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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Royal Na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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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년경에 그려진 바부르 초상
델리에서 왕으로 즉위하는 헤무
1631년, 무굴제국의 5대 황제인 샤-자한의 황후인 뭄타즈 마할이 가우하라-베굼 황녀(皇女)를 낳자마자 목숨을 잃었다. 황후를 몹시도 사랑한 황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위하여 성대한 무덤을 지을 것을 명령하였다. 뭄타즈-마할의 시신은 잠시 부르한푸르라는 곳에 가매장되었다가 무덤이 지어지자마자 이장(移葬)되었다. 뭄타즈-마할의 무덤은 “극상(極上)의 궁전”이라는 뜻의 타지-마할로 불리게 되었으며 인도를 대표하는 유적이 되었다.
타지마할이라는 세계적 유적을 남긴 샤-자한은 개인적으로는 사랑하는 황후를 잃는 비운을 겪었지만 그의 재위기간은 무굴제국의 전성기였다. 인도의 학자 카오시크 로이(Kaushik Roy)에 의하면 당시 무굴제국의 1년 세수(稅收)는 12,071,876,840 다무(무굴제국의 화폐단위, 320 다무=영국의 1파운드), 즉 영국의 파운드 단위로 3772만 4615파운드에 해당한다. 이러한 막대한 세수로 샤-자한은 거의 110만 (보병 91만과 기병 18만 5천)에 이르는 대군을 유지할 수 있었고 제국의 영토는 3백만 평방 km를 넘었다. 가진 부(富)와 권력에 있어 당시 유럽의 군주들은 무굴황제에 비교대상조차 되지 못하였고 오직 중국 명나라의 황제와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정도가 무굴황제에 비견될만하였다.
[강대국의 흥망]의 저자인 폴 케네디는 무굴제국의 궁정을 두고 ‘베르사이유의 태양왕(太陽王)조차 너무 사치스럽다’고 할 정도의 화려함과 막대한 소비의 현장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전성기에 백만의 대군과 엄청난 영토, 그리고 막대한 부를 누렸던 무굴 제국. 그러나 그 시작은 중앙아시아의 초라한 떠돌이 왕조에 불과하였다.
당시 지구상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초강대국이었던 무굴제국의 뿌리는 중앙아시아에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자면 몽골족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칭기즈칸 등장 이후 유라시아를 종횡무진하며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던 몽골족의 세력은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는 하였지만 쿠빌라이의 원(元)나라를 제외하고는 몽골족은 유목민적인 통치체제를 버리지 못하였다. 수도를 세우고 정착한 후 행정체제를 통하여 세금을 거두는 것보다는 주변의 정복민들에게 공물을 뜯어내는 소위 ‘착취형(Extractive)’의 경제체제를 유지하였다. 결국 몽골의 말발굽에 눌려있던 정복민들은 이러한 착취에서 벗어나려고 하였고 여기에 제국 각지에서 군주들과 왕자들이 계승문제를 놓고 다투면서 몽골제국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칭기즈칸이 죽은 후 얼마 안 되어 제국은 네 부분으로 갈라졌고 이마저도 내부의 왕족들이 서로 다투면서 사실상 자치영주들이 되었다.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쉬켄트에 있는 티무르 동상
예를 들어 칭기즈칸이 코레즘을 정복하면서 종군하였던 천호(千戶)가문인 바를라스부(部)의 사람들은 지금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정착하여 투르크 사람들과 섞이고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무슬림이 되었다. 이후 코레즘 제국이었던 땅은 차가타이의 것이 되어 몽골제국을 구성하는 네 나라중 하나인 ‘차가타이 한국’이 되었다. 이후 몽골제국이 약화되면서 대부분의 몽골계 군주들은 주변 세력들에 밀려 약화되거나 다시 몽골 근방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더러 주변을 정복하여 강력한 세력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차가타이 한국에서 살고 있던 바를라스부의 후손인 ‘티무르’는 전쟁과 배신이 난무하는 혼란의 중앙아시아를 강력함과 교활함으로 제패하였다.
1370년에서 1405년까지의 35년간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에서 만나지 않은 적(敵)이 없었고 이들을 모두 무찔렀다. 페르시아, 그루지아, 시리아, 아르메니아가 모두 티무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점령지 모두를 철저히 약탈하고 자신의 군대에 감히 반항한 도시는 그 주민을 모조리 죽였다. 티무르의 정복과정에서 학살행위로 인하여 수백만의 무고한 목숨이 사라졌다. 심지어 금장한국의 칸으로서 몽골제국을 다시 건설할 야망을 가지고 있던 몽골의 정통왕족인 토크타미쉬 역시 1395년에 격파하였고 금장한국의 수도인 사라이를 불태웠다. 1403년에는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바야제트의 군대를 앙카라에서 두들겨 부수고 오스만제국을 멸망직전까지 몰아붙였다. 다행히 티무르가 명나라 정복을 위하여 말머리를 돌리면서 오스만 제국은 살아날 수 있었다. 무자비한 공포의 제왕은 20만 대군을 일으켜 명나라 정복에 나섰으나 먼 원정길을 감당하기에는 그의 육신이 너무 지쳐있었다. 그는 1405년에 현재 카자흐스탄에 있는 오트라르의 별궁에서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티무르가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은 그가 이룩한 제국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바로 형제들간에 싸움이 벌어졌으며 그의 제국은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참고로 티무르는 슬하에 자한기르, 오마르 샤이흐, 샤-루흐, 미란샤등의 네 아들과 딸 아가-베기를 두었다. 티무르 사후 셋째인 샤-루흐가 수도 사마르칸드를 차지하고 후계를 자칭하였다. 샤루흐의 아들인 울룩-베크대에 이르러서는 제국의 영토가 거진 상실되고 할아버지의 수도였던 사마르칸드와 그 인근지역을 유지하는데 그쳤다. 한편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티무르의 4남이었던 미란샤는 아제르바이쟌에서 카라-유수프의 투르크멘족과 싸우다가 1408년에 사망하였는데 그 역시 4남을 두었고 막내인 술탄 무함마드가 아부-사이드란 아들을 낳았다. 아부사이드는 그는 고조부 티무르의 영역을 되찾기 위하여 무진 노력을 하였다. 한때는 남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동부까지 차지하였으나 아크-코윤루(白羊) 투르크맨에게 패하고 권력투쟁하던 친척인 야디가르에게 넘겨져 참수된다. 아부 사이드의 아들인 오마르 샤이흐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동부인 페르가나의 영주로서 조용히 살아갔다. 이 페르가나의 영주 오마르 샤이흐에게 1483년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무굴제국의 창건주가 되는 바부르였다.
어떤 나라이건 창건주의 삶은 극적이기 마련이지만 바부르의 경우는 특히 파란만장하였다. 그의 5대조인 티무르는 몽골제국이 약화되어가던 혼돈 속에서 일어나 중앙아시아와 중동을 장악하였고 바부르의 조부인 아부 사이드는 티무르 제국을 재건하려다가 일가친척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바부르의 아버지 오마르 샤이흐가 1495년에 죽고 바부르가 그의 영지 페르가나를 물려받았을 때 그는 불과 12세의 소년에 불과하였다. 주변의 세력들, 특히 그의 숙부뻘되는 친척들은 이 소년영주가 가진 조그마한 땅이라도 차지하려고 난리법석을 피웠다.
비록 어리기는 하나 바부르는 만만히 볼 수 있는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영지를 지켜냄은 물론 오히려 그의 위대한 조상이었던 티무르의 땅을 회복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바부르는 불과 2년 뒤 1497년에 티무르 제국의 수도인 사마르칸드를 7개월의 포위공격 끝에 함락시키고 점령시켰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정작 그의 영지인 페르가나에서 휘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의 영지를 찬탈한 것이다. 그는 페르가나를 되찾기 위하여 돌아갔으나 그의 군대는 페르가나로 가는 도중에 모두 탈영하여 흩어졌고, 바부르는 애써 점령한 사마르칸드도 잃고 고향인 페르가나도 지키지 못한,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는 상황에 처하였다.
주변의 도움으로 간신히 페르가나를 찾은 바부르는 1501년에 다시 사마르칸드를 공격하였으나 이번에는 강력한 적이 앞을 가로막았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샤이반의 손자이자 우즈벡의 칸인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몽골의 ‘황금씨족’이었다. 샤이바니의 관점에서 티무르는 차가타이 왕위의 찬탈자였고 티무르의 후예들은 모두 반역도당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바부르 역시 몽골의 장군가문인 바를라스부의 후손이었고 티무르가 황금씨족 여인을 왕후로 맞았으니 바부르 역시 황금씨족의 피가 섞여 있었지만 그러한 것은 샤이바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불과 16세의 소년 영주인 바부르는 샤이바니에게 패하고 도주하였다. 그는 페르가나에서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쫓겨났고 3년동안 절치부심하면서 군대를 다시 모았다. 1504년에 그는 새로 모은 군대를 이끌고 만년설로 뒤덮인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카불을 공격하였고 카불과 함께 주변 지역을 모두 차지하였다. 중앙아시아의 주요 무역로상에 위치한 카불은 사마르칸트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부유한 도시였고 바부르는 카불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았다. 카불을 제 2의 고향으로 삼은 바부르는 카불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고자 하였고 도로를 정비하고 수많은 정원을 만들었다(무굴제국을 세운 후에도 그는 자신이 죽거든 카불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였고 실제로 그리 되었다).
바부르의 초상
카불에 자리잡은 바부르는 지금의 이란 동북부(호라산 지방) 헤라트를 다스리고 있던 먼 친척인 후세인-바이카라와 손을 잡고 힘을 합쳐 ‘불법’으로 사마르칸드를 차지한 샤이바니를 치려하였다. 바이카라는 원정준비가 끝나기도 전에 사망하였고 이는 바부르에게 크나큰 행운으로 작용하였다. 바이카라의 사망으로 인하여 바부르는 헤라트와 호라산 지역까지 차지하였다. 그러나 2년후 카불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그는 새로 찾은 근거지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고 겨우 반란을 진압하고 카불을 되찾을 수 있었다.
1510년에는 그의 숙적이자 사마르칸드의 지배자인 샤이바니가 이란을 다스리던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샤(임금)인 이스마일 1세에게 패하여 죽었고, 바부르는 일단 이스마일 1세에게 접근하여 후신(候臣)으로 자처하였다. 사파비 왕조의 후원을 받아 티무르의 영토를 회복하는 대신 사파비 왕조를 상국으로 섬기기로 한 것이다. 사파비 왕조의 후원은 바부르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는 티무르 제국 제 2의 도시였던 부하라로 진격하였다. “아미르 티무르”밑에서 번영을 누렸던 부하라의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샤이바니가 찬탈자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티무르 가문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던 차에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가 부하로 들어오자 그를 떠들썩한 축제로 반겼다. 다음 해인 1511년에 사마르칸드 역시 바부르의 손에 들어왔고 그 백성들은 바자르(시장)의 좌판도 비우고 시장 전체를 금색 천으로 치장하는 등 바부르를 성대히 맞이하였다. 조상의 영광을 회복한다는 바부르의 꿈은 실현된 듯이 보였다.
바부르가 스스로 쓴 자전기(自傳記)인 ‘바부르나마’에 사마르칸드 도착 이후의 기록은 빠져있다. 기록은 1518년에 다시 시작되는데 이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바부르는 사마르칸드가 아닌 카불에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적들의 침공으로 사마르칸드를 다시 잃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사마르칸드로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바부르의 눈길은 1398년 선조 티무르가 점령하였던 인도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인도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진귀한 보물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의 선조가 차지하였던 땅을 찾는다는 생각은 그를 남쪽 인도로 이끌었다. 1398년에 티무르는 델리를 초토화시키고 떠나면서 키지르칸이라는 인물을 제후로 삼았는데 키지르칸의 후예들은 델리에서 사이드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바부르의 대에 이르러 사이드 왕조는 쫓겨나고 아프간 출신의 이브라힘 로디가 술탄이 되어 다스리고 있었다. 일단 바부르는 티무르의 후예로서 델리에 대한 권리를 내세우며 땅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로디가 응답을 하지 않자 그는 인도침공을 위한 병력을 모으고 사파비 왕조를 통하여 당시의 최신 무기인 화승총을 구입하여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소규모 병력을 출전시켜 북인도지방(힌두스탄)을 약탈하고 동시에 로디군의 전력을 시험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인도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진격로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차원에서 현 아프간 남부에 있는 칸다하르를 손에 넣어야 했다.
그러나 쉬운 전투로 생각했던 칸다하르 공격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칸다하르성은 깎아지른 벼랑 위에 세워져 있었고 본격적인 공격보다는 포위하여 굶기는 작전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칸다하르는 무려 3년이 지난 후에 겨우 바부르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이후 칸다하르와 카불에서 재차 반란이 일어났으나 바부르는 이를 진압하고 고아와 과부에 대한 구휼작업으로 백성들을 다독였다. 그리고는 인도 북부 펀자브를 향해 진격하였고 북부 인도의 패자를 결정하는 대전쟁이 시작된다.
바부르가 1524년에 감행한 인도정벌은 처음부터 바부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의 적인 술탄 이브라힘-로디의 진영은 내분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바부르가 카불에서 출발할 때까지 모인 병력은 1만 2천, 상당히 적은 병력이었다. 그러나 바부르가 카불을 출발하기 전 알람-칸 알라 알-딘이란 인물이 찾아왔는데 그는 이브라힘의 삼촌이었고 이브라힘의 권좌를 빼앗으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그는 약간의 땅을 넘겨주는 대가로 자신의 편에서 싸워줄 것으로 요청하였고 바부르는 알람-칸을 도와주기로 하고 인도로 진격하였다. 이러한 내분은 차치하고라도 로디는 인도 북부의 사람들에게 단단히 미움을 사고 있어 바부르가 펀자브 지방에 도착하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전사들이 소수이지만 꾸준히 바부르에게 몰려들었다. 일단 그는 펀자브의 도성이라 할 수 있는 라호르에 입성하여 이를 전진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겨울이 오자 카불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며, 영역 북쪽을 침노하는 우즈벡족을 물리치기 위하여 잠시 군을 이끌고 나간 것 이외에는 조용하게 보냈다.
바부르가 잠시 카불에 머물러 있는 사이 그와 밀약을 맺었던 알람-칸이 다시 찾아왔다. 알람-칸의 친척인 다울라트-칸과 가지-칸이 군을 일으켜 알람-칸을 위협하였던 것이다. 알람-칸은 바부르에게 만약 다울라트와 가지를 무찌르고 로디를 델리에서 쫓아내 준다면 펀자브 전체를 바부르에게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알람-칸은 라호르에 돌아오자마자 다울라트와 가지에게 사람을 보내 동맹을 맺었다. 다울라트와 가지가 펀자브에서 바부르군을 막는 동안 알람-칸이 신속하게 움직여 델리를 점령하려 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라지푸트의 한두교도들은 무슬림들끼리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때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알람-칸의 이중적인 행태에 대한 소식은 바부르의 귀에도 들어갔다. 만약 바부르가 이러한 상황을 무시하고 인도로 진격할 경우 적대적인 세력들에 에워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바부르는 그대로 군대를 몰아 인도로 진격하였다. 알람-칸을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울라트와 가지를 속이기 위한 술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만약 알람-칸이 주된 목표를 바부르로 정하고 협공했다면 바부르의 야망은 좌절될 수도 있었지만 알람-칸은 델리의 왕좌를 차지하기에 급급하였다. 결국 완전히 세력을 굳히기 전에 조카 이브라힘과의 승부를 서둘렀고 결국 패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바부르의 전기인 ‘바부르나마’에 있는 파니파트 전투도
그의 이중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마당에서 알람-칸은 펀자브의 고향으로 갔다가 결국 가지에게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가지와 다울라트는 바부르의 군세를 두려워하여 싸우지 않고 피하기만 하였고 바부르는 1526년 1월에 적들에게 고립되어있던 라호르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바부르는 다울라트가 4만의 군세를 모아서 싸우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결전을 하기 위하여 나섰다. 다울라트는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라는 의미로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두 개의 칼을 차고 출전하였다. 그러나 정작 바부르군과 맞닥뜨린 다울라트군은 싸우지도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다울라트는 바부르 앞에 무릎꿇고 목숨을 살려줄 것을 청하였고 바부르는 다울라트를 살려주었다. 가지는 이미 산중으로 도망가 어찌되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얼마 후 배신자 알람-칸까지 바부르 앞에 무릎을 꿇었고 바부르는 그의 배신을 용서하였다. 물론 바부르는 단순히 자신이 통이 크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한 번 배신하였던 적에게 관대함을 보이면 인도 각지의 영주들이 그에게 자발적으로 복속할 것이라는 정치적인 계산을 한 것이다. 이로서 펀자브는 완전히 바부르의 수중에 들어왔고 바부르군은 이브라힘과의 결전을 위하여 델리로 향하였다. 로디도 그의 절대 권력을 굳혀줄 싸움터를 향하여 그의 군을 이끌고 나섰다.
바부르군은 히말라야 산맥 앞의 구릉지를 따라 진군하다가 델리로부터 약 150km정도 떨어진 파니파트라는 마을에서 멈추었다. 일단 바부르는 오른쪽으로는 마을까지, 왼쪽으로는 강가까지 포진하고 그 사이에 군을 배치하였다. 좌우로 적이 우회하여 뒤를 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수레란 수레는 모두 모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약 700개 정도의 수레를 모은 바부르는 이를 소가죽으로 묶어 군진의 앞에 늘어놓았다. 수레 뒤에는 화승총을 든 총병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아울러 앞의 수레벽에 몇 개의 틈을 두어 뒤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기병들이 뛰쳐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보면 바부르는 총기가 처음 등장하던 때에 총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전술을 쓴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총기는 현재처럼 방아쇠만 당기면 쏘아지는 것이 아니라 화약과 화승(火繩)을 따로 준비하고 화승에 불을 붙여 총 안쪽에 있는 화약을 폭발시켜 총알이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화약을 붓고 화승을 알맞은 길이로 맞추는 과정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빠른 사수라도 1분에 1발 쏘기가 힘들었다. 한 발 발사하고 다시 발사하기 전까지는 다른 병력이라던가 기타 장애물로 적의 공격을 막아야 했다. 바부르의 수레장벽은 이러한 용도가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아울러 로디군에는 바부르군에 있는 코끼리들이 1000마리나 있었기에 코끼리 부대의 공격을 저지하는 장애물이기도 하였다.
먼길을 달려와 지친 바부르군은 빨리 싸우고자 하였으나 로디군은 본거지 가까운 곳에서 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로디군은 천천히 여유있게 진군하였고 4월 12일에나 파니파트 근처에 나타났다. 지역 전사들의 증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기록에 따라 1만 5천에서 2만 5천정도였다. 이에 비하여 로디군은 가장 적게 기록된 것이 3만, 많게는 10만을 동원하였다 한다. 사실 근대이전에는 군대가 전쟁에 나서면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상인이며 하인같은 잡다한 인원들이 따라가기 때문에 로디의 군세는 4만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로디의 군대는 싸움터에 와서도 싸우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급해진 것은 바부르의 군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바부르는 19일에 그의 본대 일부와 지역전사들에게 야습을 명령하였다. 기습의 효과를 노렸지만 공격의 시작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기습부대는 어둠 속에서 공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흩어졌던 기습부대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을 때는 이미 동이 튼 후였고 그들은 적부대 앞에 완전히 노출되었음을 깨달았다. 만약 로디가 정신을 차리고 있었으면 바부르군을 완파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로디도 마찬가지로 준비가 안 되어 이 기회를 살릴 수가 없었다. 로디는 부랴부랴자신의 병사들에게 공격대형을 갖출 것을 명령하였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반격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바부르의 기습부대는 별반 피해를 입지 않고 후퇴할 수 있었다. 바부르군은 공격을 막기 위하여 총과 포를 쏘았고 별반 피해는 없었지만 로디군의 1000마리나 되는 코끼리들은 폭발음에 놀라 앞으로 가지 못하고 안절부절하기만 하였다. 로디군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코끼리 부대가 결과적으로 무력화된 것이다.
로디는 전면공격으로 전환하면서 바부르군 진영이 파니파트 마을과 만나는 지점이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병력을 집중시켰다. 이 때문에 로디군의 좌군(左軍)이 너무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우군(右軍)은 뒤처지게 되었다. 바부르는 적의 좌우가 흐트러지게 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병 예비대로 하여금 로디군의 우측을 우회토록 하였다. 그리고 중군의 일부도 이 공격에 투입시켜 로디군의 뒤를 돌아 그 후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로디의 우군은 좌군을 따라잡기 위하여 급히 움직이는 과정에서 대열이 와해되고 한 덩어리로 뭉쳐버렸다. 우군은 우군대로 바부르군의 ‘약점’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이에 바부르군은 총기와 대포, 그리고 활을 총동원하여 한 덩어리로 뭉친 로디군을 사격하였다. 이에 뒤로 돌아갔던 바부르의 기습군까지 로디군의 뒤를 치자 로디군은 통제를 상실하고 붕괴되었다. 병력 4만명중 2만명이 시체가 되었으며 전장에 쓰러진 시신 중에는 델리의 술탄이었던 이브라힘 로디가 있었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cut diamond(보석으로 다듬어진 다이아몬드)로 현재는 영국왕가의 보물이 되어있다.
전투가 끝난 후 로디가 죽은 것을 확인한 바부르는 아들 후마윤을 아그라로 보내어 델리왕국의 국고(國庫)를 확보하게 하였다. 바부르는 즉시 군을 정비하여 델리로 진격하였고 4월 27일에 바부르는 ‘술탄’으로 즉위하면서 이로서 무굴제국의 초대 군주가 되었다. 스스로를 이슬람 군주명인 술탄이라고 했다는 것은 스스로 무슬림임을 강조한 것이며 인도가 다시 무슬림 군주의 통치하에 들어갔음을 의미하였다. 인도를 향후 2백년간 다스릴 무굴제국이 서는 순간이었다.
술탄으로 즉위한 후 아그라로 향한 바부르는 마침 그곳에 전쟁을 피하여 피신하여 있던 구왈리오르 영주(라자)의 가족을 만났다. 이들은 몽골족이 쳐들어와 로디를 죽였다는 소식에 공포에 떨고 있었으나 후마윤은 그들을 후대하였고 안전을 보장하여 주었다. 이들은 바부르와 후마윤에게 가보(家寶)였던 다이아몬드를 선물로 바쳤는데 바로 ‘빛의 봉우리’라 알려진 ‘코이누르’였다. 코이누르는 무굴황제의 왕좌인 ‘공작좌(孔雀座, Peacock Throne)을 장식하였으나 무굴제국이 혼란속에 멸망한 후 여러 단계를 거쳐 1850년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전해졌으며 이후 영국 왕후(王后)의 왕관을 장식하게 되었다. 현재는 왕실보물로서 런던탑에 전시되어있다.
바부르가 로디를 죽이고 황제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힌두 세력들 중에는 ‘침략자’ 무슬림들을 쫓아 내고자 호시탐탐 기회만 보고 있는 군주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오랜 전통을 지닌 무사들이자 호전적인 라지푸트인들이 있었다. 약 6에서 7세기 정도에 인도의 북부에 들어온 유목민들의 후예로 추정되는 라지푸트인들은 지금 인도의 서북부 파키스탄 접경지역에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상 ‘크샤트리야(왕족, 무사)’ 지위를 차지하고 강력한 왕국을 세워 원주민들을 다스리다가 내분이 생겨 11세기경 펀자브가 이슬람 교도들에게 점령당하고 12세기경 서쪽에서 들어온 델리의 지배자인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이 튀르크계 무함마드-고르에게 패하면서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은 무슬림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37년 인도 지도
바부르가 이끄는 군대가 로디와 싸우기 위하여 인도 북부로 쳐들어왔을 때 라나-상가가 이끄는 라지푸트의 군주들은 바부르가 로디와 싸우기 전에 바부르에게 접근한 적이 있었다. 자신들이 군사를 이끌고 아그라로 진격하여 같이 싸워줄 것이니 로디를 이기게 되면 칼피(현재 인도 러크나우市 서쪽), 돌푸르(현재 인도 라자스탄州 서쪽 끝), 그리고 비아나(델리 북쪽지역) 지방을 라지푸트에게 넘겨달라고 하였다. 군사력이 열세였던 바부르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로디를 이긴 후 라지푸트 세력이 약속했던 데로 아그라로 진격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바부르는 라나-상가의 신의없음을 책망하고 땅을 넘겨주지 않았다.
바부르에게 무시당한 라지푸트 세력은 일거에 자신들의 ‘고토’를 찾겠다며 군사를 일으켰다. 앞서 말한 메와르 지방의 라자(군주)인 라나-상가는 힌두교도로써 고토 회복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를 뒤로 하고 무슬림인 메와트의 군주 하산-칸 메왓파티와 동맹을 맺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그리고 몇몇 군소영주들이 라지푸트 동맹군을 이끌고 델리의 바부르와 싸우러 나섰다.‘바부르나마’에 의하면 바부르는 델리의 술탄을 무찌르고도 라지푸트 세력을 격파하기 전에는 그의 건국이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음을 잘 알고 있었으며 싸움을 앞두고 고심(苦心)에 잠을 여러 번 설쳤다고 적고 있다.
라지푸트 동맹군은 10만이 넘었고 바부르는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적들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하여 같은 무슬림이자 인도에 있는 무슬림들에게 영향력이 큰 하산-칸 메왓파티에게 접근하였다. 바부르는 파니파트에서 포로로 잡힌 하산-칸의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준마에 태워 풀어주었다. 이는 하산-칸의 마음을 푸는 동시에 무슬림으로서 같은 무슬림과 맞서 싸울 수 없으니 동맹에서 이탈하기를 종용한 것이었다. 하산-칸은 매우 흡족해하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동맹을 풀지 않았고 분노한 바부르는 그를 ‘배교자’로 규정하고 펄펄 뛰었다. 그러나 여전히 2만 5천의 군사로 10만 대군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바부르는 1527년 2월에 라지푸트군과 싸우기 위하여 아그라를 출발하여 약 60km 떨어진 칸와로 향하였다. 전투에 앞서 군진 설치에 필수적인 식수가 나오는 곳을 차지하기 위하여 매우 빠르게 진군하였고 선봉부대 앞에 정찰대를 내세워 라지푸트군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찰대가 라지푸트 기마대를 만나 여러 차례 패하였고 비록 소규모 전투이지만 패전이 계속되자 무굴군대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바부르는 잔치에 쓰이던 금 술잔을 꺼내어 던지면서 다른 장군들과 귀족들도 그리할 것을 종용하였고 이 술잔들을 수피 이슬람 행자(行者)들에게 주어 가난한 자들을 돕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마치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메카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술을 금했던 것처럼 남은 평생동안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하였고 장군들과 병사들도 그 맹세를 따랐다. 그리고는 무슬림으로서 코란을 들고 같이 죽을 것을 맹세하여 사기를 고취시켰다. 이때 바부르는 페르시아의 문인(文人)인 페르다우시의 샤나마(帝王의 書)의 구절을 인용하며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나에게 다른 것보다는 드높은 이름을 주시고 흡족한 마음으로 죽게 하소서.
그리고 그 명예가 나의 것이 된다면 죽음이 육신을 거두게 하소서”
라지푸트군과 바부르의 무갈군은 칸와의 벌판에서 격돌하였고 전투는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다.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이긴 라지푸트군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라지푸트군은 앞에 넓게 포진한 바부르군의 우익을 향하여 기마돌격을 시작하였다. 무굴군은 참호를 파고 토벽을 쌓은 후 그 뒤에 포와 총병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무굴군 진영 중간에서 포병/총병들을 지휘하고 있던 튀르크인 무스타파 라미가 일제사격을 명하였고 라지푸트 기마대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압도적인 수를 앞세운 라지푸트군은 인해전술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라지푸트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무굴군의 좌익도 압박을 받기 시작하였고 무굴군은 뒤에 대비하고 있던 기마 예비대를 보내어 여러 차례 라지푸트 기마병들을 격퇴하였지만 워낙 라지푸트군이 대군이었던지라 라지푸트군 공격의 기세는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바부르는 도박을 하기로 하고 좌우익의 기병과 중간의 총병을 동시에 내보냈다. 이후 중군의 기병도 돌격을 시키고 총병의 양 옆으로 돌면서 라지푸트 진영을 향하여 돌격하였다. 그리고 중간에서 진격하는 총병은 움직이면서 사격을 하였다. 이때 총소리와 대포소리에 놀란 라지푸트군의 코끼리 부대가 날뛰면서 라지푸트 병사들을 마구 짓밟았다. 라지푸트군의 대형은 엉망이 되었고 일부 라지푸트 지휘관들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무굴 중군을 공격하여 전세를 돌리려 하였지만 이미 대형이 무너진 상태에서의 돌격은 각개격파 당할 뿐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는 온 종일 계속되었고 해가 서쪽하늘로 넘어갈 때 즈음하여 들판은 시체로 뒤덮였고 라지푸트군은 거의 사라졌다. 동맹을 주도하였던 라나-상가는 도망가고 없었다. 총병의 저격을 받고 죽은 하산-칸을 비롯하여 라지푸트동맹군의 주요 수장들은 시체가 되어 전장에 꼴사납게 널브러져 있었다.
이로서 라지푸트의 세력은 완전히 꺾였고 무굴황제로서의 바부르에게 도전할 자는 없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 장정 한 명씩 팔에 매달고 산을 예사로 오르내리던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였던 바부르는 계속되는 전투와 함께 잦은 폭음의 영향으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다. 게다가 전투의 살육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잊기 위하여 ‘마주드’라는 일종의 마약을 피우는 습관은 그의 체력을 더욱 더 고갈시켰다. 결국 무굴제국을 세운 위대한 정복자는 칸와에서의 대승 이후 불과 3년후인 1530년 12월에 47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는 사후 아그라에 묻혔으나 9년후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사랑했던 도시인 카불로 이장되었다. ‘바부르의 정원’이라 이름 붙여진 그의 묘에는 이러한 문구가 쓰여져 있다.
“만약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바로 이 곳, 이 곳, 이 곳이로다!”
이로써 티무르의 후예이자 무굴 제국의 창건주는 세상을 떠나고, 그의 맏이이자 태자인 후마윤이 황제의 위를 물려 받게된다.
무굴 제국의 5대 황제인 샤-자한이 세상을 떠난 왕비 뭄타즈-마할을 위하여 지은 타지-마할. 샤-자한의 재위 시절은 무굴제국의 전성기였으나 제국의 통치기반을 만든 것은 3대 황제인 아크바르(Akbar)였다.
바부르가 세운 무굴제국은 17세기에 이르러 전성기에 이른다. 이 전성기의 제국을 다스린 것은 앞서 말하였듯이 타지-마할을 지은 샤-자한 황제이다. 샤-자한은 광대한 영토와 대군을 보유한 제국을 다스린 황제이지만 샤-자한의 통치기반은 모두 그의 조부(祖父)이자 인도 역사상 최고의 명군(明君)으로 꼽히는 무굴의 3대 황제 아크바르가 다져놓은 것이었다.
그 역할에 있어 중국 청나라의 강희제에 비교될 수 있는 인도사의 영웅인 아크바르는 그의 아버지인 후마윤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556년에 아크바르가 황제위에 올랐을 때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크바르의 아버지이자 무굴제국의 2대 황제인 후마윤은 바부르 황제의 죽음 이후 인도 북부의 세력이 다시 뭉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아프간 출신의 셰르-칸이라는 인물에게 패하였고 그 수도인 델리까지 빼앗긴 후 설상가상으로 그의 형제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결국 후마윤은 적들에게 쫓겨 페르시아로 도망치는 굴욕을 감수하여야 했다. 형제들과 셰르칸이 모두 죽은 후 인도로 돌아왔고 인도의 군소 군주들의 동맹을 격파한 후 1555년에 다시 델리를 탈환하였다. 다시 제국이 안정되는 듯하였으나 후마윤은 어느 날 그의 서재에서 나오다가 기도시간을 알리는 무에찐(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후마윤은 황급히 몸을 굽히다가 계단에서 굴렀고 바닥의 돌에 머리를 부딪혀 죽고 말았다. 후마윤 황제의 어처구니없는 급사로 인하여 아크바르는 불과 13세의 소년으로서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후마윤의 총리대신이었던 바이람-칸이 섭정으로서 제국을 다스렸다.
소년 시절의 아크바르
전성기의 무굴제국은 인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제국이었지만 이때의 무굴제국은 아직 그 영토가 북인도 일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한 때 후마윤을 내어쫓고 북인도 대부분을 차지한이슬람 수리 왕조의 왕이었던 이슬람-샤가 죽고 그의 총신(寵臣)이었던 헤무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12세기 이슬람교와 함께 인도 북부에 들어온 아프간인들은 이때 ‘인도인’이 된 상태였고 힌두교도들도 비록 종교는 달랐지만 대대로 살아온 아프간인들을 이웃으로 여기고 있었다. 인도에 살고 있던 힌두-무슬림 ‘인도인’들은 이미 무굴(몽골)인들에 대하여 온갖 나쁜 소문을 뜯고 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무굴(몽골)족의 왕이 들어와 라지푸트와 델리왕국을 때려 부수고 병탄하자 ‘힌두교도들과 아프간인들은 종교가 다름에도 무굴인들을 몰아내는데 힘을 합쳤다. 라지푸트의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이 힘을 합쳐 바부르와 싸운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후마윤을 축출하고 델리에서 권력을 잡은 아프간인 셰르-샤 수리밑에서 총리대신의 지위까지 오른 헤무의 본명은 “헴찬드라 비크라마디트야”이며 힌두교 사제의 아들이었다. 그가 섬기고 있던 셰르-샤가 죽자 셰르-샤의 12살난 아들이 왕위에 올랐고 머지않아 이 소년왕은 아저씨뻘인 아딜-샤 수리에게 죽었다. 아딜-샤 수리는 국정(國政)운영에는 관심이 없는 술꾼에다 난봉꾼이었고 이 때문에 그의 왕국에서는 반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아딜-샤는 결국 수리 왕조에 봉사하면서 능력을 검증받은 신하인 헤무에게 정부의 전권과 군대의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헤무는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왕국의 안정을 이루었으며 이후 아딜-샤가 정신착란을 일으킨 후에는 델리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능했던 아딜-샤가 속된 말로 미쳐버리자 인도 서부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후마윤은 군세를 모아 그가 잃어버린 영토를 찾으려 하였고 1555년에 아딜-샤의 동생인 시칸데르 수리를 완파하면서 잃어버렸던 펀자브와 아그라, 델리를 모두 되찾았다. 그나마 수리 왕조를 지켜낼 만한 능력이 있던 헤무는 벵갈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델리에서 떠나있어 후마윤을 막지 못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샤란 인물이 벵갈에서 일으킨 반란은 1555년 말에 헤무에 의하여 진압되고 반란을 진정시킨 헤무는 군을 다시 이끌고 무굴군과 싸우기 위하여 서진(西進)하였다. 수리 왕조의 대신으로서 북인도를 사실상 장악한 헤무는 군사정치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고 무굴의 장군들은 헤무가 이끄는 힌두-아프간 혼성군을 이기기는커녕 막기에 급급하였다. 그리고 헤무가 본격적으로 힌두스탄(델리와 아그라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진입하려 할 때 무굴의 2대 황제 후마윤이 갑작스런 사고로 급사(急死)하는 일이 일어났다.
후마윤의 급사 이후 무굴의 황위(皇位)를 물려받은 13세의 아크바르는 아직 국정을 장악하기에는 너무 어려 아버지 후마윤 시절부터 무굴왕가를 섬기고 있던 대신인 바이람-칸이 섭정으로 나섰다. 선대 군주가 갑자기 사망하고 계승자가 어릴 경우, 대개는 주변의 신하들이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하고 어린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삼국지]에서 후한 왕조가 망해가는 과정에서도 보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의 문종이 죽자 단종을 둘러 싼 대신들의 소위 ‘황표(黃標)’정치가 이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굴 왕가로서는 다행히 바이람-칸은 충직한 인물이었다. ‘바부르나마’에 의하면 바이람-칸은 무굴인이 아니라 카라-코윤루 부족 출신의 튀르크인이었는데 그는 후마윤이 급사하고 왕권이 취약한 상황에서도 성심을 다하여 정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선대황제가 죽고 나라 안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헤무 같은 강력한 적이 나타나자 바이람-칸과 무굴조정은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였다.
아그라 ‘붉은 요새’의 관문
헤무는 무굴조정이 불안정한 틈을 놓치지 않고 대군을 동원하여 무굴군을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현재의 비하르와 마디야 프라데시 방면의 무굴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황망히 물러났고 특히 수도인 델리를 제외하고 당시 무굴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하고 할 수 있는 아그라를 지키고 있던 이스칸데르-칸 우즈베크는 이후 헤무의 인도군이 진격해오자 두려워서 그대로 도망쳤다고 한다. 비록 한 쪽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라 어디까지 믿어야하는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무굴군이 헤무의 인도군에 밀려 현재 우타르-프라데시 주(州)의 대부분을 내어준 것은 확실하다. 이에 델리지방의 총독이던 타르디-베크는 사태의 위급함을 섭정대신 바이람-칸에게 알렸고 바이람-칸은 휘하의 장군 중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피르-무함마드에게 군을 주어 타르디-베크를 돕게 하였다. 아그라를 점령한 후 델리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던 헤무의 인도군은 1556년 10월 델리 인근의 투그루카바드에서 부딪혔다. 무굴군의 튀르크 기병대는 정면의 인도군을 일제 돌격하여 3천을 죽이고 코끼리 400여마리를 사로잡았다 한다.
그러나 수많은 전근대 군대의 고질병이었던 약탈의 습관이 다시 한 번 살아나면서 승리에 도취된 무굴군은 인도군 진영을 약탈하기에 바빴다. 바로 이 순간이 헤무가 노리던 순간이었다. 헤무는 근처에 매복군을 숨기고 있다가 무굴군이 약탈에 정신이 팔려있든 틈을 노렸고 그 때가 되자 정예 코끼리 부대와 기병대로 전격적인 기습을 가했다. 유능하다던 피르-무함마드는 전투가 불리하여지자 도주하였고 타르디-베크도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투그루카바드에서 무굴군이 크게 패하면서 후마윤이 되찾은 영토의 상당부분이 헤무의 통치하에 들어갔고 헤무는 델리에 입성하여 스스로 왕을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12세기에 북인도를 무슬림들이 차지한 후 처음으로 힌두교도가 델리의 왕좌에 오른 것이다.
델리마저 헤무의 손에 떨어지자 현재 인도 하리아나 주 칼라나우르에 있던 무굴군은 헤무와 싸우기를 거부하고 황제와 섭정대신에게 수비가 용이한 카불로 후퇴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만약 무굴군이 인도에서 물러난다면 창건주인 바부르의 업적을 무위로 돌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바이람-칸은 장군들의 건의를 한마디로 일축하고 다시 싸울 준비를 하였다. 여러 차례 무굴군을 격파하고 델리까지 차지하여 왕으로 등극하는 헤무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에 비하여 무굴제국은 상당한 위기에 몰렸다. 만약 헤무를 꺾지 못한다면 무굴제국은 인도에서 불과 3대도 버티지 못한 단명왕조로서 끝이 날 것이었다.
투그루카바드의 성벽
마침내 1556년 11월에 북인도의 힌두왕 헤무와 아크바르의 무굴군은 파니파트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30여년전 무굴의 창건주 바부르가 이브라힘 로디를 무찔렀던 바로 그 현장에서 다시 신생 제국의 운명이 시험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헤무는 약 3만의 기병과 함께 150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동원하였다. 이 코끼리들은 장갑과 함께 코에 칼날을 달고 있었다고 하며 그 등에는 활을 든 궁수들과 총을 든 사수들이 타고 있었다. 무굴군은 대부분 기병이었고 2차 파니파트 전투는 양군 모두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면대결을 하였다. 무굴군의 선봉군인 1만 기병대는 망설이지 않고 인도군에 돌격하였고 바이람-칸과 아크바르는 8km정도 떨어진 동산에서 전투를 지켜보았다. 사기가 떨어졌다던 무굴군은 의외로 선전을 하였고 헤무의 막강한 군세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아크바르의 전기(傳記)인 ‘아크바르나마’에 의하면 ‘공기 자체가 선홍색의 칼날이 되고 병사들의 칼날이 루비빛이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인도군이 약간 우세를 점하는 싶었지만 쉽게 승부가 나지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 헤무는 빨리 전투의 결말을 보고자 하였고 그의 코끼리인 ‘칼리-베크’를 몰고 그의 친위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돌입하였다. 그는 무굴군의 선봉군 1만이 사실은 무굴군 최정예인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만약 이들을 흩어놓는다면 전투를 결정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을 제외하고 최고 지휘관이 전투에 직접 뛰어드는 것은 사실 삼가야 될 일이다. 병사들이 전투보다는 지휘관의 안위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지휘관도 전투 자체에 매몰되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전투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헤무에게 눈 먼 화살이 날아왔고 헤무의 눈을 꿰뚫고 화살촉이 머리 뒤로 나왔다. 화살에 격중 당한 헤무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지휘관이 쓰러지는 것을 본 인도군의 사기는 급락하였다. 전투는 무굴 쪽으로 기울었고, 인도군은 대부분이 시체가 되었으며 살아남은 몇몇은 도망하기에 급급하였다. 무굴의 장군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헤무를 아크바르 앞으로 데려왔고 헤무는 바이람-칸의 손에 참수되었다. 참수된 헤무의 머리는 카불로 보내져 아크바르가 ‘힌두 왕’을 참수한 증거가 되었고 헤무의 몸통은 델리의 성 위에 매달아 본보기로 삼았다.
헤무가 죽은 뒤 아그라와 델리는 별다른 저항없이 무굴군에게 접수되었다. 델리를 다스리던 수리 왕조의 잔당인 시칸다르 수리가 펀자브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속히 진압되고 시칸다르는 벵갈지방으로 유배되어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비록 헤무의 영향력은 죽지 않아 헤무가 차지하였던 땅을 온전히 제국의 영토로 만드는 데는 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지만 아크바르가 2차 파니파트에서 헤무를 죽였을 때 이미 판세는 결정이 난 것이었다.
제위에 처음 올랐을 때 소년이었던 아크바르는 북인도를 완전히 평정하였을 때는 청년왕으로 성장하여 있었다. 아크바르는 이후 군사, 조세, 행정 등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으로 무굴정부의 체제를 굳건히 세우고 무굴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라지푸트를 비롯하여 이곳 저곳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지만 아크바르는 군을 직접 지휘하여 이들을 진압함과 동시에 반란이 일어난 지역을 위무하여 제국에 원한을 품은 자가 없도록 하였다. 아크바르의 치세 하에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이 공식적인 정책이 되었고 이후 무슬림과 힌두교도들인 수세기 동안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자칫하면 단명왕조로 끝날 수 있었던 무굴제국은 명군인 아크바르의 등장으로 단단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고 타지-마할을 지은 샤-자한의 치세에 이르러서는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인도인들이 종교에 상관없이 찬드라굽타-마우리야와 더불어 아크바르를 인도사 최고의 제왕으로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무굴제국을 세운 것은 바부르였지만 무굴제국을 완성시킨 것은 아크바르였다. 말하자면 바부르는 태조(太祖)였고 아크바르는 태종(太宗)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바부르와 아크바르는 조손(祖孫)이라는 것 이외에도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파니파트에서 싸웠으며 파니파트의 벌판에서 승리함으로 무굴제국 3백년 사직의 시작을 알렸다는 것이다.
첫댓글 역사...
참 좋아요.
제가 가장 젛아하는것 중의 하나가 역사이야기입니다.
이런것도 종전 부탁드립니다.
ㅎ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