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미디어, 문화예술, 영화
충무로, 새로운 물결
기획영화에서 한국독립영화협회까지
성하훈 지음|푸른사상 예술총서 31|147×217×21mm|456쪽
38,000원|2023.9.30|ISBN 979-11-308-2089-7 04680
ISBN 979-11-308-2087-3(세트)
■ 도서 소개
충무로로 상징되는 한국영화 헤게모니 다툼의 역사
성하훈 기자의 한국영화운동사 제2권 『충무로, 새로운 물결』이 푸른사상사의 <푸른사상 예술총서 31>로 출간되었다. 1980년대 후반 정치·사회적 억압에 맞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사회변혁을 꿈꾸었던 영화인들을 조명하여 영화 운동의 흐름을 직접 취재하고 정리했다. 제2권에서는 당시 재야 영화로 불리던 지금의 독립영화인들이 충무로라는 제도권으로 옮겨와 기존 충무로 기득권 세력들과 대립하면서 한국 영화의 주류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프로듀서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한 기획영화에서 독립영화의 역량을 하나로 모은 한국독립영화협회의 결성 과정까지, 한국 영화 운동의 주요한 사건과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저자 소개
성하훈
영화 저널리스트. 2000년 오마이뉴스가 창간한 직후부터 기고를 시작했다. 영화역사와 영화정책, 영화산업,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영화제 등에 대한 심층 기획 기사를 주로 쓰고 있다. 지역신문, 간행물 등에 글을 보내기도 한다. 2018년 가톨릭영화제 심사위원, 2022년 5·18영화제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 목차
▪책머리에
01 개혁의 대상에서 연대의 대상으로
충무로로 넓힌 새로운 전선
한국영화 뉴웨이브 등장
영화법을 개정하라!
영화제작소 청년의 <어머니, 당신의 아들>
02 충무로 헤게모니 경쟁
기획영화와 프로듀서 시스템
대종상, 충무로 구체제와 영화운동의 충돌
부산국제영화제의 태동
영화 해방구 선언한 부산영화제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과 신구세대 결별
03 지역의 영화운동
광주 영화운동
대전 영화운동
대구 영화운동 1:영화언덕-제7예술-아메닉
대구 영화운동 2:대구독립영화협회
04 한국영화 성장의 주춧돌
한국독립영화협회의 결성
한국영화 세계화 발판, 영화운동
한국 영화운동의 개척자 홍기선을 기리며
▪에필로그
▪엔딩크레딧
▪찾아보기
■ 책머리에 중에서
영화를 운동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영화는 대중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종합예술이라고 하나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매력이 다분했다.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회변혁 운동의 도구로서 작용하길 바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화를 통해 약자들을 조명했고, 사회현실에 부딪쳤으며, 정치 권력에도 저항하면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려 도전했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던 이들은 노력은 하나둘 결실을 맺으며 자연스럽게 1980년 이후 한국 사회변혁 운동에 일조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들은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충무로로 상징되는 한국영화의 핵심을 이제는 초기 영화운동에 나섰던 이들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국 영화운동사는 바로 이 영화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2019년 한국영화는 100년을 맞이했다. 여기에 더해 한국 영화운동 40년을 맞는 해이기도 했다. 1979년 말에 시작된 영화운동은 한국영화의 전환을 이룬 중요한 계기가 됐다. 40년의 세월 동안 영화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시대에 맞섰던 사람들의 노력은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한국 영화운동 취재에 들어간 계기는 단편적으로 알려진 한국 영화운동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서였다. 개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파편화돼 전달되는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에는, 그 시대 한구석에서 관객으로 바라봤던 경험이 작용했다. 지난 시간의 정리가 늦어질수록 정리하는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옛말처럼 한국 영화운동에 대한 저술은 곳곳에 흩어져 있던 구슬을 수집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중략)
시기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 전후부터 2000년 전후까지로 잡았다. 1980년 얄라셩 이후 1982년 서울영화집단, 1983년 서강대 영화공동체, 1984년 부산씨네클럽, 1985년 대학영화동아리 결성, 1986년 파랑새 사건 등으로 매해의 의미가 40년간 이어지고 있다.
■ 추천의 글
우리들이 경험한 영화의 시간이 기적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책
한국영화에는 몇 번의 탄생과 굴절이 있었다. 그 긴 흐름 가운데 198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한국영화는 특별한 발아와 생장과 꽃피움의 과정을 보여왔다, 고 생각해왔다. 주어는 “나”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이는 나만이 아닐 것이다. 성하훈 기자는 그 과정을 대하드라마와도 같은 두 권의 책으로 그려냈다. 정치적 경제적 억압에 짓눌려 있던 영화라는 매체, 예술이 동토를 뚫고 여기저기서 솟아올라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숲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들이 경험한 영화의 시간이 일종의 기적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기록물이다. 역사와 현실로부터 영화를 격리시키려 하던 권력과 싸우던 영화청년들의 등장과 시대의 영화적 갈증을 증언과 기록으로 생생하게 살려냈는데, 놀랍다, 이건 참으로 세밀화로 이뤄진 대형 태피스트리이다.
― 안정숙(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한국영화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훌륭한 안내서
성하훈의 『한국영화운동사』는 그가 지난 20여 년 동안 만났던, 영화계 안팎의 수많은 이들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억이란 개개인이 그저 간직하고 있을 때는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개인들의 기억을 모으고 맥락화하는 순간, 의미 있는 역사로 재탄생될 수 있다. 이 책은 성하훈 기자가 만나고 경청하고 때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구술의 시간들에, 꼼꼼한 팩트 체크와 사료 정리가 덧붙여져 통합적인 역사 서술로 완성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 또한, 다각도에서 불처럼 뿜어져 나왔던 그 시절의 영화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또 하나의 영화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한다. 『한국영화운동사』는 지금의 한국영화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훌륭한 안내서이다.
― 이용관(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영화운동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한국영화의 역사를 논의할 수 없다
21세기 한국영화의 뿌리에는 20세기 후반 30여 년에 걸친 영화운동의 역사가 있다. 그러한 영화운동에 대한 이해 없이 한국영화의 역사를 제대로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저널리스트의 집요함, 아키비스트의 꼼꼼함, 그리고 역사서술자의 사명감으로 무장한 성하훈 기자의 역저 『한국영화운동사』는 미래의 연구자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 김홍준(한국영상자료원장)
■ 출판사 리뷰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종합예술의 하나인 영화가 사회변혁 운동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화를 통해 정치적·경제적 권력에 저항하면서 부당한 사회현실을 조명하고자 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한 이러한 노력은 군사 쿠데타와 독재정권 등으로 인해 혼란했던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변혁 운동에 일조하면서 한국영화의 성장에도 크게 기여하게 된다.
저자는 한국 영화운동에 앞장섰던 그 현장을 직접 취재해 당시 영화인들의 증언과 기록을 통합적으로 되짚어 『한국영화운동사』를 두 권으로 정리했다. 시기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 전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다. 첫 번째 권인 『영화, 변혁운동이 되다』에 이어 두 번째 권인 『충무로, 새로운 물결』에서는 기획영화의 시작부터 광주와 대전, 대구 등 지역의 영화운동, 부산국제영화제의 탄생 과정. 한국독립영화협회 결성까지 한국영화가 거쳐온 주요한 과정을 담아냈다. 기존에 알려진 내용보다는 이면의 이야기에 집중해 숨겨진 이야기들을 많이 발굴했다. 영화인 인터뷰 등 세세한 취재를 바탕으로 기존 기록과 대조해 사실 확인을 꼼꼼하게 했다. 영화인들이 직접 제공한 사진들도 다수 수록되어 당대 모습을 생생하고 다양한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
1985년 영화법 개정은 영화운동의 입지를 넓히는 발판으로 작용한다. 독립프로덕션이 만들어질 수 있었고, 충무로에서는 젊은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기획영화 시대가 열린다. 충무로 세대교체의 출발이었다. 기획영화는 소재의 다양성을 추구하며 한국영화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게 되었다. 1990년대 전후로 연우무대 등을 중심으로 한 연극배우 출신들이 영화 매체로 옮겨오기 시작한 것도 변화였다. 대표적인 배우로 송강호가 있는데,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 송능한 감독의 <넘버 3>를 통해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1990년대 초반, 영화운동을 해온 젊은 기획자나 감독의 작품이 주목받은 것은 사회변화 흐름을 잘 접목한 덕분일 것이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약화된 검열과 새로운 소재, 예술적 감각, 여기에 더해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아내면서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이를 기반으로 한 부산국제영화제의 시작은 한국영화를 한 단계 성장시켰다. 이렇듯 영화운동이 한국영화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었다. 민주화의 영향으로 표현의 자유 확장을 위한 시도들이 잇따랐고,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영화인들의 단결된 목소리들이 공개적으로 표출됐다. 1980년 출발한 한국 영화운동은 20여 년의 시간 동안 많은 성과를 나타내며 충무로의 환경을 크게 변화시켰다. 지금 한국영화를 논할 때 이 시기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 책 속으로
영화법에 문제의식을 나타낸 것은 1980년대 초반 영화운동에 나선 청년들이었다. 서울영화집단의 홍기선(감독)은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에서 “1960년대 이래 영화의 숨통을 누르는 영화법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고, 거기에 성적인 표현의 검열 완화가 주어졌다”며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 영화를 제한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포르노로의 타락한 길로 영화를 충동질한 격이었다”고 비판했다. “영화운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선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현행 영화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서울영화집단을 비롯한 영화청년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78쪽)
하지만 국가보안법과 마찬가지로 박물관의 유물이 돼야 할 검열의 악령은 여전히 창작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었다. 검열 논란이 크게 불거진 것은 1997년 4월 18일~22일까지 열린 2회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였다. 1회 Q채널다큐멘터리영상제에서 이름을 바꾼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는 당시 삼성영상사업단의 다큐멘터리 전문채널인 Q채널에서 주관했다. 논란의 출발은 천안문 사태를 다룬 <태평천국의 난>이었다. 개막작으로 선정됐으나 상영이 취소된 것이다. 영화제를 주관했던 삼성 측은 배급권과 관련해서 발생한 문제라고 얼버무렸으나 중국에서 진행 중인 사업을 고려해 중국 정부의 압박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태평천국의 난> 감독 겸 제작자인 리처드 고든과 카마 힌튼은 성명서를 통해 “영화제는 전 세계적으로 지배적인 해석에 도전하며 강력한 기득권을 위협하는 독립영화를 관객들이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공간으로 영화제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 자기검열을 하게 되면 관객들도 변화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라고 유감을 표명했다. (228쪽)
영화운동은 한국영화의 중추적인 감독들을 키워낸 근원이자 발판이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된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고, 2000년대 한류 확산에 크게 이바지하면서 한국영화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1980년대 전후 영화에 관심 있던 젊은이들이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에서 영화를 보고 대학에서 영화동아리를 만들었다면, 1990년대에 들어서는 대학 안에서의 창작 시도와 다양한 영화제, 시네마테크 활동 등이 곁들여지며 영화에 빠진 청년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영화라는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게 한 것이었다. (4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