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루가 17,11-19)
"Stand up and go; your faith has saved you."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토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남을 중상하지 말고 모든 이를 온유하고 관대하게 대하라고 충고한다. 사람들을 의롭게 하여 구원하신 것은 인간이 행한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말미암은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셨으나 그들 가운데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드린다.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입었으면서도 그렇지 못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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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남을 중상하지 말고, 온순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를 아주 온유하게 대하라고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신다. 그러나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은 외국인 한 사람뿐이다. 믿음으로 사는 이가 예수님께 감사드릴 줄 안다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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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아침 식사 때에 꿀 한 숟가락을 먹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꿀 한 숟가락,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몇 천 마리 벌을 몇 천 시간 동안 날아다니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몇 천 가지 꽃을 피게 하셨고 태양을 비추셨습니다. 비가 오면 벌들이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하늘은 땅에서 열린다』에서). 꿀 한 숟가락에도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이 담겨 있다는 고백입니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알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렸습니다. ‘천형’(天刑)이라고 불릴 정도로 끔찍한 나병이 깨끗이 치유되었으면 머리가 땅에 닿도록 감사드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병이 치유된 아홉 명의 유다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린 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유다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지적하십니다. 천국에 사는 복자들의 주된 기도는 감사 기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감사송’을 바치며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이처럼 감사는 인간이 하느님께 드려야 할 첫째 의무이자 인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기도하며 오늘 하루를 지냅시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주소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저에게 심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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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보기에도 끔찍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높여 청원을 드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병을 천형(天刑)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나병은 인간이 걸릴 수 있는 질병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병이라는 뜻입니다. 최근에는 의학의 발달과 높아진 생활 수준 탓에 나병 환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체가 직접 상처 부위와 맞닿지 않으면 전염되지 않는다는 임상 결과까지 나와서, 나병이 결코 ‘천형’이 아님이 확인되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몸을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몹쓸 병에 걸린 사람이 나으면, 사제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 병은 깨끗이 나았지만, 주님께 감사드리러 온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자신들의 이권만 챙긴 뒤 어디론가 가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면서 구원을 덤으로 주십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이 주님께 감사드릴 줄 알고, 더불어 주님께 구원의 은총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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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한센인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혼혈인이라며 비웃고 이방인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은 감사드리러 왔는데, 정통 유다인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책입니다.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이 한센병보다 나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아홉’은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은혜를 망각하며 산다는 암시입니다. 병이 나은 사람들은 왜 감사를 잊고 가 버렸을까요? 예수님께 갔더라면 또 다른 은총을 받았을 터인데, 왜 그랬을까요? 너무 기뻐서 그랬을 것입니다. 벅찬 감정에 취해 순간적으로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랬더라도 그들은 은혜를 망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그렇게 됩니다. 청할 때의 ‘다급한 모습’을 감추려 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은총에는 감사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더 큰 축복으로 인도됩니다. 감사는 은총을 붙잡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불만이 아홉이고 감사가 하나이더라도, ‘하나’를 기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바뀌게 됩니다. 기쁨이 아홉이고 불평은 하나인데도 불평만을 잡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지요? 언제라도 시각이 삶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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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이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천형의 시인이라 불리었던 한하운의 시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의 한 부분입니다. 일생을 나환자라는 멍에 속에 살다 간 그의 한이 유리 조각처럼 아프게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한과 설움은 오늘날의 현실만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이 병의 출발은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음보다 더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려집니다. 레위기에서는, 그 병의 증상이 나타난 사람이 있으면 ‘7일간 격리 수용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 다시 검진을 받아 병이 진전되지 않았다면 ‘7일간 한 번 더 수용된 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13,4-5 참조).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기에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아픔을 아셨기에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토록 애원한 그들이었건만 은혜를 망각한 것입니다. 너무 기뻐 잠시 모든 것을 잊어버렸을 겁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금이라도 받은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갔느냐?”
- 양승국신부-
<불평불만, 이제 그만!>
언젠가 미혼남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한 가지를 관심 있게 본적이 있습니다. 질문 내용이 ‘내 남자(혹은 여자) 친구, 이럴 때 제일 싫다.’였는데, 그중에 눈에 띄는 상위권 대답이 이랬습니다. ‘대중식당에서 큰 소리로 종업원들에게 야단치고 유세부리는 남자(여자)친구.’
저 역시 대중식당에서 제일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상전도 그런 상전이 없습니다. 종업원들을 마치 몸종 다루듯 다룹니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피곤한 사람들을 제대로 괴롭힙니다. 다른 데서 못 푼 스트레스를 풀기라도 하려는 듯 수시로 불러대고, 이것 왜 짜냐? 저것은 왜 식었냐, 갖은 불평불만들을 털어놓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부터 다짐을 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시키지 않고 직접 가져온다. 주면 주는 대로 먹는다. 절대로 음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다.
참으로 하지 말아야할 것이 ‘불평불만’이란 것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게 쉽지 않습니다. 불평불만이란 것, 한 번, 두 번 하다보면 그게 슬슬 습관이 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입만 열었다 하면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불평불만, 그것은 우리 인류의 역사와 같이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시대 때도 이 불평불만은 대단했습니다. 출애굽 시절을 한번 돌이켜보십시오. 민족의 지도자 모세의 인도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염원이었던 이집트 노예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향해 기쁨의 행렬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자비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섰을 때 홍해를 둘로 가르셔서 그 한 가운데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되었을 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백번 천 번도 더 감사하고 찬양해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몇몇 ‘개념 없는’ 사람들 처신하는 것 좀 보십시오. 즉시 불평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합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빼내왔느냐?” “왜 가도 가도 끝이 없냐?” “이집트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고기에, 술에 산해진미였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지긋지긋한 만나를 먹어야 되나?”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에 하느님께서도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시고 전혀 그러실 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크게 진노하십니다.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정말 싫어하시는 것, 바로 불평불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 치유의 은총을 입은 나병환자들의 모습도 한번 보십시오. 자신들에게 새 삶을 부여하신 예수님, 생명을 도로 찾아준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열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었습니까?
하느님께서 가장 즐겨 받으실 봉헌은 바로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생토록 베푸신 하느님 자비에 대한 우리 인간 측의 응답은 너무나도 당연히 ‘감사’여야 하지 않을까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참 수도자라면, 입을 열었을 때, 즉시 튀어나와야 하는 말이 감사의 말이어야 합니다. 찬미의 노래여야 합니다. 축복의 인사여야 합니다.
가장 많은 불평불만은 대체로 인간관계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말입니다.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러나? 저 사람은 왜 인생 저렇게 사나? 저 사람은 왜 나와 이토록 철저하게도 다른가? 내가 과연 언제까지 저 사람을 참아줘야 하나?
그러나 한번만 생각을 뒤집어보십시오. 한번 크게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선물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진 선물입니다. 한 사람이 내게 온다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입니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입니다(정현종, 방문객 참조).
이웃에 대한 불평불만은 이제 그만 접읍시다.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의 노래로 우리 삶을 가득 채웁시다.
몇 년 전 자동차를 새로 구입했을 때의 일입니다. 제 마음에 쏙 드는 차였고 그래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애지중지했고 매일 차를 깨끗이 닦으면서 저의 애정을 차에게 표시했지요. 그런데 차를 구입한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 청주에 내려갈 일이 있었지요. 전날 눈이 많이 오기는 했지만 그렇게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차는 일반 승용차가 아닌 4륜구동 SUV 차였거든요.
하지만 저의 예상과는 달리 눈길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눈길에 차가 미끄러지면서 제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결국 어떤 집의 담벼락에 제 차가 쳐 박히고 말았습니다. 잠시 뒤, 차 밖으로 나왔는데 차의 상태가 영 아니었습니다. 엔진 부분까지 완전히 박살 나 있었지요. 차 뽑은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착잡했습니다. 새 차가 이렇게 완전히 박살 난 것뿐만 아니라, 또한 제 차에 의해서 파손된 이 집의 담벼락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일이 생길까 라는 원망도 하게 되었습니다.
차가 담벼락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차만 바라보고 있는 제게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이고, 차 박살난 것 보니까 운전사가 크게 다쳤겠어요. 운전사는 벌써 병원 갔어요?”
그 순간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길까 하면서 원망하고 있었지만, 누구나 인정할만한 큰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멀쩡하다는 사실에 먼저 감사해야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감사하기보다는 원망하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다 은총입니다. 괴롭고 힘든 고통과 시련의 순간 역시 잘 생각해보면 감사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쁜 일이 있을 때에는 끊임없이 남의 탓 그리고 주님 탓을 외치면서도,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못했고,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선물 역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치며 은총을 청하는 나병환자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고, 당시 나병은 치유 후 율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 법적 치유 인정이 필요했기에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순간 병이 나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딱 한 사람,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를 표시한 이 사람만이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말씀,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듣게 되지요.
어쩌면 사제에게 먼저 자신의 몸을 보이고 치유되었음을 인정받는 것이 더 우선일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주님께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좋든 나쁘든 어떤 새로운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감사의 표시입니다. 감사의 표시를 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도 덤으로 받습니다.
감사는 가장 세련된 형식의 예의다(J.마르탱).
감사
-정희완 신부-
“사라지는 것만이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그 어디에도 다다를 순 없었다/ 가는 곳까지만 길이었을 뿐” (유하, ‘7월의 강’). 11월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그래서 조금은 황량한 11월의 풍경은 언제나 지난 시간을 다시 되돌아보게 합니다. 11월은 우리들의 죽음에 대한 희미한 예감, 세월이 지나간 흔적에 대한 슬픈 기억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쓸쓸한 애상을 불러일으키는 달입니다. 11월의 느낌은 참 애잔한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생은 언제나 우리를 위한 많은 이들의 사랑과 정성 속에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지난 생은 어머니의 희생과 기도 속에서, 나를 사랑해 준 많은 이들의 정성 속에서 일구어져 왔음을 고백합니다. 지난 내 사제의 삶 역시 결국 신자들의 헌신과 기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참 이기적인 세상에서, 참 이기적 본성을 지닌 우리 인간이 제 힘으로 제 노력으로 사는 것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과 부모와 이웃들의 도움 속에 언제나 서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이 지상의 땅에서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감사의 노래뿐입니다. 11월은 지나온 삶의 시간들에 대해 감사하는, 또 그 삶의 순간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열 사람이 깨끗해졌는데 이방인 한 사람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는 대목에 초점을 맞춰 묵상을 해도 좋겠지만, 전체적 흐름으로는 관상을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과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만나는 장면에 초점을 맞춰 주변의 분위기를 좀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네 분위기를 살펴본다고 할까요, 나병 환자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태도 그리고 나병 환자들 자신들의 몸짓과 표정을 좀 살펴봤으면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과 나병 환자들이 만나는 장면을 좀 세밀하게 봤으면 합니다. 성경에는 그저 말마디만 주고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 그렇게 말만 주고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까이 불러 뭔가 다른 대화들이 오고가고 있는지 등을 봤으면 합니다. 자주 하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이때도 선입견에 사로잡힌 기도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동네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배타성 내지 적개감만 드러내고 있다든지 예수님은 오로지 사랑 가득한 시선으로만 그들을 바라보며 대하신다든지 하는 식의 기도 말입니다. 내용의 맞고 그름을 떠나 기도에 신선한 감동이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병이 나은 나병 환자들 각자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똑같은 사건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단순히 모두 병이 나았다고 천편일률적으로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각자의 처한 상황과 걸어온 역사가 다르고 그런 배경 속에서 일어난 병 나음의 체험들이 각자에게 다른 울림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중 한 명 특수한 예로 사마리아인의 반응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보되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김찬선신부-
“나병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며칠 전 모임에서 오래간만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보자 가라앉아있던 기억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다 해소된 줄 알았는데 기억과 더불어 조금 남아있던 부정적인 감정도 같이 올라왔습니다.
그분은 어찌 보면 저로 인해 인생이 바뀐 분입니다. 그대로 살았으면 어쩌면 폐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이 제 입장에서 볼 때는 배은망덕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저를 반대한다면 저도 이해하지만 정의와 명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분명 감정을 가지고 저를 비판하고 음해하였습니다.
이럴 경우 저는 대체로 그것을 큰 문제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가 부족하여 그리 하기도 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죄와 허물과 악을 통해서도 뭔가를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길 때에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고 이에 대해 다윗 진영의 아비새가 가서 죽이겠다고 하니 다윗은 그를 만류하며 하느님께서 시켜서 그리하는 것이니 그대로 두라 한 것을 떠올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나한테 감사해야 할 너인데 오히려 내 등에 칼을 꽂았지!’하는 생각이 살짝 지난 간 것입니다. 즉시 그런 저를 질책하고 아무 감정 없는 것처럼 그를 대했지만 크게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런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감사를 받으려고 했던 저의 교만과 자기중심성에 대한 반성입니다.
내가 은총과 복을 베푼 것처럼 내가 감사를 받으려고 하다니!
이런 면에서 오늘의 주님은 참으로 올바르십니다. 아니 주님은 참으로 겸손하시고 가난하시며 주님의 올바르심은 바로 이 겸손한 가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외국인 나환자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자 아홉 유대인 나환자가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 한탄을 하시지만 당신께 감사드리지 않음을 한탄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영광 드리지 않음을 한탄하십니다.
당신이 감사를 받지 않고 아버지께서 영광 받게 하심,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완전한 겸손이시고 가난이십니다. 분명 당신이 연민의 정을 품으시고, 당신이 치유해주셨지만 그 연민의 정과 치유의 은총이 당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임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하십니다.
온갖 선은 하느님의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받아 지니면 하느님의 선도 우리가 나누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도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대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기도하는 하루가 됩시다.
반성과 감사 -김찬선신부-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티토서.3,3-5)
남자들은 군대 얘기를 많이 합니다. 군대에서 고생 많이 했다는 얘기. 군대에서 있었던 무용담. 군대에서 있었던 특별한 일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군대에서 이러저러한 경험을 많이 했는데 자기는 그것을 겪어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삼아 또는 적당히 옛날 일을 자랑삼는 것은 삶의 양념이 되겠지만 지나치게 옛날 일을 자랑삼는 것은 허풍일 뿐 아니라 현재의 초라함을 가리려는 가여운 과거 안주(安住)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성실히 그리고 제대로 산 성숙한 사람이라면 지난날의 자기 잘못을 늘 성찰하고 개선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과거를 어떻게 성찰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오늘 바오로 사도처럼 한 때 우리가 얼마나 세속적으로 살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과거에 대한 올바른 성찰은 내가 전에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얼마나 그릇되고 헛된 것들에 빠져 살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현재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고 앞으로도 어리석지 않은 삶을 살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얼마나 잘 못 살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과거를 돌아보며 신앙인인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내가 이렇게 어리석고 잘못을 하였는데도 하느님께서 나를 일깨우시고 인도하셨고 구원하셨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나의 모든 허물과 죄는 성령을 통하여 깨끗이 씻어주시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게 하셨다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네 눈물이 곧 내 눈물>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모습가운데 가장 제 마음에 와 닿는 모습은 아무래도 자비하신 모습입니다. 복음서 곳곳은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백성들 머리 위로 당신 자비의 팔을 펼치셨습니다.
매일 미사 시작 예식 때 마다 우리는 하느님 자비를 청합니다. ‘하느님 자비’라는 말, 생각만 해도 큰 위로가 됩니다. 자비(慈悲)란 너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네 고통을 내 고통으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네 눈물이 곧 내 눈물이란 뜻입니다. 네가 잠 못 이루며 힘들어 할 때 나도 네 옆에서 깨어있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바로 그러하십니다. 하느님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자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멀리서가 아니라 내 가까이서, 내 위에서가 아니라 바로 내 곁에서, 나와 그분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가 되어, 한 마음이 되어 아픔과 고통을 함께 겪는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 등장하는 나병환자들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하느님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의 아픔이 당신의 아픔, 우리의 상처가 당신의 상처, 우리의 울부짖음이 당신의 울부짖음이었던 예수님께서 그들의 외침을 절대로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들이 겪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슬픔을 보십니다. 마음 가득히 차오르는 연민의 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십니다. 당신도 모르게 그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토마스 머튼은 자비를 ‘서로가 서로의 일부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 사이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명철한 의식’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매 순간 살아있고, 매 순간 숨 쉬고 있는 우리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역시 또 다른 존재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비의 실천으로 또 다른 하느님의 얼굴을 그들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비야말로 가장 ‘하느님스러운’ 것입니다. 자비는 가장 충만한 신적 속성입니다. 자비가 자랄 때 우리 내면에서 신성(神性)도 자라납니다. 자비를 왜곡하거나 죽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왜곡하거나 죽이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보물 창고
- 김수만 신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끝기도를 바칠 때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나?’ 하고 되돌아봅니다. 어떤 일은 ‘참 잘했구나.’ 하고 미소를 짓고, 어떤 일은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생각보다는 제 생각이 더 커질 때가 많습니다. 필요할 때만 하느님을 찾는 것은 아닌지 반성합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천사의 안내로 하늘 창고를 구경했습니다. 그러고는 한 창고를 보게 되었는데, 안이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창고가 비어 있는 거죠?” 천사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곳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줄 보화가 가득했던 창고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느라 보화가 가득한 창고가 텅 비워지게 된 것입니다.” 천사와 그 사람은 또 다른 하늘 창고를 구경했습니다. 그 창고는 아까 본 창고와는 반대로 안에 보화가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이곳은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줄 보화가 있는 창고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너무 적어 아직도 이렇게 보화가 쌓여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감사할 일이 많음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돌아온 이는 오직 한 사람,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왜 이방인 한 사람만 찾아왔을까요? 축복의 선물을 받았으면 마땅히 감사드리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요?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릴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빛을 잃어갑니다.
우리 삶, 그리고 우리 삶의 자리, 오늘 하루, 온통 감사할 것투성이입니다.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얼마나 감사드리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감사는 고사하고 내 뜻,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느님께 불평·불만만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요. 제1독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 두 손 모아 감사기도를 해보십시오.
감사하며 살자!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사화입니다. 하나는 치유된 뒤 감사를 드리러 예수님께 왔고 아홉은 오지 않았습니다.
감사드리러 오지 않은 아홉에 대해서 저는 너무 나무라고 싶지 않습니다. 나무라는 마음 대신 애처로운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그 아홉도 감사의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긴 생애동안 병의 고통을 당한 사람으로서 감사의 마음이 없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감사드리러 오지 않았을 뿐일 것입니다. 마음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니 애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는 해도 이 아홉의 경우는 표하지 않을 정도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면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들은 그 정도는 아니기에 감사를 표하러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주 한우리 징검다리들과 강원도로 Workshop을 갔습니다. 그간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여행하는 그런 성격도 띠었기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경치 좋은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면서 저를 비롯한 남자들은 한 번 감탄을 하고 마는데 자매님들은 아름다운 경치가 나올 때마다 매번 감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들은 감탄이 열 번 중 한 번만 넘치는데 자매님들은 감탄이 매번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매번 감탄하시냐?”고 농 삼아 말씀드렸지만 누가 더 행복한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 번을 봐도 열 번을 다 감탄하는 사람과 열 번을 봤지만 한 번만 감탄을 하는 사람. 열 번에 한 번만 감탄이 넘치는 사람보다는 매 번 감탄이 넘치는 사람이 더 충만하게 사는 사람이니 그가 당연히 더 행복한 사람이겠지요.
感자가 들어가는 모든 말은 기울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넘쳐서 나오는 것입니다. 感動, 感興, 感歎, 感情, 그리고 感謝. 이런 것들은 절대로 기울여 나오는 것들이 아닙니다.
기울여 나오면 비어지기 때문에 그 뒤 공허감이 남지만 넘쳐서 나오면 자신도 채우고 남도 채우는 것이 됩니다. 나도 만족, 너도 만족이고 나도 충만, 너도 충만입니다.
그런데 感謝는 感자가 들어가는 그 많은 말들 중에서도 특별합니다. 감사는 은총, 은혜에 대한 감사이기에 감사가 넘쳐 나오는 순간 은총으로 충만해집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 마리아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음은 하느님 손해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그 큰 은총으로도 다 차지 않는 자기 손해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감사를 드립시다. 횟수로는 매 번, 양으로는 넘치게 감사를 드립시다.
감사(Eucaristia)와 구원
-전삼용신부-
송명희라는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소뇌를 다쳐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습니다. 몸의 성장발육이 느리고 연약하여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그렇듯이 얼굴과 몸이 비틀어져 거울을 보기도 싫었습니다. 몸이 그래서 초등학교도 가지 못해서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수차례 반복되는 이사와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을 보면서 그녀는 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때 하느님은 ‘말하는 대로 써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왼손에 토막연필을 쥐고 받아 적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느님이~”
그녀는 너무 어처구니 없는 말씀에 울며 소리쳤습니다.
“아니요! 못 쓰겠어요! 공평해 보이지가 않아요! 내겐 아무 것도 없어요!”
하느님은 ‘시키는 대로 공평하신 하느님이라 써라!’ 하셨고, 그녀와의 반복되는 공방전 속에 결국 하느님이 승리하셨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렇게 ‘나’라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사로 한국 복음성가 작사대상을 수상하고 그녀의 책도 기독교 저서 최우수 서적으로 선정되었으며 지금은 장애인 학교 건립을 추진 중이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 열 명 중에 유일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치유해 주신 것이 곧 그 사람들의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돌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렸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예부터 나병은 죄의 상징이었고 나병을 치유해주시는 것은 세례로 상징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다는 보증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때 비로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송명희 씨는 비록 개신교 신자지만 우리에게도 큰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그녀를 바뀌게 한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것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변화시킨 것은 ‘하느님의 공평함’을 어렵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찬미 하면서부터 였습니다.
가끔 미사시간에 신자들의 얼굴을 보면 억지로 나와 있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분들을 의외로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미사는 파견한다는 뜻이 있고 동시에 ‘감사(Eucaristia)’의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감사의 찬양을 드리지 않으면 미사가 아니고 다른 이들이게 주님을 전하려는 사랑이 없다면 미사는 그 사람에겐 헛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미사는 오늘의 치유 받고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미하기 위해 제대 앞에 모이는 이는 비로소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하기가 얼마나 인색하고 어렵습니까?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았다고 느낄 불행한 순간에도 감사가 나온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의 찬가를 지어 자연과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시는 그 분이 눈이 멀어 보이지 않을 때였다고 합니다. 눈이 멀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 분을 찬미하였기에 성인이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문구를 보았습니다.
“‘우리’라는 선물을 주신 그대, 사랑합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배우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바로 관계입니다. 말을 못 해도 엄마가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찬미도 바로 이래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 하나만으로 능히 찬미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라는 선물을 주신 하느님과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봅니다. 그분이, 그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도록 합시다.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회색 빛 나날들>
-양승국신부-
돌아보니 제 "신앙생활"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여행길이었습니다.
산행을 하다보면 평탄하고 호젓한 오솔길을 걸을 때가 있는가 하면 가파른 오르막이나 아슬아슬한 절벽 사이를 기어갈 때도 있지요.
지난 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로 희망과 설렘으로만 가득 찼던 맑은 날이 있었는가 하면, 답답함과 좌절과 쓰라림뿐이었던 회색빛깔의 나날들도 많았습니다. 아버지와 이웃들 앞에 떳떳하고 의기양양하게 살아가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쥐구멍으로 들어가고만 싶었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절실하고 감미로운 하느님 체험으로 가슴 뛰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과연 하느님이 계시기는 하는가? 이게 도대체 뭔가?"하며 막막해하던 시절도 많았습니다.
제 신앙여정 안에서 참으로 피하고 싶었던 불행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봅니다. 물론 그 순간은 현실적으로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제 삶 전체가 뒤흔들렸던 위기의 순간들이었지요. 어떤 체험들은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떠올리기조차 싫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조금씩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좌절의 순간이야말로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좌절의 순간이야말로 제 삶 안에 큰 쉼표를 찍게된 보물과도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불행했다고 여겨지던 그 순간이 비록 육체적으로 괴로웠지만 제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바라다 볼 수 있었던 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병고의 십자가를 지고 가던 순간이야말로 진한 하느님의 은총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희망과 구원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한평생 나병으로 시달리던 사람들을 말끔히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언제나 인간의 병고를 모른척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함께 아파하며 함께 고통 당하시며 함께 눈물 흘리시는 연민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고통 당할 때, 거듭되는 실패 속에 헤맬 때도 우리가 결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한가지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를 외면한다할지라도 예수님 그분만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간다 할지라도 그분만은 끝까지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결코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통 안에 계심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노화마저 거부하지 않습니다. 봄이 오면 고목의 등걸에서 연녹색 푸른 싹이 돋아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마저도 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마저 물리치셨음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상지종신부-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나병 환자들은 예루살렘의 사제들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아야만 정상적인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사제들에게 자신의 깨끗한 몸을 보여 줄 날만을 고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살 수 없었던 나병 환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을 억눌렀던 온갖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었으며 복음(기쁜 소식) 자체였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더 이상 예수님 앞에 머무를 이유는 사라졌습니다. 모든 멍에를 벗어던지고 온전한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사제에게로 달려갑니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나병 환자들은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사제에게 달려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달려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곧 나병의 치유라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사제들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었는지, 그들은 자신이 온전히 나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사제들에게 달려만 갔습니다.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똑같이 나병을 앓았고 치유의 은사를 받았지만, 한 사람은 예수님께로, 다른 아홉 사람은 사제에게로 향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서로의 길이 갈립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굴레를 벗겨 준 해방자에게로 달려감으로써 가장 가까이에서 참 해방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당장의 현실적 이익을 향해 달려감으로써 해방자에게 멀어집니다.
한 순간의 일입니다. 한 순간의 선택입니다.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지금까지 온 몸으로 겪어야 했던 굴레를 벗어버렸다는 해방의 기쁨에 그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이 해방의 기쁨을 온 몸으로 체험했기에 더 완전한 해방, 총체적인 해방을 향하여 나아갈 것인가?
머리로서는 명확하게 대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으로 결단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더욱 충만한 내일을 향해 얻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당장의 편안함과 이익이 너무나도 아쉽기 때문입니다.
"너는 과연 어디로 달려갈 것이냐?"
"너는 과연 지금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느냐?"
오늘 주님께서 던지는 화두입니다.
로또를 좋아하는 어떤 형제님이 계셨지요.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매주 토요일 저녁에 복권을 손에 쥐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인생은 한방이야.”를 읊조리면서 당첨번호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복권을 사서 당첨번호를 확인하는 것을 이 형제님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것 역시 일반 사람들의 취미 활동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지요. 또 만약에 당첨이 되면 그야말로 ‘인생역전’을 이룰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들이 울상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글쎄 시험을 빵점 맞아서 선생님으로부터 혼났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아들의 시험지를 받아들었지요. 그리고 그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험문제는 이러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적어보시오.”
이에 대한 아들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인생은 한방이다.”
나의 잘못된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와 나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분명히 나의 행동은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분명해 집니다.
먼저 하느님께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도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풍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가 있으며, 다시금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하고 그래서 늘 사랑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10명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다시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사람. 그것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한 명 뿐이었습니다. 9명의 유대인은 자신의 치유가 마치 받을 빚을 받은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치유받은 이방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임에 감사하며 주님 앞에 엎드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육체의 치유만이 아닌, 영혼의 구원까지 얻게 됩니다.
10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누가 다른 이의 모범이 될까요? 바로 단 한 명의 치유받은 이방인이 우리의 모범이 되고, 우리 역시 이러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살 때 영혼의 구원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모범을 보이며 살고 있을까요?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도록 합시다.
E.T.라도 감사해요
- 임영인 신부-
한센병을 겪은 것처럼 코가 없고, 한쪽 눈과 눈썹도 없고, 입술이 뒤틀린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E.T.할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채규철 선생님입니다. ‘E.T.할아버지’라는 말은 ‘이미 타버린 할아버지’라는 뜻이랍니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덴마크에 유학 가 선진 농업기술을 배워 돌아온 뒤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던 가슴 뜨거운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언덕에서 차가 굴러 폭발하면서 전신 3도 화상을 당해 얼굴이 도깨비처럼 변했습니다. 한창 나이인 서른한 살 때였습니다. 2년 뒤에는 아내마저 쇠약해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삶은 절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식당이나 다방에서 거지 취급을 당하고 버스 승차를 거부당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원망스러워서 자살하려고 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를 살리신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주님 뜻에 순종하며 살자.’ 그 후 채규철 선생님의 삶은 변했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피고름이 나던 머리에서 새 머리카락이 돋아나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일그러진 얼굴을 머리카락이 조금이라도 가려 줄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귀가 없어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한쪽 눈을 잃었지만 남은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했고, 입술이 없어졌어도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청십자 운동을 하고, 간질 환자들을 위해 활동 했으며, 86년에는 아이들을 위해 두밀리 자연학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강연을 했는데 그때마다 감사의 전도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뿌린대로 거두리라
-조명언신부-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 좋은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돈이 많았지만, 정이 많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을 했지요. 그런 그가 어느날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목수를 불러 집을 좀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우리 부부가 3개월쯤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최상의 건축재료와 초일류 목수를 총동원해 멋진 집을 지어주세요. 건축비를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고 주인이 여행을 떠나니, 목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요. 그리고 그는 싸구려 건축자재와 형편없는 인부를 동원해서 날림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건물을 다 지었어요 구멍이 나고 금이 간 곳이 생겼지요. 이런 부분은 페인트칠로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드디어 부탁을 했던 부자가 돌아왔고, 목수는 부자에게 열쇠를 주며 이렇게 뻔뻔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집을 지었어요."
그러자 부자가 목수에게 그 열쇠를 다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집은 내가 당신 가족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바로 그 순간 목수는 땅을 치며 후회를 했지요. 그는 자기에게 돌아올 집인지도 모르고, 단순히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엉터리로 건물을 지었으니 말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지요. 즉,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기교를 부리는 사람들은 결국 낭패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서 은혜도 모르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다가 10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십니다. 그들 중에 아홉은 유대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나병이란 불치의 병으로 뭇사람과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소외를 당했겠지요. 따라서 그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서 예수님께 외치지요.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의 불행을 가련히 여기시어 나병을 낫게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들은 모두 깨끗해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치유받은 아홉 명의 유대인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한 사람만이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만이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왜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은혜도 모르는 짓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율법에는 나환자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환자였던 자신들과 접촉한 예수님은 이미 부정해진 것이지요. 그런데 부정해진 예수님을 만나면 그들 자신이 또 다시 부정해 질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병이 나기 전의 유대인들의 완고한 마음으로 다시 되돌아간 것이지요.
이 모습이 혹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지만, 우리 자신의 편리와 이해타산으로 인해 다시금 멀어지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온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홉 명의 유대인처럼 단순히 병의 치료만 될 뿐,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겠지요. 앞서 그 가난한 목수처럼 나에게 돌아올 것도 그냥 차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끊임없이 치유를 받아야 할 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과 이웃에게 죄인임을 고백하고, 굳은 믿음으로 주님의 자비를 간청해야만 합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생각과 말과 행위의 십일조
-이인옥-
오늘 한 말 중에 고맙다는 표현은 얼마나 되나? 한 달 동안 한 일 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일은 얼마나 될까? 올 한 해 사람들에게 받은 호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 이제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 은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일생 일어난 일들 중에 감사드릴 사건은 무엇인가?
하루 종일 한 말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표현을 하고 살았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한 달 내내 한 일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마음으로 했어도 지금보다 훨씬 즐겁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일 년 동안 만났던 분들의 고마움을 십분의 일만 되새겨 잊지 않았어도 지금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에 은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면 그만큼 마음이 겸손하다는 증거다. 정말로 은인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살아오는 동안 감사드릴 일이 너무도 많아 손꼽을 수 없다면 그만큼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이다. 정말로 감사할 일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우리는 생각의, 말의, 행동의, 시간의 십분의 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
치유된 나병환자 열 명 중에 감사한 사람은 겨우 십분의 일, 단 한 명이다. 그런데 육신의 치유에 감사할 줄 알았던 그 한 명에게는 영혼의 구원까지 덤으로 주어졌다. 작은 감사가 더 큰 감사를 불러온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동안 행복해진다고. 감사할 일이 많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써 더 많이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그러니 행복하고 싶다면, 구원받고 싶다면 ‘적어도’ 우리 일생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하지 않을까? 나머지 아홉은 그만두고라도.
참된 치유
-서현승 신부-
미국의 한 언론사가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당첨 이후의 삶을 조사해봤더니, 당첨된 사람들은 당첨금을 받은 이후에 거의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마약에 빠지고 도박에 빠져서 가정이 파탄 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더랍니다. 그런데 복권에 당첨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반대로 아주 행복하고 건실하게 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그들에게는 비슷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복권 당첨금의 상당 부분을 사회단체에 기부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 도와주는 삶을 사는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 중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고 구원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똑같이 치유를 받고나서도 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까요? 결국, 육체적인 나병의 치유가 그들 삶의 목표였기 때문이죠. 복권에 당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상시 간절히 바랐던 것이 돈 자체였고 갑자기 행운의 돈이 생기자 그 돈을 가지고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병환자 아홉 사람도 육체의 치유를 통해 그들 삶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었던 나병환자만 병을 치유해준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분께 감사드리고자 찾아와서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는 믿음을 통해 이제는 몸만이 아니라 나병환자로서 살았던 삶까지 치유를 받습니다. 참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감사의 정을 드리는 정도가, 영혼이 건강한 정도입니다”
-홍성만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어떤 마을에 들르십니다.
마침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집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으로 구원된 사람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입니다.
다른 아홉은 몸은 깨끗해졌지만 구원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영혼의 나병이 치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사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영혼의 나환자들입니다. 그들은 부족한 작은 것에 집착한 나머지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그런 나머지 주어진 큰 은혜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혹시 나도 부족한 작은 것 때문에, 크신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감사의 정을 드리는 정도가, 영혼이 건강한 정도입니다.
감사의 정을 잊지 않는 매일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평범한 일상에서의 감사 -이강건 신부-
오늘 복음은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할 줄 아는 한 사람을 등장시켜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이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을 얼마나 무감각하게 보내는지를 또한 알려준다.
마태오복음 5장 43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전해준다. 즉 세상사람들에게 똑같은 배려와 똑같은 사랑을 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며 그러나 이에 감사하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리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병이라는 큰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이 치유되었다면 몸의 변화를 매우 크게 체험했을 것이다. 문드러지던 몸이 낫는다는 것은 매우 큰 변화이다. 그뿐 아니라 나병환자들의 비참한 삶에서 정상인의 삶으로의 변화 또한 매우 큰 변화이다.
나병환자들은 숨어서 생활해야 했고, 정상인의 삶의 터로 내려와 거리를 다닐 때에는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쳐야 했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쳤던 그들의 신세는 주님을 만나면서 더 이상 부정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 이런 매우 큰 변화를 체험했으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면 얼마나 그들의 삶이 무감각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묵상할 수 있는 내용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듯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신다.
오늘 복음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이방인을 부각시킴으로 신앙인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계시는 것이다. 이웃을 이웃으로 받아들였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감사할 줄 알았던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신앙을 가졌다
는 신앙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감사의 생활에서도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 더 뛰어났고, 이웃을 받아들이는 이웃 사랑에서도 그들이 더 모범적이었다. 이런 내용을 알려주면서 신앙인인 우리들에게 더 분발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이제 신앙적 감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주 큰 변화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 스도인들은 평범한 일상 안에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열 명의 문둥병자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루가 17:11-19]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줄 알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교훈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레아 사이를 지나시다가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에는 이상하게도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천시해서 그들을 상종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고 피하는 것이 마치 그들에게 공노가 되는 것처럼 멀리하는 처지였는데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사마리아인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공통적인 불행에 처하게 되면, 서로가 "사람이다"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중요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문둥병이라는 비극 속에서 서로가 고통받는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을 뿐, 유대인이라든가, 사마리아인이라는 구별을 잊어버리고 함께 같은 처지를 마음 아파하면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서로도 하느님 앞에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의식하고 있을 때, 타인을 멸시하거나 할 수 없고 서로를 용서하고 함께 손을 잡고 살 수 있으며, 진정한 기도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사람이 어떤 은혜를 누구에게 받은 다음에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즉, 복음서 가운데 이 장면에서처럼 인간의 배은을 신랄하게 묘사한 곳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고 못견디게 부르짖었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사제들에게 자기 몸을 보이러 가는 도중에 낫게 해 주셨다. 그런데 자신들이 평생의 절망이요,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과 같은 그 무서운 문둥병에서 해방시켜주신 은혜를 모두 받았으나, 은혜 받은 것을 알았을 때, 예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유대인들이 아니고, 죄인이라고 멸시 받아왔던 사마리아인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 은혜 받은 적이 없는가? 받았다면 얼마나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만큼 있는가? 누구는 그럴 것이다. 내가 하느님 덕본 것이 무엇이 있기에 그분에게 그토록 감사할 것이 있는가? 나는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여유있게 살아가는데, 그분의 도움도, 그분께 감사할 것도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그러한 자신이 자신 만만한 존재인가? 자신의 살아있는 목숨부터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처지에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감사가 먼저입니다
-장재봉 신부-
하느님의 자비가 풍요로우심은 생각할수록 놀랍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 하느님께서는 약자를 ‘편애’하신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탈출 22,22)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오늘 치유를 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 가운데 아홉 명은 아마도 사제에게로 갔을 것입니다. 그것은 틀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일러주셨으니까요. 열에 아홉은 다수결 원칙에 따르면 우위입니다. 열 가운데 아홉이 원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곧 옳은 것이고 정의라고 믿는 것이 세상의 잣대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에 하나에 불과하지만 먼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잣대가 세상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외롭고 때로는 고독합니다. 하지만 소수일지라도 그것이 변치 않으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일이라면 강합니다. 절대 꺾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믿음의 힘입니다. 오늘 홀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셨는지요? 그리고 무엇을 감사하셨는지요? 그분께 엎드려 감사할 것이 지금, 이렇게 온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우리들이 허공만 쳐다보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곤란하지요.
수험생을 위한 기도
-임종심-
우리 성당 근처에 입시학원으로 유명한 종로학원이 있어서인지 주일날 청년미사에 수험생들이 많이 온다. 본당 신부님과 종로학원에서 가르치는 두 분 신자 선생님의 도움으로 4년째 수험생을 보살피고 있다. 고해성사도 보고, 냉담하는 수험생들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봄에는 삼겹살 파티도 한다. 매년 수능 전날 미사에서 수험생들에게 일일이 안수해 주고 십자가나 기적의 패를 목에 걸어준다. 미사 후에는 구역에서 정성껏 준비한 저녁식사를 수험생들과 함께 나누며 1년 내내 수능이라는 굴레에서 마음 졸이고 힘들어한 그들을 격려한다. 시험이 끝나면 모두 뿔뿔이 떠나겠지만 결코 이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일 수능을 치를 수험생들의 마음이 무척 초조하고 불안할 것이다. 지금 수험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침착하게 시험 잘 치르고 그동안 노력한 모든 수고가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라며 수험생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지혜라는 큰 복을 주신 주님! 모든 수험생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수능을 준비하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장차 미래의 큰 일꾼이 될 수험생들이 수능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여여(如如)한 마음으로 큰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볕돋?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감사하는 삶
-강영구신부-
그들 중 한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루가 17,15-18)
사랑하는 예수님,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까지 나음을 받고 새 삶을 시작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입니다. 그는 감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상처는 치유 받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병들어있습니다.
감사는 행복과 기쁨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하면 행복합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에 감사하고, 잠을 깨우는 새소리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음에 감사하고, 곱게 물든 나무 잎과 아름다운 국화 때문에 감사하고, 계절의 변화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 우리 삶은 행복하고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불평과 불만은 불행과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괴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불평하고, 밝아오는 새날을 어떻게 살까 염려하고 걱정하며 투덜대고, 가까이 있는 가족과 이웃을 귀찮아하고, 떨어져 수북이 쌓이는 낙엽 때문에 투덜대고, 국화가 너무 아름답다고 불평하고,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고 투덜대면 사는 것이 괴롭고 불행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살5,16-18) 인생은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유일회적인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늘 행복합니다.
예수님,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초대해주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一明)
감사에 더디고 파티에 익숙한 우리들
-박상대신부-
예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신 오늘 복음의 기적사화는 루가복음만의 고유한 사료이다. 루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를 엮어가면서, 예수께서 상경 길에 있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9,51.53; 13,22.33; 17,11; 18,31; 19,11.28) 뿐만 아니라 베레아 지방을 통해 가시면서 오늘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지방을 언급한 이유는 나병환자 열사람 중에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나간 복음들에서 드러났다. 애당초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 상경계획을 잡았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를 제자들이 꼽게 여겨 하늘의 불을 내려 태워버리자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초연히 우회로를 택하셨다.(9,52-56)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10,29-37)에서도 예수님의 호의적 속내가 드러난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열 사람의 치유사화에서도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이 돋보인다.
구약성서에서는 사제들이 나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악성 피부병들을 부정함으로 규정하고 그 환자들을 격리시켜 살게 하였다. 그들이 완치되었을 경우, 자신의 피부를 사제에게 보여 정함으로 인정받아야 했다.(레위 13장) 사제가 정함을 선포하면 병이 나은 자는 사제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의 장막에서 복잡한 ‘정화예식’을 치러야 했다.(레위 14,2-14) 하루도 아니고 8일씩 걸리는 이 예식이 얼마나 복잡하고, 사실 골치 아픈 것인지는 레위기의 이 대목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 이 대목을 읽고나면 나병환자 10명 중에서 유대인이었던 9명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악성 피부병자들이 마을 중심과 격리된 어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마을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치유의 자비를 청했다. 사실 예수께는 어떤 병이든 치유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이 사제들로부터 치유를 인정받고 공식적인 정화예식을 치름으로써 가족들과 함께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사제에게 가는 도중에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10명중에서 9명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이 나병환자로 격리되어 지내는 동안 살아서는 결코 그들 가족과 동족에게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낫게 된다면 율법이 규정하는 ‘정화예식’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 예식을 치러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수백 번을 뇌까렸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치유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더 힘차게 사제들에게 달려갔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바로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수께로 돌아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제대로 치유를 받은 사람이 된 것이다.
과연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법(法)이 사람을 깨끗하다고 선포한다 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인가? 깨끗하고 흠 없이 산다는 것은 사람의 인정을 받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삶이다. 정화예식은 천천히 치러도 늦지 않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발걸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자신의 길을 가야 하시는 것이다. 오늘 9명의 유대인들 속에서 찬양과 감사에는 더디고, 축하파티에는 잽싸고 익숙한 우리들 자신을 본다. 감사와 찬양에는 정한 날 없이 미루고, 파티와 회식과 약속에는 열 손가락이 모자라는 우리들이 아닌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두 배의 기쁨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