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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0장 34-38절, 마태복음서 18장 15-20절, 빌립보서 1장 3-11절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평화통일주일, 성령강림후 열한째주일)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지난 두 주간 우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본질적인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나 자신을 세상의 다른 어떤 기준이나 정체성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 분명히 인식하고 그 마음을 잘 간직할 때, 우리는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교단이 제정한 ‘평화통일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세 본문을 통해 각자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가며 살아가야 할지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배우고 있고, 매일 기도 묵주를 통해 묵상하고 있는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청원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의 세 청원입니다.
이 세 청원을 드릴 때 마다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게 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완전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완고한 우리 인간 개개인의 나라와 뜻이 무너져 내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통치와 뜻이 세워지기를 구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기도가 이 주기도문의 하나님을 향한 세 청원에 담겨 있습니다.
이 청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지점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담대한 마음과 헌신의 태도로 기꺼이 참여하고, 그렇게 살겠다는 결단에 있습니다.
불가능해 보여도, 내 뜻과 달라도, 심지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시기에, 하나님이 기꺼이 이루시기에 성도는 그저 동참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경험이고 은혜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향해 나아갈 때,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묵묵히 사역함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이 직접 이루시는 그 경험 말입니다.
성도님들은 최근 인도에서 있었던 ‘바퀴벌레 운동’을 아십니까? 지난 5월, 인도에서 바퀴벌레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금방 사그라지리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도 두 달 넘게 집회가 이어졌습니다.
이 바퀴벌레 운동의 발단은 인도의 의대 입학시험인 ‘NEET’의 시험지 유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수백만 명이 응시하지만, 합격자는 6-7만 명도 채 되지 않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시험인데, 시험지 유출 사건으로 시험이 전면 무효화 되면서 십여 명의 수험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까지 벌어졌습니다.
사실 인도에서 시험지 유출은 만성적인 문제입니다. 청년들이 불만을 터트리곤 했지만, 사람들은 이 불만의 목소리가 금방 꺼질 것이며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늘 그래왔습니다.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대법원장이 실업 상태의 청년들을 향해 “한가롭게 시위나 한다.”라며 불만을 터트린 청년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는 모욕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이 발언을 들은 분노한 청년들 중에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30살 청년 아비지트 딥케가 SNS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래! 우리는 바퀴벌레다!”
이 30살 청년 딥케는 집권 여당인 ‘인도 인민당’을 패러디해, 시스템에서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바퀴벌레 인민당’을 창당했습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나흘 만에 딥케의 인스타 계정 팔로워가 1천만 명을 돌파했고, 몇 주 만에 2천2백만 명을 넘어서며 집권 여당의 계정을 압도했습니다.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며 온라인에는 온갖 밈과 풍자가 쏟아졌고, 급기야 딥케는 귀국하여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여기에 수많은 인도 청년들, 인도의 유명 작가 아룬다티 로이, 제가 개인적으로 너무나도 좋아하는 인도 영화 <세 얼간이>의 실제 모델인 환경운동가 소남 왕축 등 유명 인사들까지 합세했습니다.
결국 두 달이 넘는 시위 끝에 교육부 장관이 자진 사퇴하고, 모디 총리가 직접 재발 방지와 해결을 약속했으며, 체포된 학생들에 대한 고소가 취하되면서 시위는 승리로 끝났습니다.
인도의 바퀴벌레 운동은 적어도 인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된 놀라운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불가능한 일도 가능해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걸으려고 하는 평화와 통일의 길도 이와 같습니다. 계산이 되고, 가능하기 때문에 평화와 통일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해 보여도 성도는 마땅히 평화와 통일을 향한 길을 가야 합니다. 결과는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 본문은 평화와 통일의 길을 향하는 성도가 어떤 믿음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8장 15-20절입니다.
본문에는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의 구체적인 지침이 나옵니다. 첫째는 단둘이 있을 때 충고하고, 둘째는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증인을 세우고, 셋째는 교회에 말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이방인과 세리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세리를 배척하고 혐오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방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그들과 밥을 함께 먹으며 식탁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라는 말씀은, 배척하고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긍휼과 사랑으로 다시, 또 다시 다가가 죄를 깨닫게 하고 뉘우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을 누리게 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죄는 과녁에서 벗어난 화살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 죄란, 내 스스로 판단하여 ‘이 일은 가능하고, 저 일은 불가능하다.’라며 한계 짓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인간적인 경험과 지식으로 가능한 일만 하려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고 하는 평화와 통일이라는 과녁에서 벗어난 생각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능력과 판단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평화와 통일의 길을 향해 나아가면 그만입니다.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평화, 남과 북의 통일, 기후 재앙 시대의 생태적 회복, 숱한 죽음을 낳는 이민자의 문제, 세종호텔 해고자를 비롯한 노동자의 문제들 또한 그렇습니다. 안 되는 일이라 말하지 말고, 그저 동참하는 태도가 성도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건 이미 불가능해. 그걸 왜 해?”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판단이 죄가 됩니다.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돌려놔야 할지는 명백합니다.
성도는 “이방인처럼, 세리처럼 여겨라.”라고 하신 말씀에 의지하여,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으로 설득하여 돌이키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평화와 통일의 길을 향해 성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선행 과제입니다.
이어서 빌립보서 1장 3-11절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이라고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당신들 안에서 스스로 완성하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시작도, 과정도, 끝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 사역에 동참함으로 의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소망했습니다.
우리가 평화와 통일의 길을 걸어가면서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명백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며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0장 34-38절 역시 동일한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이 본문의 윗 구절에서 모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대로 이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그대로 모세는 이행했습니다.”라고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도 모세의 행동과 동일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만 움직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화의 길 위에서 실망하는 이유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한계를 설정하고, 우리의 목적과 바람과 시간대로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안전한 길, 평화를 지키고 이루는 길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구름이 머물면 멈추고, 구름이 떠오르면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나의 고집과 나의 때를 내려놓고,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라고 섣불리 판단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방식과 때를 신뢰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한반도에는 반드시 통일이 필요하겠습니까? 이것 마저도 인간적인 생각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네, 진정한 평화를 위해 통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진정한 광복은 아니었습니다. 38선이 그어지고 강제적인 분단을 겪었습니다. 이후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인 남북전쟁을 치렀고, 1953년 정전협정 이후 73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한민족임에도 한민족으로 지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거대 정치집단의 대립, 호남과 영남이라는 지독한 지역감정, 그리고 그 죽음과 갈등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까지 대물림된 치유하기 힘든 분열의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요즘 세계 정세나 남북 상황을 보며 다들 ‘통일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통일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 시선입니다. 통일은 단순히 군사분계선을 지우고 땅을 합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통일은 이 땅에 깊숙이 박힌 분단의 트라우마와 내부 분열이 치유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분단의 아픔을 겪어보지도 못한 세대가 “스타벅스로 가야지”라며 광주의 아픔을 조롱하는 이 참담한 현실을 회복하고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객관적으로 현실을 본다.’라는 착각, ‘통일을 포기하고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평화.’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통일에 대한 벅찬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오래전부터 이런 상상력을 많은 이들이 발휘했습니다. 평화는 꿈꾸는 이들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이사야 11:6-9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헛소리냐고 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평화를 향한 놀라운 꿈을 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꿈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보고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 스스로가 그렇게 이루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수 김민기 씨의 노래 가사도 이런 상상력을 잘 보여줍니다. <내 나라 내 겨레>
나의 조국은 / 허공에 맴도는 아우성만 가득한 이 척박한 땅 / 내 아버지가 태어난 이곳만은 아니다 / 북녘땅 시린 바람에 장승으로 굳어버린 / 거대한 바위덩어리 - 내 어머니가 태어난 땅 / 나의 조국은 그곳만도 아니다 / 나의 조국은 / 찢긴 철조망 사이로 / 스스럼없이 흘러내리는 저 물결 / 바로 저기 눈부신 아침햇살을 받아 / 김으로 서려 피어오르는 꿈속 그곳 / 바로 그곳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알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오늘날에는 오히려 이런 상상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평화와 통일은 불가능해 보여도 가야 하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 스스로 한계를 정해놓고 “이건 가능해”, “저건 불가능해”라고 단정 짓는 교만입니다. 이것이 과녁에서 벗어난 화살, 바로 죄입니다.
성도는 오히려 불가능해 보일 때일수록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 더욱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꾸라고 하신 평화와 통일의 꿈을 꾸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한계짓고 부정적인 이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우리는 냉소하고 절망하는 이들을 이방인처럼, 세리처럼 여기며 다가가야 합니다. 배척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계속해서 평화를 말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일이기에, 객관적 상황을 핑계로 판단하는 우리의 오만한 마음을 거두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한반도에는 통일이 필요합니다. 통일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의 길입니다. ‘불가능하다.’ 여기는 마음을 걷어내고, 통일을 상상하며 그 길을 향해 시선을 두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평화를 향해 걷는 걸음입니다.
평화통일주일인 오늘, 우리 모두가 사실 객관적이지도 않지만 객관적 현실이라 여기며 판단하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평화와 통일에 대한 상상력과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 더욱 주목하려는 태도로 주님을 의지함으로 이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