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백석
북방에서 정현웅에게- 백 석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勃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 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 ― 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Tamara - Abrazame
내가 백석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정기 구독하고 있던 한 월간지에 박목월 시인이 연재하고 있던 시 창작 강좌를 통해서이다. 거기 백석 시인의 '오리 망아지 토끼'와 '여우난골', 그리고 '비'가 소개되어 있었는데, 나는 단박에 백석이 좋아졌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시를 좋아하게 된 것도 실은 백석 시인으로 인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강좌에 소개된 시집 <사슴>을 구하려고 노력했지만 시골서 구할 길은 없었다. 그 얼마 뒤에 책방에서 <학풍>이라는 새로 나온 잡지를 뒤적이다가 거기 그의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시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자리에 서서 읽었는데 나는 너무나도 놀랐다. '詩란 이런 것이로구나.'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싶다. 나는 그 詩 한편을 다시 읽기 위해서, 그 詩 말고는 단 한 쪽도 읽을 수 없으리만큼 어려운 그 잡지를 사서 당시 같은 집에서 학교를 다니던 당숙들이며 족형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사슴>을 손에 넣은 것은 대학으로 진학해 서울로 올라와서다. 막 전쟁이 끝나 세상은 여전히 뒤숭숭하고 먹고 살기가 크게 어려운 때 였다. 나는 동대문과 청계천 일대의 고서점을 도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서재에서 빠져나온 장서 도장이 찍힌 귀한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사슴>도 그 책더미 속에 묻혀 있었다. 책의 뒷장과 속표지에 붉은 장서인이 찍힌 것말고는 말짱했지만 주인은 가치를 모르고 참고서 한 권 값밖에 받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사슴>을 처음 읽던 흥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실린 시는 40편이 못 되었지만 그 감동은 열 권의 장편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컸다는 느낌이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저녁밥도 반 사발밖에 먹지 못했으며, 밤도 꼬박 새웠다. 그 뒤 <사슴>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꺼내 읽고는 했으니, 실상 그것은 내가 시를 공부하는 데 교과서가 되었던 셈이다. 이렇게 애지중지하던 책을 1961년에 잃어 버렸다. 하찮은 사건으로 가택 수색을 당해 압수당한 50여 권의 책 속에 그의 시집도 끼여 있었던 것이다. 홍명희의 <임꺽정>, 이태준의 <복덕방>, 김남천의 <대하>, 오장환의 <성벽>, 이용악의 <오랑캐꽃>등이 이때 빼앗긴 책들인데, <사슴>을 빼앗긴 일이 가장 억울했다. 다행히 <사슴>의 시들은 거의 외고 있었지만, 이 일로 나는 얼마동안 시를 읽는 흥미도 시집을 사는 재미도 잃었다. 생각해보니 60년대 후반 내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기까지 나는 단 한권의 시집도 사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도 서슴없이 나는 나의 <시 스승>으로 먼저 백석 시인을 댄다.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 상이 그 상 우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盞이 뵈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백석의「酒幕」전문
이 시는 우리 머리에 세 개의 그림을 그리게 한다. 첫째로, 호박잎에다 붕어곰을 싸오는 주막집 아들아이다. 그 아들아이는 이름이 범이고, 장(늘)고기를 잘 잡고, 앞니가 뻐드러졌고, 또 나와 동갑이다. 말하자면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은 생략된 관게대명사를 고리로 "아들아이"를 수식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이 놓여 있는 "빨갛게 질 (길)들은 팔모알 상" 하나만으로 극히 인상적으로 그린 주막집 부엌의 모습이다. 빨갛게 길든 팔모알 상과 그 위에 놓여 있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이라는 소품이 그 주막이 그리 막돼먹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효과도 가진다. 세 번째는 주막 밖 풍경이다. 주막 울파주(울바자) 밖에는 어미말이 매여 있고 망아지가 그 젖을 빨고 있다. 장짐을 지고 장꾼을 따라온 말이다. 앞니가 뻐드러진 고기를 잘 잡는 주막집 아들아이, 해장국 끓는 냄새,지짐게질 냄새가 자욱한 주막집 부엌,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장꾼들,울파주 밖의 질척거리는 길과 말똥 냄새……. 서도의 장날 풍경을 언어로 그린 한 폭의 풍속화다. 이 시는 서도 사투리를 골간으로 하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직조하는 토속적 조성 정조를 기초로 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우리를 한 세대 이전의 옛 삶의 모습, 인정과 풍속의 세계로 데려가 준다. 그러나 그 표현양식은 토속적이거나 재래적이 아니다. 우리말에 없는 관게대명사며 도치법 등 서구적 표현방식을 과감히 채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명확한 이미지를 제공하고 집중을 중시한 점에 있어 그는 모더니스트요 이미지스트이기도 하다.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내려간 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트리며 날아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 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두 던져버린다 장날 아침에 앞 행길로 엄지 따라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리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커다란 소리로 - 매지야 오나라 - 매지야 오나라새하려 가는 아배의 지게에 지워 나는 山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고 생각한다. 맞구멍난 토끼굴을 아배와 내가 막어서면 언제나 토끼새기는 내 다리 아래로 달어났다. 나는 서글퍼서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 「오리 망아지 토끼」전문
이 시 역시 백석 시인의 다른 시나 마찬가지로 서도 사투리에 대한 약간의 에비지식을 필요로 하는 시. "오리치"는 오리창에로 오리를 꾀어 잡는 틀, "아배"는 아버지, "동비탈"은 뚝 비탈, "동말랭이"는 뚝마루, "시악"은 고약한 심술, "엄지"는 어미말, "매지"는 망아지, "새하려"는 나무하러로 읽으면 된다. 세 연 중 첫연은 오리가 주제요 논이 무대다. 오리(들오리)를 잡� 창애를 놓기 위해 아버지는 논으로 내려가서는 영 올라오지 않는데 오리는 날아가버리고, 화자는 둑 위에서 아버지를 찾다가 심술이 나서 아버지의 신이며 버선이며 대님을 개울물로 던져 버린다. 두 번째 연은 논과 뚝 대신 행길이 무대다. 장보러 가는 장꾼과 장짐을 실은 어미말과 어미말을 따라가는 망아지, 그리고 그것을 보고 망아지를 사내라고 생떼를 쓰는 화자, 망아지를 향해 건성으로 "매지야 오나라"하고 소리치는 아버지가 인상적이다. 셋째 연에서는 다시 장면이 바뀌어 이번에는 산이 된다. 나무하러 가는 아버지의 지게에 지워진 어린 화자, 맞구멍난 토끼굴을 막아서는 아버지와 화자의 숨결 등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시인의 유년시대의 기억을 토대로 한 것일 터이지만, 동화적 시각 없이는 불가능한 시다. 색깔을 엷게 칠한 담채화 같은 기법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山뽕잎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둘기가난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둘기켠을 본다 - 「山비」전문
나는 '청시', '비', '노루'등 3, 4행밖에 되지 않는 그의 짧은 시들도 다 좋아하지만 특히 위의 시가 좋다. 이 시를 읽으면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기 시작하는 산비탈 밭이 떠오른다. 산과 들이 새파랗게 물든 초여름날 저녁 나절,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에서 저녁 먹으라고 아이를 부르는 소리도 들리고, 산비에 묻어오는 싱싱하고 비릿한 풀냄새도 난다. 산뽕에 빗방울이 치고, 멧비둘기가 일어나 날고, 자벌레가 나무등걸에서 고개를 들어, 멧비둘기 편을 보고 하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면서도 이 시는 산골살이의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재미, 이것이 백석 시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로, 시를 읽으면서 낯선 서도의 한 세대 이전의 삶을 상상하는 것도즐거운 일이다. 그의 시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안고 있는가는 2행밖에 안되는 짧은 시 '노루' 한 편만 더 읽어 보아도 금세 알 수 있다.
山골에서는 집터를 츠고 달궤를 닦고 보름달 아래서 노루고기를 먹었다 - 「노루」전문
산골에서는 집터를 치고(츠고) 달구질(달궤)을 하고 보름달 아래서 노루고기를 먹었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이지만 웬만한 독자면 다 이 시에서 "어허야 달구"하는 달구질 소리, 노루고기와 술에 취한 장정들이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 아낙네들의 수다까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성외(城外)'도 그 시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가 구성지고 애처롭다.
어두워 오는 城門밖의 거리 도야지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 엿방 앞에 엿궤가 없다 양철통을 쩔렁거리며 달구지는 거리 끝에서 江原道로 간다는 길로 든다 술집 문창에 그느슥한 그림자는 머리를 얹혔다 - 「성외(城外)」
성문 밖은 어두워 오고, 한 사람이 장에서 도야지를 사서 몰고 간다…… 엿을 받으러 온 사람들도 다 돌아가 엿궤 하나가 없는 엿도가 앞, 그곳 강원도로 가는 길로 달구지가 양철통을 쩔렁거리며 밤길을 재촉한다 …… 그 양철통 속에는 양잿물이나 간수가 들어 있겠지 …… 그 성문 밖에 있는 술집,며칠 전까지만 해도 머리를 땋아내렸던, 창문에 어리는 야윈(그느슥한) 그림자는 머리를 얹었다 …… 머리를 얹는다는 것은 기생이 몸을 허락함을 뜻하니 돈 많은 스폰서라도 얻었나 보다 …… 산문으로 풀면 이렇게 되는 터로서, "양철통을 쩔렁거리며" 강원도로 가는 길로 든 달구지와 머리를 얹힌 "술집 문창에 그느슥한 그림자"를 선명하게 대비시켜 그려내는 개화기 이후의 우리 산읍의 풍속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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