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타서 마시던.......*
~힐링소녀~
요즘같은 폭염에, 폭우에 지치게 되면 오싹시린 막걸리가 생각이 납니다.그렇다고 애주가도 못되면서 말입니다.
땅으로 꺼지려는 저질 체력엔 모든 세포를 깨울듯한 한약 같기도 하다.시원하다 못해 오감을 마비시킬 정도의 이틀 숙성된 막걸리가 여름엔 묘약이다.
당연 안주는 빈대떡이다. 둥근 울타리 호박 얇게 채썰고, 매운 청량고추 듬뿍 넣은 달고 매운 빈대떡. 호박도 그냥 호박이 아닌 초록색이 짙은 주먹만한 동그란 호박이라야 달고 꼬시다.양파도 반개 썰고, 달걀도 한개 풀고 주물주물 할머니 손으로 맛을 더한 빈대떡.
아무리 배가 등짝에 붙어 배가 고파도 막걸리에 이 빈대떡 한입이면 게임 끝이다.
"아가야! 너무 덥고 힘들었제? 천천히 묵어라. 체하면 본전도 없다."
허리가 구십도로 굽으신 시할머니가 차려 주신 저녁상은 항상 훈훈했다.
"할머니! 어서 드세요.
오늘은 무슨일 없으셨어요?"
"무슨일은 무슨일.
비실비실한 화분 비 맞추려고 계단 올라가다 또 넘어졌지 "
"에고 그럴줄 알았어요.그냥 내버려두지. 그따위 화분이 뭐 대수라고. 괜찮으세요?"
물음과 동시에 파스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막걸리 바닥 한잔 정도의 걸쭉한 몫은 항상 할머니 몫이다.
밥사발에 따라서 '이따 천천히 마시지. 어여들 먹어라.' 하시면 다들 알아 들어야 한다. 설겆이를 끝내고 하수구망에 걸린 하얀 쌀밥을 다시 조리에 받혀 헹궈 막걸리에 타서 마시던 시할머니.
사카린 두.세알 넣어 손가락으로 휘이휘이 저어 힘껏 허리를 핀다고 다리만 펴진 자세로 싱크대 앞에서 마시던 가녀린 할머니가 눈에 선합니다.
밥도 조그만 압력솥에 누릉지가 생기게 금방 지어서 주셨다.
"반찬도 시원찮은데 밥이라도 맛있어야제."라며 밥상머리에서 식사대신 우리를 한참이나 감상하셨던 할머니.
같이 드시자고 하면 뻔한 대답을 하신다. 점심을 늦게 먹어 생각이 없다고. 이따 막걸리 한잔 한다는 뻔한 고집스런 답을 하신다.
눈부신 삼베에 풀 먹여 다려 입으시는 고운 할머니.
대문앞 담벼락에 기대 눈이 빠지게 손자들을, 손자며느리를 기다리던 할머니 모습에 먹먹해 집니다.
"더운데 왜 나와 기다리세요?"
"더워 종일 집안에만 있었더니 바깥이 궁금해서지."
허리를 펴서도 150이 될까말까한 키가 허리까지 굽으시니 소화도 안되고 얼마나 힘드실까?
삼십대 애기 낳으시고 병을 빨리 고치지 못해 허리가 굽으셨단다.
꽃다운 삼십대 혼자 되어 50여년 자식들, 손자들 바라기로 사셨던 불쌍한 시할머니.
남편 초등때 '우리 할머니'란 동시를 써서 교내 대상을 받았단다.
갑자기 그 시가 생각나면서 할머니가 그리운 날이다.
제목:우리 할머니 ~윤진수~
"할머니 몸체보다 몇배의
보따리를 항상 끌고 오시는 할머니
배추 시래기 푸대를 친구 삼은 우리할머니.
손도 새까맣고
코끝도 새까만 우리 할머니.
로버트 다리미 만들어
할머니 허리를 먼저 펴 드려야지.
곧게 허리를 핀 할머니와
나란히 걸으면 키가 비슷해지겠지."
우리 남편은 오남매중 맏이다.
할머니가 애지중지, 금지옥엽 업어서 키우셨다. 첫번째도 큰손자고 영순위도 큰손자 뿐이셨다. 그런 손자가 할머니 허리 펴 드린다는 동시를 써서 상까지 받으니 얼마나 대견스러웠을까?
남편또한 끔찍이 할머니밖에 없었다.
온갖 약이며, 주전부리를 사다가 안기며 애교를 부린다.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사랑이셨던 할머니. 아마 남편은 사람에 대한 사랑은 원없이 받았을게다.
남편이랑 사귀면서 시골 할머니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포장되지 않은 시골길이 얼마나 멀었던지 지금도 생각하니 멀미가 날것 같다. 기차를 타고 한참이나 기다려 버스를 타고, 어스름에 또 한참이나 걸어 갔던 시골길.
무서웠는지 이십대 한창 연애중이라 좋았었는지 둘이 손을 꼭 잡고 들어선 할머니댁.
할머니 부르기도 전에 부엌에서 아궁이 불 지피다 맨발로 뛰쳐 나오시던 할머니. 처음 보는 아가씨 손을 으스러지게 잡고 한참이나 눈물 짓던 할머니.
"우리 큰손자 결혼 시키는거 보고 죽을수 있어 원이 없구나. 아이고 고맙다. 아가야! 미리 얘기라도 하고 오지 찬이 없는데."
라며 금방 노각을 묻혀 늦은 저녁을 먹었는지 말았는지 .
할머니께서는 내 얼굴만 쳐다보며 눈물 흘린 기억만 주마등처럼 스친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딱서니 없었다. 정말 저녁 생각이 없어서인지, 속이 안 좋아서인지 막걸리 한사발만 드시는줄 알았다.
걸쭉한 남은 막걸리에 밥솥, 밥사발에 붙은 밥알 몇개를 타서 마시던 그게 할머니의 저녁이였던 것을 왜 몰랐을까?
지금처럼 흔하디 흔한 아니 그토록 사랑하는 큰손자가 만든 바디오일을 듬뿍 발라 통증을 완화 시켜 주는 맛사지를 수없이 해드릴수 있는데 .........
가난했던 서민의 대표주 막걸리.
우리 시할머니의 저녁을 대신했던 막걸리. 그래서 막걸리는 특별하긴 해도 좋아 할수 없다. 아픈 현실을 타서 마시던 할머니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밥알을 헹궈 타서 마시던 할머니가 밉기 때문이다.
그런 눈치도 없이 뻔뻔스럽게 빈대떡에 막걸리를 들이키던 철부지 손자며느리가 바보 같아서 더더욱 막걸리가 싫다.
가슴 아픈 현실을 타서 손가락으로 휘이휘이 저어 마시던 소녀 같았던 우리 할머니.
오늘 같이 장대같은 비로 아련해지면 한사발 들이키고 싶습니다. 할머니께서 우릴 지켜 주셨던 그 기운을 타서 한사발만 마시렵니다.
내 얼굴이 벌개죽죽 물들으면 추억도 아스라이 가슴 한켠에 스며 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