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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권고하소서
시편 106:1~15
오늘 읽은 시편은 할렐루야와 더불어 시작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찬양으로 가득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순수하고 영적인 기도입니다.
말하자면 기도는 천국의 공기를 들이키는 것이고 찬양은 내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도와 찬양입니다. 어떤 이는 기도는 열심히 하지만 찬양에는 인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공기를 들이마시기만 하고 내쉬지는 않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과 내쉬는 것의 균형이 잡혀야 건강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기도와 찬양을 잘 조화 있게 하는 사람이 건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고는 “오 주여 주님께서 주의 백성을 돌아보시는 은혜와 더불어 나를 기억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찬양을 게을리 하기 때문에 기도의 권능을 상실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바 은혜로 인해서 찬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 또 은혜를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이미 응답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보다 더 큰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기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지난번 네가 요청하는 것을 이루어 주었는데 내게 감사하지 아니하고 또 다른 무엇을 원하느냐?”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주님을 찬양할 수 있고, 찬양하는 사람의 탄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기도는 성도들이 받은 축복을 알고 있는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본문 3절에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기도는 대부분 죄인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공의를 지키고, 항상 의를 행하면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많은 시련과 환난과 좌절에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어떠한 시련을 겪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련들은 그들의 죄의 결과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와 같은 어려움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죄의 포로가 되지 아니하였던들 그들이 적들에게 포로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살았다면 강물 같은 평화가 흘러 넘쳤을 것입니다.
이제 본문 45절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오늘 생각할 말씀의 중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업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소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50억의 인류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 구원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선한 말 중에 구원이란 말처럼 귀한 말, 아름다운 말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시인이 이 귀하고 아름다운 구원을 어떻게 노래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했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포로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손과 펼친 팔로 이스라엘을 노예생활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역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사실 저희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기적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과거 우리 민족의 역사를 뒤돌아보아도 일본 사람에게 종살이할 때 언제 해방될 것인가를 생각이나 해보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서서히 움직여 결국 우리가 뜻하지 않은 때 해방을 선물로 안겨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이 겨레가 얼마나 감격했습니까! 우리의 구원이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해방의 날을 위하여 얼마나 애쓰고 기도했습니까?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얼마나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까? 출애굽기 3장에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출 3:7-8)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시작하면 곧 살게 됩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에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갓 태어난 어린애의 울음소리보다도 약할는지 모릅니다. 몸이 불편하고 배가 고프면 우는 것 외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의 신호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 백성의 신음 소리를 듣고 계시며,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물 방울도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울음소리를 들으실 때 그 의미를 아십니다. 새끼 새는 둥지에 있으면서 어미 새가 먹이를 물고 오면 입을 넓게 벌려서 어미 새가 날라 온 먹이를 받아먹습니다. 그래서 새끼 새는 점점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부르짖는 소리를 못들은 척하지 아니하십니다. 물론 가나안 여인의 기도처럼 어떤 때는 주님이 기다리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못 들으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그 여인의 믿음을 더욱 자라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의 평화통일을 위해서 해방 후 50년간을 얼마나 애써 기도하였습니까? 그런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다 듣고, 보고,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기한이 찰 때가 오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새끼 새의 울부짖는 소리보다 절대로 못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하지 않도록 만들려고 시험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상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기도해 보아야 소용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마귀의 공갈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부르짖으면 아버지 하나님은 반드시 들으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홍해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애굽의 군대가 뒤쫓아오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하였습니까? 그들은 근심과 고통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8-11절을 보세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 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 하였도다”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지금 처한 형편이 마치 홍해가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암담한 가운데 놓여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되십니까?
여러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옵소서. 주여, 홍해가 내 앞에 굽이치며, 바위가 양쪽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나의 죄악 애굽의 군대가 나를 추적하여 오고 있습니다. 오,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여 주옵소서. 주여, 오셔서 이 부정의 홍해를 마르게 하옵소서. 오셔서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원수를 멸하시옵소서. 그래서 나도 시편의 저자와 같이 감사의 노래를 하게 하옵소서.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 하였도다. 오, 주의 구원으로 권고하옵소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떠한 일들을 행하셨고, 주께서 홍해를 다시금 끌어내려 바로와 그의 모든 말들을 삼켜 버리게 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흥분됩니다. 그래서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들고 모든 여인들이 그녀를 따라 영광스러운 승리를 하시고 모든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바다에 넣어버린 주님께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이 노래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 중의 하나입니다. “저희를 바다가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 하였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구원을 마침내 찾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광경을 생각하면 마치 서부활극을 보는 것 같은 통쾌함을 느낍니다. 어린애 같지만 저는 서부활극을 좋아합니다. 물론 어느 서부활극이나 그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착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서 업신여김을 받고 중상과 모략을 당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애처로운 마음이 들 정도로 고생을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착한 사람이 힘을 내어 악한 사람을 물리치는 그 과정이 너무 통쾌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렇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구원은 슬픔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저희의 적 때문에 큰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저희를 어려움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슬픔과 고통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시편 34편 19절에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하였습니다. 시편 68편 20절에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대적하여 즐거워 말라. 내가 넘어졌으나 다시 일어날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산으로부터 다시 데려오고 바다 밑으로부터 나의 백성을 다시 끌어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본문 말씀의 기도를 권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소서” 매우 의미 깊은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능력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주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능치 못할 것이 없는 것을 믿는 단순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 중풍병 든 환자를 메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께 오기만 하면 무슨 병이든지 고치신다는 철저하면서도 단순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시인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소서 다른 말로 하면 주님께서 나를 권고하지 아니하시면,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나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여, 주님의 구원으로 나를 도와주세요. 주님께서 내게 오시기까지 나는 잃어버려진 사람입니다. 주님, 어서 오세요. 나를 구원해 주세요.”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의 영적 친교를 갖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소서” 우리에게 가장 축복된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하신 말씀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하셨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모실 수도 없을 뿐더러 주님과 교제를 가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바른 자세는 언제나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와 계시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주님이 내 심령 속에 들어오실 때 우리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변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1.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빛을 찾음도
주 내 맘에 오심
후렴 : 주 내 맘에 오심
주 내 맘에 오심
물밀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내 맘에 오심
2.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옛 행실 끊고
머리털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보다 더 희어졌네
3. 내 맘에 소망을 든든히 가짐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의심의 구름이 사라져 버림도
주 내 맘에 오심
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다가
밝은 빛 홀연히 보고
저 멀리 하늘 문 환하게 보임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5. 나 이제 천성에 올라가 살기는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천성을 향하여 내가 곧 가리니
그 기쁨 비길 데 없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내내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나누시고 성경을 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갈 때 주님이 가시려 하자 이 제자들은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눅 24:29) 하였습니다.
주님이 계속 나와 함께 계시도록 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이 날마다 나와 함께 계셔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혹시 주님이 “안돼, 나는 가야 해.” 하신다고 해도 제자들이 한 것처럼 강권하여 같이 계시게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얍복강가의 야곱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와 만나서 밤새 씨름을 하였습니다. 날이 밝아올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를 놓아 달라, 내가 가야 한다.”라고 할 때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사자에게 매달렸습니다. 주님과 항상 같이 있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그랬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냉대, 무시가 있어도 주님이 함께 계시면 모든 것이 선하게 해결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여성은 유치원 보모생활을 하다가 좀 늦게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군 되시는 분도 신랑으로는 나이가 드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어린애가 없었습니다. 어린애를 기다려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이 부인은 남모르게 고민을 했습니다. 남편이 다른 집 아이를 보면 그렇게 부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 이 부인은 더욱 괴로웠습니다. 병원엘 가서 진찰을 받아 보았더니 어린애를 출산할 가망성이 없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앞이 아찔하고 캄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남편이 예수를 잘 믿는 분 같으면 모르겠지만 교회도 거의 나오지 않는 분인데 돈은 넉넉히 있으니 남자로서 어린애를 가지고 싶은 마음에서 딴 짓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매님은 결론을 내리기를, 나 모르게 다른 여자와 가까워져 애를 낳는 것보다는 아예 내가 선수를 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아 어떤 여자 하나를 소개받았습니다. 이거 참 미안한 말이지만, 믿지 않는 세상에서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소위 ‘씨받이’ 할 여자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에 남편과 의논을 했습니다.
“여보, 당신 어린애 가지고 싶지요?”
“글쎄,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거요, 마음엔 있지만.”
“그런데 저는 병원엘 갔더니 애를 낳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해요. 너무 오래 기다리기 어려우니 제가 생각을 하나 했는데 섭섭해하지 마시고 들으세요.”
“무슨 말인데?”
“화내지 않으실 거지요? 약속하세요.”
“그럴께.”
“다름이 아니고요, 제가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은 후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어요. 며칠 전 어느 분의 소개를 받아 애를 틀림없이 나을 수 있는 여자를 알게 되었고 그 분과 이야기가 잘 되었어요. 당신이야 나 이외의 어느 여자를 사랑하겠어요. 그러나 단순히 어린애 하나 얻기 위한 것 뿐 인데 그 여자를 통해서 우리 애 하나 받아 봅시다. 그러나 내가 낳은 애 이상 내가 당신의 아이를 우리 아이로 잘 키울게요.”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이,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말 같지 않은 것은 아예 꺼내지도 말아요.”
처음에는 응하지 않는 것을 며칠씩 설득시켜 나중에는 부인이 소개한 여자에게 가게 되었습니다. 미리 약속을 하고 남편을 데리고 그 여자의 집까지 가서 소개를 하고 부인은 집에 돌아왔습니다.
여기까지는 했는데 이 부인의 마음이 평안했겠습니까? 안방에 자리를 펴고 자리에 누우려니 잠이 옵니까? 눈만 감으면 자기 남편이 자기 아닌 다른 여자(그것이 비록 자기가 소개한 씨받이라고는 하지만)와 같이 지낼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집에서 기도하는데도 마음이 시원치 않아 교회가 몇 집 건너 있는데 그 교회에 들어가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혼자 밤을 새우며 기도했습니다. 눈물이 비오듯하고 가슴이 찢어질 듯합니다.
아래 교인 석에서 기도하다가 강단에는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실 것 같아서 강단에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 남편의 죄가 아닙니다. 내 죄입니다. 하나님, 그런데 오죽하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내 남편이 지금 다른 여자에게 가 있습니다. 내 가슴이 아픕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나님, 입장을 좀 바꿔 놓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나는 왜 애를 낳지 못합니까? 나도 애를 낳게 해 주세요.”
몸부림치며 밤새 기도했습니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인데 네 시에 통행금지가 해제된 지 얼마 후에 집엘 갔더니 남편이 벌써 와 있더랍니다. 그래서 너무 놀라 “아니, 당신 어떻게 된 거예요? 이렇게 일찍 집에.”
그랬더니 남편이 손을 꼭 잡으며 하는 말이, “여보, 미안해요. 내가 솔직히 남자의 마음으로 애를 하나 갖고 싶은 욕심에서 당신의 의견을 따라서 그 여자의 집까지 갔었어. 그러나 차마 못할 짓이어서 지난밤을 그저 앉은자리에서 새고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자 돌아왔소.”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너무 감격해서 남편을 붙들고 한참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후 얼마 안되어서 어린애가 생기게 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주님, 나는 떠날 수 없습니다.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 분명히 보세요.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소서” 했습니다. 세리와 같이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구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이기주의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자기의 필요는 하나님 외에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곤고한 지경에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헤엄을 쳐서 나온다고 이기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구명대를 붙든다고 그것이 이기주의일까요? 하물며 우리의 영혼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구원을 찾는 노력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응답이 있을 때 우리 자신을 위해서 진지하게 기도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심령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주의 구원은 참된 구원입니다.
그리고 주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놀라운 구원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애굽에서, 홍해에서, 슬픔과 고통에서 구원하소서. 그리고 나와 함께 하셔서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소서.
우리를 왜 구원하십니까?
시편 106:6~23
우리가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면 하나는 “누가 이 만물을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만물을 무엇 때문에 만들었을까?” 하는 것일 겁니다.
“누가 이 만물을 만들었을까?” 하는 첫째 질문에 대하여 정직한 양심과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한다면 쉽게 대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눈을 들어 밤하늘의 뭇 별들을 쳐다보세요. 그 별들이 하나님이라고 쓰고 있는 글자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 넓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세요. 똑바로 들을 수 있는 귀를 소유한 사람이라면 물결이 출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 이 바다는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선언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높은 산을 바라보세요. 아무 말이 없이 조용한 것 같으나 침묵 가운데 “우리를 만드신 손은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소리,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 이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만물을 무엇 때문에 지으셨을까?” 이 두 번째 질문은 성경 말씀을 떠나서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첫째 질문에 대한 대답에 “하나님이시다.” 한 것과 같이, 두번째의 질문도 역시 “하나님이시다.” 하는 같은 대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왜 만물을 창조하셨을까?”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명예와 기쁨을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머리를 써서 아무리 훌륭한 대답을 한다고 해도 이 이상의 대답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만물이 생기기 전의 형편을 잠시 생각해 보세요. “나 외에는 아무도 없느니라”고 말씀하실 때의 하나님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홀로 계셨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기쁨과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지으셨다고 하는 대답 이외에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4장 11절 말씀에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창조의 역사를 하나님이 하셨다면, 구원의 역사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의 눈을 들어 명멸하는 저 별들 너머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거룩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저 구원받은 무리들을 보십시오. “누가 저희를 구원하였으며 무엇 때문에 저희를 구원하였을까요?” 우리는 여기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구원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다 같이 읽으십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였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그가 저희를 구원하셨다.”
‘그(He)’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셨고, 아버지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택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고 우리를 영접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양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보혜사 성령이 같이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것이 성령이요, 그 분이 우리로 하여금 활기찬 희망으로 거듭나게 하시며,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고, 심령을 깨끗게 하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세주’라고 말할 때 이 말 속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을 떠나서 구원받을 수 없고, 성자 예수님 밖에서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보혜사 성령이 없이 구원의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들이 창조의 역사에 있어서도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도 함께 역사하시며 구원의 행사에 있어서도 함께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주의해서 보세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모세가 저희를 구원하지 않았습니까? 지팡이를 내밀어 홍해를 가르지 않았습니까? 모세의 기도가 상달하여 개구리를 모여들게 했고, 파리 떼들이 몰려들었으며, 바다가 피로 물들었고, 우박이 애굽의 전역을 강타하였습니다. 모세여, 당신이 우리의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까? 아론이여, 당신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것이 아닙니까? 이들은 대답합니다. “아니요. 우리는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저희를 구원하신 것이오. 하나님은 저희의 구원을 위하여 단순히 우리를 사용하신 것 뿐이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있을 뿐이고 우리들 자신에게는 아무런 영광이 있을 수가 없소.”라고 대답합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이 위대하기 때문에 홍해가 갈라져, 육지같이 건너고, 애굽의 군대는 홍해에 빠져 죽고 말았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저희들이 저희 자신을 구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더구나 저희 중의 누가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논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어이없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거나, 혹은 성직자나 설교자가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자가 하나님 아래서 인간의 주의를 끌거나 경고를 하며 깨우치는 도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되십니다. 설교자의 입술로부터 흘러나오는, 아무리 훌륭한 웅변도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으니 그 분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저는 아무개 때문에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하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받게 된 것이지, 결국은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스스로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영으로 나야만 영의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하였습니다. 저희가 누구입니까? 본문 7절을 보세요. 저희가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고 바다를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저희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저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기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저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저희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현명하고 범사에 신중한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 아니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십니다.
여러분,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도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공부 못했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고 깨우쳐 주십니다.
사실 초등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사람도 예수 믿어 구원받고 교회를 10년 정도 다니게 되면 대학을 졸업한 사람 못지 않게 모든 면에서 밝아집니다. 그러므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고 해서 조금도 염려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면 우리의 심령이 밝아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적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저희를 위하여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가 여러 번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집을 주셨습니다. 매일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까지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이 고마움을 알고 있습니까?
이사야 선지가 예언한 말씀과 같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우리가 혹시 집에서 짐승을 키울 때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않는 것을 키우는 것을 보셨습니까? 소는 키워 밭을 갈게 하고, 말은 키워서 타고 다니고, 고양이는 키워 쥐를 잡게 하고, 개는 키워 집을 지키게 하고, 염소는 키워 젖을 짜먹고, 닭은 키워 알을 받아먹고, 새는 키워 노래를 듣거나 아름다운 모양을 봅니다.
그리고 짐승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길을 들여보다가 그래도 안되고 희망이 보이지 아니하면 처분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아도 매일매일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은 저희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양육하시며, 힘을 북돋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힘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께 도전하는 데 사용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보이는 데 소모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였습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고맙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 뿐 아닙니다. 우리는 거역하는 백성이었습니다.
본문을 주목해 보세요.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거역하는 백성입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시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한두 번은 참을는지 모르지만 그 이상 할 때는 손이 올라갈 것입니다. 아무리 인내심이 있고 침착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몇 차례는 참겠지만 마지막에는 “이젠 더 참을 수 없다. 고얀 놈 같으니, 덤빌 테면 덤벼봐라. 내가 가만있지 않겠다.” 하며 일어설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심정을 가졌다면 우리가 설 곳이 어디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니 나는 여호와라 나는 변하지 않으니 그렇지 않으면 야곱의 자식들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니라” 이들은 거역하는 백성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7-12절에는 홍해에서 거역한 죄를 말합니다. 그들이 모세를 원망하며 말하기를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 곳으로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지도자를 원망하는 것은 결단성 없는 민족의 특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저희가 거역하고 배반하고 은혜를 잊어버린 것을 생각하면 마땅히 그냥 내버려 두어 애굽 군대의 발에 짓밟히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애굽을 나온 저들을 그냥 버려 두신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저들에게 그 이름이 조롱 받을 것 같아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건지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시고 저희를 미워하는 애굽의 손에서 건지실 뿐 아니라, 그 대적은 물로 덮어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시고 홍해에 수장시켜 버리고 마셨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12절까지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감사한 가운데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13-15절에는 음식물을 조급히 탐하여 모세를 원망한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역에 대하여 감격하여 찬송하던 이스라엘이 조그만 어려움이 있을 때 감사와 감격은 다 잊어버리고 원망과 불평으로 변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 이하에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6장 2-3절에 보세요.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1-2절에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했습니다.
참지 못하는 것과 조급함, 그리고 배은의 죄는 서로 관련된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같은 죄 때문에 일시 동안의 음식물의 결핍을 인하여 거룩한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범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샘물을 내어 마시게 하시며, 만나와 메추라기의 고기로 공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보세요. 출애굽기 16장 18절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음식물에 욕심을 내어서 죄를 범하고 심령에 불안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16-18절은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킨 죄입니다. 민수기 16장 3절에 보면 “그들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고 하면서 지도자의 지위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의 말씀대로 시기하는 마음으로 의를 치워 버리고 불의를 세우려는 악당의 소위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노하셔서 땅을 갈라지게 하시고 원망하던 사람들을 불로 삼켜 버리고 마셨습니다.
19-23절까지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죄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그 자세한 내용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범죄의 동기는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아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은 그만큼 유치했습니다. 그들은 지도자가 없으면 신앙마저 유지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거룩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생명을 내건 이와 같은 모세의 간절한 기도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멸하려 하였으나 그 택하신 종 모세가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위대함을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24-27절에는 가나안 복지를 주시마 하신 언약을 신종치 않고 퇴보한 죄입니다. 민수기 13장과 14장에 내용이 있습니다. 민수기 14장 3절에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는고 우리 처지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한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12명을 뽑아서 40일간의 기한을 주어 가나안을 정탐케 했는데 다녀온 사람 중에 10명이 온 이스라엘 회중이 모인 가운데 절망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 보기에도 역시 그럴 것이외다”고 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을 때 온 회중은 낙심천만해서 밤을 새우며 곡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성도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명심할 법칙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어려운 자리에 나를 가져오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나는 이 자리에서 안식할 것이라고 생각하라.
둘째,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처지에서도 그의 자녀답게 행하도록 은혜 주실 것을 믿으라.
셋째, 하나님께서 필경 이런 난처한 처지로 하여금 나에게 복되게 하실 것이라고 믿으라.
넷째,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처지에서 건져내실 때가 올 것을 믿으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아니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지 아니하고는 우리 인간을 구원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죄인이 구원받아야 할 자격은 없습니다. 또, 죄인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만한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인간이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치가 있어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재능을 보셨다면 사탄은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 인간보다 재능이 월등하니까요. 우리가 덕성이나 미덕을 자랑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넝마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어떤 좋은 일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오직 하나, 그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의 이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그 분 개인의 이름이요, 그 분의 속성이요, 그 분의 본질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인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본질을 증명하기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나타내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우주에 있는 삼라만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만 가지고도 부족해서 “내가 무한한 마음으로 저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저희를 다시 말해서 악을 행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내 아들을 죽게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 내 본질인 사랑을 나타내려 하였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를 생각하시고 계획하신 것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권능과 공의와 사랑과 믿음과 진리를 나타내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성호를 입증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켜 잔인한 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폭군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한 사람을 택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한 죄인을 택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국의 모든 조각은 매듭이 많은 것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백향목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백향목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베시기 전에 모두 매듭이 많은 나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나쁜 것들을 택하사 그의 이름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의 솜씨와 기술을 발휘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13절에 보면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신분이 어떠하든지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이름을 위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지 우리 자신을 위하여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 말씀했습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그러므로 이 말씀을 믿고 주님께 나아오면 구원을 선물로 받습니다.
1.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점점 더 멀리 가나
후렴 :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오라
2. 고달파 지친 자 쉬라시네 쉬라시네 쉬라시네
무거운 짐진 자 다 나오라 쉬게 해 주시리라
3. 주께서 지금도 기다리네 기다리네 기다리네
죄 짐을 가지고 다 나오라 어서 주 앞에 오라
4. 주님의 소리를 들어보라 들어보라 들어보라
그 이름 믿는 자 복 받으리 어서 곧 일어나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저희를 용서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