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4년 가해 4월11일 (자)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수원] 표징보다 강한 말씀의 힘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예레 20, 10 - 13
† 복음 : 요한 10, 31 - 42
★ '예레미야의 고백록'의 마지막 편인 다섯 번째 고백이다. 예레미야는 모든
죄는 벌을 받고, 모든 악한 행동은 고통으로 그 값을 치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직접 벌주는 일에 나서지 않고 주님께 맡긴다.
예레미야는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시는 주님을
찬양한다(제1독서).
★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욕하셨다고 몰아붙이며 그분을
해치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논박하시며 당신이
하시는 아버지의 일들을 보고 믿을 것을 촉구하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이 아버지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주간이 눈앞이라는 생각과 함께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듣습니다. 도처에서
달려드는 고발자와 박해자에게 쫓기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모습을 보면서,
또한 신성 모독이라는 모함으로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다인들의 적개심을
대하며 긴장감이 고조됩니다. 그리고 저 멀리서부터 나에게로 무섭게
다가서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바라보게 됩니다.
여러 가지로 흥미 있는 소설인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의 시작
부분에서 본 한 문장이 뇌리를 스칩니다. "배신이라 말할 때, 지는 해를 따라
길어지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쫓아가 보는 것." 가끔은 왜 이리도 십자가의
그림자조차도 보기 싫었던지 그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예언자의 수난과
예수님의 고통, 그리고 사람들의 폭력과 적개심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더러 그분을 배신하는 저의 약한 모습과 그것을 알기에
슬퍼지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그림자를 보면서 떠올릴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의 갖가지 아픔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대하며 느끼는 저의 복잡한 심경을 비로소 자각하게 해 준
사람이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입니다. 나가사키의 바다가 굽어보이는
언덕에는 그의 대표작인 『침묵』의 한 구절을 새긴 '침묵의 비'가 있습니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님, 바다가 너무도 푸릅니다." 이 작가의 고백을
거듭 되뇌며 먹먹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그는 긴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의 소설 『깊은 강』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믿을
수 있는 건, 저마다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아픔을 짊어지고 깊은 강에서
기도하는 이 광경입니다. 그 사람들을 보듬으며 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강, 인간의 깊은 강의 슬픔, 그 안에 저도 섞여 있습니다."
이제 저의 나약함과 인간의 나약함, 저의 슬픔과 인간의 슬픔, 저의 악함과
인간의 악함, 이 가련하고 비참한 모든 현실을 담고 있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성주간을 기다립니다. 그 드리워진 그림자 밑으로 도망치지 않고
그 앞에서 십자가를 뚫어지게 응시하리라 다짐합니다. 그 십자가가 구원의
길임을 믿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우리는 구원의 도구입니다.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4월11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요한 10,31-42)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우리는 구원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탓하지 않고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게 됩니다. 남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기보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성찰합니다. 그야말로 회개의 삶을 삽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인 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1,4).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분명,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한다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이요, 신입니다’(요한10,35).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을 하시되 우리를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고 희망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사랑합니다.
***** ***** ***** ***** *****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요, 며느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요, 딸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랍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여야 하지만 마음과 같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느님과의
관계는 얼마나 어려운지요?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을 바라봅니다.
2014년 가해 4월11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어떤 글을 쓰다가 ‘친구가 싫어할 행동’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예가
필요했습니다. 저의 이 조그마한 머리로는 구체적이고 또 보편적인 생각들을
제시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해 지식 검색을
했지요. 검색 창에 ‘친구가’라고만 적었는데, 인터넷 자동완성 기능 때문인지
몇 가지 예시가 쭉 나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실수로 ‘친구가 없어요.’를
클릭하게 되었네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친구가 없어요.’라는 제목의 글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제대로 된 친구가 없어요.’, ‘친구가 없어요.’, ‘학교에 친구가
없어요.’, ‘반에 친구가 없어요.’, ‘같이 다닐 친구가 없어요.’ 등등의 제목이
담긴 글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세상에 친구가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지요.
사실 제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습니다. 형제도 6남매였기 때문에 집이 항상
북적북적 댔지요. 또 어렸을 때부터 친구도 많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친구들과
연락을 하고 만납니다. 그리고 제 동창신부들을 비롯해서 많은 선후배
신부님들을 만나고 있지요. 그러면서 내 개인적인 시간들을 보내지 못하고,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고민을 합니다. 누구는
자기 주변에 친구가 없다고 고민하고 있는데 말이지요.
지금의 제 상태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고, 오히려 그 누리고 있는 것들을
하나의 짐으로 생각하는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던 것이지요. 내 자신의
상태를 잘 봐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은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당연히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말을 섞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총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영광을 깨닫지
못했고, 감사하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하나의 짐으로만
생각했지요. 잘 살고 있는 자신들에게 커다란 혼란만을 가져다 준 사람,
그래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의 일들을 통해서 충분히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닫힌 마음으로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생각하고 있지요.
이렇게 닫힌 마음으로 인해 오늘 복음에서 보면 결국 예수님을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쫓아내게 됩니다.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과 함께 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며,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 싶습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들, 부정적인
생각으로 쉽게 단죄하는 마음을 가진 우리들과 함께 하실 수 있을까요?
얼마 남지 않은 사순시기. 주님을 쫓아낼 수밖에 없는 나의 잘못된 점을 없앨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정이란 이해받는 것보다는 이해하는 데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오늘부터 인천교구 전례꽃꽂이 전시회가 있습니다. 구경오세요.
획일화에서 벗어나세요.
초등학교 선생님이 자기 반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발을 밟았을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첫 번째 아이: 죄송합니다.
두 번째 아이: 미안합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자신 있게 손을 들어 말합니다. “이를 어쩐다?”
기가 막힌 선생님은 다시 이러한 문제를 냈지요.
“누가 선물을 주면 다섯 글자로 어떻게 말할까요?”
첫 번째 아이: 감사합니다.
두 번째 아이: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까 이상한 대답을 한 아이가 또 자신 있게 손을 들어 말하지요.
“뭘 이런 걸 다…….”
틀린 답일까요? 아닙니다. 단지 독특한 답일 뿐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러한 독특한 답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보편적인 답으로 똑같이 만들려는
획일화를 시도하곤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획일화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특한 답 역시 정답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에서 다양함 속에
일치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당시에는 너무나 독특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독특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틀린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독특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유다인들이었습니다.
획일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 안는 포용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어둠 속의 빛 -마음의 성지(聖地)-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4월11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예레20,10-13 요한10,31-42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어둠 속의 빛 -마음의 성지(聖地)-.
어제는 천사같은 지인의 배려로 남한산성과 천진암, 구산 순교성지를
순례했습니다. 순교성지를 방문할 때 마다의 느낌은 평화와 위로입니다.
방문후로도 다른 여행과는 달리 공허함이 없는 충만한 행복감입니다.
순교성지마다의 성전은 정말 영혼의 안식처 같이 깊은 평화와 위로에 젖게
했습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어 성지라는 진리를
새삼스럽게 확인했습니다.
"아, 이 땅은 성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 덕분에 구원 받아 살아났구나.“
구산성지를 방문하며 깨달은 진리입니다. 신도시 개발로 인해 사방은 아파트
건설이 한창 이었고 구산성지는 마치 이들에 포위된 듯 사면초가의 섬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구산성지를 에워싸고 있는 높은 담벽이 마치 구산성지를
쳐들어오다 멈춘 듯 싶었습니다. "아, 이 성지를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 정말
치열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에워싸고 있는 막강한 현실 앞에 성지의 존재는 정말 초라하고 약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힘은 무엇보다 강합니다. 하느님의 힘이 이
성지를 지켜낸 것입니다. 마치 영적전쟁 치열한 한 복판에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바로 이런 성지같은 '믿음의 전사들'이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사방 온통
인위의 건설 현장에 오직 소박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여기 구산성지
하나뿐이었습니다. 성인 덕분에 살아 난 성지였습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형제자매님이, 형제자매님의 마음이 성지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성인이 되는 것이요 내 삶의 자리를 성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형제자매님도 이 성지처럼 이웃에게 영혼의 쉼터가,
오아시스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안내해 준 고마운 분들에게 드린 말씀입니다. 정말 구산성지의 존재는
각별했습니다. 문명의 야만 속에 자연을 지키려는 장엄한 투쟁처럼
느껴졌습니다. 만일 이 성지가 개발로 사라졌다면 그 무형의 정신적 손실은
상상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돈 만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깊은 영적
전통과 유산으로 살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영성이 없어 내적으로 공허하면 맹목적 욕망은 외적성장과 성취를
향하여 돌진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무분별한 낭비의 개발로 무참히 상처받고
사라져가는 자연은 바로 내적공허의 표현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둠 속의 빛, 죽음 속의 생명, 절망 속의 희망을 상징하는 구산성지였습니다.
이 거대한 신도시를 살리는 구원의 땅 성지처럼 느껴졌습니다.
구산성지가 주는 영적 메시지가 참으로 무궁무진합니다.
흡사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가, 복음의 예수님의 처지가 구산성지 같습니다.
어둠 속의 빛, 죽음 속의 생명, 절망 속의 희망, 말 그대로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현실이지만 주변 모두를 밝히고 살리는 하느님 구원의 표지입니다.
만일 이 개발되는 신도시에 구산성지가 없다면, 오늘 1독서의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복음의 상황에서 예수님이 빠져버린다면 그 현실은 온통
어둠이요 죽음이요 절망일 것입니다. 예레미야와 예수님은 그대로 세상을
살리고 밝히는 구원의 표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주소서.“
내 마음의 성지를 지키는 것은, 내 존재 자체가 주님의 성지가 되게 하는
비결은 예레미야와 같은 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힘입니다.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로 하느님의 힘을 내
힘으로 할 때 사면초가의 현실에서도 영혼의 쉼터인 성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바로 예레미야가 주님의 성지로 살 수 있었던 비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였음을 깨닫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을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의 성지로 살 수 있었던 비밀 역시 아버지와 깊은 일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바로 예수님이 살아있는 성지임을 알려줍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마음을, 우리 존재자체를 당신의
거룩한 땅, 성지로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 저희를 보호하시어, 온갖 해로운 것에서 언제나 지켜주소서."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아름다운 고독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4년 가해 사순 제5주간 4월11일 금요일 복음묵상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요한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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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지 않은 시선들, 거친 목소리들이 분노의 몸짓들을 만들어냅니다.
언제라도 누군가를 돌로 쳐죽일 듯한 분위기입니다.
그 성난 군중들 한 가운데 바로 당신께서 서계십니다.
조금은 상기된 모습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어가시면서 당당하게
당신의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제자들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당신을 초조하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심정들입니다.
당신께서 입을 여실 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은 더욱 거칠어만 갑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셨을 고독을 생각해봅니다. 당신만이 알고 계셨던 진실,
모두가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진실, 하지만 결코 숨겨서는 안 될 진실.
그 진실을 위해 정해진 삶은 고독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을 배척하고 비난하는 시간들 안에서도, 당신을 따르고 환호하는 시간들
안에서도, 죄로 물든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 속에서도 아픔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연민 속에서도 심지어는 성부에 대한 그리움과 그분께서 주신
사명 안에서도 당신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철저한 고독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분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죄와 고통 한 가운데에서 진실을 위해
한다면, 우리는 고독을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고독은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의 시간임을 믿어야만 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표징보다 강한 말씀의 힘
2014년 가해 4월11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복음 : 요한 10,31-42
< 표징보다 강한 말씀의 힘 >
미국 뉴욕에 사는 ‘리리안 요맨’이라는 유명한 여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병원
일에 지쳐 아편을 조금씩 복용하다가 아편중독이 되어버렸던 여인입니다.
아편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치료를 받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포자기 상태에 있을 때 하느님을 받아들였고 말씀을 묵상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고 아편을 끊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아편 중독, 알코올 중독,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는 요양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요양소에서는 약이나 수술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의 힘으로만 치료를 한다고 합니다.
그녀가 쓴 책에 이런 경험담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루는 앰뷸런스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면서 그의 요양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들것에 실려 온 사람은 폐병 3기가 지나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여자 환자였습니다. 그녀는 뼈가 앙상하고 숨이 턱에만 남아
있었습니다. 리리안 요맨 박사는 환자를 곧 이층 입원실에 옮긴 다음 성경
말씀 구절을 크게 쓴 종이를 환자에게 주고 요양원에 있는 한 그 말씀으로
살아야만 한다고 권했습니다. 그 말씀은 이 구절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갈라 3,13)
그 환자에게 이 성경말씀을 하루 종일 주의를 기울여 읽고 무슨 말씀인지 뜻을
생각해보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튿날 환자에게 찾아간 요맨 박사는 그
구절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고 물어보았지만, 환자는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라고 해 놓고는 병실을 나왔습니다.
6일 째 되는 날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이층에서부터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요맨 박사는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이층으로 올라가서 문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활짝 웃는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뛰어내려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요맨 박사를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사님, 이젠 제가 더 이상 침대에 누워 있을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박사님께서 적어준 성경 말씀을 주위를 집중해서 읽고 묵상했는데, 방금
전에서야 깨달았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분께서 받으신 저주 안에는 저의 폐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산하신 짐을 내가 왜 지고 살아야 합니까?
이 기쁜 소식을 박사님께 알려드리려고 뛰어 내려왔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건강을 회복하고 요양소를 떠났습니다.
[참조: 인터넷 블로그, 터나누기, 나의 참 모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지 않고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에 가서 머무셨습니다. 그런데 그 곳으로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믿는 이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사실 믿지 않는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표징’, 즉 기적이나 이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없는 이의 눈을 만들어 주어도, 다 죽어서 썩는
냄새가 나는 라자로를 살려 내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이들은 표징을 하나도 보여주지 않은 요한이 한
‘말’들이 모두 사실이었음을 깨닫고 믿었다고 합니다. 즉 표징보다 말씀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더 큰 힘이 있는 말씀을 바로 옆에다 두고도 그
말씀을 통해 믿음을 찾지 않으면서 기적들만 찾아 헤매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말씀의 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기적은 감각적인 것에 영향을 주고 표징은 이성에 영향을 주지만 말씀은 영에
영향을 주어 가장 깊숙이 찌르는 쌍날칼과 같은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해서 그리스도께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구약의 예언들이
당신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오랜 시간 설명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 때서야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소공동체에서 하는 성경말씀 묵상이 바로 이렇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단시간 묵상하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말씀으로 일주일은 살아내야
그 말씀 안에 머물게 되고 그 말씀이 내 심장 깊숙이 스며들어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렇게 묵상하고 체험한 것을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사순 제5주간 금요일
2014년 가해 4월11일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자발적 진화, 제3인류, 세계사 심리코드, 히스토리아,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 눈물, 복음의 기쁨’ 요즘 읽고 있는 책들입니다. 책을
통해서 얻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던 것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과 물질주의가 만연한 세상에
영성을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는 소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함께 나누는 것처럼 책을 통해서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됩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알게 됩니다. 책은 인류가 더 나은 발전을 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셋째는 나의 부족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곳입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곳입니다.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고의 틀을 과감하게 깰 수 있게 해 줍니다. 주말이
시작됩니다. 책 속에서 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타요버스’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즐겨보는 만화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를 버스에 옮겨놓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모습을 한 버스를 타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서울시는 4대만 만들었는데
타요버스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100대로 늘리겠다고 합니다.
기간도 늘려서 어린이날까지 운행하겠다고 합니다. 서울시의 타요버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다른 지역에서도 타요버스를 운행하겠다고 합니다.
한 시민의 생각을 서울시에서 받아들였고 이것이 자칫 삭막한 도시의 거리를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용문 수련장에 있을 때입니다. 수련장에는 담장이 많았습니다. 가톨릭
학생회의 미대생을 중심으로 담장에 벽화를 그렸습니다. 코끼리, 기린,
무지개, 사슴, 토기, 그네, 아이들을 그렸습니다. 수련장의 건물들이 20년이
되어서 많이 낡았는데 그 그림들 때문에 화사하게 변했습니다. 더운 여름에
벽화를 그려주었던 학생들에게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가르침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인 통념과 기준을
과감하게 허물었습니다. 죄인들로 여겨지던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에게 율법의 참된 뜻을 가르쳐 주었고, 지탄을 받았던
세리들과도 어울렸습니다. 정해진 장소에서 등록을 하고 율법을 가르쳐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수업료도 받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사람들에게 진실과
진리를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예와 권력을 향해서 무한 경쟁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미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많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과감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로
왔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랑을 원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사람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려던 예레미야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예레미야의 모습은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려야 했던 예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하는 일들이라도 믿어 주십시오.’ 그러나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검찰과
판사가 되어서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리려고 합니다. 이들이 부당하게
예수님을 고발하고 재판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군중들의 무관심도 한 몫을
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자선, 희생, 선행은 힘이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는
나눔, 사랑, 봉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 발,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을 진화의 종점으로 받들어 따름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예수님을 진화의 종점으로 받들어 따름
사랑에 빠진다는 게 맞다는 생각이며 믿음도 빠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주려는 연인처럼 성경의 모든 말씀 다 믿습니다.
전문가나 달인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듯 주님의 기적들에 감격합니다,
200년 전 사람이 현대인과 오늘 함께 있다면 현대인들을 귀신같다 할걸요?
2000년 전 예수님은 현대인에게 진화가 겨우 이정도 뿐이냐고 꾸짖습니다.
인생성공은 2000년 전 예수님을 진화의 종점으로 받들어 따름일 뿐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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