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허창수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 : 1 - 9
웃음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웃음보다 더 좋은 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웃음도 가장된 것입니다. 가장된 웃음은 건강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감사보다 건강에 더 좋은 것은 감탄입니다. 감탄은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 밖으로 폭발하는 것입니다. 감탄할 때 엔돌핀이 솟아나 행복지수가 높아집니다. 월드컵을 할 때 꼴을 넣은 선수는 물론 그 장면을 보는 관중들도 좋아서 소리를 치며 좋아할 때 엔돌핀 호르몬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힘들었던 피곤은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더 솟아나는 것입니다.
금년 월드컵 때 국민들은 많은 기대를 가졌다가 패하므로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2002년도 월드컵 때는 기대 이상으로 이기므로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국민들이 그날 밤 잠을 자지 않고 거리로 뛰어나와 ‘대한민국’을 외치며 좋아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온 국민은 행복지수가 올라가고 나라 경제도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좋은 경지를 보고 즐거워하며 감탄 할 때 모든 근심 걱정은 다 사라지고 행복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감탄이 줄어들고 탄식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감탄하면 젊어지고 행복해집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문안 할 때 꽃을 가져갑니다. 그 꽃을 보고 좋아하는 환자는 곧 회복하여 퇴원합니다. 그러나 꽃을 보고서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는 머지않아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감탄하면 젊어집니다. 작은 들꽃 하나를 보고 아름답다고 좋아하면 80세라도 20세처럼 젊어지는 것입니다. 좋은 경치를 보고 ‘야호!’ 소리치며 좋아하는 사람은 젊어지지만 별로 감동도 감탄도 없는 사람은 갈 날이 멀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감탄은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하셨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며 감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하며 감탄했습니다. 에덴동산은 감탄으로 충만하여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감탄이 언제부터 사라졌습니까? 죄를 범한 이후 감탄은 탄식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인간은 감탄하기보다 탄식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탄식을 감탄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구원은 범죄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은 감탄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구원받은 백성들이므로 탄식을 감탄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작은 꽃 한 송이를 보고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깨닫고 감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 8편은 다윗의 감탄의 시입니다. 1절과 9절에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땅을 보고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감탄하였습니다. 온 땅에 가득한 피조물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발견하고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감탄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보는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고 감탄하였습니다. 3절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라는 말씀에서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고 감탄하였습니다. 하늘에 달과 별들은 다윗이 어쩌다 본 것이 아닙니다. 매일 같이 보는 것들 입니다. 다윗만 보는 것들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매일 보는 것들입니다.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고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하며 다윗은 감탄하였습니다. 다윗은 달과 별들을 보고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감탄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솜씨를 보고 감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치를 보고 ‘아름답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발견하고 감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성도의 신앙은 엔돌핀이 넘쳐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성도는 슬픔도 아픔도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이란 섬세함을 의미합니다. 광활하게 펄쳐 있는 하늘과, 둥근 달의 아름다움과,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보고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섬세함을 감탄한 것입니다.
작은 들꽃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솜씨가 담겨진 것을 성도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들꽃 한 송이를 보고서도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섬세한 창조의 능력을 발견하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느끼지 못하고 감동도 감탄도 없다면 신앙은 건강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건강합니까? 병든 신앙입니까? 병든 신앙이라면 속히 감탄할 수 있는 건강한 신앙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다윗이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고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감탄했던 것처럼 우리는 감탄하는 믿음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작은 꽃 한 송이를 보고서도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행복치수는 솟아나며 하나님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고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하늘과 달과 별들 앞에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람이 무엇이기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과 달과 별들 앞에 자신이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가를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앞에 자신이 너무나도 작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백두산을 여덟 번 가 보았지만 두 번은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99년 6월에 중부산 노회 북방선교의 일로 노회장과 둘이서 중국에 갔다가 백두산을 다녀 온 일이 있습니다. 등소평이가 자고 갔다는 장백산 호텔은 백두산 바로 아래 있습니다. 비수기라 손님이라고는 우리 일행 뿐 이였습니다. 밤늦게 도착하여 자고 아침 일찍 깨어 호텔 창문을 열었더니 광활한 백두산에 천지 폭포가 마치 아름다운 그림처럼 보이는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백두산은 높기 때문에 나무가 없어서 크고 웅장한 산 전체를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높기 때문에 해가 일찍 떱니다. 햇빛이 산 꼭데기서부터 비춰서 내려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정오가 지나면 중국 쪽의 백두산은 역광이기 때문에 그늘진 곳을 봅니다. 그러나 아침 일찍 떠오르는 해가 백두산 구석 구석을 비취 그림자도 없는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지폭포가 있는 곳까지 가서 한 시간 이상을 혼자 광활한 백두산을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며 사진을 찍고 즐겼습니다.
6월이지만 눈이 덜 녹았고 바람에 밀려 어떤 곳은 눈이 높이 쌓여있었습니다. 눈으로 덮힌 얼음 밑에는 천지의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만약 눈에 미끄러져 얼음 속에 빠지면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그때 내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를 느꼈습니다. 아무도 없는 크고 웅장한 백두산의 어느 한쪽에 서 있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두렵고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이러다 눈속에 빠져도 누구 한 사람 구해 줄 사람도 없다고 생각할 때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잠시 내 자신이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 하다가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찬송을 크게 불렀습니다. 대부분의 산에서는 큰 소리를 치면 메아리가 돌아 옵니다. 그러나 백두산은 앞에 가린 산이 없고 넓고 확 트였기 때문에 메이리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그때 저 아래서 ‘허 목사님’하고 소리치며 가이드와 노회장 목사님이 나를 찾아 올라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고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자신이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사람이 무엇이기에’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비하니까 유한한 존재, 깨어지기 쉬운 존재, 더럽고 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 자연 앞에 지극히 미천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이기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능력 앞에 자신은 너무나도 작은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늘과 달과 별을 창조주하신 하나님께서 미약한 사람을 생각하시며 돌보아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4절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하며 찬양하였습니다. 하늘과 달과 별들 앞에 지극히 작은 존재인 사람을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돌보아주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감사 감격하여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라는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 존재들입니까? 병들어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돌보아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같은 존재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6절에서 8절까지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라고 하며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사람들이 다스리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늘과 달과 별들과 모든 피조물을 사람의 발아래 두셔서 다스리게 하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연 앞에 자신이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두려움에 떱니다. 그래서 해와 달과 별에게 도와달라고 복을 빌고 섬깁니다. 백두산에도 바위틈이나 천지의 주변에 촛불을 켜 놓고 복을 빌었던 흔적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물을 그 발아래 두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만물 앞에 두려워 할 사람이 아니라 만물을 다르시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동물과 짐승이며 공중의 바다의 물고기까지도 사람이 다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5절에 “그를(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 더럽고 추한 죄로 말미암아 지옥불 속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타락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타락하여 벌레만도 못한 사람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탄하였습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란 말씀은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로 인하여 영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을 알 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만물 앞에 사람은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더럽고 추한 죄로 인하여 벌레만도 못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와 여러분을 생각하시고 돌보아주시며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까지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진리를 알고 감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감탄할 때 여러분의 신앙은 엔돌핀이 쏟아나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 때 그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아픔도 슬픔고 고통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고난도 능히 이길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행복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찬송가 143장에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벌레만도 못한 나를 생각하시고 돌보시고 영화의 관을 씌워주시려고 주님 죽으신 그 은혜에 감탄하여 우리 모두 진심으로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하고 찬송을 불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