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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청 조희관 선생을 아십니까?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특이함을 일상용어에서 찾아낸 사람 김주희(eoghrj) 기자 전쟁이 일어나기 전 48년 목포에 낭만과 꿈의 한시대를 엮는 문인이 나타났다. 항도여중(현 목포여고) 교장으로 부임한 소청 조희관 선생. 글을 쓰는 수필가이자, 한글학자, 교육자로서 남도 문학의 뿌리를 이루었으나 가난과 시대의 불운을 짊어지고 불과 쉰셋의 나이에 홀연 세상을 떠남으로써 잊혀진 문인. 그늘에 묻혀버린 소청의 문학과 삶을 제위치에 돌려놓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동아인재대학 남도문화관광진흥센터는 최근 남도문화예술인 시리즈의 첫 번째로 '소청 조희관 -문학과 인간'을 펴내고 지난 40년대 말부터 10여년에 걸쳐 이지역 문화예술계를 이끌었던 소청의 생애를 다룬 특집을 마련했다. 영광출신인 소청이 목포에 발을 내디딘 것은 46년 목포상고 교감으로 부임하면서 부터이다. 2년 뒤 항도여중 교장으로 전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한자로 된 학교 간판을 한글로 고치고 '한송이 들꽃을 보라/남을 시새워 하지 아니하고 /힘껏 제 빛을 나타내나니'라는 교훈을 손수 지어 걸은 일은 아직도 이지역 교육계에서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부용산'의 작사가 박기동, 작곡가 안성현을 비롯, 당시 소청이 직접 전국을 돌며 유능한 인물들을 초빙하고 학생들의 창작 활동을 독려, 당시 항도여중을 중심으로 한 풍요로운 분위기는 이지역 예술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청의 한글 사랑은 유별나서 유달중, 목여고, 해양대등 순우리말로 된 교가들을 직접 짓는가 하면 취미국어라는 이름을 단 '샘'을 통해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특이함을 일상용어에서 찾아내고 어원을 밝혀 나가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소청 자신이 전쟁이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새롭고도 풍부한 우리말 수필로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김으로서 조운에 의해 싹트기 시작한 근대 남도 문학이 수필가 조희관과 소설가 박화성에 의해 목포에서 꽃받침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 읽어도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우리말들로 채워진 수필집 '철없는 사람'을 비롯한 작품들과 출판사업 등 소청의 꾸준한 활동들은 전후 황폐한 목포에 예술 문화의 새바람을 일으켰고 현 목포예총의 전신인 목포문화협회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듯 목포문화계의 텃밭을 일구었다고 평가받는 소청이지만 기념사업은 지지부진해 별세한 지 23년만에 유족과 후배 문인들의 노력으로 제정된 소청 문학상이 제 12회, 지난 94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그 동안 박기동 시인과 '부용산'기념 사업을 꾸준히 추진해 왔던 목포 백년회에서 소청 문학상 재개를 검토 하고 있으며 육필원고등 자료의 목포자연사 문화 박물관 소장이 논의되는 등 유족과 문화예술계를 대상으로 체계적인 자료 수집이 이루어질 전망이어서 목포 문화계의 선구자, 소청 조희관의 부활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2006 Oh 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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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사투리 조희관 서울 말 소리는 담 너머로 들을 때 곰보도 일색이다. 어느 강의 시간에 이런 말을 했더니 학생들이 자그르 웃었다. [...그런데 우리 사투리는 어때요? 여간 듣기 거북해요. 랑께, 라우, 깐디..... 깐디는 무슨 인도의 성인 아녀요? ] 이랬더니 학생들은 또 자그르 웃는 것이었다. 웃는 학생들은 그 말이 옳은 줄은 알면서도 곧 또 복도에만 나가면 그 듣기 싫은 제 고장 사투리를 마구 퍼널어 놓는 학생들인 것이다. 사투리랑 조매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타관으로 이사해서 몇십년을 산 사람도 고장 사 투리는 제 향수와 함께 늘 그림자를 끈다. 유득 경상도 사투리가 그렇다. 전라도 사투리는 거기에 비해서 쉬운 시일에 때 를 벗을 수 있다. 악센트가 강하지 않은 때문인가 한다. 나 같은 사람은 어려서 서울 가 서 오래 살은 때문인지 모르지만은 초면에 내 고장이 전라도라고 아는 사람이 적다. 서 울 학교에 있을때도 내가 곧잘 조회 시간에 늦게 가는 탓도 있어서 내가 졸업할 때까지 나를 [인천 통학생]으로 알고 만 친구들이 많다. 혹 어떤 때 고향을 묻는 사람 이 생겨도 전라도라고 내 고향을 대지는 않았다. 이것은 나뿐이 아니고 대개의 전라도 사람이 아마 그런가 한다. 다만 [전라도 개땅쇠] 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전라도] 라는 데 대한 긍지를 어쩐지 가질 수 없다. 사람이 간하다. 잔 꾀가 많다. 신의가 없다. 이런 것들이 늘 전 라도에 대한 나쁜 인상으로 남는 것이다. 옛날에도 [바람 앞에 가는 버들](註-그 당시는 전라도 사람의 기질을風前細柳라 했슴-원미산) 이라고 전라도 기질을 말했다. 이 건 자랑이 되지 못 할뿐더러 거기 태생인걸 알기 무섭게 다른 고장 사람들의 경계와 경멸을 사기에 족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니까 전라도 사투리를 싫다는 건 아니다. 그 사투리부터가 모든 그런 나 쁜 특징을 말하고있다. 말 끄티리에 [잉] 이라든지 [응] 이라든지를 다는 것은 어느 서울 여인은 아조 듣기에 상냥하다고 나한테 전라도 사투리 예찬을 한 일이 있다. [그래 잉, 저래 잉......] 혹은 이건 [ 우리 여그서 바꿈새기 허께 잉! ] 하는 어린애들의 귀염성은 될지 몰라도 덩치가 큰 사내에게 가서야 그 간삼성을 나타내는 소리밖에 안 된다. 말 소리를 아름답게 하려는 공부는 저절로 듣기 싫은 사투리를 덜게 될뿐더러 또 말을 연구하는 세상의 모든 것임에도 틀림 없다. 국어 공부를 한다. 혹은 연구를 한다. 이 것도 결국 끝에 가서는 말소리를 아름답게 하는 공부이고 연구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투리란 모조리 듣기 싫은 것, 없애야 할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되려 사투리 속에서 우리는 까닭 모르던 옛말의 자취도 발견할 수 있고 또 그 어 느 고장에만 남은 사투리여서 그 한 말만이 있어서 우리 말의 세상에 끌어 들어와 야 할 것도 한둘이 아니다. 그뿐더러 같은 말이라도 그 사투리에 매력이 있고 귀염성 이 있어서 되려 표준말을 그 사투리로 바꾸어야 할 말이 있을 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전라도 시인들이 제 고장 사투리 고대로 털어내가지고 [너] 를 [늬] 라고 썼 다. 그런데 어느덧 이 말은 모든 고장의 시인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았다. [너] 라는 말이 인제 [늬] 라고 바뀌리라는 말이 아니라 특히 시어에 있어서 어감의 문제로서 그 생명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쪼로 좇아서 전라도 말 가운데 사랑스럽다는 말에 [보도시, 보듬고] 이 두 말을 드는 평안도 태생의 문인이 있었다. [처음 광주에 내려왔을 때 앞에 걷는 여학생들이 아조 태가 좋아요. 얘 이건 서 울 학생들보다 깨끗하구나 했더니 흘리고 가는 말 소리에 정이 떨어 졌어요. 지금은 귀에 젖어서 그렇지도 않고 나 자신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적도 있지만.....그러나 여 기 사투리 가운데 정작 좋은 건 [보도시] 예요, 아조 어감이 나거던요. 또 하나 [보듬고] .....이것도 좋아요.] 이러던 것이었다. 이상하게 [오] 소리 나는 것에 귀가 팔렸구나 했지만 그럴 까닭이 있는 옛 가 요(노래) 에 [오] 소리를 애용하던 형적을 보아 이 족속 오랜 전통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도리 도섭 남기 홍글위 때요이다 노르시다 청소년하] 라든지[별해 바 로 ㄴ빗 마호라] 또는 [분디 남가도 갓근 저 다호라] 이런 고려 가요에서 보는 형적이 그것이다. 본디 같은 맑은 소리이면서도 [아] 소리는 까발시고 [오] 소리는 오미어서 오붓하다. [봄, 꽃] 이런 말들이 그렇거니와 벌통에 친 [발] 은 까발시고 퍼더진 것이지만은 옴 태기에 물을 담아야 하고 다시 그 물을 둑을 쳐서 오무려야 하는 [논] 은 [오] 소 리로 되어 있다. [오] 라는 소리가 특히 귀여운 것이 여기에 있는가 한다. 이 오미는 아름다움이 [아] 소리로 나가면 툭 터지고 밝고 시원스러워진다. [바다, 바람, 하늘.....] 따위의 어휘에서 그걸 짐작하리라. 어쨌건 전라도 사투리에 [보도시] 에 아름다움을 느꼈다는 어느 문인의 그 어감은 이 족속이 [오] 소리를 사랑하는 전통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보도시] 가 좋다고 해서 [팔] 을 [폴] 이라고 [밝다] 를 [보리라]고 하는 두메 사투리가 어감에 고울 리는 없다. 이런 걸 미뤄 보면 [보도시, 보듬고] 따위가 고이 들리는 것은 그 말의 개념의 오 미는 성질이 그 소리 [오] 에 안겨 드는 데에 ----전라도 사투리로 하면 [보듬켜 드 는 맛에]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이러고 보면 그 사투리는 우리가 들어도 좋다 이런 종류의 사투리 가운데에 내가 사랑하는 사투리는 [난시]라는 우리 고장 말이다. [난시] 라는 말은 [때문에] 라는 말이다. [때문에] 의 준소리 그대로를 [때ㅁ시] 라고 하는 일도 있다.그러나 그 [때 ㅁ시] 가 아니고 [난시]를 좋아하는 내 마음은 아 까 그 [난시] 의 발음이 부드럽고 여잣한데 있는 것 같다. [너 때문에 이러지 않았니?] 이 말은 듣기부터 허물을 발곽 뒤집어 씌어서 참혹한 것 같다. 그렇게 세게 책임을 묻지 않아도 좋을 일인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에 쓰는 [난시] 는 어디까자든지 여잣스럽고 상냥하다. [늬 난시 그랬다. 야] 이를 표준말에 섞으면 이리 된다. [너 난세 이러지 않았니] [난시] 가 [난세] 로 바뀌는 것은 사투리 어감의 [시] 를 [세] 로 바꾼 원인 밖에 없다. 이런 데서 보는 것 같이----만약 읽는 이에게도 같은 느낌을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 사투리를 때를 벗겨 나가면서 가까운 장래에 표준말보다도 아름다운 말의 세계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말 소리가 아름다와지면서 전라도 사람의 나쁜 기질도 좋아져 가리라. 그때는 어디 가 든지 내 고장은 전라도라고 버젓이 자랑을 하리라. 위 글은 국문학자 이시며 수필가이셨던 소청 조희관 선생님이 1954년도에 출간한 수필집 [철없는 사람] 에 수록된 글입니다. 이 글을 올린 이유는 50년전 목포에 사시면서 곱고 아름다운 우리말 찾아 갈고 닦으시며 그의 수필집 철없는 사람이 말해주듯 청빈한 생활을 누리셨던 소청 조희관 선생님께 존경과 사랑을 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후일담 한마디..... 이 글이 발표되자 같은 전라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을 그렇게 비하할 수 있느냐고 여기 저기서 수군 수군 댔대요. 그 중에서 선생님을 찾아와 따지는 성미 급한 사람도 있었답니다. 그 사람한테 선생님이 말했어요. "자네 내 글을 끝까지 읽었는가?" 그 사람이 답변 하였답니다. "녜" "그러면 끝에 내가 뭐라고 하였든가?" 그 사람 대답이 궁색해 졌대요. 그 사람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선생님, 그건 아니고요" 위 후일담은 제 선친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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