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을 옹호하면서
나는 이미 ‘탈현대 자본주의 시대이냐? 신화의 시대이냐?’라는 화두를 던져 본만큼, 형이상학을 옹호하는 낙천주의자이다. 형이상학은 우리 인간들의 삶을 가능케 하는 인본주의의 토대이며, 그 형이상학은 내가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낙천주의가 파생시킨 새싹에 불과하다. 형이하학(유물론)이 자연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며 형이상학(유신론)의 멱살을 움켜잡으면, 형이상학이 비이성적인 신비주의의 잣대를 들이대며 형이하학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신은 죽었다’는 말에는 ‘신은 살아 있다’라고 대답을 하고, ‘신은 살아 있다’는 말에는 ‘신은 죽었다’라고,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반격을 가한다. ‘영혼불멸’이라는 말에는 ‘영혼은 없다’라고 응수를 하고, ‘종교의 무용론’에는 ‘종교의 유용론’으로 반격을 가한다. 인간 존재의 근거가 무라는 말에는 우리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라고 대답하고, 예술의 무용론에는 예술의 유용론으로써 응답한다. 형이하학이 문명과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말에는 형이상학이 그 문명과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발전에 기여를 했다고 응답을 하고, 지상낙원의 건설을 역설하는 유물론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내세의 천국으로 반격을 가한다. 이처럼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싸움은 그 끝이 없게 된다. 바로 그 싸움 속에서 우리 인간들의 삶과 예술이 있게 되고, 그 모든 것이 가능해 진다. 만일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싸움이 종식된다면, 그때에는 이 세상도, 하나님도, 우리 인간도, 그 어떤 삶도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지 않는 자로서 형이상학을 옹호하는 낙천주의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옹호없이 어떻게 인간의 삶이 가능하고, 예술이 가능하고, 행복이 가능하단 말인가?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의 세계이며, 초월의 세계는 일상성의 쪽박을 떨구어버린 신성의 세계이다. 그 초월의 세계는 두 가지의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이 외디프스, 프로메테우스, 반 고호, 폴 고갱, 베토벤, 알렉산더, 그리고 나폴레옹처럼 불멸의 업적을 이루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생물학적 본능에 충실한 종의 보존에 의해서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수없이 역설해 온 바가 있으므로, 이 두 가지 방법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자연과학의 성과에 힘을 입어, 어떤 날짐승들보다도 더 빨리, 더 많이, 더욱더 자유롭게 이 세상을 날아 다니게 되었고, 로버트나 인공지능을 지닌 기계 인간에 의해서 그토록 어렵고 힘든 육체 노동마저도 대체할 수가 있게 되었다. 초고속 인터넷망은 모든 사건과 소식들을 ‘실 시간 대’로 연결시켜 주고 있고, 유전자공학에 의한 ‘인간게놈지도’의 완성은 그처럼 꿈에도 그리던 유토피아와 영원불멸의 삶을 안겨주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연과학의 성과에 반하여,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의 죽음, 형이상학의 종말, 학문, 도덕, 풍습의 미덕, 인간의 죽음, 문자 매체의 쇠퇴,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의 종식, 나날이 행복해 지기 보다는 점점 더 불행해져 가고 있는 삶----, 바로 이것이, 또한 오늘날의 자연과학의 성과가 아니던가?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더 이상의 자연과학의 탐구를 유보시키고, 탈현대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신화의 시대로 되돌아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연과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고용된 살인청부업자들이며, 만지는 것마다 그 모든 것이 황금이 되게 하는 미다스 왕의 후예들일 뿐이다. 형이상학은 인본주의의 토대이며, 만일, 형이상학이 종말을 고한다면, 우리 인간들의 시도, 예술도, 삶도 그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형이상학을 말살시키는 자연과학의 날개는 가짜의 날개----옛날에는 형이상학(종교)이 자연과학의 숨통을 조인 바가 있지만, 이제는 자연과학이 형이상학의 숨통을 조여대고 있다는 점에서----이며, 형이상학만이 우리 인간들의 두 발에 날개를 달아주고,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을 옹호하는 낙천주의자로서, ‘무신론의 근본원인’이 되는 자연과학을 비판하고, 형이상학을 옹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날이면 날마다 형이상학의 날개를 달고 날아 다녀야 하기 때문이고, 또한, 우리 인간들의 첫 번째 삶의 양식인 ‘상승주의의 미학’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상승주의의 미학’에서 삶의 본능을 옹호하고, ‘하강의 깊이’에서는 죽음의 본능을 옹호하게 될 것이다.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은 우리 인간들의 가장 중요한 삶의 두 양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반경환, [상승주의의 미학]({행복의 깊이 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