 강원도 홍천의 산속에 올라와 있었다. 그 절의 기왓장과 나무 기둥 등은 그가 직접 지은 세 평짜리 황토방으로 탈바꿈했다. 그의 시나리오 작업실은 영화 ‘수취인 불명’에 출연했던 미군 버스를 개조한 것이고, 산중에서의 탈것은 영화 ‘해안선’에 나왔던 효성 125cc 오토바이 트로이였다.
지리산에도 몇 번 다녀간 김 감독이 나의 졸시집 <옛 애인의 집> 프로필을 보더니 “이 시인, 저 금방 영화 하나 찍을 것 같아요” 하는 것이었다. ‘중고 오토바이 한 대가 전 재산, 빈집을 전전한다’는 그 한 문장에서 영화 시나리오 한 편을 구상했고, 곧바로 후다닥 찍은 영화가 바로 재희와 이승연이 주연을 맡은 베니스영화제 감독상 수상의 ‘빈집’이었다. 물론 무대는 시골이 아니라 도시로 바꿨다.
그가 상을 받은 뒤 난생 처음으로 직접 차를 몰고 지리산까지 왔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참으로 코믹했다. 그때까지 완전초보였던 그는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시속 60km로만 달리며 직진만 하다가 부산까지 간 것이다. 첫 장거리 운전이었다. 부산에서 겨우 방향을 틀어 지리산까지 오는 동안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 먹었다고 했다. 도착 예정시간을 8시간도 더 넘겨 도착한 그는 반쯤 얼이 빠진 몰골이었다. 천하의 명감독인 그도 운전자로서는 완전 초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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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송 주왕산 주산지의 물안개가 몽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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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기월식의 붉은 달과 국근섭씨의 감성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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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 신노량항 코뿔소바위 일몰. 지는 태양 속으로 철새들이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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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주왕산 주산지에서 황홀한 안개 목격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청송 주왕산과 주산지, 절골에서만 사는 둥근잎꿩의비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가 바로 쾌남아 소설가 김주영 선생이다. 최근 객주문학관이 완공된 데다 민족연구소 소장인 임헌영 선생이 한국산문작가협회 제자들과 함께 방문한 것이다. 김주영 선생은 그 좋아하던 술마저 잠시 끊으시고도 손님들에게 술 접대를 했다. 원로작가가 일일이 테이블마다 동동주를 퍼 나르고 요지와 휴지까지 챙겨 주는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역시 대인다운 풍모였다.
20년 전 김주영 선생의 고향 진보장터를 찾아가는 문학기행에 동행한 적이 있다. 그때 선생이 어머님을 만나자마자 개구쟁이 아이처럼 “엄마, 짜장면 사줄까?”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정겨워 보였고 내심 부러웠다. 당시 선생은 칠성사이다 광고의 모델이었는데, 백두산 천지에서 그 맑은 물로 세수하는 장면이었다. 그날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내 아들이 기냥 소설가일 때는 동네 할매들이 안 알아주더니 맨날 텔레비전에 나오니 확 달라졌데이. 인자는 경로당에서 민화투 치다가 30원쯤 속여도 눈 감아 준다카이” 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도 바보처럼 허허 웃기만 했다.
이제는 선생의 어머니도 가시고 그 어머니를 보며 부러워하던 불효막심한 아들인 나의 어머니도 먼길 가시고 말았다. 그날 밤 <한국산문> 세미나에서 나의 졸시 ‘달빛을 깨물다’를 낭송했더니 효자 김주영 선생이 돌아서서 슬쩍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청송에서 지리산 화개동천으로 돌아오니 원로시인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운 성산포’의 이생진 시인이었다. 칠불사 아래 ‘시인의 정원’에서 ‘산에서 바다를 건지다’라는 현수막 하나 달랑 걸어놓고 문화난장을 벌인 것이다. 지역 원주민과 귀농·귀촌자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온 지리산 마니아들이 모두 출연자이자 구경꾼인 신명나는 밤이었다. 지난해 봄에 지리산에 들른 원로시인 이생진 선생이 “깊어가는 가을밤에 시와 노래로 한 번 놀자”는 말씀이 씨가 되어 활짝 꽃을 피웠다.
86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가히 시낭송의 프로였다. 대개 시인들의 시낭송은 뭔가 어색하고 촌스러운데, 그게 또 하나의 미덕처럼 여겨져 왔는데, 이생진 선생은 역시 대가였다. 찬조출연한 여러 가수와 춤꾼 등 출연진들이 모두 만만치 않았다. 특히 우리시대의 기타리스트 김광석씨의 연주는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감동적이었다. 출연진 모두 무료로 흔쾌히 무대에 섰는데, 아마 출연료를 모두 합하면 적게 잡아도 1,000만 원은 훨씬 넘을 것이다. 주인장 권행연씨는 펜션 전체를 하룻밤 공짜로 내놓고, 음향과 장작과 술과 안주 등 모든 것이 십시일반 몸과 마음을 모으는 것으로 해결했다. 돈 없이 잘 살고, 돈 없이 잘 노는 방법이 바로 이런 게 아닌가.
그 무렵 전남 구례에서 열린 2014구곡순담(장수학술포럼)의 ‘문화로 소통하다’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구곡순담은 구례-곡성-순창-담양 장수 벨트의 준말이다. ‘고알피엠여사’ 신희지의 사회로 곡성중동농악팀의 농악, 김소현의 판소리, 안혜경의 포크송, 인디언수니와 밴드 올디스벗유의 노래, 그리고 국근섭의 감성무가 정취를 한층 돋우었다. 그중에서 인디언수니의 노래 공연과 국근섭의 감성무를 다중촬영으로 담아봤다.
매월 음력 보름달 밤에 여는 ‘지리산 여가수’ 고명숙의 달빛 콘서트가 있던 지난해 10월 8일, 그날은 때마침 개기월식의 붉은 달이 떴다. 시낭송 하러 갔다가 그날 찍어둔 그 붉은 달을 지우지 않고 카메라 속에 RAW(CR2) 파일로 저장한 뒤 그때를 기다려왔다. 다중촬영 기법은 참으로 진일보한 디지털카메라 시대의 정점이 아닐 수 없다. 오래 전의 달을 불러내 그날 밤의 공연 장면과 만나게 한 것이다.
일종의 합성사진인 셈이지만 이는 포토샵이 아니라 카메라로 현장에서 바로 찍는 것이 합성과는 또 다른 맛이다. 첫 앨범 ‘내 가슴에 달이 있다’를 낸 바 있는 광주의 인디언수니와 감성무를 추는 담양의 국근섭씨의 모습과 참 잘 어울리는 개기월식의 달이었다. 그렇다. 누구나 가슴속에는 달이 하나씩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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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중화, 한겨울에도 꽃이 피는 화개동천의 전설이 증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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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여쁜 물까치, 아침마다 나의 늦잠을 깨워 주는 자명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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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설 속에 산수유 붉은 열매가 더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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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여가수’ 고명숙 달빛 콘서트 열려
그리하여 그 간절한 그리움으로 노래하고 시를 쓰고 춤을 추는 것이다. 생애 첫 개인 음반 ‘시린(詩鱗)’을 발매한 가수 박경하 또한 그런 가수다. 오직 시를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 또한 맑고 쨍하다. 지난해 12월 5일 서울 광진문화예술회관 나루아트센터에서 열린 박경하의 첫 개인 콘서트에 다녀온 것도 ‘시노래’로 맺어진 인연 때문이다. 나의 시 ‘동행’은 가수이자 작곡가인 백창우 형이 다시 작곡을 했으니 두 개의 버전으로 불리게 됐다. 시의 비늘 시린(詩鱗), 시의 이웃 시린(詩隣), 그녀의 노래는 모두 13편의 시에 곡을 붙인 것들이다.
알고 보니 그녀는 시집 <탄광마을 아이들>을 펴낸 바 있는 고 임길택 선생의 제자다. 그녀가 바로 강원도 정선의 탄광마을 아이, 그 선생의 제자 소녀였던 것이다. 고 임길택 선생이 벌떡 일어나 춤을 출 일이었다. 임 선생에게 시를 배우고 광산촌의 경비원으로 일하던 아버지에게 노래를 배우고 기타를 배우며 가수의 꿈을 키우던 탄광촌의 소녀 박경하. 오랫동안 싱어송라이터 박제광씨와 더불어 울산지역의 시노래패 ‘울림’ 활동을 하더니, 마침내 솔로 음반을 내고 시를 노래하는 가수로 우뚝 섰다. 시인이자 작곡가 가수인 백창우 형이 힘을 보태고, 기타리스트 김광석과 안동에서 시노래를 부르는 부부가수 위대권-강미영의 징검다리 등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콘서트 중간에 전남 화순의 요양병원에 계시는 아버지의 육성을 들으며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옆자리의 안소휘 선생도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광산을 통한 우리의 근대화는 규폐 진폐라는 치유될 수 없는 가혹한 형벌을 남겼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은 덕분에 100mm 단렌즈로 그녀의 얼굴을 찍을 수 있었다. 야생화만 찍다가 무대 아래서 그것도 키가 큰 여가수를 찍는 일은 쉽지 않았다. 조명도 수시로 바뀌고 각도는 잘 맞지 않았다. 야생화나 풍경의 표정도 참 다양해서 미천한 실력으로 담아내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사람의 얼굴은 천의 얼굴이 아닌가. 하여 사람의 얼굴은 몇 년 쯤 뒤에나 찍어볼 심산이었다. 그렇지만 이 하수상한 시절에 일편단심 시를 사랑하고 또 그 시를 노래하는 그녀를 찍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섬진강에 큰고니와 독수리가 돌아오고, 눈발이 몰아친다. 천적일 것만 같은 독수리와 까치들이 악어와 악어새처럼 어울리기도 하고, 아침마다 물까치가 날아와 나의 늦잠을 깨워 준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감나무의 대봉감 홍시 다 어디 갔느냐”고 난리를 친다. “야, 이 자식들아, 너희들이 다 먹었잖아! 나는 반의 반도 못 먹었다”고 냅다 소리를 치려다 말고 참는다. 우리 집의 살아 있는 자명종들에게 미안했다. 곰곰 생각해 보니 나는 아직 저희들의 잠을 단 한 번도 깨워 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파와 폭설이 몰아닥쳐도 새해 아침은 밝아온다. 하동군 금남면 신노량항의 코뿔소바위 일몰이 제 각도를 되찾았으니 아주 가까운 중평항의 일출도 제 때가 온 것이다. 폭설 속에서도 산동의 산수유 붉은 열매는 더 붉고, 자세히 보면 키 낮은 큰개불알꽃, 일명 봄까치로 개명된 꽃들이 눈밭에서도 꽃을 피운다. 마침내 큰개불알풀 꽃의 설중화(雪中花)를 찍고 보니 한겨울에도 꽃이 핀다는 화개동천 전설을 증명하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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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례 간전면 효곡저수지의 감나무 세 그루가 안개 속에서 몽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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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
겁나게와 잉 사이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고마잉!
어쩌다 리어카를 살짝만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조깐 씨알이 백힐 이야글 허씨요
지난 봄 잠시 다툰 일을 얘기하면서도
성님, 그라고봉께 겁나게 세월이 흘렀구마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
여름 모기 잡는 잠자리 떼가 낮게 날아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날고
텔레비전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금세
새끼들이 짜아내서 우짜까이잉! 눈물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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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시인님도 오시고 집에서 가까워
박경하 콘서트 꼭 가고 싶었는데
저번 홍대앞 공연도 좋았고
성당에서 제가 주관하는 행사가 하필 그 날에 있어서요.
그 다음 주에는 정호승 시인님 특강이 있었어요.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그려....허벌나게 좋았당게~ㅎㅎ
이시인님께 들었던 이야기들이 글속에 있어서 감동이 두배입니다...
이시인님...올해 시문학반 수업도 기대 하겠습니다...압력..ㅎㅎ
요안나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구례 아시는분이
순수 서각으로 이시인님
행여 지리산....
시 전편을 새겼더만요
기다란 예쁜나무에....
하~
그 한글자한글자 새김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대단합디다
시인님 덕분에 중국 황산부터 지리산 마을까지 주~욱 읽으며...저도
겁나게 좋았지라잉~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