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9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하나님 말씀의 힘 》
시 12:1~8
〈 말이 됩니까? 〉
엊그제 손흥민의 코너킥, 공이 바나나처럼 휘어져서 골망을 흔들었습니다. 다들 보셨지요?
그거 보고 우리가 어떻게 감탄했습니까?
“와~ 이건, OO O O!” 수수께끼로 두고 설교를 시작합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순대국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은 스크린골프장이 들어섰습니다. 그 앞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길어야 2~3분, 그 시간에 없어진 순대국집을 떠올립니다. 가끔 가서 맛있게 먹었거든요!
순대국집은 사라지고 스크린골프장이 들어섰는데, 언젠가는 또 바뀌겠지요?
이렇게 바뀌는데 ‘그 자리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곳,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000번지, 그곳의 참모습은 무엇입니까?
순대국집이 진짜 모습인지, 스크린골프장이 진짜 모습인지, 확답하지 못합니다.
얼마 지나면 또 바뀔 겁니다.
거리 풍경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장아장 걷던 모습이 사라지고, 미운 일곱 살이 됩니다. 초중고를 거쳐 대학생이 됩니다.
군대를 가고 직장인이 되고, 결혼하여 가장이 됩니다. 이제는 쭈글쭈글해졌습니다.
어느 때가 나의 참 모습일까요? 지금의 나일까요?
그러면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닙니까? 또 내일의 나는 내가 아닙니까?
우리가 그런 말도 하잖습니까? ~ ‘사람이 천국 갈 때는 몇 살 때의 모습으로 갈까?’
‘아,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던 시절, 그 모습으로 가고 싶다!’
꼬부라지고 쪼그라든 모습으로 간다면 그것도 불만입니다. 그렇지요?
☞ 지금 제가 다소 철학적인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여기서, 제가 중요한 질문을 할 것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잠깐 드린 저의 이 말이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됩니까?”
① 말이 된다! ② 말이 안 된다! “①번입니까, ②번입니까?”
☞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이것입니다.
“이게 말이 돼?” “그것이 말이 돼?” “그걸 말이라고 해?” 그리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된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말도 안 돼!”
〈 그 행동, 말이 됩니까? 〉
“말도 안 돼!” 이 말의 쓰임새는 비단 말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가끔 연예인 부모들의 ‘빚투’문제가 뉴스에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자식이 스타가 되어 갑자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걸 믿고 부모가 크게 사업을 벌입니다.
그러다가 폭망합니다. 또 연예인 자녀에게 손을 내밉니다.
성공한 자식의 부모 행동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때 항간에서 뭐라고 합니까?
“에이, 그건 말도 안 된다!” “부모면 부모답게 행동해야지, 그건 말도 안 된다!”
말이 아닌 행동에 대해서도, 말이 된다느니, 말이 안 된다느니, 평가를 합니다.
사람들의 언어만 가지고 “말이 된다” “말이 안 된다”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도 주변에서 말할 때는 “에이, 그건 말도 안 된다. 정말”
이렇게 우리가 말합니다.
행동을 가지고 말이 된다느니, 안된다느니 하는데, “이것이 말이 됩니까?”
① 말이 된다! ② 말이 안 된다! “①번입니까, ②번입니까?”
설교 시작할 때 말씀드렸어요, 축구선수 손흥민이 코너킥으로 골을 기록했습니다.
볼이 공중 높이 떠오르더니 바나나처럼 휘어져 골대로 들어갔습니다.
함께 감탄해 봅니다. “우와 이건 말도 안 돼!”
공을 발로 차면 공은 직선으로 움직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감아차는 기술!
바나나 킥, 골키퍼도 맥을 못 췄어요. 정말 기가 막힙니다. “와 이건 말도 안 돼!”
사람의 말뿐 아니라, 행동까지, 여기에 축구공이 휘어진 것도, “말이 된다. 안 된다!”
이것이 우리의 ‘슬기로운 언어생활’입니다.
“말이 된다” “말이 안 된다” 이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 매우 중요한 표준입니다.
“말이 된다”
이것은 옳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뜻입니다.
“말이 안 된다”
이것은 틀렸다는 겁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상식이고, 비합리적이라는 겁니다.
대명천지 21세기에 비상계엄이라니,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말이 안 됩니다. 대통령이 말이 안 되는 짓을 해 가지고 나라가 이 난리입니다.
말이 안 되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놓은 국민들, “말이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 말의 쓰임과 말이 가진 힘 〉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언어뿐 아니라 행동의 표준입니다!”
“말은 말 뿐 아니라, 행동의 표준이고, 삶의 표준입니다!”
“말은 말과 행동과 삶과 인생의 표준입니다!”
“우리는 말이 되는 말과, 행동과, 삶과, 말이 되는 인생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말이 되는 말을 하고, 말이 되는 행동을 하고, 말이 되는 삶과 인생을 삽시다!” 할렐루야~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말이 안 되는 말을 밥먹듯 하고,
말이 안 되는 행동을 온종일 하고,
말이 안 되는 삶으로 스트레스 받고,
말이 안 되는 인생으로 지치고, 쓰러집니다!
사람이 천국 못가고 지옥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말이 안 되는 말, 행동, 삶, 인생을 살다가 지옥가는 겁니다.
잠시 생각해 봅시다. 평생 해 온 말 중에서 ‘말같은 말’ 얼마나 하고 살았나?
평생 해 온 행동 중에서 ‘말이 되는 행동’ 얼마나 하고 살았나?
내 삶, 내 인생은 ‘말이 되는가?’ 이거,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 설 쇠면 열한 살, 여덟살 되는 두 손주들에 부대끼면서 저희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로서 깜냥에 최선을 다 한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손주를 사랑으로 보살펴야 하는데, 무엇으로 사랑을 해야 할까?
손주 녀석들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녀로 양육해야 하는데, 제가 무엇으로 양육해야 할까요?
코흘리개 철부지 어린 손주들을 잘 보듬고 쓰다듬어야 하는데, 무엇을 보듬고 쓰다듬을까?
제가 무엇으로 해야 합니까?
“어? 정답이 바로 안 나오네요? 제가 무엇으로 해야합니까?”
그렇습니다. 말로 해야 합니다.
말로 사랑하고, 말로 양육하고, 말로 쓰다듬어 주고, 말로 보듬어줘야 합니다. 할렐루야~
부부간에도 똑 같습니다.
말로 사랑, 말로 배려, 말로 위로, 말로 건강을 살펴야 합니다. “말로 해야 합니다”
“말에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위력이 있습니다. 엄청난 힘이 말에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 말이 모든 것의 표준입니다 〉
(5절)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련한 자들, 눌린 자들, 궁핍한 자들의 탄식을 들었다.
그 탄식을 듣고 “내가 그들을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무엇하신다고요? “말씀하신다고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안전지대에 두시고, 우리가 원하는 곳에 두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무엇으로 그렇게 하십니까?
“말씀으로!” 말씀으로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 하나님 말씀의 힘 》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손주 사랑? 말로 합니다. 아내 사랑? 말로 해요!
교회 사랑? 성도 사랑? 이웃 사랑? 모두모두 말로 합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은 언어, 행동, 삶과 인생의 표준이고 힘이고 능력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우리가 엉터리 말을 합니다. 엉터리 행동을 합니다. 엉터리 인생을 삽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 중에 정말, 진솔한 말, 진정성 있는 말, 몇 마디나 하고 살았습니까?”
자녀를 사랑한다고, 손주를 사랑한다고, 아내를 사랑한다고, 교회와 이웃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얼마나 진정성 있는 말을 했습니까?
꾸미고, 치장하고, 무게잡고, 입술에 기름칠하고…
늘 내 입장에 유리하게 말하고, 나 편하자고 말하고, 내 판단 내 기준으로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솔직해야합니다!
오늘 설교 듣고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입술의 말, 행동, 살아가는 일, 인생이 진정으로 진솔했습니까?
“말이 되는 말을 하고, 말이 되는 행동을 하고, 말이 되는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우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만,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6절)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와 다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다고 시인이 노래합니까?
6절 말씀은 아주 대단한 시의 한 구절입니다.
아무리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라도 언저리에도 못 미칩니다.
6절 말씀에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벽하다!
우리 인간의 말은 늘, 자기 포장, 자기 이익, 자신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하나님은요?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함이-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그러니,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이렇게 시편을 해석하고 설교하는데도 안 믿어진다면 저로서는 더 이상 할 방도가 없습니다.
솔직히 저처럼, 이렇게 설교하는 목사 흔치 않습니다.
누가 시편의 말씀으로 이렇게 깊이 풀어냅니까?
저의 자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랑이지요!
하나님에게도 말, 말씀은 곧 언어요, 행동이요, 권능입니다. 파워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으로 행하시고, 창조하시고, 파워를 드러내셨기에,
우리, 피조물, 사람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하나님을 따라 합니다.
“그게 말이 돼?” 하면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에는 불순물이 너무 많아요,
순금, 순은은 순도가 99.9%인데, 우리 말에는 불순물이 99.9%입니다.
지금 시편 12편을 쓴 시인,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세오경을 기록한 모세도 이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민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여기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 나옵니다.
〈 말씀의 신학 〉
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참 오묘하지 않습니까?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하나님이시래요!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평생 제가 제 입으로 쏟아낸 말들이 바로 ‘나’입니다.
평생 여러분들이 입으로 쏟아내신 말씀들이 바로 ‘당신’입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했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 말이 곧 그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일곱 번 단련한 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죄로 물들었습니다. 죄를 먹고, 죄를 마시고, 죄로 숨을 쉽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담 하와의 선악과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가 예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고 ‘용서받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죄의 언어, 죄의 행실, 죄의 삶, 죄의 인생을 삽니다.
그러니 주일마다 수요일마다 예배로 씻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다행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전해 주십니다.(7절)
말씀으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오늘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오늘도 우리는 평강을 누립니다!
우리가 천국에 갈 때, 생애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 리즈시절 혹은 화양연화!
그 시절 모습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평생 내 입으로 쏟아낸 말, 그 말로 뭉뚱그려진 모습, 그 모습으로 가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